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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문학*
김 종 길**
오랜 만남의 인연
문학은 인간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의 표현이다. 문학의 논리는 인간의 논리이며 문학 작품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수하기 위한 감성적 실천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학으로서의 의학이 뮤즈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의학은 문학을 만나서 의학 본연의 실체를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마종기 외 지은 <의학과 문학>, 서문 )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현대인들은 인근의 재난을 느끼고 불안해한다. 사이렌은 그리스신 세이렌(Seiren은 반은 여인, 반은 새)의 이름에서 연유하고 주사기syringe는 공황장애의 어원을 제공하는 그리스의 님프 시링크스Syrinx에서 연유한다. 그리스인들은 동틀 무렵 새벽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드는 것이 동쪽을 가리키는 이오스의 손끝이 붉은 탓이라고 여겼는데, 붉은 염색약을 이오신Eosin이라 하고 이 약으로 붉게 염색되는 세포를 에오시노필eosinophil(백혈구로 알러지에 관여하는 세포)이라고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의무부대 그리고 대한의사협회의 마크가 제우스 신의 지팡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올라가는 지팡이이다. 정신과를 뜻하는 Psychiatry는 정신(영혼)의 신, 프쉬케Psyche에서 비롯된다. 서양의학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의학은 그리스 신화와 이렇듯 인연이 많다. 의학은 그 뿌리가 문학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의학도의 경우 그리스 신화를 음미하면 재미있는 의학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김건상,<의학과 문학> 61쪽)
소설가 앙드레 모로아는 ‘현대의 의사는 환자를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예술가가 되어야 하며 철학가의 지능과 소설가의 재주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제 의학도로써 왜 문학을 해야 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의사로써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문한 자료나마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
환경 그리고 변화
세계는 인류 기백만 년의 역사적 시공을 압축하며 변신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소외된 한반도 생활이 이제 비행기로 연결된 거리의 축지법이 가능해 졌기에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도 숨차고 바쁘다.
연전에 문우들과 논개의 무덤을 찾아 여행을 하였을 때 시인 강은교의 말이 기억난다. ‘옛 선비들은 우리가 수 시간 만에 차로 달려온 이곳에 조랑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며 왔다.’라고. 세계화가 시대적 과제가 되었고, 모두가 빨리 달려가는 세상에서 역설적 느림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소도시 전체가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이 실천되고 있어서, 빠름과 느림의 세상이 혼재되면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사람이 환
경의 지배를 받음은 작가 또한 수조 속에 사는 물고기와 다름 아닌 생이다. 그래서 시대적
여건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자. 작가 중에는 나이와 무관하게 만년필, 아나로그에 집착하는 작가, 키보드를 애용하는 작가들, 나름의 맛을 즐기는 방식으로 생을 즐기고 있다. 다양성 그리고 뒤섞임이야말로 이 시대적 특성을 대변하는 또 다른 키워드이다. 어느 수단을 택하는가, 어떤 일상을 사는가, 작가의 행동 뒤에는 보이지 않는 작가의 성격이 자리하고 있다. ‘성격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격언이 되었고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타고난 체질이 순환성 기질이면 쉽게 써내며 생산이 많고, 분열적 기질이면 수줍게 소수의 작품을 낼 뿐이다. 강박적 사람은 작품의 질에 무게를 두고 고민한다.
일상인은 통상 환경의 본질에 신경 쓰지 않고 산다. 가령 이웃 광산에서 폐광의 침출수가 흘러나와서 논밭을 오염시켜도 자신에게 해가 없으면 심각성을 생각 못한다. 폐해를 발견, 연구하고 개선함은 과학자의 몫일 터. 사실을 규명하고 알려주어도 일반 대중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들을 뿐, 자신이 병들어서야 실감하게 된다. 이른바 ‘개구리 온탕 효과’ 사례들은 상식처럼 흔해도 모르고 산다. 작가는 타고난 성품에 따라서 시대적 변화에 눈을 감거나 개혁을 위하여 정열을 바친다. 혹은 외부의 생에 무관한 산신령 같이 본질적 인생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모습의 작가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각자는 관심의 대상이 다를 것이고 관심의 초점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개인 환경이다. 그래서 한 작품을 깊이 이해하려면 그 작가의 성장 환경, 직업 등 시대적 모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진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지 못하듯 환경을 떠난 작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도 일상인이기에 운명은 다를 바 없다.
