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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리
개발과 보존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다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농심을 닮은 마을. 조선시대 울산과 동래를 잇는 기착지로의 역할을 마다않았지만 사람들은 남김보다 앗아가려 기세를 올렸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순후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도농복합마을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대복리의 모습이 더 사라지기 전에 구제 발굴하는 심정으로 다시 더듬어 본다.
참,이 마을에 우리 김병환 동기가 산다. 양지바른곳에 터를 잡고 들꽃처럼 살고있는 친구다.
□ 마을변천사
울산 최초의 읍지로 알려지고 있는 ‘학성지’1) 면명(面名) 조에 대양(大陽)이란 땅이름만 보이다가 훗날 오복(五福)이란 땅이름이 같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대양마을에서 오복마을이 생겨났고, 1914년 두 마을을 합치면서 각각 한 자씩 따 대복리가 되었다. 이 무렵 웅촌면 소재지가 대복리에 있었다.2)
대복은 대일(大日), 서을리(西乙里), 새각단(越洞)으로 갈라져 농청을 먹었으며, 1959년의 ‘면세일람(국민방)’에는 동구(洞口), 월동(越洞), 전야(田野), 서리(西里), 동리(東里)로 되어 있다3)
오복은 약천(藥泉)과 신동(新洞)이 있으며, 과거 삼동면과 청량면, 웅촌면을 관할하는 경찰서 지서가 이곳에 있었다4)고 한다.
지금은 13,392,561㎡의 면적에 1,588세대 4003명의 주민이 6개 행정리(行政里)를 이루며 살고 있다(2009. 1. 31현재)
□ 대양(大陽, 大洋)
전해오기를 이곳에 태양사(太陽寺) 혹은 대양사(大陽寺, 大洋寺)라는 절이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여 ‘대양동’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대양’이란 이름을 내렸다. 대양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남암산 자락 양지바른 자락에 자리 잡은 절이라 대양사라 불렀다5)는 설과
‘이 마을에 신라 때 태양사(太陽寺)라 하였던 절이 있었으므로 대양(大陽)이라 한다고 전해온다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이곳에 두었던 원(院)을 다물원(大洋院)이라 한 것을 본다면 꼭 그렇게만은 보기 어렵다. 「大」는 고지명에 「地 . 對」등과 같이 그 음을 「다」라고도 한다. 「洋」은 그 새김이 「물(水)」이다. 「洋」을 단지 물(水)로만 본다면 이곳의 지세로 보아서 그 이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물(大洋)을 다물계(多勿系)의 지명이란 측면에서 고찰할 만하다.「다물(大洋)」과 「다물(多勿)」은 그 음이나 뜻이 같기 때문이다.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나라를 세우고 먼저 복속한 나라가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沸流國)이었는데 이곳을 다물도(多勿都)라 하였다.6) 삼국사기에서 말하되 다물이라 함은 구토의 회복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고찰할 것은 백제계의 남하함에 따라 그중의 주거지에도 다물계 지명이 생겨나고 이 계통의 지명은 서해안에서 남해를 지나 동부 경상도에 까지 분포되었다 한다.(金聖昊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原)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복구토(復旧土)란 고구려 말을 귀화 내지 정복으로도 보고 있다. 이렇다면 이 대양을 진한계통(辰韓系統)의 정복지라 하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웅촌지방은 일찍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던 곳이란 것을 참조할 일이며 이 다물계 지명은 두동면 구미리에 대밀(大密 . 多密)이 있다.’7)
□ 대양원(大洋院)
전근대 시대 전국의 주요 교통로에 설치된 숙박시설을 원(院)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삼십리마다 한 원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 원 제도가 도입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주부 남쪽 6리쯤에 대로원(大櫓院)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양사와 함께 울산 치소와 동래를 연결하는 길목에 설치되었다고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이 대양원은 북으로 청량면 율리의 단두원(丹豆院)에 이어지고 남으로는 서창의 공계원(孔界院)에 연결된다.
□ 원터(院址)
대양원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고가도로 아래 삼동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인데, 동쪽으로 물류창고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 대일(大日), 몰대각단
예전에는 마을 단위로 농청(농삿일을 위해 마을사람끼리 그룹을 이루는 단위. 논매기와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주들이 술과 안주를 내고 하루 논다)을 하였는데, 대복은 현재 장백아파트를 중심으로 서쪽을 서을리, 동쪽을 대일리, 염치진 입구를 새각단 또는 월동이라 하였고 각각 농청을 먹었다.
대(大)는 크다는 뜻이며 일(日)은 나루의 차자(借字)로 통용되는데, 이로 미루어 이 일대가 고대에는 냇가였을 개연성이 있다.
