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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풍류기행기
이번 7월 풍류기행은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대가이자 한 세상 원없이 풍류를 즐겼다고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 선생을 찾아 전남 해남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우리의 풍류기행은 우천시에도 떠난다고 했지만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진다면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매일 일기예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풍류기행일 중부지방은 장마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지만 남부지방은 쾌청하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매번 풍류기행때 마다 날씨는 좋은 편이었다. 풍류기행 전날만해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했지만 막상 풍류기행 당일은 늘 화창한 날씨였다. 지난해 7월 허균과 허난설헌을 찾아 떠났던 강릉 풍류기행때 유일하게 비가 온 적이 있지만 그 비는 구름이 만든 비가 아니라, 27세에 요절한 천재시인 허초희(號 : 난설헌)의 원통한 눈물이 만든 비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7.13.(토) 새벽, 장대비 소리에 잠이 깼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면 회원 몇 분이 못 올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며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버스 대기 장소인 당산역으로 나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는데도 별탈없이 모두 예정된 시간에 맞춰 잘 도착했다. 버스가 출발했고 양재역에서 대기중인 초암에게 출발시간을 알려 주었다. 7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에 양재역에 도착했고 양재역 탑승 회원 모두 빠짐없이 버스에 탑승했다. 장대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도 한분도 지각하지 않고 참석하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버스는 고속도로에 천천히 진입했고 톨게이트 조금 지나 야공과 오늘 처음 참석하는 윤숙례님이 버스에 합류했다.
회원들이 자리를 잡은 후 초암이 오늘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초암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아마 회원들이 많이 참석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오늘은 전남 해남이 목적지라 버스내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길다. 대략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소개 시간을 버스 이동중에 갖기로 했다. 일정에 대한 소개를 하기전 오늘도 여러 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해온 떡과 음료 등을 나눠 먹었다. 아침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회원들은 이 조그만한(?) 준비에도 행복해 했다. 윤선도에 대한 초암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 중ㆍ후기 시인이며 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ㆍ해옹(海翁)이다. 그리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과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을 보도(輔導)했다. 그뒤 형조정랑(刑曹正郞),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지냈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하였으나 남인의 거두로서 서원 철폐, 효종의 장지문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 등을 놓고 송시열(宋時烈)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과 맞서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ㆍ복서(卜筮)ㆍ음양ㆍ지리에도 능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윤선도의 삶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나는 그 사이 고산 선생이 지은 주옥같은 시(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이따가 고산의 시와 풍류를 회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윽고 버스가 휴게소를 진입하고 있었다. 회원들이 내려 잠시 볼일을 본 후 버스는 다시 남쪽으로 달렸다. 나는 버스앞쪽으로 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나라 풍류사(風流史)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고산의 풍류를 행복학교 회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된 상태로 고산의 풍류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산의 삶은 유배지에서의 고된 삶과 해남에서의 풍류생활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풍류를 알 수 있는 수많은 일화와 시가 있지만 지면상 대표적인 시 몇 개만 소개를 하고자 한다. 고산이 45세 때 벗들과 함께 양주의 고산 별서에서 사흘간 놀이를 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에서 그의 풍류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배저어 옛 동산 찾아가니
산 빛깔 바야흐로 황혼이로다.
궁중의 술병을 낚시노인에게 자랑하니
신선의 음악이 강촌에 진동하도다.
‘배 위에서 산수를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니 신선이 따로 없구나!’ 라며 호기(浩氣) 가득찬 고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고산이 50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51세 때 제주도로 가려다가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안착했는데, 이때부터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불렀으며, 그뒤 문소동(文簫洞)과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50세 때부터 솔, 대, 매화, 국화, 연을 심어 놓고 오우(五友)라 부르며 고아한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는데, 86년 후에 태어난 고산 선생도 50대에 이르러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이라! 앞마당에 수석이 있고 뒤뜰에 송죽이 있는 수간모옥(數間茅屋)위로 마침 환한 달이 떠오르니 이 보다 더 운치있는 그림이 어디 있겠는가? 고산의 풍류는 바로 이 오우가에 있다. 이 다섯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고산의 풍류를 소개하고 나서 풍류기행 회원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 고산의 얼굴로 보였다. 이어서 오늘 처음 참석하신 열한분에 대한 소개를 마치자 우리의 버스는 목적지인 해남 땅을 넘고 있었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해남읍에 도착했다. 먼저 미리 예약해 놓은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매뉴는 해남의 대표 음식인 해물탕이다. 자리를 잡고 건배를 하려고 하니 저쪽 끝에 앉은 회원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큰 소리로 “건배!”를 외치면서 앞으로도 오늘만 같기를 기원했다. 얼큰한 해물탕에 시원한 막걸리 몇잔을 들이키고 나서 우리는 음식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산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20여분을 달린 후 우리는 차에서 내려 코스모스 핀 길을 따라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 입구로 들어서자 해설사님이 먼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더운 날씨에도 해설사님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해남윤씨가 아님에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홍보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전시관에는 우리가 책에서 많이 보아온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이 있었다. 수염과 눈이 살아있는 듯한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공재 선생이 마치 살아서 그림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또한 전시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고산 윤선도와 해남윤씨들이 남긴 유물 4천 6백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윤씨 가전고화첩은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재 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라고 한다. 이외에도 해남윤씨들이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영화를 느끼게 해주었다.