이 시대의 주요한 문화적 특성 중 하나가 퓨전이다. 국제화 속에서 해외 교류가 폭증되면서 의식주 생활 모두가 급변하는 퓨전의 운명에 놓였다. 그래서 태고 적부터 맺어진 인연, 의학과 문학이 퓨전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언어와 정보의 다양화는 옛 것을 버려야 하는 갈등을 야기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문학적 소재가 전문적 다양화되는 것도 필연적 운명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그 변화의 모습을 이해, 습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21세기 부산에만 오천이 넘는 의사가 활동하고 있다. 반세기 전 전국의 의사 숫자에 육박한다. 이 중에 글을 쓰는 의사는 문필가 중에서 손꼽을 숫자이니 의사/문인은 아직도 극히 마이너리티의 수준일 뿐이다. 바람직하건 데는 의사 하나 하나가 문학적 소양을 바닥에 깔고 인간애 적 고뇌 속에서 진료에 임한다면 세상살이가 더 훈훈해질 것이라고 상상한다.
개인적 동기와 현실
의업 하나만으로도 힘든 세월에 뭐하려고 고통스런 문학까지 하는가? 의사/시인 마종기 님은 <내 문학과 의학의 길>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이 70을 몇 해 앞두고 내 어줍잖은 문학을 뒤돌아보면 내 몇 개의 작품 중에, 의학이나 의업의 색채가 물들어 있다기보다, 내 인생 전체가 통째로 문학과 의학이 뒤범벅되어 서로 죽이기도 하고, 서로 붙잡고 울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 되겠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된 이유는 ‘위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낯선 사회에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어둠 속을 헤맬 때, 불안과 당황, 절망의 늪에서도 크게 낯설어 하지 않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문학이었다. ‘물 찬 제비같이 날렵하지는 못해도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자신이 매달린 신명나는 놀이였고, 황홀이었고, 진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문학의 화두가 생명이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생명은 언제나 희망과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 따뜻함이 그리워 시를 썼고 시를 쓰는 동안의 어줍잖은 고통까지도 껴안으려 하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이국의 삶 속에서 고통을 시로 배설하며 삶을 버틴 셈이다. 안톤 체홉이 ‘의학은 나의 아내요, 문학은 나의 애인이라.’ 고 하여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심경을 나타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나 즐거움이기도 한 양면성을 가진다. 아내와 애인으로 비유된 심경, 인생의 조건이 바로 이중성, 양면성이 아닌가.
시국이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져도 삶의 흔들림은 계속되는 것이기에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부산 수필계의 원로이면서 은퇴 의사/수필가인 정재훈 님에게 ‘글을 쓰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질문 드렸다. ‘그냥 쓴다.’는 답이 돌아왔다. 알피니스트에게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산이 있어서 간다고 하는 도인적 답을 연상시킨다. 동기 같은 것은 따져 뭐하느냐는 은근한 꾸지람으로 들린다. 개인적 만남 속에서 보이는 님의 성품은 온화한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적 시야를 겸비한 선비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르신으로 세상의 타락이나 세속적 욕망을 넌지시 나무라는 훈계성의 냄새가 담뿍 느껴진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국가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너무나 혼란된 사회의 무질서와 부패상을 많이 겪어서일까. 생의 긍정보다는 부정적 혼란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고 님의 교육적 배경은 다분히 유학적 배경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해 본다. 경제 안정이 된 중진국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 개원의, 여의사/수필가 이귀숙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자신의 정체성 찾기’라고 답한다. 이제 안정된 사회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로 초점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중년의 교수/의사/수필가인 허원주는 ‘삶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인간 욕망의 최고급 단계인 명예의 욕망을 말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남긴다.’ 는 선조들의 격언을 이어 받는 말이다. 선비의 가치관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듯 의사마다 글에 대한 동기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중생의 삶이 ‘빛을 향하여’ 노력하고 있듯이 글 쓰는 사람들은 모든 삶의 고통이 사실은 ‘사랑의 속성’이라는 점에 귀의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마종기). 감동을 주는 수필은 삶에 대한 사랑과 따스함이 내재된 글이기에 그러하다. 박문하님의 대표작인 <약손>은 복통을 호소하는 손자에게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사랑임을 상징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배가 아픈 추억은 있고 그 때 배를 쓸어주던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을 사랑으로 간직하고 있기에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직업의 속성상 의학은 모성의 성격이다. 