대일의 위쪽을 ‘몰대각단’이라 하였는데 산 위를 만디라고 하고 만디를 끼고 도는 지역을 모랭이라고 한다. 마을은 각단이라 한다. 만디모랭이가 줄어서 몰대각단이 되었다.
□ 서을리(西乙里)
장백아파트 서쪽을 일컽는다.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고, 지금도 옛길이 남아 있다.
□ 염치진, 염천골
운암산에서 북쪽으로 난 3km가 넘는 골짜기를 말한다. ‘염’자의 뜻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달라지겠으나 북쪽골짜기는 대체로 주검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염할염(殮)자로 보고자 한다. 치는 「치미」「채」「터미」로도 나타나는데 산이 물가로 돌출한 곳을 일컽는다. 진은 대일의 「日」과 마찬가지로 나루(津)다. 지명으로 미루어 큰 물가였다고 본다. 다시 해석하면 운암산의 퇴화된 기운을 실어내는 주술적 장소였을 것이다.
□ 음달산
염천골로 들어가는 왼쪽 봉우리로 오전 내내 음달이 지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을 양(陽)으로 보고 남암산을 음(陰)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음양의 조화에 따라 대복마을이 융성한다고 한다.
□ 지름생이등
음달산에 붙은 등성이다. 호롱의 손잡이를 지름생이라고 하는데 모양이 흡사 닮았다. 흥려박씨가 입향한 이후 손이 귀했는데, 어느 지관이 지름생이등에 산소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고 일렀다. 그는 또 자손이 일어나면 반드시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고 하였는데 과연 묘를 쓴 후 11남매를 얻었다. 그러나 이장을 하지 않아 장손의 가세가 무척 기우렀다고 한다.8)
□ 가나무골, 미영밭골, 범무골, 무근산골
염치진골 안에 이루어진 각 골자기 이름이다.
□ 돌터골
범무골 안의 검단 송씨 문중산으로 청석이 나와 광복 전에는 비석과 좌판을 만들던 채석장이었다.
□ 문동골(文童谷)
염치진 못에서 운암산으로 난 긴 골짜기로 곡천마을과 연결된다. 아이들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글을 외웠다고 한다. 골짜기에 논이 있다.
□ 제피골(山椒谷), 운암산골, 가재밭골
문동골 좌우로 난 골짜기다.
□ 새각단
염천골 입구에 새로 마련된 마을
□ 안대이, 안대양
대양리의 안쪽이란 뜻으로 뒷들에서 큰골과 서장골까지를 말한다. 안은 내(內) 대는 (大洋) 이는 명사 밑에 붙는 접미사다. 옛날 신씨와 고씨가 살았다고 한다
□ 동뫼, 진등
남암산 골짜기가 두 갈래 남쪽으로 내리면서 가운데 등성이를 이루었으니 동네산이다. 달리 길게 내려왔다고 하여 ‘진등’이라고도 하는데, 이 등성이에 흥려박씨 묘가 있다. 등성이잔등에는 대복지구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오랜 옛날 대복천가에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는데 남암산에서 자그만 산 하나가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의아한 처녀가 “산도 봄나들이 가나”하자 그만 멈춰 앉은 것이 동뫼가 되었다’고 한다
□ 복골, 복골저수지(호박못, 포강못)
대일 앞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막은 보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보가 있어 복골이 아니고, 남암산 줄기가 서진하다 동남으로 큰 골짜기를 이루니 밝은 골짜기인 밝골이 되고 밝골이 변하여 복골이 되었다.9)
이 복골에 조그만 저수지를 축조하고 복골저수지라 부르며, 또 방앗간 확(호박)처럼 생겼다고 호박못이라고도 한다. 또 달리 ‘보골포강못’이라고도 하는데 그 연원은 모르겠다.
□ 복골 쇠부리터
울산 달천 철장의 토철을 연료가 풍부한 곳으로 옮겨 무쇠로 제련하였는데, 이곳을 쇠부리터라고 부른다. 복골저수지에는 지금도 다량의 쇠찌꺼기가 나오고 있다.
