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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武王傳
흥무왕(=김유신)전[1]
解釋 : 2005. 5. 31. 金順大
[1] 보통 **전(傳) 이라고 하면 역사적인 실제 사실(事實) 즉 사실(史實)에 바탕을 둔, 한 개인의 전기(傳記)를 말하나 아래의 글은 소설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두고자 합니다.
高句麗之末王后有齊姜之行而性且貪虐生殺與奪以賄賂多寡陞降黜陟以苞苴輕重栽辱之患出於貴戚大臣州牧之任及於賤隸僧尼朝野有曷喪之歎閭巷作譏剌之詠
고구려의 말에 왕후가 정권을 쥐고 흔들며, 성품이 탐욕이 많고 포학하고, 백성을 살리고 죽이거나 주고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하며, 뇌물(賄賂)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관리의 승진과 좌천, 임용과 파직을 행하고, 뇌물(苞苴)의 경중에 따라 돌보아 주거나 또는 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왕의 친척(貴戚)들을 주나 목의 관리에 등용했으며, 또 천민이나 노예(賤隸), 중 들과 같은 조야에서는 한탄이 끊이질 않았고, 충성으로 간하는 노랫소리가 만들어져 불리었다.
是時御溝小澗滾滾逆流廟廷立石啾啾悲鳴天有星辰運移之變地有山川崩渴之災雷運見於冬霜雹行於夏
이때 대궐안의 작은 개천(御溝小澗)의 물이 세차게 솟아올라 거꾸로 흐르고, 사당의 뜰에 세워 놓은 돌에서 웅성거리는 비명소리가 나오며, 하늘에서는 별들의 운행 경로가 이동하여 변하고, 땅에서는 산천이 붕괴하고 물이 마르는 재난이 발생하고, 겨울에 천둥이 치는 것이 보이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지더라.
王怪之招秋南筮之以卜吉凶秋南乃當時明卜也秋南受命刷精進告於三曰御溝水之逆流廟庭石之悲鳴乃宮中淫亂之故也星辰之運移山川之崩渴乃牝雞司晨之致也冬日之雷霆夏月之霜雹天之告警也靑龍之歲朝有南北問罪之師而夕有繫頸含璧之厄也
왕이 이를 괴상하게 여겨 추남[1]을 불러 길흉의 점을 치게 하니, 추남은 당시의 유명한 점술가이었다. 추남이 명령을 받고 정진하여 3일째 되는 날 고하기를 “대궐의 개천이 역류하고 사당 뜰의 돌에서 비명소리가 나는 것은 궁궐 내에 음란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별들의 운행경로가 이동하고 산천이 무너지고 마르면 암탉(牝雞)이 새벽에 울게(司晨)됩니다.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며 우박이 쏟아지는 것은 하늘이 이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청룡지세[2]에 아침에는 남북에서 죄를 묻는 사자가 올 것이고, 저녁에 되면 목을 메어달고 옥구슬을 입에 무는 재앙이 있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1]秋南; 삼국유사에 金庾信의 前身(전생)으로서 고구려에서 점을 치는 추남으로 살다가 죽어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함.
[2]靑龍之歲; 사회적으로 어떠한 시대를 말하는 것 같은 데 잘 모르겠음. -> 후반부에 갑진(甲辰)년이라고 되어 있으니 644년이나, 이때 고구려에서는 특별한 일은 없음. 참고로 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이하 대신들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였으며 644년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신라와의 화친을 권고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안시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당태종은 철군함.
王聽而黙黙后聞之恐其淫亂之言泄於內外殺秋南欲滅?其口捕得一大氣納於石函下鎖堅封授心腹宦者曰汝持此往秋南家使筮之解之不得斬其首以來也
왕은 묵묵히 듣고만 있고 왕후는 그 음란한 말이 내외에 누설된 것에 놀라 추남을 죽여서 그 입을 봉하고자 하여 추남을 사로잡아 묶어두고, 돌로 만들어진 함을 견고하게 자물쇠로 채워 심복인 신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것을 가지고 추남에게 가서 추남으로 하여금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점을 쳐 알아 맞추도록 해라. 만일 알지 못하면 목을 잘라 가지고 오너라.” 고 하였다.
宦者領命往秋南家使之卜而解之秋南推解以告曰混沌無消長之氣而以琢以磨作爲兩儀狙伺有猶預之性而畏首畏尾禀得虛靈以六除之有零以八計之未滿混沌者石也狙伺者鼠也六而有零八而未滿者七也必以七鼠納於石函也
신하가 명령을 받들어 추남에게로 가서 추남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도록 하자, 추남이 점을 쳐 풀어 고하기를 “혼돈되어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나는(消長) 기운은 없으나, 학문을 갈고 닦으니(琢磨) 헤아려 분간할 수 있게 되어, 이를 엿보건대 그 성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목과 꼬리(?)가 잘려서 죽는 두려움이 있더라도, 잡념이 없이 영험한 기를 받아보니, 여섯을 빼고 나면 나머지가 있고, 여덟로 하자니 아직 차지 않아 혼돈스러운 돌이구나. 가만히 보니 이는 쥐이고 여섯 마리라고 하면 남는 것이 있고, 여덟 마리라고 하면 아직 차지 않았으니 7마리이다. 반드시 7마리의 쥐가 돌 함속에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 삼국유사에 쥐는 한 마리이고 뱃속의 새끼가 일곱이라고 하는데 해석된 내용의 의미를 정확히 잘 모르겠음.
宦者以其言復子后后曰石函納鼠之說是矣而以一爲七其卜不明也汝又往其家啓函示之言其不善解而斬之可也
신하가 그 말을 왕후에게 고하니 왕후가 말하기를 “돌 함속에 쥐가 들었다는 것은 맞으나, 한 마리를 일곱 마리라 한 그 점은 틀렸으니 너는 또 <추남의> 집에 가서 그 돌함을 보여 주고 그가 이를 잘 풀지 못했으니 목을 벨 것이라고 하여라.” 라고 했다.
宦者又往秋南家曰王后傳敎內汝之以鼠納石函雖不謬而一謂七解之善命我斬汝汝當死也
신하가 또 추남의 집으로 가서 말하기를 “왕후가 전하기를 너는 돌 함속에 쥐가 있었다는 것은 비록 틀리지 않았으나 한 마리를 일곱 마리라고 당당하게 물었으니 나에게 명하여 너의 목을 베라고 하였으니 너는 의당 죽을 것이다.”
秋南聞其言知其不免乃言于宦者曰御溝之逆流廟庭石之悲鳴綠於王后之淫亂星辰之遷移山川之崩渴亦出於王后之貪虐故吾以是告於王則后以是含怨於我試以鼠卜之殺我後已之計也我死後當托生於他國爲名將滅此國栽此后以報我無辜就刑之寃也
추남이 그 말을 듣고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그 신하에게 말하기를 “대궐의 개천이 역류하고 사당 뜰의 돌에서 비명소리가 나는 것은 왕후의 음란한 짓 때문입니다. 별들의 운행길이 이동하고 산천이 무너지고 마르는 것 역시 왕후가 탐욕스럽고 포학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를 왕에게 알리고자 하니 왕후가 이 일로 원한을 품고 나를 쥐로서 시험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은 계획된 일입니다. 나는 죽어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명장이 되어 이 나라를 멸망시고 왕후에게는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리겠습니다. 제가 형을 받는 것은 원통합니다.” 라고 하였다.
宦者令其從者卽斬秋南則有一靑鳥出自喉中而宦者哀鳴翩翩高飛向天而去宦者怪秋南之能解鼠而不能辨其數又怪靑鳥之出於喉中高飛戾天刃其腹視之果孕六雛毛骨已成也宦者服其善而歸告王后矣
신하는 그를 따라온 자에게 명령하여 추남의 목을 베니, 한 마리의 푸른 새가 추남의 목에서 나와 신하를 보고 애통하게 울며 빠른 날개 짓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신하는 추남의 능력으로 쥐의 마리수를 알지 못한 것을 괴상하게 여기고 또 푸른 새가 <추남의> 목에서 나와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괴상히 여겨, <쥐의> 배를 갈라 들어다 보니 과연 6마리의 새끼가 있고 털과 뼈가 이미 생겨나 있었다. 신하는 그가 옳았다는 것에 탄복하고 돌아와 왕후에게 보고하였다.
後三年王后穢德彰於宮中別處令室而王始聞秋南臨刑時告天之言及化爲靑鳥飛去之說募得多智謀有膂力二僧一送百濟一送新羅而言于兩僧曰汝二人分往兩國勿計勞困周行險夷必得年歲之爲幾容貌之秀異者殺而來告則予當厚報也
그 후 3년이 지나 왕후의 좋지 못한 행실(穢德)이 궁중에 알려지고, 왕이 추남이 형을 받을 때 하늘에 맹세했던 말과 <추남이 죽어서> 푸른 새가 날아올라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지혜롭고 꾀가 많으며 힘이 센 두 명의 중을 뽑아 한 사람은 백제로 보내고 한 사람은 신라로 보내며 두 사람의 중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 두 사람은 나누어 양 나라로 가서 힘들게 험한 오랑캐 나라(백제와 신라)를 둘러볼 생각은 하지 말고, 반드시 <추남의> 나이 또래 중에서 용모가 수려하고 뛰어난 자를 죽이고 돌아와 보고해라. 그러면 나는 당연히 후하게 보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先是秋南臨刑時喉中所出靑鳥飛入新羅爲金舒玄子舒玄夫人乃新羅宗室女萬明公主也是時舒玄得一夢有一大星鎭二星入於萬明公主懷中夫人之夢有一童子衣金甲乘雲自天降下入於室中自是有娠二十月而生一男是日乃庚申也
이전에 추남이 죽을 때 목구멍에서 나온 푸른 새가 날라서 신라로 들어가 김서현의 아들이 되었다. 서현의 부인은 신라 종실의 여자로서 만명공주이다. 이때 서현이 꿈을 꾸니 하나의 큰 별이 있었는데 이것이 두개의 별을 누르고 만명공주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부인의 꿈에는 한 동자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 일이 있고나서 잉태를 하여 20개월 후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 날이 경신일 이었다.
仍以庚申爲名矣後自新羅聞其狀有異庚似庾以申爲信改以庾信
따라서 경신을 그 이름으로 하였다. 이후에 신라 때부터 특이한 일이 있었다는 상황을 듣고 경(庚)을 그 비슷한 유(庾)로 하고, 신(申)을 신(信)으로 바꾸어 유신(庾信)이라 하였다.