의학은 그런 인간애에 기초한 직업이기에 의사/수필가는 좋은 소재가 너무 많아서 모두 소화시킬 수 없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뛰어난 의사/작가가 그의 직업적 주변 소재를 훌륭하게 써내어서 어떤 소재보다도 훌륭한 명작을 만들어 낸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의업이라는 수련 속에서 인간적 한계점은 의학의 속성이 정확한 시술과 빈틈없는 판단을 요구하기에, 그렇게 훈련된 의사의 가슴 속은 서정과 문학적 향기가 싹트기에는 척박한 토양이 된다. 재능을 살리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인 경직성, 상상력을 불허하는 구체성으로 인하여 문학적 향기는 소독약 냄새를 이겨내기 어려운 운명이다. 박완서님의 소설 <그 가을의 사흘 동안>(1980)은 반세기 전에 의사가 겪는 현실적 딜레마를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준다. 그의 글 중에서 의사가 주인공인 글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하는 데, 그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 의사는 여의전을 졸업하자 6.25를 맞는다. 피난통에 외국인에게 강간당한 경험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고 개업을 하게 된다. 변두리 동네의 2층에 개원을 하고 25년 간 소파 수술 전문의로 많은 돈을 번다. 세든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은퇴를 결심하는데 남은 사흘 동안에 애기를 하나 분만해 보았으면 한다. 집주인 황영감의 며느리가 만삭이어서 그에게 받아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내 손주를 사람 백정한테 맡길 줄 알았더냐’ 며 심하게 말한다. 그 날 세 건의 소파수술을 했는데 그중의 3개월짜리 한 아기가 완두콩만한 머리통에 채송화씨 같은 까만 눈이 박힌 걸 본다.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처형한 눈, 한 번도 의식화되지 않은 눈이 느닷없이 샅샅이 조명한 나의 생애는 거러지보다 못한 남루하고 나의 손은 피묻어 있다.>라고. 마지막 환자는 임신 칠 개월의 소녀였다. 자신의 원치 않는 아기를 가졌을 때의 생지옥의 고통이 생각나 7개월이나 된 아기를 중절해 준다. 결국 마지막 소망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허탈하게 쉬고 있는데 어디서 끼익끼익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확인해 보니 강보에 싸인 아기가 있다. 간호사가 그리 했는가 하였으나 아니라고 했고 그녀는 자신의 무의식적 행동이 그렇게 했음을 깨닫고, 아기를 갖고 싶다는 자신의 숨겨둔 욕망을 인정한다... 그녀는 갸날픈 기성을 지르는 아기를 품에 안고 미친년처럼 계단을 박차고 나간다. 큰 병원, 인큐베이터가 있는 병원으로 내달려서 ‘살려 주세요. 내 아기입니다. 5대 독자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을께요.“ 간구하지만 품안의 애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만약 주인공 여의사가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면 소파전문의로 활동하면서 그의 심경을 수시로 작품화 할 수 있었을까? 만약 쓸 수 있었다면 그녀는 이중인격자의 삶이었으리라. 삶의 깨달음은 중생의 이중성에 엄청난 짐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어떤 의사는 소파수술을 해야 하는데,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시행한 사람은 사랑받을 수 없게 되는 운명이다. 아무리 진솔해 지더라도 자신의 양심, 작가적 태도에 엄청난 갈등을 제기할 것이기에 글쓰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세월이 지나 은퇴 후에 회고록으로 사회에 관용을 구하는 자세로 자기 용서를 구도적 자세로 옮길 때는 따스하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세상의 모순과 사랑의 모습이다. 박완서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여의사는 당당하게 나름의 신념으로 의술을 여성만의 이중고를 해결하는 데 써먹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대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 한다.” 왜? “그것은 대중이 의사를 존중하고 자식을 가장 만들고 싶어 하는 직종 중의 하나도 의사이지만, 해결사는 이용할 일은 생길지도 모르지만 경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 말은 새로운 의료법을 제정하고 의사들을 탄압하는 사회주의적 의료제도를 정착하려는 현 정부에 시책에 대하여 실제로 항거할 묘법이 없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은 의사라는 부르죠아 계급에 흠모가 있어 자식을 의사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질투와 멸시의 모순된 감정을 숨기고 있다. 모든 것이 삶의 이중성과 모순 안에 녹아 있기에 언어화하기에는 묘한 복잡성을 띄게 된다. 의료의 시스템 안에서도 환경은 매우 다양하다. 가령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그 안에서 분과되는 수십 종의 직능, 전문병원의 소임, 개인의원들,
개인 의원도 분과된 질병의 전담에 따라서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다만 아픈 환자를 만나
고 대인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안에도 외과계外科系는 수직적 관계로 수술대 위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환자와 군림하는 전능적 의사의 관계이나 내과계內科系는 수평적 인간관계이다. 사회적 통념상 의사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연상되지만 속내용의 현실은 이렇듯 다양하다. 따라서 작금의 수필 소재가 다양하고 전문적으로 지향되고 있음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른 의학이 세분화되는 당연한 변화이다.