고산 유물전시관에서 나오니 햇볕이 내리쬐는 길은 지열로 인해 찜찔방을 연상케 했다. 먼저 길을 나서지 못하고 모두 쭈뼛쭈뼛하고 있는데 용감한 회원 몇분이 앞장을 선다. 나머지 분들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 나서는데 하늘과 땅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할 때 준비해온 우산을 펴니 한결 나은 것 같다. 일부 회원은 전시관 바로 옆에 있는 일월정(日月亭)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더 이상 걷기를 포기했다. 더위에 강한 회원들은 녹우당으로 향했다.
녹우당(綠雨堂)은 고산 윤선도(1587~1671) 고택의 사랑채를 뜻한다. 녹우당은 효종이 그의 사부였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터는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고산의 14대손인 종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다.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비가 내리는 듯 하다고해서 녹우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녹우당 입구에는 500여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으며 뒷편 덕음산에는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숲이 있다. 이 집은 형식과 규모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이지만 지금은 보수중이라 녹우당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바깥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녹우당 앞에는 300년 된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정말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 생에 있어 이렇게 큰 소나무는 본 적이 없다. 바람좋은 달밤, 저 장송 가지 끝에 달이라도 걸리면 술 한잔 아니하고 버틸 재간이 없을 것 같다.
녹우당을 둘러본 후 우리는 마지막 행선지인 방춘정(芳春亭)으로 버스를 몰았다. 방춘정은 고산 유물전시관에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동네 입구에 도착해서 방춘정을 찾아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동네 주민이 있어 방춘정을 관리하는 분께 연락을 취해 다행히 방춘정에 오를 수 있었다. 방춘정은 우리가 흔히 보는 독립된 육각 정자가 아니라 일반 건물에 딸린 대청마루 형태의 정자였다. 19세기 말 순천김씨 사당과 강당이 있던 이 자리에 방춘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어쨌던 우리는 방춘정에 돗자리를 깔고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미리 준비해온 술과 안주를 곳곳에 놓고 풍류체험 준비를 했다. 먼저 삼행시 발표 시간을 가졌다. 오늘 삼행시 제목은 윤선도, 오우가, 녹우당, 세연정이다. 먼저 오늘 처음 오신 이상명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한 수 읊는다. 이에 질세라 몇 분이 연이어 일어나 한수씩 멋들어지게 지어 낭송하니 풍류의 흥이 절로 난다. 고산 선생의 풍류가 여기 방춘정까지 흘러오는 것 같다.