公年五歲出遊街上一城羣兒咸聚推公爲將進退早晩行動起伏惟令是從無敢違拒
공이 5살 때 길 위에 나가서 놀 때 한 성의 아이들이 모두들 모여들어 공을 대장으로 뽑아서, 전진했다가 물러나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어났다가 엎드리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고 <모두들> 이것에 따르는데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此時高句麗所送僧到慶州西川邊見公年幾五六狀貌奇異胃(冑?)藏萬甲眼如流星而五百餘羣兒隨令聽從莫敢自任也
이때 고구려가 보낸 중이 경주에 도착하여 서천의 강변에서 공을 보았는데, 나이는 대략 대여섯 정도이고 용모가 기이하며 눈빛은 유성과 같이 빛났으며 오백여명의 아이들이 그의 명령을 듣고 따르며 자기가 맡은 바를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僧意謂彼領羣兒者疑是秋南後身也終日聽候日暮?隨羣童宿於客店
중이 마음속으로 그를 생각하기를 아이들을 이끄는 애가 추남이 다시 태어난 것일 것이라고 여겼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듣고 기다리다가 날이 저물자 아이들을 따라가 객점에 묶었다.
翌日又往川邊以探動靜矣領率羣兒比昨又倍幾千餘而擁護其兒有若侍衛王者然其兒登高而坐號令羣兒聽令小退隨力輕重各以石紛紛運來爲築城狀曰此是高句麗國城又作草偶二人置之城中曰此是高句麗王及后也
다음날 또 천변에 나와서 동정을 관찰했다. 우두머리가 거느리는 아이들은 어제에 비해서 배로 늘어 천여 명쯤 되었고, 이들은 그 아이(유신)를 둘러싸서 마치 왕을 모시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아서 호령을 하면 아이들은 그 명령을 들었다. 아이들은 그 힘이 세고 약함에 따라서 각각 돌을 가져와 성을 쌓자 대장이 말하기를 “이는 고구려국의 성이다.” 라고 하였다. 또 풀로서 허수아비 두 사람을 만들어 성안에 세워두니 말하기를 “이는 고구려의 왕과 왕비이다.” 라고 하였다.
卽令羣兒或擧石或荷杖而大作吶喊進擊其城而陷之曰格破高句麗國也拉致二草人於前曰汝多殺無辜殘虐百姓其罪當死也
즉 아이들에게 명령하면 어떤 아이는 돌을 들고, 어떤 아이는 몽둥이를 들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그 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말하자면 고구려 나라를 격파한 것이다. 풀로 만든 두 개의 허수아비를 납치하여 그 앞에서 말하기를 “너는 무고하게 사람을 많이 죽이고 백성을 학살하였으니 그 죄로서 당연히 죽어야 한다.” 고 하였다.
乃斬其首裁其屍羣兒跪告曰受將令討滅高句麗獻賀也僧自語於心曰此果秋南後身也明月又往川邊則其兒領率羣兒以來而其數又多於昨日矣
이에 그 머리를 베고 시체를 도막내고 나서 아이들이 꿇어앉아 보고하기를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고구려를 토멸하여 바치니 축하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중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는 과연 추남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다음날 또 천변으로 와보니 그 아이(유신)가 아이들을 이끌고 왔으며 그 수 또한 어제보다 많았다.
俄有一大獐自山而下入於雞林林中其兒見獐之入於林中呼羣兒數句號令羣兒伏地聽令投入於左右山中各列一円柴五箇葛
이때 갑자기 한 마리의 큰 노루가 산으로부터 내려와 계림의 수풀 속으로 들어가니, 그 아이가 노루를 보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며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호령을 하며 부르니 아이들은 땅에 엎드려서 그 명령을 듣고는 좌우의 산으로 들어가면서 각 열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잡목과 5개씩의 칡덩굴을 준비했다.
而來其兒令羣兒以其此各作一草人解其衣衣之以其葛貫艸人之腰圍立林外空其一隅而
그 아이(유신)가 와서 아이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하나씩의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고 옷을 벗어 그 옷을 칡덩굴로 꿰어서 허수아비의 허리에 감싸고 수풀 주위에 세우게 하니 비어 있는 곳은 한 귀퉁이 뿐이었다.
抄壯健有力者若干人銜伏於空處左右抄百餘人入林中叫呼搜打又令餘兒間草人以立引其葛撓之而
건장하고 힘 있는 몇 명의 아이들을 뽑아서 숨을 죽이고 비어 있는 곳의 좌우에 엎드리게 하고, 백여 명을 뽑아서 수풀 중에 함성을 지르며 들어가게 하여 수색하며 때려잡도록 하였다. 또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허수아비 사이에 서 있게 하여 칡덩굴을 잡아당겨 구부러지게 했다.
喊聲四起震盪天地獐爲搜軍之打起欲左而左有軍吶喊欲右而右有人荷杖驚遑周走跳出於空缺無喊之隅則伏兵齊起亂打捕之納于其兒其兒卽爇火灸之分餉羣兒曰討滅高句麗以是犒餽羣兵也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일어나 벼락처럼 천지를 진동하니, 노루는 수색하는 아이들을 피해서 왼쪽으로 달아나고자 하면 왼쪽에 있던 아이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오른쪽으로 달아나고자 하면 오른쪽에 있는 아이들이 몽둥이로 때리니 <노루는> 놀라서 허둥대며 주변으로 도망치다가 비어있고 소리도 없는 모퉁이로 나가게 되었다. 이러자 숨어있던 병사(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마구 때려 사로잡아 그 아이(유신)에게 바쳤다. 그 아이는 즉시 불에 구워서 군량으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고구려를 궤멸시켰으니 이것을 배불리 먹으라.” 고 하였다.
僧的知其兒之爲秋南後身雖欲殺之未得其便思得一計曰彼兒夜則宿於其父母所處之室晝則以千童擁護而行必以毒藥而後乃可殺也
중은 정확하게 그 아이가 추남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죽이고 싶었으나 좋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하나의 계책을 생각하여 말하기를 “그 아이는 밤이 되면 그 부모가 있는 방에서 잘 것이고, 낮에는 천 여명의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반드시 독약을 사용하야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朝往暮還日如羣兒而或以時果散給之或以玩物分與之效作交結之狀矣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것을 여느 아이들과 같이 했다. 어떤 때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장난감을 나눠주어 서로가 친해지는데 효과가 있도록 했다.
一日僧造果千餘張而別造大果五葉以毒藥置其中尾往公所遊處先以五葉大果納於公繼以小果散給羣兒公竢其盡分乃令羣兒縛其僧問之曰汝無所爲而盤桓不去遂日從我聽我動靜者一可怪也汝以貧僧行乞爲命而或以果或以貸散給羣兒者二可怪也
하루는 중이 과자를 천여 개 만들고 별도로 5개의 큰 과자를 만들어 그 속에는 독약을 넣었다. 뒤에서 살그머니 나와 공이 놀고 있는 앞으로 와서 5개의 큰 과자를 공에게 주고 계속해서 작은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이 다 나누어 줄 때까지 기다라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명령하여 그 중을 묶게 하고 묻기를 “당신은 아무 할일이 없으면 왜 가지 않고 여러 날을 머물며 우리를 따라 다니면서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가? 이것이 첫 번째로 이상하다. 당신은 빈털터리 중으로 생명을 유지하려면 구걸을 해야 할 것인데 과자나 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두 번째로 이상하다.
散財費物多造果給我千餘兒者三可怪也果若無心則其果大小當爲一樣而納我之果如是別造者四可怪也毋隱直告也
엄청난 비용이 과자를 만들어 천여 명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위해 들었을 것인데 이것이 세 번째로 이상하다. 과자를 만들 때, 생각없이 만들었다면 과자의 크기는 당연히 일정해야 할 것이데 내개 준 과자인 이것은 별도로 만든 것일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로 이상하다.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라.” 라고 했다.
僧曰盤桓不去者旣無住着處處一般之故也前給貸果者我赤有氣好觀君遊戲故也進以大果者君爲羣童領首欲分將卒故也負財造果者僧以損施爲貴之故也
중이 말하기를 “가지 않는 것은 이미 돌아가 머무를 곳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전에 돈이나 과자를 준 것은 내가 너희들이 놀고 있는 것이 보기 좋고 마음에 들어 즐기고 있기 때문이고, 큰 과자를 준 것은 네가 아이들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장수와 병졸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고, 과자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재물은 중으로서는 손해를 보고 베푸는 것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公曰其言詐也卽招狗餉之其狗卽斃而頭腦自坼矣公令羣兒格殺之此時高句麗王怪前僧之周年不還
공이 말하기를 “거짓말이요.” 하고 즉시 개를 불러다 먹이(큰 과자)를 주니 그 개가 즉시 쓰러지면서 머리가 터져 버렸다. 공이 아이들에게 명령하여 <중을> 때려죽이라고 했다. 이때 쯤 고구려왕은 전에 보낸 중이 일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又末得一僧勇兼百人智出千夫而能使百斤鐵鎚也給銀子一千兩送于新羅曰汝往新羅探聽前僧之生死而如見氣局之超異智力之援萃者必殺而來予以千金當報汝也
또 마지막으로 한사람의 중을 뽑았는데 그 중은 백 사람의 용기를 겸하고 있고 천 사람의 지략을 가지고 있으며 능히 백근의 쇠몽둥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은자(은으로 만든 돈) 1천량을 주면서 신라로 보내며 말하기를 “너는 신라로 가서 전에 보낸 중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아보아라. 그 상황을 보고 <너의> 특별한 지혜와 힘으로 그를 도와서 <아이를> 반드시 죽이고 나에게 돌아오면 당연히 너에게 보답할 것이다.” 라고 했다.
僧授密旨往新羅聞知前僧之被殺於公之手而更探公所爲之如何則日與千餘兒擁前衛後而行雖欲殺害無計可施住宿於公家門外客店以賚去銀子搜得珍寶或納舒玄或給公納款獻誠傾心討惰與公故作膠添之交而誘公出野外欲殺之
중은 밀지를 받고 신라에 가서 전의 중이 공의 손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공이 있는 곳을 찾아서 공이 어떠한 가를 알아보려 했다. 어느 날 보니 천여 명의 아이들이 앞에서 둘러싸고 뒤에서 호위하며 가고 있었다. 비록 죽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행할 만한 계책이 없어 숙소로 돌아갔다. 공의 집 문 밖에 있는 객점에서 뇌물로 은자를 주고 진귀한 보물을 골라 샀다. 혹시 서현공에게 주던지, 공(유신)에게 주던지 정성껏 주어서 마음을 기울게 하고 불경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하여 끈끈한 우애를 만들어 공을 밖으로 불러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一日僧請於公曰欲與君遊於城隍堂下也公許之翌日僧與公僧往城外而僧勸公前行公讓僧先行互相推讓僧恐公之疑而不行不得已前行公從其後幾至城隍堂有一丫鬟立於街上姿色特異公急投前挽執其手而
하루는 중이 공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당신과 같이 성황당 아래에 놀러가고 싶다.” 고 하자 공이 허락하여 다음날 중과 공이 성의 바깥으로 나갔다. 중이 공을 보고 앞서 가기를 권하자 공이 양보하여 중에게 앞장서라 하고 서로 간에 양보를 계속하였다. 중이 공이 의심하여 가지 않을까봐 걱정되어 부득이 앞서가고 공이 그 후를 따라 갔다. 얼마쯤 가서 성황당에 다다르니 한사람의 여자종(丫鬟)이 길거리에 서 있었는데 용모가 특이하였다. 공이 급이 다가가 그 손을 꼼작 못하도록 하였다.