의사들이 겪는 일상 소재에 대한 반응은 서정성이 메마른 게 현실이다. 가령 심각한 죽음의 느낌조차도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건조해지기에 그렇다. 가슴이 건조해 지고 강박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그래서 서정성이 강조되는 기존의 가치관으로 보면 의사들의 글이 문학성으로 살려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역경을 딛고 앞서간 부산의 선두주자 한 분을 소개한다.
박문하 (호;雨荷) -인용, 국제신문(2006), 시인 김기태의 인간기행
그는 반세기 전 부산의 의사/수필가로써 첫 인물이다. 우하는 1960년 의창 수필집인 <배꼽 없는 여인>을 내면서 의사 문인으로 이름을 얻게 된다. 일간 종합지나 잡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정리, 보충하여 4권, 3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종래의 수필과는 사뭇 개념이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수필은 독보적이었으나 내용의 특이성과 전문 분야의 특별한 경험을 다뤘기 때문에 문학의 본질과 과연 일치할 수 있느냐는 논난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장신의 거구에 호남아의 풍모를 타고났고 두주불사였다. 밤을 새워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체였지만 기어이 간을 다쳐서 58세에 간암으로 운명하였다.
그는 혼란기의 시대적 아픔 속에서 태어났기에 고생이 많았다. 1917년 동래 복천동에서 우국지사 박용한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는데, 형 둘과 누나는 독립투사로 해외로 떠났고 어린 우하는 호떡장수를 하는 등 어린 시절을 고생하며 보낸다. 아버지 정도 모르고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병원 조수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고, 동래 수안동 동래시장 입구에서 ‘민중의원’을 개원하였다. 개원 중에는 월북한 형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고생을 했고 후년에는 장성한 아들을 잃고(익사) 심적 고통을 받았다. 1973년 부산문인협회장을 지냈다. 시대적 수난 속에서 굳건히 살아가면서 고통의 세계를 의창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수필은 오로지 문학을 하는 수필가에 의해서 씌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기에 문학성에 이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중의원’이라는 간판의 ‘이름’ 때문에 사찰을 당했다니까 문학성의 시비도 시대정신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의학과 문학의 연결
소설가 성석제는 <카타르시스의 전후 맥락(2005)>에서 아래와 같은 비유로 의학과 문학을 잇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제 발로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은 환자라고 고백하고 입원을 했다. 진단을 한 의사가 숙제를 내주었다.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만큼 쓰시오’라고. 환자는 연습장을 사달라고 해서 그때부터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연습장 다섯 권을 빽빽하게 채웠을 때 환자는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즉시 퇴원을 허락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연습장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뿐이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그 연습장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한 때 환자를 자처했던 그 사람은 자신이 그런 적이 없다고도 한다. 그 속에 씌어 있는 것이 의학과 문학 사이의 다리 이름이 아닐까 짐작한다.”
