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디네 집을 다녀온 지도 일주일이 넘어 열흘이 되어가네요. 이제사 소식 전합니다.
좋은 여행길이었어요, 그저껜 운문사 아래 민박집에서 만나 새벽 예불 같이 드렸던 아가씨한테서 연락이 왔더군요.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어요.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인연이 이어지나 봅니다.
국화차는 자랑하며 회사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있어요. 수세미는 아직 쓰지 못하고 대바구니에 장식으로 모셔 놓고 있답니다.
그리고, 저녁마다 한 차례씩 죽염으로 코를 씻어 주고 있지요.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소줏잔에다가요.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여행길에 바람 불고 추울 때 한데 돌아다니고 해서 감기에 걸리고 말겠구나 염려했는데 끄덕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틀림없이 그 비법이 통한 거예요.
선생님, 전 내일 무너미엘 가려 합니다. 공부방 모임에요. 글쓰기회가 무너미로 이사간 지가 일 년이 넘었는데, 이제사 가 보게 되는군요. 다녀와서 또 소식 전할게요.
또또와 강산이, 고양이(이름이 뭐더라?)한테도 안부 전해 주시구요, 언니분한테도 고맙다는 말씀 전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선반은 물론 창고에 멋지게 달려 있겠지요?)
이승희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나니 지난 일이 떠오른다.
지지난 주 일요일날 서울을 떴다. 첫 목적지는 해남. 작년에 자연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고 거기 내려가 있어 그 사람도 만날 겸, 지난번 해남 갔을 때 땅끝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기에 거기도 가보리라 맘먹었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에 굴렁쇠 아이들 노래 공연을 보자마자 바로 터미널로 달려갔다.
해남행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이렇게 또 혼자 여행을 떠나기는 한참만이구나. 작년에 자연학교 뻔질나게 드나든 것 빼면 일 년하고도 몇 개월을 서울에 묶여 있었구나 싶다. 지지난해 늦봄, 처음 혼자서 길을 떠났을 때가 떠올랐다. 십 년을 앓다 돌아가신 엄마. 내가 도맡아 돌본 건 5년 남짓. 그 빈 자리, 빈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일 주일에 한 번씩(49재 때문에 주말에는 서울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또는 역에서, 서울을 떠나는 버스나 기차에 내 몸을 기대었지. 쉴 곳도, 아니 목적지도 분명하게 정하지 않은 채 처음으로 혼자서 서울을 떠나던 날은 버스가 정류장을 빠져나가자마자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줄줄 흘러나와 손수건으로 계속 닦아 대었지. 그 눈물은, 엄마의 죽음보다는 살아 있는 내 모습에 대한 애도였다. 여러 가지 감정의 덩어리가 그렇게 눈물로 빠져 나온 것이었겠지.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아는 사람 없이 혼자서 생전 처음 가는 낯선 곳은 아니다. 다른 점이 그것만은 아니겠지. 그해 여름, 가을 지나면서 내 갈 길을 못 찾아 많이 헤매었다. 길가에 선 채 고개 박고 길이 안 보인다 하고 있었지. 1년 가까이 그랬다. 지금도 길이 환하게 보이는 건 아니다. 적어도 고개 들고 간다는 거지. 앞도 보고, 옆도 보고, 어릴 적 소풍길에서처럼.
해남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 집 주인은 귀농하여 아내와 아들 셋(셋째는 난 지 한 달이 좀 못 되었다지), 처남,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고 있는데, 5년차라 했다. 5년이면 인제 자리잡은 거 아니냐 물었더니, 옆에서 부인이(이분은 시골에서 자랐단다), 처음엔 풀맨다더니 뽑을 것 안 뽑을 것 못 가리고 그랬다고 흉본다. 해남은 워낙 땅이 넓어서 그런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딴 데보다 땅값이 싸고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대하다고 자랑한다. 방 안에는 책도 많아 이 집 사람들의 성향을 알 수 있겠다. 풀무학교 교육 방향이 '일만 하면 소, 책만 보면 도깨비'라던가?
사흘쨋날 아침을 먹자마자 짐을 챙겨들고 나왔다. 그 집 둘째가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안 놓아 준다. "산이는 그럼 이모 따라 가라." 엄마가 한 마디 했다. 그러니깐 삐직삐직 울라 한다. 예전 우리들 모습이 보여서 정겹다.
다음 목적지는 밀양 이승희 선생님 댁. 가는 길에, 말만 들은 섬진강을 만나고 가려 한다. 처음엔 임실까지 가서 강줄기를 따라 내려올까나 하다가, 지도를 보고 시간을 보고서 구례로 갔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한 시간 정도를 차는 강물을 따라 달렸다. 잔잔히 흐르는 섬진강, 짙은 풀빛과 조금 옅은 파란 빛이 어우러진 물빛이 참 곱다. 물길과 모랫길도.
구례에서 선생님 댁에 전화를 했다. 언니가 받으시더니 일직이라고 학교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셨다. 그래, 학교로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렇게 번거롭지 않으시면 한번 뵙고 싶다고. 사는 모습도 보고 싶고. 어디냐고, 어디서 왔냐고, 언제 올 거냐고 물으시더니, 오늘은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안 되고 내일 오란다. 그러고 나서 찾아오는 길을 자세히 알려 주셨다. 다행이었다. 혹시 거절하실까 봐 조금 마음 쓰였거든.
그래서 오늘은, 나중에 들를까 하던 청도 운문사 쪽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한밤중에 운문사 아래 민박집엘 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방에 온기가 돌 때까지 안방에 들어와 있으랜다. 방 안에는 마실 온 오육십 줄의 아주머니들이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빈말 아닌 인사말들을 한 마디씩 건네는데, 따뜻한 방바닥보다 더 훈훈하다. 하긴, 막차를 놓쳐 동곡에서 잡아탄 택시 운전사도 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내가 방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지(택시비도 깎고 탔는데도).