戲之丫鬟含淚而言曰彼僧欲害君誘君往城隍堂君何不知而從往耶君自此走西以避大禍也公聞其言始覺其僧之爲刺客依其所指走西欲避而無處可投方納悶之際有一女浣衣於堂下川邊公急往其前問其隱身之所女曰彼僧跟君以來君可怠避也
희롱하던 여자종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 중이 당신을 죽이고자 당신을 꾀어서 성황당으로 왔는데 당신은 어찌 알지 못하고 따라 왔습니까. 당신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도망쳐 큰 화를 피하소서.” 라 하니 공이 그 말을 듣고 그 중이 자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여자종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서쪽으로 달려서 몸을 피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알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당 아래의 천변에서 옷을 씻는 여자가 있어 공이 급히 그 앞으로 가서 몸을 숨길 곳을 물어 보니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 중이 당신을 찾으러 왔다가 갔으니 당신은 천천히 피해도 된다고 하였다.
卽與丫鬟共掘沙土作一坎使之臥取其浣衣之器覆其上坐其邊仍浣濯而己僧來問曰容貌年歲如許童子曾過此地耶
즉시 여자종과 같이 모래흙을 파서 하나의 웅덩이를 만들고 그 속에 누운 후, 빨래감들을 가지고 그 위를 덮고 빨래하는 여자를 그 옆에 앉아 있도록 했다. 이에 그 중이 와서 묻기를 용모와 나이가 동자승과 비슷한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女徐答曰我自朝至午浣濯於此而無人過此也僧移時周搜不能推得還向舊路而走半餉後其女扶起公公謝其救護得全之恩女曰妾等憐王孫而救之何謝之有彼丫鬟卽城隍堂地神妾乃此江所守之神也
여자가 천천히 대답하여 말하되 나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여기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아부도 이곳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중이 그 주변을 둘러 보다가 찾지 못하고 지나온 길을 돌아가 뛰어가 버렸다. 10분쯤[1]후 그 여자가 공을 도와서 일으키자 공이 구해 준 것이 모두 당신의 은혜라고 감사해 했다. 여자는 말하기를 “첩 등은 왕손이 가련하여 구해주었는데 무엇이 감사합니까. 아까의 여자종은 성황당의 지신이고 접은 이 강을 지키는 신입니다.
[1]半餉; 식사할 정도의 짧은 시간의 반 정도
君不知彼妖僧之誘引幾陷大禍故自城隍堂送被丫鬟而告之江神送我護君也有所使而告之護之於妾等何謝爲哉然天生大福之君雖無被害於而彼恐有一時之失如是救之也願公子自此善善保護焉因忽不見
당신은 그 요망스러운 중이 유인한 것을 알지 못하여 큰 화를 입을 것 같아 성황당에서 그 여자종을 보내어 강의 신에게 알려 나를 보내어 당신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켜서 보호해 줄 것을 첩 등에 알려 와서 그렇게 하였는데 무엇이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천생에 큰 복을 가진 당신이 비록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그가 때를 놓칠까봐 걱정하고 있어 이와 같이 당신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공자는 지금부터 소중히 <옥체를> 보호하소서.” 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公年至十五面如傳粉勇如快鶻眉如靑山眼若晨星藏經天縮地之機懷神出鬼沒之才欲討高句麗之計不灰於中而如無交締宮O?之事則其言聽計用自難如意也
공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얼굴은 화사하고 날래기가 송골매 같고 눈썹은 청산과 같으며 눈은 샛별과 같았다. 하늘의 이치를 알고 땅을 다스릴 기회를 가슴에 품으며 신출귀몰하는 재주로서 고구려를 토벌할 야망을 마음속가지고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자와의 친분이 없었으니 즉 그 말은 계책을 들어주고 시행한다는 것이 뜻대로 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公有三妹長曰姮娥次曰月娥季曰仙娥年皆及{竹/牙;죽순}俱有絶世之色姮娥一夜得一夢上陳留嶺放溺初若小溪之滾滾漸似大江之浩浩流入東海仍成大海覺而怪之翌朝言其二弟曰今夜一要如斯可怪也
공에게는 3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니 제일 위가 항아이고 다음이 월아이고 막내가 선아이었다. 나이는 모두 피어날 때이고 절세의 미모를 겸비하였다. 항아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방책의 위쪽 고갯마루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처음에는 작은 시냇물로서 조금씩 물이 흐르다가 점차 큰 강이 되어 넓게 흘러 동해로 흘러가 큰 바다가 되었다. 이를 생각하니 이상하여 다음날 아침 두 동생에게 오늘(지난?)밤에 간단히 말해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仙娥解其所着上衣投之姮娥之前曰吾以此換其夢也姮娥笑而許之公以三妹矜於王子欲結秦晉之緣以成其計矣
선아가 그 꿈을 해석하고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항아의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저의 이것과 그 꿈을 바꾸자.” 고 하자 항아가 웃으며 허락하였다. 공은 세 두이동생들을 가엾게 여겨 왕자(김춘추)[1]에게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인연[2]처럼 맺어 주고자 생각하며 그 계획을 세웠다.
[1]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손자로서 그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시기는 김유신의 나이 15세로서 609년이고 이때의 왕은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왕위를 큰 딸인 선덕공주에게 물러 주게 된다. 따라서 김춘추를 왕자라고 호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뒤에도 계속 왕과 왕자 또는 세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왕을 진평왕이라 보면 왕자, 또는 세자는 없다.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누이를 구해준 사람이 선덕공주라 나오는데 이것이 맞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김춘추와 몰래 정을 통한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하자 이를 구출한 사람을 선덕여왕이라고 하고 있다. (문희가 벤 아이가 바로 훗날 문무대왕.) 선덕여왕으로 묘사한 것은 틀린 말이다.
[2]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秦과 晉나라사이의 혼인(정략결혼)을 말하는 것 같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겠음.
此時王子日遊鳳凰臺上臺在其家之後矣一日公先往鳳凰臺故作遊翫之狀見王子之來佯若驚遑欲走之態王子招之前問曰汝以何人敢入禁地耶公俯伏奏曰小臣以金舒玄之子臺在家後不知邸下之駕於此地而冒禁敢來罪難容赦也
그 시기에 왕자는 봉황대 위에서 <자주> 놀았는데 봉황대는 그(유신)의 집 뒤에 있었다. 하루는 공(유신)이 먼저 봉황대로 가서 장난감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자가 이를 보고 오자, 거짓으로 놀라서 도망가는 것처럼 하였다. 왕자가 그를 앞에 불러 놓고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인데 감히 금지된 이곳에 들어왔느냐?” 고 하자 공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고하기를 “소신은 김서현의 아들로서 봉황대가 우리 집 뒤에 있어서 이 곳이 저하(세자의 호칭)의 놀이터인 줄을 몰랐습니다. 금지된 것임에 불구하고 감히 들어온 죄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고 하였다.
王子曰舒玄乃朝廷大臣國家柱石也汝年幾何汝名云何公對曰年今十五名曰庾信也
왕자가 말하기를 “서현은 조정의 대신이며 국가[1]의 기둥이다. 너는 몇 살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되 “나이는 금년 15세이고 이름은 유신이라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1]국가라는 단어를 보고 이 글을 쓴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단어를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것은 최근(일제시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문서를 찾아본 결과 1800년대 초 쯤에 김조순(金祖淳,1765~18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安東, 초명은 洛淳, 자는 士源, 호는 楓皐.)이 기록한 난계선생(박연,1378~1458) 유고의 서문에 國家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니 아마 그 전에도 사용한 것 같다. 참고로 國家라는 단어는 중국의 <주역(周易)·繫辭下第八>에서 ‘왕실과 국토’란 뜻으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 군자는 편안해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되어도 망함을 잊지 않고 다스려져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이로써 몸이 편안하여 ‘국토와 왕실’이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王子曰汝旣是宰相之子亦與我同庚也壓驚賜坐相與歡喜曰何驚惶若是耶勿以疑懼也及日暮乃罷約以來日矣
왕자가 말하되 “너는 이미 그 재상의 아들이고 또한 나와 같은 동갑[1]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壓驚) 바로 앉게 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 왜 그렇게 놀라는가(驚惶). 의심하거나 두려워(疑懼)하지 말아라.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하고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자.” 라고 하였다.
[1]김유신은 595년생, 김춘춘는 602년생으로 되어 있음
翌日王子先到而公不來也王子命召公曰汝與予昨有今日之約而汝忘明朝有意抱琴來之詩何不先來而使予待汝耶公奏曰臣雖與邸下有今日之約先入禁地唐突不敢也
다음날 왕자가 먼저 도착하였으니 공은 오지 않았다. 왕자가 공을 불러 오게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와 같이 어제 오늘 <만나자고> 약속하였는데 너는 잊어 버렸다. 오늘아침 생각이 있어 거문고를 가지고 시를 지어 왔건만 <너는> 어째서 먼저 오지 않고 나로 하여금 너를 기다리게 하였느냐.”고 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은 비록 저하와 같이 오늘 <만나기로> 약속이 있었습니다만 출입이 금지된 곳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당돌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王子曰旣有約何曰唐突乎仍與之着棋爭道之際公故落王子衣纓王子色變良允怡顔慰諭曰昔漢太子與吳王鼻子棋吳王之子爭道不恭漢太子引局提殺之予恨太子之量狹也予何以一衣纓之缺落引咎於汝耶汝勿爲懼也
왕자가 말하기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데 어찌 당돌하다고 말하는가?” 라고 하였다. 또 <공이 왕자와> 같이 바둑을 두어 길을 뺏는 놀이를 할 때 공이 고의로 왕자의 옷고름을 떨어뜨렸다. 왕자는 얼굴색이 변하였으나 짐짓 기뻐하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의 태자와 오왕의 아들(鼻子는 종을 말함)이 바둑을 두다가 오왕의 아들이 길을 뺏는 것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하여 한나라의 태자가 그를 잡아 죽였으나 나는 한나라 태자와 같이 속이 좁지 않다. 내가 어찌 옷고름 하나가 떨어진 것을 가지고 너를 나무라겠느냐. 너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였다.