오 : 오륜이 무너진 지금에 와보니
우 : 우정만 남아 있구려
가 : 가득히 마음껏 한번 놀아봅시다 <이상명>
녹 : 녹수가 있으니 청산이 있고
우 : 우리가 있으니 풍류가 있네
당 : 당연히 자유행복이 넘치도다 <윤진평>
녹 : 녹음이 우거진 오늘
우 : 우리가 만났습니다
당 : 당신과 함께라서 행복합니다 <김나영>
오 : 오호 통제라 이제야 바람이 부는구나
우 : 우리 풍류 친구들 동지들이 다 함께 모였도다
가 : 가는 길에도 버스에서 재미있게 놀면서 갑시다 <김승진>
오 : 오늘 고산 윤선도편 땅끝마을 해남 풍류기행날
우 : 우리 고~운님들과 자유와 행복을 맘껏 체험하며
가 : 가슴속에 기쁨 가득, 추억 가득 담아 가렵니다 <고다연>
윤 : 윤선도 선생이 풍류를 즐겼던 이곳 해남땅에
선 : 선남선녀 풍류객들과 함께 찾아와 보니
도 :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이렇게 한 수 짓고 갑니다 <심재현>
오 : 오늘은 고산 윤선도 풍류 자취 찾아 해남 가는 날
우 : 우리 모두 그 분이 읊으셨던 오우가를 되뇌면서
가 : 가당찮은 풍류지만 가슴 속으로 가까워지네 <백천>
삼행시가 끝나자 이번에는 은봉 선생이 애송시 한 수를 낭송하는데 늘 그렇듯이 은봉 선생의 애송시는 인간의 감성을 끄집어내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어 영소님과 윤숙례님이 고운 목소리로 가곡을 부르는데 방춘정 기둥을 휘감아도는 바람도 숨을 죽이며 듣는다. 여성회원의 멋진 가곡에 자극받은 김승진님과 변용범님도 분위기있는 목소리로 ‘오솔레미오’와 ‘귀천’을 선보이자 여기저기서 “오빠!”가 터져 나온다. 이윽고 마지막 체험인 통기타가 등장한다. 김태윤님, 지설님, 김민서님이 차례로 갈고닦은 연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김태윤님의 7080 노래 연주에 맞춰 모두들 박수를 치며 신나게 따라 부른다. 모두들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끝으로 초암이 퉁소로 천년바위와 한오백년을 연주하자 술잔이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간다.
2시간 가량의 풍류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앉았던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버스에 탑승하니 오후 5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서울까지 거리가 멀어 좀 일찍 출발하려고 했으나 매번 풍류체험 시간이 길어져 출발이 늦어진다. 회원들이 정자에서의 풍류에 취해 일어설 줄을 모르니 집행부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못다한 흥은 계속됐다. 오늘 풍류기행에 대한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임에도 일부 회원은 노래를 자청한다. 반주도 없는 노래지만 나름 열심히 부른다. 각자의 소감 및 노래 발표 시간이 끝나자 초암이 통기타 담당 김태윤님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김태윤님의 기타 연주에 맞춰 모두 악보를 보면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니 스트레스는 날아가고 행복이 날아온다. 한참을 노래 부르다 보니 배가 출출해진다. 휴게소에 들른 우리는 밤참으로 국수를 한그릇씩 먹었다. 포만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버스는 벌써 경기도 수원을 지나고 있다.
나는 창밖을 보면서 고산의 삶과 풍류정신을 다시 돌이켜 본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 윤선도는 이들과 달리 시조만 75수나 창작했다. 어부사시사가 춘하추동 10수씩 총 40수가 전하는데 한글 시조의 백미로 꼽힌다. 또한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을 벗삼아 평생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풍류만 즐긴 것이 아니라 고단한 백성을 멀리하지 않았다. 84세 때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자신의 창고에서 의곡을 풀어 이웃을 구제하기도 했다. 그는 85세 6월 보길도 부용동에서 세상 풍류를 마쳤는데 이번 기행에서 그의 주옥같은 시들이 탄생한 보길도와 세연정을 회원들과 함께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퇴계와 고산이 오십을 넘은 나이에 오우가를 지어 여생을 오우(五友)와 함께 보냈는데, 나도 남은 인생 함께 할 오우가 필요해 나름 오우가를 지어보았다. 비록 350년의 시차가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풍류정신은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니 각자 자신의 오우가를 한번 지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내 벗이 몇 이던가
활, 차, 붓 그리고 풍류와 컴퓨터가 있네
활과 차는 건강을 나누는 정이 한결 같고
붓은 노후에 나타나는 치매를 쫓아주네
풍류는 언제나 청량한 마음을 갖게 하고
컴퓨터는 온갖 지식 소통시켜 준다네
이 다섯이 내 벗이니 부러울 게 없어라 <인봉의 오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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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산의 풍류가 흐르는 해남에서 행복한 시간 보냈던 기억들이 새롭습니다~
학교장님의 오우가 넘 멋져부러요.
윤선도편 기행기를 읽으니 줄거웠던 기억들이 살포시 떠오릅니다.
오래도록 기억될 풍류기행입죠.
집필에 감사드립니다.
9월에 풍류도 7월풍류기행 같아라~내심 기대를 해봅니다.
밤이 익어가는 계절!
9월 풍류기행때는 높은 가을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을 정자로 초대해서 같이 놀까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