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현대 정통 유다이즘의 창설자로 여기는 라삐 삼손 라파엘 히르쉬는 달력의 종교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이야기했다.
유다인의 교리는 그들의 달력으로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삶을 헤쳐나가게 하는 시간의 톱니바퀴에 영혼을 고무시키는 당신의 교리의 영원한 말씀을 새겨주시면서 당신 전령들이 당신의 진리를 선포할 날과 주週와 달과 해를 만드셨다. 그 무엇도 이 시간 요소보다 덧없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그 요소들에 당신의 거룩한 일의 관리를 맡기심으로써 그 요소들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가 유다인의 달력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의 해〔年〕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가톨릭 신자에게도 교리가 있긴 하지만(그래서 그 점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가끔은 교회의 축일과 단식일을 지키는 것만으로 그 교리를 훨씬 더 깊이 또 실질적으로 배울 수 있다. 실제로「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달력을 한 해 내내 교리를 가르치는 시기로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이야기한다. “전례주년과 그에 따르는 대축일들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에 근본이 되는 주기다.”(2698항) 대축일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고 전해 주며’(1171항), ‘지속적인’ 기도를 함양시켜 주는 ‘정기적인 기도’를 권한다(2720항, 2698항).
‘손꼽아 날짜를 헤아리며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과 정체성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기념일과 생일을 기억하고 중요한 사건을 특별히 경축한다. 또 그러한 날과 시간에 따라 우리 자신을 규정짓는다.
예를 들면 ‘나는 오늘 쉰한 살이다. 결혼한 지 29년 되었고, 가톨릭 신자가 된 지는 22년째이며, 18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는 내 자녀와 손자 하나하나의 생일을 기억한다.’ 등과 같이!
내 직장 생활은 학기와 중간고사에 따라 구분된다. 교수의 한 해도 농부의 한 해나 세무사의 한 해와 마찬가지로 주기를 따른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표시하고 수명을 정확히 세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 본성을 창조하신 하느님보다 인간 본성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세상이 주기를 따르도록 만드셨다. 창세기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세상을 엿새 동안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고 한다. 그분이 쉬신 것은 지쳐서가 아니라(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 인간의 노동과 휴식에 모델을 제시하시려는 것이었다. 그 후 하느님 백성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엿새 동안은 일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곧 일하는 엿새는 자유로운 몸으로 주님께 예재드릴 날을 지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주기를 따르는 데 실패하자 주님은 그것을 율법으로 성문화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언제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했다’(탈출 20,8).
교회력은 우주의 주기와 일치한다. 구약에서 축제일은 신성하고 역사적인 사건뿐 아니라 파종기와 수확기도 기념했다. 율법은 사제들의 성막 재임 기간과 인간의 출생 시기에도 관여했다. 그런데 우주에 주기가 있었던 것은 거룩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달력과 달력의 종교적 의미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계셨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랬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셨는지 기억하라.(루카 22,15 참조) 그리고 그분과 그분의 가족은 물론 나중에는 그분의 제자들도 정해진 시기에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 주목하라.
성 요한은 예수님의 성스러운 직무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그 극적 사건이 유다인의 축일력에 따라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떠올린다. 예수님은 그 절정에서, 파스카 어린양이 성전에서 희생제물이 된 바로 그 순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을 때 모든 인간과 역사는 그 말씀이 실현되었음을 깨달았으며, 하느님에 대한 교의가 직접 계시되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달력 자체가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달과 날들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며(실제로는 하느님 백성이 그것을 재정리했다) 복음을 충만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적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모아졌다. 이제 주일은 더 이상 안식일로 이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로 이어졌다. 한 해의 정점은 여전히 파스카 축제였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의 축제인 그리스도교적 파스카였다.
주님의 날과 부활절은 새로 태어난 교회의 주된 거룩한 날이었지만, 주님의 잉태·탄생·세례·승천 등 차츰 새로운 축일이 추가되었다.
교회는 주님의 일생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도 구분했다. 예수님은 “믿음의 영도자”(히브 12,2)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시다. 이런 표현은 따라야 할 사람이 많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비롯하여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성인들의 축일을 거행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입증했다.
한 해는 그것이 발전해 온 대로, 현미경이나 망원경처럼 언제나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가까이하기 위해 세밀하게 조정된 하나의 도구다.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교 교회력은 유다력과 마찬가지로 날·주·달 단위로 계산한다. 그 교회력에는 성주간과 8일 동안 지속되는 팔일축제들이 있다. 팔일축제는 부활과 성령강림 같은 성경적 신비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도 있고, 그리스도교 일치 같은 기도지향을 주제로 다루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교 교회력에는 연중 시기를 비롯하여 사순 시기, 대림 시기, 부활 시기, 성탄 시기가 있다. 또한 5월은 성모님께, 10월은 성모님의 묵주기도에 봉헌하듯이, 달을 지정하여 봉헌하는 관습도 유지하고 있다.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은 날마다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같은 다른 신비들을 묵상하게 된다. 누군가 노래했듯이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때때로 교황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해 전체를 선택하여 ‘성년聖年’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전례력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구원 역사의 주요 사건을 반복적으로 접할 기회를 갖는다. 「미사전례성서」는 미사에서 선포할 교회의 독서, 곧 구약성경의 예시와 신약성경의 실현을 지정한다. 그 밖의 다른 의식인 성사와 준성사의 거행은 같은 양식을 인생의 과정에 적용한다. 「미사전례성서」의 전개로 주週와 시기時期와 해〔年〕가 일원화된 연속성 있는 이야기를 전하며 그 과정 속에서 교의를 가르친다.
단식과 축제의 시기, 슬픔과 기쁨의 시기, 회개와 화해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돌아온다. 모든 피조물이 그 이야기를 하고, 모든 역사가 그 이야기를 하며,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삶이 그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희망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희망…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는 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하는 힘찬 격려다’(히브 6,18-19 참조).
---------------------------------------------------------------------------------------------------------------
마음에 새기기
---------------------------------------------------------------------------------------------------------------
사람들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가르침보다 해마다 신앙의 신비를 거행함으로써 훨씬 더 많이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신앙심이 주는 내적 기쁨을 누립니다. 교회의 공식적 선포는 얼마 안 되는 좀 더 유식한 신자들에게 전달되지만 축일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전자는 한 번 말하지만 후자는 해마다 이야기합니다. 아니, 실제로는 영원히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로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만, 축일은 마음과 정신 모두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인간 본성 전체에 구원의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외적인 축제행사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의식은 다양한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받아들이도록 자극하고, 인간은 그 가르침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자신의 영적 생활에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축일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통적인 위험에 맞서기 위해 힘이 필요하거나 교활한 이단의 공격을 받을 때, 또는 신앙의 신비나 거룩한 축복에 대해 신앙적으로 검토를 해야 할 때처럼 그들의 필요나 이익이 요구됨에 따라 차례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 교황 비오 11세, 20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