公伏地奏曰邸下以天地包容之德雖有勿咎之敎臣之不恭於邸下有浮於吳王之子也邸下降此諄諄之敎臣當損首以報也然邸下缺纓披襟以此還宮必駭臣民之膽聆而亦有欠於尊貴之體與臣偕往臣家改縫其纓徐徐還宮何如
공이 땅에 엎드려 아뢰되 “저하는 천지를 포용할 덕을 가지셨습니다. 비록 <저를> 책망하지 않으셨으나 신이 저하에게 불경을 저지른 것은 오왕의 아들 보다 더 큽니다. 저하가 이처럼 타이르며 가르침을 내려 주시니 신은 당연히 목숨을 걸고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나 저하는 옷고름이 떨어진 채로 옷을 입고 환궁하시면 반드시 신하와 백성이 놀랄 것입니다. 또 존귀한 몸에 흠이 있는 것과 같으니 신과 같이 함께 신의 집으로 가셔서 그 옷고름을 꿰매고 천천히 환궁하심이 어떠하옵니까.” 라고 하였다.
王子許之公陪王子偕來其家安予客堂入言于長妹姮娥曰我與東宮遊戲於鳳凰臺偶落王子衣纓其罪當死而王子以好生寬弘之量不以我罪我陪來客堂姐姐急往外軒改縫其纓可也
왕자가 허락하여 공은 왕자를 모시고 함께 그 (유신의) 집으로 가서 객당에 모셔놓고 큰 동생인 항아에게 말하되 “내가 동궁(왕자)과 같이 봉황대에서 놀다가 우연히 왕자의 옷고름을 떨어뜨렸다. 그 죄는 당연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왕자가 좋게 생각하고 넓은 아량으로 내 죄를 묻지 않았으니 나는 그분을 모시고 와서 객당에 계시라고 하였다. 너는 급히 밖에 있는 집(外軒=객당)으로 가서 그 옷고름을 꿰매어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姮娥曰東宮雖貴我亦宰相家處子也以處子而與外客同入一室於禮有失不敢從命也
항아가 말하되 “동궁은 비록 귀하신 분이나 저는 재상집의 딸입니다. 처녀로서 모르는 손님과 한방에 들어가는 것은 예법이 아니니 감히 그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公言于月娥月娥之言亦與姮娥同又言于仙娥仙娥聞其言垂頭良允含羞而言曰處子不欲與外客露面相對我與兩兄亦可云一般而弟以此爲嫌不緝其纓則罪有所歸也我何引嫌於此而貽憂於賢弟耶
공이 월아에게 가니 월아의 말도 역시 항아와 같았다. 또 선아에게 가서 말하니 선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含羞) 말하기를 “처녀가 외부 손님에게 얼굴을 내어놓고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두 언니가 말한 것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생으로서 이것을 싫어하여 그 옷고름을 집어주지 않으면 죄가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제가 어찌 이 일을 싫다고만 하여 착한 동생이라면 근심을 끼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卽具裝束持針綿暫移蓮步出往外堂玉手啓戶歛{示+壬}而坐王子擧目視之窈窕之色依依若雲間新月初湧於天中單姸之態彷佛若含露棠花獻笑於風瑞
즉시 바늘과 옷감 등의 장비를 갖추고 급히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외당으로 가서 고운 손으로 문을 열고 분부를 기다리니 앉아 있던 왕자가 그 모습을 바라보니 요조숙녀이고 구름사이에서 달이 하늘에 튀어 나오는 것 같고, 고운 자태가 이슬을 머금은 해당화가 바람에 미소를 짓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
王子脫其衣投諸仙娥之前仙娥低眉含羞取來改縫置之座前方欲起身王子不勝豪蕩之情急入前執其手仙娥正色而言曰男女有別人侖之始夫婦以禮王政之本而東宮位在儲貳貴體之尊重何如也臣民之膽仰亦如何也我雖鄙賤亦宰相家處子也挾貴無禮何若是耶
왕자가 옷을 벗어 선아 앞에 던져 주니 선아는 눈썹을 낮게 깔고 이를 받아 기워서 자리 앞에 두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왕자가 호탕한 정을 참지 못하여 급히 앞으로 다가가 그(선아의) 손을 잡았다. 선아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남여가 유별한 것이 인륜의 시작이고 부부의 예이며 정치의 기본이니 동궁께옵서는 태자로 계시면서 두 번째로 귀하신 몸으로서 존중을 받으시는데 어찌 이리 하옵니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우러러 보는데 이리 하십니까. 저는 비록 비천하나 재상집의 처녀이옵니다. <동궁의> 신분이 귀하다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挾貴)은 예의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王子緊抱仙娥曰予未有伉儷子未及從人願與予生同室死同穴也
왕자가 선아를 세게 껴안고 말하기를 “나는 아직 배필(伉儷)이 없고 내가 좋아 따르는 사람도 없으니 나와 같이 한집에서 같이 살고, 죽어서는 같은 구덩이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仙娥低聲曰東宮不棄鄙陋欲爲配偶告大殿備六禮迎迎可也而不告不聘敢行溝瀆則東宮有不告之失臣妾有自躍之嫌失不從命也
선아가 낮은 목소리로 “동궁께서는 비속함을 버리지 않고 <저를> 배우자로 삼고자 하신다면 대전(大殿)에 알리시고 육례를 준비하여 <저를> 맞이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알리시지도 않고 예를 갖추어 부르지 않으시면 감히 개천과 수렁(溝瀆)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즉 동궁께서 알리시지도 않고 이런 실수를 하시면 신첩은 이 혐오스러운 곳을 뛰쳐나가버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王子曰子欲使予備禮以迎則其於貪花戀戀之蝶何正亦權權亦正也子旣許我何不聽我耶抱之尤緊無意相捨仙娥拒之不得乃許之紅潮溢面若春{酉+?)之惱人雲髮婆娑若箤柳之帶煙才行雲雨兩情綢繆
왕자가 말하기를 “나는 너를 맞이하기 위한 예식을 준비하도록 하겠다. 꽃을 탐하는 나비가 되어서야 어찌 되겠는가. 정의가 권력이고 권력이 곳 정의이다. 나는 이미 결정하였는데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가.” 하고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떠밀던 선아는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이에 허락하였다. <선아는> 봄에 술 먹은 사람처럼 얼굴에 홍조가 더해지고 헝클어진 머리가 가냘프게 떠는 것이 수레의 버들가지가 연기처럼 흔들리는 것 같으며 운우의 정을 나누는 것이 빈틈없고 꼼꼼하였다.
自其後乘間往來仍有娠而王子不敢告於父王公亦不敢亂言於外人矣
이 일이 있은 후 서로 간에 왕래가 잦아지더니 이윽고 임신을 하게 되자 왕자는 감히 부왕[1]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공도 역시 감히 바깥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1]김춘추의 아버지는 왕이 아님
一日王子言于公曰某日大駕當幸於鳳凰臺也公預積柴草於鳳凰臺相對高阜上竢王之登臺公放火於積柴風烈火猛煙燄衝天王大驚使宦者問其故於公公伏於路下宦者問其放火之由公曰吾妹作死罪吾欲燒殺積柴放火也
하루는 왕자가 공에게 어느 날 큰 가마를 타고 봉황대에 갈 것이라고 하자 공은 잡목과 마른 풀을 봉황대 부근의 상대적으로 높은 언덕위에 준비해 쌓아놓고 왕이 봉황대에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왕이 오자> 쌓아 둔 잡목에 불을 붙였다. 바람을 타고 불은 맹렬하게 연기를 뿜고 불꽃이 하늘을 뒤덮자 왕이 크게 놀라 신하로 하여금 공에게 무슨 일인가 물어보게 하였다. 공이 길 위에 엎드리고 신하가 그 방화의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되 제 동생이 죽을죄를 지어 저는 그를 태워 죽이려고 쌓아둔 잡목에 불을 붙였다고 했다.
宦者曰汝妹有何罪犯而必欲燒殺耶公曰此非亂言之事也宦者以公放火於柴欲殺其妹而問其燒殺之由則答以此非亂害之事終不直告矣
신하가 말하되 네 동생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반드시 태워 죽이려고 하느냐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했다. 신하는 공이 잡목에 불을 붙여 그 여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불에 태워 죽이려는 이유를 묻자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라고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왕에게> 전했다.
王怒曰吾有問而不告其由於傳敎之下又欲燒殺其妹其罪不輕急發金吾郞掌來鞠問也金吾郞承命馳往掌致公伏於臺下王使承旨傳問曰汝妹有何罪汝欲燒殺於烈火之中耶無隱直告無陷大辟也
왕이 노하여 “내가 물었는데 내 명령을 따라서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또 그 여동생을 불살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급히 금오랑[1]을 시켜 잡아드려 극문하게 하라.” 하였다. 금오랑이 명령을 받들어 급히 가서 잡아오자 공이 봉황대 아래에 엎드렸다. 왕이 승지를 시켜 전하여 물어 말하기를 너 여동생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너는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 죽이려고 했느냐. 숨지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라. 거짓을 말하는 것은 큰 죄이다. 라고 하였다.
[1]金吾郞; 조선 시대에, 의금부에 속한 도사(都事)
公俯伏奏曰殿下設緘之下何敢毫絲欺隱乎小臣有妹其名仙娥今年二月之望臣陪東宮邸下上鳳凰臺遊戱之際邸下衣纓偶落於小臣之手雖非臣故犯其罪當死而東宮邸下以天地好生大德不以爲罪然而缺纓披{木+築?}有欠於尊貴之體故臣陪往邸下安于臣家使臣小妹改緝其纓矣此時東宮邸下不禁春情有犯於小妹仍有娠己三朔臣忘其同氣之情欲免門戶之辱果欲燒殺也
공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저를 붙잡아 두셨는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이고 숨기겠습니까. 소신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 이름은 선아라고 하옵니다. 금년 2월에 신이 동궁저하를 모시고 봉황대에 올라가 놀 때에 소신의 손 때문에 저하의 옷고름이 우연히 떨어졌습니다. 비록 신이 고의로 범한 것은 아니오나 그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오나 동궁저하께서 하늘과 땅과 같은 생명을 귀중이 여기는 큰 덕으로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떨어진 옷고름은 존귀하신 몸에 흠이 되어 신이 저하를 모시고 신의 집으로 가서 신의 막내동생으로 하여금 그 옷고름을 고쳐서 집게 하였습니다. 이때 동궁저하 께옵서 춘정을 못이겨 저의 막내 여동생을 범하여 막내 여동생이 임신하여 3개월이 되었습니다. 신은 형제자매의 정을 끝내버리고 가문의 치욕을 면하고자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此時東宮亦在王侍側王顧問王子曰汝果有此事耶王子歛容以奏曰不覺無禮果有是事也王黙然良允曰事不妥當而旣有是事又有其娠腹中之物是予血屬也安忍殺之耶汝勿殺汝妹陪以來也
이때 동궁 역시 왕의 옆에 있었으니 왕이 왕자에게 돌아보며 묻기를 “네가 과연 이 일을 저질렀느냐.” 하자 왕자가 용서를 빌면서 아뢰어 말하기를 “생각없이 무례를 저질러 이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잠잠히 말이 없다가(黙然) 말하기를 “이 일은 타당하지 않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또 임신을 하였으니 뱃속의 그것은 나의 혈육이다. 죽이고 싶은 것은 참아라. 너(유신)는 네 동생을 죽이지 말고 나에게 데리고 오라.” 고 하였다.