□ 대양사터
복골과 절골 사이 지금은 넓게 경지 정리된 자리가 옛 대양사 터다. 1970년대 초 합배미하였는데 이곳에서 금동부처10)가 나왔다고 전하며, 탑재는 복골저수지 위로 길을 낼 때 매립토와 함께 묻었으며, 주초석 등은 그대로 두고 복토하여 경지 정리하였다고 한다.11)
□ 아들바위(남근바위)
복골저수지에서 150m정도 올라가면 계곡에 튀어나온 바위가 있다. 자손을 바라는 염원이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거석이나 거목 또는 맑은 물에 빌기도 하지만 이처럼 Y자 형태로 내려오는 골짜기의 합수점에 돌출한 바위를 남근으로 인식하고 비손하는 사례가 잦다. 이 기자암은 높이 100cm 넓이 140cm 길이 170cm.의 네모에 가까운 바위지만 아랫부분에 고환에 해당하는 바위가 받혀주고 있어 신비를 더하고 있다. 이 바위의 영험은 득남이 우세하지만 가끔 딸을 빌기도 한다.12)
□ 큰골고개, 홍범이 집터
복골에서 산등으로 올라 한참 오르면 묵은 밭과 논이 몇 도가리 있고 돌담 주변으로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에 홍범이라는 사람이 살았으며, 더 오르면 큰 고개가 있다. 고개를 넘으면 남암산 김신대로 나아가는데 이 고개가 큰골고개다.
□ 절골
복골의 동쪽골짜기를 절골이라 한다. 대양사에 딸린 암자가 있었거나, 청송사에서 마당재를 거쳐 대양사로 넘어오는 골짝길이므로 절골이라 한다.
□ 미륵불
절골로 접어들면서 700m쯤 오르면 석불이 있다. 이 좌불은 불두와 오른쪽팔목 그리고 왼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는데 1980년도쯤 대복 태안사의 한 보살이 당시 돈 100만원을 들여 서울의 전분가에게 의뢰하여 떨어져나간 부위를 수리하여 태안사 경내에 두었는데 주민들이 원하여 본래의 자리에 옮겼다.
이 불상은 고려후기의 불상양식을 띠고 있는데, 원형은 지장보살이었으나 보수하면서 석가여래로 해석하여 불두를 만들어 붙이고 팔목을 지나치게 굵게 만들었고, 목에는 삼도를 생략하는 등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깨의 폭 53cm 연화좌대 위에서 어깨까지의 높이 64cm며 가부좌한 무릎의 폭은 75cm다.
이 불상은 영험이 대단하여 아래 절골못을 막을 때 계속 둑이 터지자 이 불상에게 빌고 나서 완공했다고 한다. 개인 치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13)
□ 절골저수지
몰대각단의 논 전체에 관개하고 넘친 물이 오복들까지 적시는 대복리의 가장 큰 저수지다. 이 저수지를 막고 나서 비로소 부자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 밤티고개(栗峴)
오복동재를 거쳐 청량면 율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밤나무를 많이 심어 붙여진 이름이다.
□ 오복동재(五福洞嶺)
대복에서 밤티고개로 넘어가는 고개를 이른다. 도둑이 자주 출몰하여 악명이 높았다.
□ 작동고개(鵲洞-)〔당고개〕
삼동면 작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 큰골, 큰골못
정족산에서 남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당고개를 지나면서 남쪽에 골짜기를 이루었으니 큰골이다. 이 골짜기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는데 큰골못 또는 큰골 포강못이라 한다
□ 바깥바람, 안바람
큰골로 들어가면 처음골짜기를 ‘바깥바람’이라하고 그 안쪽을 ‘안바람’이라 한다. 엄동설한에 나무를 지고 골짜기를 내려오면 북풍이 몰아쳐 붙인 이름이다. 이 안에 ‘천불사’라는 절이 있다.
□ 가는 등
큰골 서북쪽 등성이로 삼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남암산에서 정족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다.
□ 응서리골
큰골 안마침을 이른다. 광복 후까지 한 집이 살았고, 논도 조금 있다.
□ 서장골(西藏谷)〔석산골〕, 석산골 못
당고개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이며 지금은 숯가마찜질방이 들어와 있다. 삼동면 둔기리 둔터가 군사주둔지이고, 당고개 아래에 군사를 매복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깊은 골짜기까지 논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고 산업시설과 사찰이 들어와 있다. 여기에 있는 저수지가 석산골 못이며, 못 아래로 작은 석산골이 이어진다.
□ 불당골
큰골못에서 남동으로 난 골짜기며,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 불한당골
불당골 아래 동족으로 난 골짜기다. 천수답과 밭이 있었으나 물이 없어 불모지인지라 붙여진 이름이다.
□ 구정지골(구정기골)
불한당골 아래 골짜기로 소로(小路)가 있었고 정자가 있던 곳이다.
□ 못골
구정지골 아래 모랭이를 돌아 동쪽으로 난 골짜기
□ 모시밭골, 수시밭골
불한당골 서쪽으로 난 골짜기. 모시밭이 있는 골짜기, 수수밭이 있는 골짜기를 이른다.
