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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목장이었던 마을-현경면 외반1리 반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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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 이 마을을 포함한 외반리 지역은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목장지대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매부리에서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토성은 반룡동 토성이라 불렀는데 망운목장의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축조한 토성으로 당시 다경면과 현화면의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성들, 성안, 성 너머, 목장 성터, 성등 등의 지명을 말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마을의 입향조를 김해김씨로 보았다. 원래 ‘반룡에는 이참봉이 살고 있었다’ 라는 말이 전해왔었으나 그보다 앞서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김해김씨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후손이 현재 옆 마을인 매부리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엔 광산김씨, 전주이씨, 파평윤씨, 평산신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의 형국을 키 형국으로 보기도 한다. 키는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로 고리버들이나 대를 납작하게 쪼개어 앞은 넓고 평평하게 하고 뒤는 좁고 우긋하게 엮어 만든 기구이다. 이 마을은 키의 안쪽에 해당된다. 이러한 지형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을의 맞은편에 천석꾼의 부자가 살았는데 부자가 된 이유를 키 형국의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보았다. 즉 곡식을 까불릴 때 곡식이 떨어지는 곳이 곧 부자가 될 수 있는 터라는 것이다. 지금은 저수지가 되었는데 예전에 이곳을 흐르던 작은 고랑을 ‘개잇고랑’이라 하기도 했다. 이 마을에는 두 군데에 고인돌이 있었다. 하나는 현재의 송기병씨 댁에 묻혀 있는 미끄럼 바위 3개와 현경초등학교 뒤에 마당바위라 부르는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없다. 아이들이 즐겨 탔던 미끄럼 바위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위 밑을 막대기로 자꾸 쑤시면 마을 부녀자들이 바람 난다’는 속설이 전해오는 것이 그것이다. 주민들은 조암동의 한새바위 와 평산리의 팔바위 그리고 이 마을의 미끄럼 바위를 연관시켜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에 다경시장이라 부르는 장터가 있었다. 3일장으로 열리는 이 장은 일제강점기 때 망운면이 일본인과 물산의 중심지가 되면서 그곳으로 넘어갔다. 일본이 패망 후 망운장이 시들해지자 주민들은 현경장을 살리려고 한국전쟁 이후에 현재의 파출소 뒤에 장터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지속되지 못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매부리 동쪽에 있는 들로 예전에 광수라는 사람이 언(제방)을 쌓았다 하여 ‘광수언장'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매부리 주변이 장터였음을 말해주는 ‘장텃골’과 그 안의 샘 ‘장텃 샘’이 있다. 마을 앞에는 대문동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곳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마을을 포함한 현경면 일대가 고구마 주산지여서 새마을 사업 등으로 길을 내거나 확장할 때 필요한 ‘자갈을 깔 돌은 없으나 고구마는 깔 수가 있다’ 할 정도로 돌은 없고 고구마는 많이 생산되었다. ▲ 두 그루의 백일홍에서 비롯된 꽃마을-외반2리 화촌
花村은 新興과 함께 외반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신흥마을은 원래 다복이란 이름의 마을이었는데 오래 전에 전염병이 돌아 마을이 황폐해지고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되어 폐촌이 되었다. 이후 다시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는데 새롭게 번성해라는 뜻의 신흥이라 했다. 과거에는 40여 가구가 살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서너 가구가 살고 있다. 외반리가 용이 서려있는 형상이라고 볼 때 신흥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된다. 해서 어른들은 예전부터 이 마을에서 부자가 나올 수 있는 형국이라 했다. 실지로 평산신씨 신참봉이 이 마을에 살면서 재산을 일궜는데 천석군이라 했다. 지금도 신부자의 집터가 남아있는데 서마지기(600평)가 넘는다고 한다. 화촌이란 마을 이름은 이 마을 입향조가 정착하면서 마을 앞에 심은 두 그루의 백일홍 나무에서 연유된다. 지금은 길이 나면서 모두 없어졌지만 학문을 중요시하겠다는 입향조의 뜻이 반영된 나무로 꽃이 필 때면 밖에서 볼 때 꽃마을처럼 보였다고 한다. 화촌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신흥마을에서 이주한 장흥 고씨였으나 지금은 한 가구만 살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비슷한 시대에 영성 정씨와 인동 장씨가 들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망운 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황토길이 지나고 있다. 황토길은 조선시대에 매부리부터 애북 마을까지 이어지는 목장 성터 길에 나 있는 길이다. 오른쪽은 신촌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망운면 상주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1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행주기씨의 무덤으로 원래는 4기가 있었다 한다. 무덤 주위에는 인동장씨 세덕비가 있고 둘레가 2미터 50센티미터인 두 그루의 소나무와 한그루의 구수나무가 있다. 이중 왼편의 소나무가 마을의 당산나무로 30여년 전까지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마을에는 1963년에 만든 洞契冊이 지금도 쓰여지고 있었다. 이 책에는 주민들의 화합된 모습과 마을공동 행사에 참여하는 사례들이 다양하게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탈선례 수입이란 것이 있는데 脫扇禮(탈선례)란 마을로 장가 오는 신랑에게 동네 어귀에서 마을의 어른들과 친척들이 신랑의 학식과 예법 그리고 건강을 점검하는 우리 고유의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해서 새 신랑이 마을의 구성원이 되는데 이 마을에서는 이런 의식에 덧붙여 찬조금을 조금씩 받아 마을공동기금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돈으로 마을 공동 비품을 사거나 주민들의 복지 향상에 사용해 한때는 현경면에서 제일 가는 마을이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백일홍을 비롯한 꽃나무를 심었었다. 꽃마을이라는 지명처럼 꽃이 있는 마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였다. 실지로 꽃이 필 때는 마을에 생기가 돌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무 주위의 농작물의 피해가 커 현재는 많이 베어버렸다. 마을 주변에 고인돌 群이 있다. 현경면소재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바우백이라 부르는 양성이씨 납골묘역에 두기의 바위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를 한새바위라 부르고 있다. 원래는 7기가 있었는데 주변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 5기의 고인돌을 없앴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귀신이 나온다 하여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2016년 1월에 다시 확인한 바우백이의 고인돌은 없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