公受命與宦者偕往其家使仙娥治容具裝陪到于臺下王命之使直上座前仙娥到座前行四拜叩頭王賜坐視之眉如細柳之含綠眼如晨星之流光關睢之德樛木之行永諸今古難得其雙主不覺露齒曰予欲得汝此嬪而疑此世上無此美人矣近在輦轂之下予未聞焉恨予耳目之不廣也旣作予嬪不可仍留閭舍也急取來儀伏陪入宮中可也
공은 명령을 받들어 신하와 같이 그 집으로 가서 선아에게 치장을 시키고 준비하여 <선아를> 데리고 봉황대 아래로 갔다. 왕은 명령하여 <선아를> 윗자리에 앉게 하고 <신하들을> 선아의 앞에 안게 하여 앞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4번 절하게 했다. 왕이 <선아를> 바라보니 눈썹은 가는 버들가지 같고 초록빛을 머금은 눈은 새벽 별에서 비치는 빛과 같아 그 덕을 우러러 불 수 있었다. 묶어 놓은 나무가 영원히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 두 주인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왕은 느닷없이 이빨은 드러내고 기뻐서 말하기를 “나는 너를 얻었으니 (세자)빈으로 맞고 싶구나. 아마도 이 세상에 이 같은 미인은 없으리라. 내 수레에 가까이 오너라. 나는 아직 <세자와 너 사이의 일을> 듣지 못했으니 내 눈과 귀가 넓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이미 나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계속 너의 집에 머무르지 말고 급히 예를 갖추고 입궁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宦者承命飛鞚到宮中以紅粉宮女侍衛前後乘玉轎呼警畢由大道而行一城已傾矣
신하가 명들을 받들어 말에 재갈을 물리고 날듯이 궁중에 도착하여 치장을 한 궁녀들에게 앞 위에서 시중들게 하여 <선아를> 옥가마에 태우고 ‘물렀거라.’ 하고 외치며(警蹕) 큰 길을 지나 성에 도착하여 내려놓았다.
中殿見之不勝喜悅金氏行四拜見於中殿中殿賜之坐曰吾有一子未得佳耦今得汝爲嬪喜幸何極耶
중전[1]은 이를 보고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김씨(선아)는 네 번 절하고 중전을 보니 중전이 앉게 하고 말하기를 “나에게는 한 아들이 있는데[2] 아직 좋은 배필(佳偶)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이번에 너를 맞아 빈(왕의 며느리)으로 삼으니 기쁘고 다행한 것이 어찌 지극하지 않겠느냐.” 고 했다.
[1] 진평왕의 왕비로서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2]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다.
俄有先報曰大殿與世子還宮也金氏奏於中殿曰大駕將入敢請少避中殿許之尤喜其知禮矣
이때 갑자기 임금(大殿)이 세자와 같이 환궁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김씨가 중전에게 아뢰기를 임금께서 타신 가마(大駕)가 좀 있으면 오니 감히 조금 피해 있겠다고 청을 드리자 중전이 허락하며 예의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王入大內言于中殿曰佳婦得送於心何若中殿曰得送天上仙娥不勝感幸大張風樂設宴以賀引見公父子賞賜浩多父子恩寵榮貴擧國無二至十朔産得男子王及后喜得元孫尤重待金氏矣
왕이 대전(大內=大殿)으로 들어와 중전에게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서 보내주었는데 마음이 어떠한가.” 하자 중전이 말하기를 “보내 주신 것이 천상의 선녀와 같이 예뻐서 기쁜 감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크게 풍악을 울리고 잔치를 베풀어 공을 불러 축하하고 부자에게는 크고 많이 상을 내려야겠습니다. 부자의 은총으로 영화와 부귀가 나라를 일으켜 세우니 둘도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열 달이 지나자 남자아이를 얻으니 왕과 왕비는 원손을 얻은 것을 기뻐하고 김씨를 더욱 귀중히 대하였다.
公旣結宮O?欲討高句麗而未得匕劒遂日放糞於城中滿千泉井一日黑雲蔽空天地震動公出立庭下仰觀天門有一小僧兩手各持一劍而降漸近於公
공이 이제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고 고구려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검을 얻지 못해 며칠을 성중에서 아무데나 똥을 누었더니 1000개의 우물물에 가득 찼다. 하루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가 진동하여 밖으로 나가 정원아래 서서 하늘을 쳐다보니 한 사람의 작은 중이 양손에 검을 하나씩 들고 내려와 점점 공에게 가까이 갔다.
公大吼一聲踊躍騰空掌下其僧鬪鬨半餉奪其兩劒其僧反爲哀乞於公曰以君放糞泉井之罪上帝命我殺君而兩劒見奪於君請君返我兩劒則我當舍君還去也
공이 크게 노하여 소리를 치면서 공중으로 뛰어 올라 그 중과 결투를 잠시[1] 벌여 중의 양손의 검을 빼앗았다. 그 중은 애걸은 계속하며 공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마음대로 우물물에 똥을 눈 죄로 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당신을 죽이라고 했다. 양 검을 당신에게 빼앗겼으니 당신에게 청하건대 양 검을 돌려 달라. 그러면 나는 당연히 당신을 놔두고 돌아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1]半餉; 식사시간 반 정도의 짧은 시간
公曰雖云上帝之命而汝欲殺我故我奪汝劒我何給汝耶僧曰以我不殺君雖入死地當無怨尤於君敢請君還我兩劍也
공이 말하기를 “비록 상제의 명령이라 말하지만 너는 나를 죽이고자 했으니 나는 너의 검을 빼앗았는데 어떻게 <돌려>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중이 “너를 죽이지 않는다. 비록 죽을 곳에 들어 왔으나 당연히 당신에게 더 이상의 원한은 없다. 감히 당신에게 청하노니 나의 양검을 돌려 달라.” 고 하였다.
公給其一劒而奪其一問其名僧曰龍泉劒也以此指物物自斃矣僧持一劒還歸後公以其劒試指鴻鴈一條虹光直射其物物果自斃翩翩下來矣
공은 한 개의 검을 <돌려> 주고 하나는 자기가 차지했다. 그 검의 이름을 묻자 중이 “용천검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사물을 가리키면 그 사물이 스스로 베어서 쓰러진다.” 고 했다. 중이 한 개의 검만 가지고 돌아간 후 공이 그 검을 시험하기 위해서 기러기를 가리키자 한줄기의 무지개 빛이 그것(기러기)에 명중하여 그것(기러기)가 과연 스스로 베어져서 나부끼며 아래로 떨어졌다.
公必欲滅高句麗入中岳山石窟中作誓文齋戒祝於上帝第七日有一老人來授一秘書贈一金甲曰甲是白花甲也矢石不入觸之自粉書是秘訣也神謀鬼智都在此中也
공은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중악산에 들어가 석굴 속에서 맹세문을 써서 목용재계하고 상제에게 빌었다. 제 7일째 한사람의 노인이 찾아와 한권의 비서[1]를 주고 한 벌의 쇠로 만든 갑옷을 주었다. 여기서 갑이라는 것은 백화갑[2]이고 화살과 돌에 맞아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화살과 돌이> 스스로 산산조각이 나는 옷이다. 책은 비결서이다. 신의 술책과 귀신의 지혜가 그 속에 담겨 있다.
[1] 여러 가지 비결들이 적힌 책
[2] 직역은 흰 꽃이나 아나도 백화라는 조개가 있으니 이것으로 만든 갑옷인 것 같음.
此時新羅以公之父舒玄爲將軍討高麗狼臂城公從其父爲中幢主矣
이때 신라에서는 공의 부친인 서현이 장군이 되어 고려[1]의 낭비성[2]을 토벌할 때, 공이 그의 부친을 따라 중당주가 되었다.
[1]高麗; 원래 옛날에는 고구려도 고려라 하였으나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주몽이 세운 고려(또는 구려)를 고구려라 칭함.
[2]狼臂城; 삼국사기 권41의 김유신편에서 건복 46년(진평왕21년, 629년)편 참조
麗兵强健羅卒殘弱而主客旣殊勞佚且異累戰不利麗人乘勝長驅羅卒大敗公告父親曰兒子平生以忠孝自許今羅卒之不利兒子不可不試勇乃着白花甲揮龍泉劒鞭馬直入麗陣斬其將提其首級回本陣羅卒見公之勇銳氣自倍呼聲動地無不一當百麗人大敗遂陷狼臂而還
고구려 병사는 강건하고 신라의 병졸들은 무너지고 허약하여 지휘자와 병사가 이미 <많이 죽고> 숨어 버려 싸움이 거듭될수록 불리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신라의 병졸들은 크게 패하여 공이 부친에게 고하기를 “소자는 평생을 충성과 효도로 살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지금 신라의 병졸들이 불리하니 소자가 할 수 없이 용맹을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하고는 백화갑을 입고 용천검을 휘두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직접 고구려의 진영으로 들어가 그 장수의 목을 베어 구 머리를 들고 본진에 돌렸다. 신라의 병졸들이 공의 용맹을 보고 용기가 배가되어 함성을 질러 땅이 진동하니 일당백이 아니 될 수 없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크게 패하여 낭비성의 함락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公得其秘訣之後智略弟畜孫吳勇力僕命賁育上通天文下達地理用兵吉凶山川險夷觸頭無礙如見諸掌矣
공이 얻은 그 비결은 그 후 지략있는 동생을 기르고 후손들을 용기와 힘과 명령에 따르는 것과 크게 되도록 가르쳐, 위로는 천문과 아래로는 지리에 통달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 법과 길흉, 산천, 위험한 오랑캐의 우두머리를
다루는 법 등등이 거리낌 없이 손바닥 보듯 하였다.
其後三年王薨東宮卽位乃以金氏爲中殿以金氏所生之子立爲世子以公爲角干
그 후 3년이 지나 왕(진평왕)이 죽고 동궁이 즉위하자 이에 김씨(선아)는 중전이 되었다.[1] 김씨 소생의 아들[2]로서 세자로 세우고 공은 각간이 되었다.