□ 순나무골
못골 건너편으로 숯을 굽던 숯나무골이 변하여 순나무골이 되었다.
□ 함박등
산봉우리가 함박꽃(芍藥)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크고 밝은 신령스러운 산, 또는 산과 산의 한 복판(가운데) 등성이가 변하여 한복판등→함박등이 되었다.
□ 손독골
음달산 아래, 예술고등학교 쪽의 골짜기인데. 손은 솔다는 뜻이니, 도가니안처럼 좁은 골짜기를 말한다
□ 고래장터
예술고등학교 밑인데, 고려장을 한 흔적이 195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 헛다리골, 지게골, 소도독골
웅촌 큰빛병원 뒤의 골짜기다. 지게다리처럼 생긴 골짜기로 지금의 국도가 나기전 울산과의 통로였다. 연안차씨묘가 위쪽에 있는데 이의 발복으로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 새미골(옹달새미)
국도에서 반정으로 난 삼거리 노방산 자락에 있는 샘으로 문경 이남에서 가장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 깊은다리〔산하교(山下橋)〕, 매구빨래터
지게골 입구에 있는 다리인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14)
‘웅상읍 매곡에서 태어난 서장군은 힘이 얼마나 장사였는지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웅상읍이 울산부에 소속되어 있을 때이니 울산 출입을 자주 하였는데 어느 날 하루 밤티고개를 넘어 날이 어두운데 깊은 다리쯤에 오니 개울가에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인가도 없는 깊은 다리 개울가에 빨래하는 여인이 하도 이상하여 가까이 가서 "이 야밤에 여자가 요망하게 빨래는 뭐냐" 하며 한 섬 만한 바위를 들어 여인에게 던지니 여인은 여우소리를 내며 즉사하였다.
갑자기 간 큰 서장군이지만 간이 서늘하고 무서움이 닥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축지법으로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아뢰니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매구(여우)란다 하시며 서장군을 큰 독안에 숨겨두고 바깥채에 있던 디딜방아를 방에 들고 와서 죽은 사람같이 염을 해놓고 가족들은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니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서장군 있는냐고 물으니 서장군이 어제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들어오더니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 누웠는데 아무리 간호를 해도 새벽에 죽었다고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더니 이왕 돌아가셨으니 시체라도 한번 보자고 하기에 방문을 열어주니 염한 디딜방아를 손으로 쥐니 바싹바싹 부러지고 방아괴(디딜방아 머리, 쇠로 만들었다)를 쥐어 보더니 서장군이 여기에 힘이 있었구나 말하며 돌아갔다. 집에 찾아온 사람은 서장군이 죽인 매구(여우)의 남편이었다.
□ 대복리 초소(哨所)15)
6.25 사변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부산과 울산을 잇는 7번 국도가 통과하는 밤티고개에서 빨치산의 준동으로 버스가 전복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 경찰은 웅촌면 대복리 해발169.8m 산정(N.35°29′19″, E.129°13′50″)에 요새를 쌓아두고 가파른 아래쪽에 검문 초소를 운영한 일이 있었다. 이후 시국이 안정되면서 초소는 철수하였으나, 요새로 사용하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그 시대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이 요새는 동쪽으로 급경사의 산사면을 두고 남쪽으로 완만한 능선을 바라보며 주변의 돌을 모아 쌓았는데, 둘레 58m의 기단을 70°경사지게 약 3m 높이로 쌓고, 다시 폭 2.5m의 단을 만든 다음 경사 65°, 높이 4m 정도의 벙커를 쌓았다. 이 가운데 지름 1.8m의 흙으로 만들어진 참호(塹壕)가 있다.
참호로 오르는 길은 4.2m길이의 계단이 있으며, 주변에 사격을 하기 위한 총안(銃眼) 흔적이 있다.
또 남쪽으로는 요새에 붙여 총 연장 39m의 둑을 쌓고 그 가운데 폭 3.8m의 출입구를 내었으며, 전체 둘레에 참호를 판 흔적이 역력하다.
□ 오복(五福)
옛날 어떤 지관이 지나가다가 이 부근에 묘터 네 곳과 집터 한 곳 등 다섯 곳의 복 받을 명당(明堂)이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지만 이 마을에서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한 눈에 다섯 봉우리가 들어오므로 오봉(五峯) 이 변하여 오복이 되었다고도 본다. 1959년의 면세일람에는 약천(藥泉)과 신동(新洞)이 있다고 했으며, 이 무렵 이곳에 삼동면과 청량면, 웅촌면을 관할하는 경찰서 지서가 있었다. 또 1920년대에 생긴 대복장이 매1,6일에 오복에서 열렸는데 1932년 곡천장에 통합되면서 지서도 곡천으로 옮겼다.