옆방에 든 아가씨도 내일 새벽 예불 간다 했다고 주인 아주머니가 귀띔해 주시길래 같이 가자고 미리 말해 두고, 아직 온기가 덜 퍼진 방에서 이불을 코위에까지 올리고 한숨 붙였다. 새벽 3시 20분 전쯤 옆방 아가씨가 깨워 가진 것 다 꿰어 입고 나갔는데도, 산이고 새벽 공기가 찬데다가 그 많은 비구니 스님들 법당에 다 들어갈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다 들어간 법당 안은 또 어찌나 찬지…. 그래도 동행이 있어 훨씬 나았지. 혼자서 여행은 처음이라는데,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귀엽고 복스럽게 생겼다. 서울에서 왔다 하여 나중에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돌아와서 한숨 더 자고 아침에 절 한 바퀴 돌고 청도행 버스에 올라탔다.
청도에서는 이승희 선생님이 일러 준 대로 기차를 타려 했는데, 시간이랑 돈이 안 맞아 그냥 상동역에 서는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내려 안여수 마을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선생님 말이 마을회관에 내려 선생 집 물으면 다 안다 했다. 정말 그랬다. 몇 집 안 되지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어제 묵었던 해남 집과는 많이 다르다. 훨씬 따뜻하다, 동네가. 아버지가 나고 자란, 예전 시골 큰집 마을이 생각난다.
낮은 언덕길 끝에 나즈막한 기와지붕의, 생각보다 넓은 집이지만 그 집인 줄 단박에 알겠다. 문에는 입춘대길 단정한 붓글씨가 붙여져 있고,
'반디네집'이라는 문패도 이쁘게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왕왕왕 개가 짖어 대며 낯선 손님을 맞는다. 개를 따라 나오던 여자아이(국민학교 5-6학년쯤 되어 보이는)가 "선생님, 손님 왔어요." 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나무토막, 망치, 못 따위 공구가 널려 있고, 선생님은 한창 톱질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미루다가 오늘 날잡아 창고 선반을 만든다고 했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 가방을 올려놓고 걸터앉았다. 마루 생긴 모양하며 나뭇결과 색이 오래 된 집임을 은근히 자랑한다.
선생님은 첫 마디가, 어제 전화 끊고 '보여 줄 것도 없는데 괜히 오라 그랬다' 싶었단다. 휴! 다행이다. 부산에서 옛날 같은 학교 선생님이었던 분이 딸(아까 그 여자아이)과 같이 놀러 와 있었다. 애가 좋아해서 가자고 하니까 벌써 몇 번째 왔나 보다. 오늘은 선생님 조수 노릇을 한답시고 구부러진 못을 펴고, 나중엔 스스로 톱질도 해 보고 그랬다.
선생님은 한가롭게 일하시고, 나는 한가롭게 나무토막 좀 잡아 주다가 개들하고 놀다가, 집도 둘러 보고 그랬다. 언니분이 또닥또닥 한가롭게 차린 점심상 앞에서 감사 기도를 하고 밥을 먹었다. 나도 이 음식이 내 입에까지 오도록 해준 섭리에 고마워하면서 밥을 먹었다. 찰밥에 호박전, 동치미, 김치, 시래기국(시락국이라고 하지, 경상도에서는), 다 깔끔하고 맛깔진데다 나는 아침도 제대로 안 먹은 터라, 정말 달게 먹었다. 멸치만 빼고 여기 있는 반찬 다 농사 지으신 거라고 선생님이 자랑하신다. 혜린이는 시래기국을 무척 좋아하는지 연거푸 떠 넣는데, 어른보다도 더 많이 먹는다. 호박전은 누런 호박 속을 파내어 야채를 넣고 부친 건데, 호박전이 전이 아니라 호박떡이 되었다며 반농담으로 부엌 조수(혜린이 어머니)를 탓하시더니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겠단다. 근데, 선생님이 부친 호박적은 진짜 더 맛있었다.
밥상을 치우고 언니분이 정성으로 만드셨을 국화차를 내오셨다. 햇빛이 든 마루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며 한갓지게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채비를 하고 나섰다. 선생님이 수세미와, 연필꽂이 길이만큼 대나무(죽염 만들려고 해다 놓았단다)를 잘라서 주셨다. 언니분은 좀전에 마신 그 귀한 약국(국화 말린 것)을 조금씩 덜어 우리한테 싸주셨다. 혜린이네는 시래기도 한 묶음 주셨다.
가는 길이라 상동역까지 혜린이네 차를 얻어탔다. 마을회관 앞에서 선생님과 언니분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내가 인사도 하기 전에 언니분이 먼저 내게 멀리까지 와 주셔서 고맙다고 하신다. 이승희 선생님은 손을 잡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하셨다. 차가 좀 달리기 시작했을 때, 혜린이가 소리쳤다. "강산아!" 그때까지 안 보이던 진돗개 강산이가 저 쪽 밭에 서 있다가 달려왔다. 안 그래도 혜린이 강산이 없어서 인사도 못 하고 떠난다고 아쉬워하더니…. 혜린이만 내려서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한참이나 강산이는 차 뒤를 쫓아왔다.
이승희 선생님 댁을 다녀온 뒤, 언젠가 주순중 선생님이 그 집엘 다녀와서 쓴 글이 생각나서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다. '아름다운 삶'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98년이니 2년전 쯤이구나. 마지막 글귀가 다시 내 마음을 울린다.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다른 사람도 그 사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얻는 그런 삶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2000.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