[1] 26대 진평왕(진흥왕의 손자) 다음에는 그의 큰 딸인 선덕이 27대로서 여왕으로 등극하고 그 다음이 28대인 진덕여왕(진평왕의 조카)이고 이 이후에 김춘추가 29대로 왕이 되는데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진흥왕의 둘째 아들)의 손자이고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선덕의 동생)이다.
김춘추가 즉위한 연도는 654년임
[2] 법민, 후에 문무왕
角干以高句麗遠在一隅山川遙遠道路險惡猝難討滅一日公奏於王曰高句麗王弑其君自立侵虐百姓多殺不辜弔其民討其罪不可已者而以我孤軍遠征强國主客之勢不同飢飽之形且殊奏於唐朝乞兵討之則彼有分兵之機而我有乘虛之得勇而不能施其勇智而不能設其智此爲我萬全之策也
각간은 고구려에서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는 산천이 요원하고 도로가 험악한 곳을 급히 쳐서 토벌하고 멸하였다. 하루는 공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고구려왕은 그의 군주를 죽이고[1] 스스로 왕위에 올라 포악하여 백성을 많이 죽였으나 죄를 씻지도 않고 그 백성을 위로하지도 않으니 그 죄를 벌하여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불가능 하였습니다. 저로 하여금 몇 사람의 병력(孤軍)만 주어 원정하게 해 주십시오. 저 강국은 주인과 백성의 형편이 같지 않아 한쪽은 굶주리고 한쪽은 배터지게 먹는 것 같습니다. 또 결심하여 당나라의 조정에 부탁하여 병사를 지원받아 그(당의 군사)들과 싸움을 나누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병사가 모자라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용기는 있으나 그 용기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지혜는 있으나 그 지혜를 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당의 원군을 받는 것이> 만전지책입니다.” 라고 하였다.
[1]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사건을 말함. 이는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데 역사적 연도의 순서가 틀리게 서술되어 있음.
王曰以何爲文以何爲貢乎公曰新羅恪守臣職已至累世而今高句麗與百濟連兵阻新羅入貢之路乞兵救授爲辭則必許之也聞唐天子以出世英主放出宮女多至累千云以二美女入貢則無損我國而還送二女也
왕이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 가.” 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를 공경하여 신하된 도리를 지켜온 지 여러 세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하여 그의 병사들이 신라가 당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가는 길을 막고 있으니 병사를 빌려서 도와 주십사하고 말하면 반드시 허락할 것입니다. 들으니 당의 천자[1]는 세상에서 뛰어나고 걸출한 군주여서 쫓아내버린 궁녀가 수천에 이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미녀를 뽑아 바치면 우리나라로서는 아무런 잃는 것 없이 두 여인을 다시 돌아옵니다.” 라고 하였다.
[1]당태종 李世民을 말함
王然而許之公卽下令城中選得二美女一則十七歲一則十八歲而玉容花貌可謂國色命使入唐唐帝見其奏曰高句麗蓋蘇文弑其主侵虐百姓又不奉詔不可不討明年朕當自將討之也
왕이 들으니 그럴 듯 하여 허락하니 공이 즉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두 사람의 미녀를 뽑으니 한사람은 17세이고 한사람은 18세이니 옥과 같은 몸가짐과 꽃과 같은 얼굴은 가히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다. 사신에게 명하여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여 당나라 황제가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1] 고구려 연개소문이 그 군주를 죽이고 백성에게 참혹한 짓을 하고 또 이를 <나에게> 아뢰지도 않으니 할 수 없이 토벌해야 하겠다. 내년에 짐이 응당 직접 장수가 되어 토벌할 것이다.“ 라고 했다.
[1]윗 글에서 奏라는 글자는 삭제해야 좋을 것 같음.
封德彝等文官皆諫止李世勣等武將皆勸討帝御五鳳臺招其女賜之坐曰美女也二女不勝首丘之懷淚自勇出帝見而憐之曰曾自林邑貢二鸚鵡鵡鸚鳥也而不堪其去國之悲哀辭呼泣朕憐而還之況於人乎
봉덕이(?)등 문관들은 모두 출병하지 말 것을 간하고, 이세적 등 무장들은 모두 토벌할 것을 찬성하였다. 황제가 오봉대에 그 여자를 앉게 하고 미녀이구나 하였다. 두 여자들은 참지 못하여 머리를 맞대고 마음으로부터 눈물이 눈으로 흘러나오자 황제가 이를 보고 가엽게 여겨 말하기를 “일찍이 계림(신라)에서 선물로 보내온 두 마리의 앵무새도 나라를 떠나 온 것을 견디지 못하여 슬퍼하고 울어서, 짐이 가엽게 여겨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물며 사람은 더하지 않겠느냐.” 고 하였다.
使還還送二女以明年自將討高句麗救報於新羅公卽發精兵二十萬遂日鍊習甲辰公聞唐帝親統大兵來攻遼州卽發兵渡臨津直屠平壤語其陣則入陣言其軍則豺虎堂堂整整鳥不敢飛
사신들이 돌아 갈 때 두 명의 여자도 돌려보내면서 내년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토벌하여 신라를 도와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공은 즉시 정병 20만을 일으켜서 여러 날 동안 훈련을 시켰다. 갑진(644)년[1] 공은 당의 황제가 친히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요주(요동)를 공격하니 즉시 병사를 출발시켜 임진<강>을 건너 직접 평양<성>을 빼앗으라는 말을 들었다. 진중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이 말을 하니 승냥이와 호랑이 같이 당당하게 진격하여 새도 감히 날지 못하였다.
[1]정확하게는 645년 을사년임.
高句麗王發兵迎戰不得抵當公驅大軍渡大同江鼓譟以進高句麗王果(삭제?)其城只以三千兵登後山公以大軍三包圍之水不能泄
고구려왕이 군사를 출발시켜 전쟁에 맞서니 부득이 맞서서 겨루었다(抵當).공은 대군을 재촉하여 대동강을 건너서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고구려왕에게 진격하여 그 성에는 단지 3000명의 병사만 올려 보내고 뒷산에서 공은 대군으로 하여금 3중으로 둘러싸게 하여 물조차 샐 수 없도록 하였다.
高句麗王謂其左右曰乙酉秋南言靑龍之歲外有南北問罪之師內有繫頸含珠之厄靑龍乃甲辰而唐師自北而來羅卒自南而至其南北問罪之言符合而勢已窮矣食已盡矣逆天命我何爲哉
고구려왕이 좌우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을유(565)년[1]에 추남이 말하기를 청룡지세에 밖에서는 남북간에 죄를 묻는 사자가 올 것이고 안으로는 목을 매달고 구슬을 입에 무는 액운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청룡은 갑진년이니 당나라의 사자가 북에서 오고 신라의 군졸이 남쪽에서 오니 그 남북에서 죄를 묻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이 기세를 견디기가 궁핍하구나. 식량도 다 떨어졌다. 하늘의 명을 거역하고 내가 왜 그랬든가.” 하였다.
[1] 서두부분에서 추남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말기라고 하였는데 565년은 너무 이른 시기임
乃與后妃世子縳其兩手於後以白絲繫頸含珠奉章伏於路左豎<=>白旗以降而唐軍方住安市城與蓋蘇文戰矣
이에 왕후와 비, 세자와 같이 양 손을 뒤로 묶이고, 흰 끈을 목을 매고 구슬을 입에 물고는, 글(항복문서?)을 받들고 길에 엎드려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이에 당나라 군사가 안시성에 들어가니 연개소문이 두려워서 떨었다.[1]
[1] 당 태종은 안시성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한쪽 눈까지 잃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과 위의 글의 내용이 서로 다름
公跪王於庭下責之曰王者受天命抱百揆代理其民而侵虐百姓多殺無辜上下離心朝野怨獄?如斯而其可享國乎高句麗王后聽我言身爲國母尊貴無比財寶充溢於庫服用贍足於前有何不滿而窓行穢德濁亂宮臺?受賂擅政無所顧忌惡貫天地罪通神人滅絶宗祀皆后之作也傾鴨江之水而不能洗后之惡盡南山之竹而不能記后之罪也
공이 왕을 뜰아래에 꿇어앉히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왕이라는 것은 천명을 받들어 백성을 끌어안고 헤아리며 그 백성을 대리하는 것이거늘, 잔학하게 백성을 많이 죽이고 무고하게 상하를 이간시켰으며 조야가 원망하도록 옥에 가둔 게 이와 같으니, 나라를 보존하겠는가. 그리고 고구려 왕후는 내말을 들어라. 네 몸이 국모가 되어 가지고 존귀해야 하거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재물과 보화를 가득 차서 넘치도록(充溢) 창고에 채우고 입고 사용하는 것이 그 전보다도 넉넉하고 풍족했으니 무슨 불만이 있는가? 창문 <안>에는 좋지 않은 행실이 횡행하고(穢德) 궁에서는 뇌물을 받아 멋대로 정치를 하였으며 반성하는 바도 없고 증오와 악행이 천지를 꿰뚫어 그 죄가 천신에 까지 알려져 종사를 멸절하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황후가 만든 것이다. 압록강의 물을 뒤집어 쓰도 왕후의 죄를 다 씻을 수 없을 것이다. 남산의 대나무를 다 쓰더라도 왕후의 죄를 다 기록[1]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 종이가 나오기 전 옛날에는 죽간(竹簡)이라고 하여 대나무에 기록하였음.
乃裁其屍回示軍中以檻車囚其王送於遼東唐陣帝以手?勑暘公曰將軍以孤軍滅此累世屈强之國俘送其王將軍之威可震華庚?將軍之功可以銘鼎也
이에 그 시체를 토막내어 군사들에게 돌려서 보이고 그 왕은 함거[1]에 가두어 요동으로 보내니, 당의 진영에 있던 황제는 손으로 공을 위로하고 말하기를 “장군이 외따로 누세에 걸쳐서 아주 강국이었던 이(고구려)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을 사로잡아서 보내주니 장군의 위용은 가히 천지에 떨치고 빛납니다. 장군의 공은 존귀한 곳에 새겨질 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1]檻車; 죄인을 가두어 싣고 가던 수레
以鴨綠爲界西屬中原東給新羅公初以二十萬兵出及還無一人損折新羅王率百官出郊外十里受馘迎之山呼之聲動天地矣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중원에 소속시키고 동쪽은 신라에 주어졌다. 공이 처음에 20만 병력을 출정시켜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없이 귀환하여 왕이 백관을 이끌고 교외 10리까지 마중나와 <노획한> 적의 목과 귀(馘)를 받고 만세를 부르니(山呼) 그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王割東海三郡爲公食邑封爲東海君進爵角干領軍國事角干年才十八而秋南之死已二十年滅其國戮其后果付秋南臨刑時告天之言其報之速如影之形如響之應福善禍滛<=濟>此之謂也
왕이 동해의 세 개의 군을 떼어서 공에게 식읍으로 주고 동해군이라 봉하였으며 작위를 각간으로 올리고 군대와 나랏일을 다스리게 했다. 각간의 나이가 18세가 되자(612년)[1] 추남이 죽은 지 20년이 되어[2] 그 나라는 멸망하고[3] 그 왕후는 죽임을 당했으니 과연 추남이 형벌을 당할 때 하늘에 고한 말대로 되었다. 그 보복이 빨리 온 것이 그림자의 실제형상과 같고, 메아리가 응답하는 것 같으며 복과 선과 화가 다 해결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함이다.