□ 약천동
옛날 갱빈이었던 오복마을회관 주위를 약천동이라 한다. 앞에 초천약수(椒泉藥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약천산
약천마을 뒷산이다.
□ 갱빈
현 회관 진입로 주변의 거랑은 자갈이 많은 갱빈이었다. 이곳에 대복장(오복장)이 섰다.
□ 사기장골
약천동 은혜사 앞의 골자기에서 많은 양의 그릇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거주지 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 양반소
노계 박인로 선생의 흔적을 비롯한 숱한 묵객들이 울산-동래길을 가면서 이곳에서 쉬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양반소 산, 산신제 터
양반소 위에 있는 바위산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위쪽에 돌이 떨어지면 윗동네에 초상이 나고, 아래쪽에 떨어지면 아랫동네에 초상이 난다고 한다. 이 산에 있는 산신제 터에서 음력 정월보름에 제를 지낸다.
□ 쟁골(재궁골)
중도절골에 있는 집터인데, 광복 후까지 흥려박씨 제실이 있었으나, 외진 곳이라 짐승이 자주 출몰하여 입구로 옮겼다. 지금은 산막을 이루고 있다.
□ 중도절골바우(평풍바우)
석천에서 깊은다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높이 7m 길이 20m되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이곳에 절터의 흔적이 있다.
□ 돌안지, 돌안지 들
오복에서 석천으로 가는 길의 모롱이. 모롱이가 석천리를 돌아앉아 있기에 붙은 이름이고, 이 주위의 논이 돌안지 들이다.
□ 허드락골
신진자동차 안 골짜기다. 옛날 허씨 성을 가진 부자의 집터라고 하여 ‘허부자 뜰’이라고도 한다. 골짜기에 들어서면 반석과 폭포가 있는 명승지였는데, 지금은 석산개발로 흔적도 없다.
□ 장승백이
오복장터 건너편에 이정표와 비보의 기능을 가진 장승이 있었다.
□ 오복의 5대 명지16)
강씨 입향묘(狗腹形), 천안이씨(小門形), 흥려박씨(雉腹形) 등 3대 명지는 확실하나 청부한씨(태광주유소 뒤), 파평윤씨(진등), 조순재 집터(조래터) 오복장터 등은 서로 5대 명지 중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아직 한 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 이외의 땅이름들17)
골안, 부채징이, 산박골, 섶밭골, 딧자리, 멍에배미, 장구배미, 가분데들, 논들, 당수말들, 도랭이들, 산박구매, 서나무징이, 참새미들, 구리등, 이반굴등, 장구딩이, 짱치밋등,꾀밭골, 봉수말보, 안땡이보, 양반소보, 자갈보, 홈거리보, 갯비알〔고자갓비알〕, 노루목양달, 무근산골(無谷山谷), 톳감비알
1) 鶴城誌(사찬읍지). 영조25년(1749). 權相一
2) 蔚山案內. 1917. 울산군. p.5
3) 웅촌면지. 2002. 웅촌면지편찬위원회(강혜경). p.253
4) 웅촌면지. 2002. 웅촌면지편찬위원회(강혜경). p.250
5) 대복리 거주 박시준(67세) 담
6)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一 始祖 東明聖王
7) 蔚山地名史. 李有壽. 蔚山文化院. p.440~441
8) 대복리 거주 박원조(61세) 담
9) 웅촌면지. (김헌경).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388
10) 웅촌면지. (김헌경).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389 ; 진등 박씨묘 옆 몰대각단에 사는 정남화씨가 밭을 갈다 손바닥 길이만한 금동불을 발견하였는데, 전신이 온화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정창화의 말에 의하면 군 공보실에 신고하여 갖다 주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행방을 모른다
11) 대복리 거주 박원조(61세) 담
12) 웅촌면지. (이상도).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706
13) 웅촌면지. (이상도).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701
14) http://ungchon.ulju.ulsan.kr/introduction/legend.jsp#c
15) 웅촌면지. (이상도).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705
16) 웅촌면지. (김헌경). 웅촌면지편찬위원회 2002. p.384
17) 울산광역시사. 제2권. 지명(이상도).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p.672~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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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르처 주지않으면 모르고 지나처버릴것인데 김현경씨 가 웅촌사람이라서 한번씩 이야기는 들었다만 정말 옛이야기로 남겨지겠네 ..
어느 지명이고 무심히 붙혀진 것은 없다.자료 고맙게 보고간다
바빠서 다읽지못하고 가네 정말 볼만한것이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