[1] 연도가 뒤섞이고 있음
[2] 따라서 추남은 유신의 탄생 2년전, 즉 593년에 죽은 것으로 됨
[3] 고구려의 멸망은 668년
人之招怨之人果不懼哉角干拓地千里坐享太平其後唐天子賜手勑曰今自天朝詔發諸道兵使蘇定方討百濟新羅亦命將出兵助討百濟也
원망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두려워 할 줄 모른다. 각각은 땅을 천리나 개척하여 거주하며 태평을 누렸다. 그 후 당의 천자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이번에 천자의 조정에서 알리니 여러 도의 병사를 출발시켜 소정방으로 하여금 백제를 토벌하게 하였으니 신라 역시 장군에게 명하여 출병시켜 백제를 정벌하는데 도와라.” 고 하였다.
王又以角干爲元師領精兵十萬助唐討百濟角干引兵踰淸風嶺直指百濟所向無前幾至百濟國都有一員大將欄住前路公見其旗大書將軍黃駿也
왕은 또 각간을 원사로 삼아 정병 10만을 거느리게 하여 당나라를 도와 백제를 정벌하라 하였다. 각간은 병사를 이끌고 청풍령을 넘어서 백제국을 직접 가리키며 갔다. 백제국의 수도에 이를 때 까지 위험스러운 일은 없었다. 수도에는 한사람의 대장이 있고 그가 있는 곳에 다다르기 전에 길에서 공은 깃발을 보았는데 그 기에는 장군 황준이라고 크게 씌어져 있었다.
角干與黃駿對陣黃駿以萬夫不當之勇使開山大斧其勇不可當也羅兵多被損折不能退却角干曰吾用武彼不可眠乃舞劒策馬馳入百濟陣中黃駿立在門旗之下角干不有問答大作一咸<喊>聲如巨雷黃駿未及措手揮劒斬之百濟軍大潰
각간은 황준과 대치하여 진을 쳤다. 황준은 만 명의 힘으로도 그의 용맹을 당하지 못하고 산을 쪼갤 수 있는 큰 도끼로도 그의 용맹을 당할 수 없었다. 신라의 병사는 많은 피해와 사상자를 내고 이기지 못하여 퇴각하였다. 각간이 말하기를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로는 그를 잠들게 할 수 없다.” 하며 검을 휘두르며 말을 급히 몰아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황준이 문에 있는 깃발아래에 서 있었고, 말도 주고받지 않고 크게 함성을 지르니 큰 천둥소리와 같았다. 황준이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검을 휘둘러 목을 베니 백제군은 크게 무너졌다.
角干催督前後鼓譟以進天兵陣於江邊角干怪之問其結營不渡之由唐兵曰到此成陣今已三日而不得渡江者有一白龍在江中如有越涉者輒覆其舟故不敢濟
각간이 <당나라의> 도독에게 재촉하니 앞뒤에서 시끄럽게 북을 치며 강변에 있는 천자 군사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각간이 괴상하게 여겨 당나라의 병영이 왜 강을 건너지 않았는지 연유를 물어보니 당나라 병사가 말하기를 “이곳에 도착해서 진영을 만든 지 오늘로 3일이 되었지만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흰 용이 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앞서서 건너던 자는 갑자기 그 배가 뒤집혔으니 감히 건너지 못한다.” 고 하였다.
角干引兵到江邊與唐兵連營安歆選得軍中冶匠設台爐於江邊收聚軍中鐵物打鑄大鈞鉤又聚軍兵所持麻(;가는실)絞作大索以其索縳其鉤得一白馬右手牽其馬左手曳其索往于江上兩國之兵莫知其用或怪之或疑之
각간이 병사를 이끌고 강변에 도착하여 당의 병사들과 같이 진영을 만들고 기쁘게 음식을 먹은 후, 군사들 중에서 야금장이[1]를 뽑아 강변에 화로를 설치하고 군졸들에게서 철물을 모아 큰 갈고리를 만들고, 또 군병들이 가지고 있는 삼실을 꼬아서 큰 밧줄을 만들어 그 밧줄에 갈고리를 달아 묶었다. 한 마리의 백마를 구해서 오른손으로 그 말을 끌고 왼손으로 그 밧줄을 잡아 당겨 강 위로 가니 양국의 군사는 그 용도를 알지 못하고 혹 괴상하게 여기거나 혹 의아해 했다.
[1]冶匠; 쇠를 녹여 물건을 만드는 사람
角干以其鐵鉤貫于馬背投之江中俄有白龍呑其馬浮於江面大可六圍長幾五丈矣
각간은 그 쇠로 만든 갈고리를 말의 등에 꿰어서 강 속으로 던졌더니 갑자기 흰 용이 그 말을 삼키고 강물위로 떠오르니 크기가 가히 둘레가 6장[1]정도이고 길이가 5장정도 되었다.
[1]丈; 길이의 단위로서 1장은 3.3m
角干引出其索龍亦從索而來角干今萬軍曳出其龍以劒斫斷仍今軍灸而犒之聚船渡江
각간이 그 밧줄을 잡아당기니 용도 밧줄에 끌려 왔다. 각간이 이제 많은 군사와 그 용을 끌어내어 칼로 쳐서 자르니 이에 군사들이 구워서 맛있는 음식으로 먹고 배를 모아 강을 건넜다.
此時百濟王自語於心曰龍在江中如有他軍欲渡者覆其船渰其軍兩國之兵雖至百萬焉能飛渡耶率若千軍百官宮女登江上高峯遙聞喧聲笑謂侍從曰唐師羅卒欲濟吾江者爲吾龍所渰喧聲動地也
이때 백제왕이 스스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강 속에 있는 용이 강을 건너고자 하는 적군이 있으면 그 배를 뒤집어 버리고 그 군사에게 비구름을 일으킨다. 양국의 군사가 비록 백만에 이른다고 해도 날 수 있어야 강을 건널 수 있겠지.” 하고 1000명의 군사와 백관과 궁녀를 거느리고 강 위로 올라가 높은 봉우리에서, 멀리서 두려워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며 시종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사자와 신라의 병졸이 우리 강을 건너고자 하지만 우리 용이 비구름을 일으키니 두려워하는 소리가 땅을 울리는구나.” 하였다.
兩國大軍不意卒至百濟王大驚懼計無所施乃降宮女千餘人以綠衣紅裳乎投江中而死怳若千片紅葩散落於春風仍名其巖曰落花巖名其江曰白馬江名其地曰釣龍臺
양국의 대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이르니 백제왕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에 항복하였다. 궁녀 1000여명이 푸른 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강으로 뛰어 들어 죽어 놀라서 바라보니(怳) 거의 천개의 붉은 꽃(葩)이 봄바람에 흩어져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에 그 바위를 이름 붙이기를 낙화암이라 하고 그 강은 이름 붙이기를 백마강이라 하고 그 곳을 조룡대라 하였다.
角干露布以聞於朝立石頌功於江邊與唐將蘇定方連兵南下循百濟城之末下者至扶風唐將所住處後人建寺名曰來蘇角干住軍處至今謂之禹金巖蓋其時角干與禹姓將軍同來故也
각간에게서 드러나고 펼친 것<공로>이 조정에 까지 알려져 강변에 돌을 세우고 공로를 칭송하였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성의 마지막까지 함락하였다. 부풍(현재 부안?)에 이르러 당 장군이 거쳐한 곳에 후세 사람들이 절을 짓고 이름 붙이기를 ‘래소사[1]’라 하였다. 각각의 군사가 머무른 곳은 지금 이르기를 ‘우금암’ 이라 숭상한다. 그때 각간이 우씨 성의 장군과 같이 왔기 때문이다.
[1]來蘇寺; 현재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절
[2]禹金巖; 현재 부안군 개암사 뒤편에 있는 바위 일명 울금바위라고도 함
盡下餘城奏凱還師唐以百濟之地盡給新羅角干還朝王率百官遠出郊外迎之曰東方分爲三國者千有餘載而至寡人今始統一此莫非角干之功也角干奏曰聖德之攸曁將士之用力也臣何功焉
남은 성을 다 함락하고 모여서 소리치며 돌아오니 당나라의 사자가 백제의 땅을 전부 신라에 주었다. 각간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왕은 백관을 인솔하여 멀리 교외까지 나와 환영하면서 말하기를 “동방이 3국으로 나뉘어 진 것이 천여 년이 되었으나 과인에 이른 지금 통일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각간의 공이 아니겠는가.” 하니 각간이 아뢰기를 “성스러운 덕으로 다스린 것과 모든 장군과 병사가 함께 힘썼기 때문이니 어찌 신의 공이라 하옵니까.” 하였다.
王設大宴三日受賀餉師加割東海五城爲角干萊邑封爲太大舒發翰純忠壯烈公中殿引見角干慰之曰我男妹以微門孤蹤何意榮貴之到此耶
왕이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고 축하를 받았으며 사자에게 음식을 내리고, 또 동해의 5개의 성을 떼어서 각간에게 식읍으로 주었으며 태대서발한순충장열공으로 봉하였다. 중전이 각간을 불러다 놓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우리 남매는 보잘 것 없는 가문으로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외로웠으나(孤蹤) 뜻하지 않게 부귀영화가 이제 찾아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此時百濟將黃駿子昌欲報其君父之讐而以隻身無奈學習劒術四年乃成曲盡其妙神鬼莫測一日黃昌告其母親曰新羅王遣其將庾信滅我國殺我父吾與庾信不共戴天吾今欲東入新羅斬庾信殺其王報我君父之讐而報之當死未報亦死一往之後無望生還惟望母親善善保攝無至傷懷焉
이때 백제 장군 황준의 아들인 황창이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홀몸(隻身)으로 지닌 것도 없었으나(無奈) 4년 동안 검술을 익혀, 사악함을 완성하여 그 묘기가 신과 귀신에 버금갔다. 하루는 황창이 그의 모친에게 여쭙기를 “신라왕이 그의 장군 유신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저는 유신과 같이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동쪽으로 신라에 들어가 유신을 베고 그 왕을 죽여 부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보복을 한다 해도 죽을 것이고 보복을 하지 못해도 역시 죽을 것이니 한번 가고난 후 살아서 돌아 올 것을 바라지 마시고 바라옵건데 모친께서는 소중히 <몸을> 보존하고 지극한 마음의 상처나 생각을 버리옵소서.” 라고 하였다.
其母曰汝父親已歿唯汝一身在吾依汝爲命汝今作一去不復回之行我心冏?極然我亦聞之忠臣不顧其家孝子不顧其身汝以一身兼爲忠孝吾何强而挽耶使汝不得行爲人臣盡其忠爲人子盡其孝乎汝自任焉我有一女長成後如可依之恃渠爲生如不如意我亦從汝父親於地下也
그 모친이 말하기를 “너의 아비는 이미 죽었고 오로지 너 한 몸만이 내게 있어 너를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너는 지금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나 내 마음은 아주 밝구나. 나 역시 충신은 그 집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효자는 그 몸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들었으니 너는 한 몸으로서 충과 효를 겸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강하게 만류하겠느냐. 너로 하여금 부득이 신하로서 그 충성을 다하고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 효도를 다하기로 너는 자임했다. 나에게 있는 한명의 딸이 자라면 믿고 의지할 수 있어 살아 갈 것이다 뜻 한대로 되지 않으면 나 역시 너를 따라서 지하에 계신 아비에게로 갈 것이니라.” 하였다.
黃昌痛哭而別入於新羅舞釗行乞於市觀者如堵咸稱其妙
황창이 통곡하고 헤어져 신라에 들어와 칼춤을 추며 시장에서 구걸하였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담처럼 빙 둘러서서 모두들 그 묘기를 칭찬하였다.
一日羅王會百官設宴於鳳凰臺上王言于羣臣曰聞有一乞人善舞劒卿等亦見之耶寡人亦欲一觀使人召之諸臣皆稱其妙招至臺下王問曰汝乃何地人舞劒行乞耶
하루는 신라왕이 백관을 불러 모아 봉황대 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한명의 거지가 훌륭한 칼춤을 춘다고 하는데 경들도 역시 이를 보았는가. 과인도 역시 한번 보고 싶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묘기를 칭찬하고 봉황대 밑으로 안내하니 왕이 묻기를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며 칼춤을 추며 구걸을 하는가.” 하였다.
黃昌跪奏曰臣以高句麗之人早失父母無所依賴偶學釗術何敢當其妙舞之稱乎
황창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신은 고구려 사람으로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우연히 검술을 배웠으니 어찌 감히 이를 기묘한 춤이라 칭하겠습니까.” 하였다.
王使舞於臺下黃昌承命舞於臺下王稱善使舞於臺上大張軍樂鼓角喧騰黃昌着紅戰袍手兩利劒和其節盡其法初若梨花桃花紛紛散落舞袖漸緊則黃昌一身都不見存數條虹光閃閃於空中而禀稟寒氣襲人膚骨
왕이 봉황대 아래에서 춤을 추게 하니 황창이 명령을 받들어 봉황대 아래에서 춤을 추었다. 왕은 훌륭하다고 하면서 봉황대 위에 올라와 춤을 추라고 하였다. 많이 모인 군사들이 즐거워하며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며 수리를 지르고 날뛰었다. 황창이 붉은 장수의 옷(戰袍)을 입고 양손에는 날카로운 칼을(利劒) 들어 그 마디마디가 어우러지고 그 칼 쓰는 법을 다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흡사 배꽃과 봉숭아꽃이 날려서 떨어지는 것 같더니 춤추는 소매가 점점 감기서 황창의 한 몸에 모이더니 볼 수 없게 되고, 여러 개의 무지개 빛이 공중에 번쩍이며 차가운 기운이 내려와 사람의 피부와 벼에 엄습하였다.
黃昌<=肉+帝>視角干身着白花甲手持龍泉劒黙察動靜儼然端坐黃昌自語於心曰彼庾信天縱人也先犯庾信而如不得售則未報君父之讐空作無名之鬼先斬王頭後殺庾信也俄有一條雷影直射堂上王之頭忽落座下
황창의 배가 크게 보이자 각간은 몸에 백화갑을 입고 손에는 용천검을 들고 묵묵히 그 동정을 살피며 의젓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황창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유신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먼저 유신을 잡는다는 것은 행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부친의 원수를 갚지는 못하고 하늘에서 이름 없는 귀신으로 떠돌겠구나. 먼저 왕의 머리를 벤 후에 유신을 죽여야 하겠다.’ 하였다. 갑자기 한 줄기의 번개와 같은 그림자가 당상에 쏘이더니 왕의 머리가 홀연히 자리 아래로 떨어졌다.
餘氣又觸角干角干拔其劒大呼一聲跳上於數十餘丈高巖之上黃昌知其不能犯擲劒於地角干欲斬之旋止曰不問其根柢而斬之則其人顚末無人明知也乃問曰汝以何人有何讐於我朝旣弑吾君又欲害我耶
그 여세로서 또 각간에게 달려드니 각간은 그 칼을 빼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위로 수 십장을 뛰어올라 높은 바위위로 올라가니 황창은 범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칼을 당으로 던졌다. 각간은 <그를> 죽이고 싶어 칼을 돌리다가 멈추고 묻기를 “그 이유나 원인을 묻지는 않고 그 목을 벤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말이나 그 사람이 누군지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하고 묻되 “너는 어떤 사람이고 나와 조정에 어떤 원한이 있어서 이미 나의 군주를 죽이고 또 나를 살해하려 하느냐?” 하자
黃昌曰吾乃百濟大將黃駿子昌也爾王遣汝滅我國殺我父吾與汝不可共戴一天故吾學釗誓報我君父之讐矣豈意今日只斬汝王之頭恨不能竝汝斬之以快洩我無窮之痛遂自刎而死
황창이 말하되 “나는 저 백제 대장인 황준의 아들이다. 네 왕은 너를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의 부친을 죽였으니 나는 너와 같이 하나의 하늘 밑에 같이 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칼을 들고 맹세하여 내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어찌 그 뜻으로 오늘 단지 네 왕의 목만 베고 너를 같이 베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재빠르게 빠져나간 것이 나에게는 끝없이 원통하다.” 하며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此時侍衛百官軍卒驚懼披靡魂不付體抱頭鼠竄及誅黃昌還集擧?哀歛王屍葬之世子卽位年才十歲金氏以王大妃垂簾臨朝以角干攝政是時甄萱弓裔等陰畜士馬而恐角干之神武不敢動焉
이때 옆에서 호위하던 백관과 군졸이 놀라서 두려워하고 이리저리 흩어져서 쓰러지며 몸에서 혼이 붙어 있지 아니하였고 머리를 감싸 쥐고 쥐처럼 숨어버렸다. 다시 황창을 죽이고 돌아와 왕의 주검을 수습하고 애도하며 장사지내고 세자가 즉위하니 나이는 10세이었다. 김씨는 왕의 대비로서 조정에 나아가 수렴하고 각간이 섭정하게 되었다. 이때 견훤과 궁예[1] 등이 숨어서 사병들과 말들을 비축하며 협박하였으나 각간의 신과 같은 무예 앞에서는 감히 날뛰지 못하였다.
[1]견훤과 궁예는 김유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이 아님
其後大星隕於城外王憂之角干曰今日之災厄在大臣非國家之憂也角干病篤王親臨問之還宮語左右而歎曰角干若死則國家自失一棟樑矣
그 후 큰 별이 성의 밖에 떨어져 왕이 근심하였으나 각간이 말하기를 “오늘의 재앙은 대신에게(유신 자신) 있으니 나라에서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각간이 병으로 위독하여 왕이 몸소 병문안을 하고 궁으로 돌아가 좌우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각간이 만일 죽으면 나라에서 하나의 기둥을 잃게 된다.” 도 하였다.
角干年七十九卒王震悼不已用軍樂鼓吹以葬之追封爲興武王
각간이 나이 79세에 죽으니 왕이 매우 슬퍼하고(震悼) 군대를 움직이거나 즐겁게 놀거나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부는 것을 금지하여 장사를 지내고 흥무왕으로 봉하였다.
傳中之言多有荒誕而有窮后羿射下入日云則與僧鬪鬨奪其匕劒之說不必强謂之妄矣
전해오는 말에는 황당무계한 것이 많다. 죽은 왕후가 날아올라 해로 들어갔다는 말이 있고, 중과 함께 싸워서 그 비검을 빼앗았다는 말은 허망된 것이라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黃石公授素書於子房云則神授秘訣之說不必强謂之妄矣周時雷震出於孕婦塚中云則秋南後身之說不必强謂之妄矣宋帝乘土馬一夜行累百里云則江神救護之說不可强謂之妄矣
황석공이 어떤 책을 아이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과 신이 비결이 적힌 책을 주었다는 말은 허망되어 강조해서 적지 않았다. 주나라 때에(周時?)에 우뢰와 천둥이 임산부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과 추남의 환생이라고 하는 것도 허망되니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송나라 황제가 적토마를 타고 하루 밤중에 수백리를 갔다고 말하는 것과 강의 신이 그를 구해 주었다는 말도 허망되니 강조해서 적지 않았다.
而事在於古無所的見則亦不必强謂之信然無妄也然唐太宗甲辰親征可質於史記釣龍臺落花巖至今在人牙頰禹金巖來蘇寺邑人載之輿覽則此與玄鳥之夘巨人之迹何異哉
이러한 일들이 옛날에 있었다는 것은 보기에 근거가 없으니 역시 믿으라고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으니 별 생각이 없다(無妄). 그리고 당 태종이 갑진년(644)에 친히 <군대를 일으켜> 치러 왔다고 사기에 적혀 있으나 이것도 의심스럽다(질문할 만 하다). 조룡대와 낙화암은 지금 사람들에게 이를 갈게 하고 뺨을 붉게 하는 것이고, 우금암과 내소사는 읍의 사람들이 여람(동국여지승람)에 실어 놓았으니 이는 제비(玄鳥)와 더불어 거인(김유신)의 발자취이니 얼마나 특이한 것인가.
김원석 2005-05-27. 08:14
저희 집안의 보책에 실린 흥무왕전입니다.
2권(乾,坤)으로 되어있는 책이나 乾곤은 망실하였고 坤권 후반에 있는 내용입니다.
乾권이 있으면 제작년도나 잃어버린 상계를 알 수 있을 것이나 불행히도 알 수가 없습니다.(혹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에서 동일본을 가지고 계신분이 계시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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