의학은 인체의 구조와 기능, 건강과 질병의 여러 현상을 연구하며, 건강 유지와 집병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는 학문이다. 문학은 언어로 쓰여진 작품을 연구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이란 과학의 번역어이다. 연구가 학문의 특성이다. 연구의 대상에 따라서 학문은 세 개의 영역으로, 자연현상을 연구하면 자연과학(natural sciences)이요, 사회현상을 연구하면 사회과학(social sciences)이다. 인간성(humanity), 인간적 가치, 인간적인 것을 연구하면 인문학(humanities)이다. 연구의 목적은 영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연과학에서는 자연현상의 법칙을 좇고,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의 특성 내지 경향을 구한다. 인문학은 인간성 또는 인간적 가치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영역도 개별적, 특수적, 실제적 현상이나 사실을 연구하여 전체적, 보편적, 추상적 원리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학문이란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이른바 생명을 다루는 부문이 의학이요. 문학은 사람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의학 중에서도 정신의학은 상당 부분이 문학의 기능과 유사성을 보이나, 양대 산맥이 추구하는 본질은 생명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래서 의학과 문학은 그 본질의 추구에서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근본적 질문은 이런 모든 작업이 ‘사람’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학문도 없어진다는 점이다. 모든 게 사람을 위한 연구일 뿐이다. 본질은 하나로 환원되는 셈이다. 삶을 논하다가 나중에 사람이 없어지는 우화가 되지 않도록, 사람이 중심이고 그 본질은 생명에 있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하여 최근에는 의학교육 정규과목으로 문학이 등장하였다(가톨릭, 연세, 인제의대). 학제간의 연계가 활발해 지는 경향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의학이 분석적이고 미시적 연구에 치우쳐서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상실하는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교육이 ‘맹장염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맹장염을 앓는 사람 전체를 치료하는 의학’을 강조해 왔지만, 실제 교육 효과가 신통치 못한 걸 늦게야 깨우치고, 문학수업을 통하여 통합된 인성교육을 습득시키는 시도인 것이다.
환자는 생화학적 요소가 결합된 ‘구조물’이 아니고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다. 의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학문, 즉 넓은 의미에서 ‘인간학’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병훈, 의학교육과 문학 2005). 문학은 인간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의 표현이다. 정신의학을 공부하게 되면 처음 배우는 것이 증상의 이유와 목적이 그 사람의 인생 배경과 어떤 유기적 관련을 갖고 있는가를 공부한다. ‘정신역동’이라고 하는 정신분석적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의식의 흐름을 쓰는 소설가의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오는 의문이 ‘정신분석은 의학인가, 문학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정신분석가의 대답은 물론 의학이라고 귀결되는데, 문학은 그 수단이 언어와 문자에 국한되지만 의학은 인접된 여러 과학 분야들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 복잡해진다. 그러나 미래에 제시되는 의학은 종합 학문으로써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문학과 의학이 만나는 것이다. 비의사인 임상심리가들이 분석치료에서 임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은 ‘꿩 잡는 게 매’라는 현실적 논리가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암시한다.
이미 문학 분야에도 치료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문학치료는 시(詩)치료에서 시작하여 병원 환경이 아닌 정서적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가정이나 학교에서 치료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의 후계자인 페를로스가 개발하여 현재 국내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수단은 의학만이 아니다. 문학은 물론 운동, 댄스, 그림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된다.
미래의 의사는 ‘인간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문학을 모르고서야 그런 사람이 가능할 일인가. 그런 능력을 성취하는 기본이 ‘듣는 기술’이다. 듣는 행위는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문학과 연결된다. 고도의 의사소통 능력을 얻는 수단으로 문학작품은 대화와 화법의 보물창고이다. 대화술을 익히려면 솔제니친의 <암병동>(1967)이 가장 좋은 교재로 꼽힌다. ‘말은 가장 뛰어난 치료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중요시 되지 않고 있다(Bernard Lown).’ 누구나 말을 하고 살지만 ‘옳은 말을 하고 옳은 행위를 함’은 어려운 수행의 길이다.
문학사적 업적을 남긴 의사들 (마종기, 의사와 문학가로 사는 삶, 2005)
의학을 공부하고 의업을 계속하면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약술하면 아래와 같다.
1) 체흡 Anton Chekhov; 러시아에서 1860년 출생. 모스크바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희곡작가, 소설가. 당시의 지식인들의 퇴폐적 일상을 그린 기발하고 애수적인 단편, 유머러스한 단막극들, <바냐 아가씨
>,<갈매기>,<세 자매>, <제6병동>,<곰>,<눈의 비밀.,<약혼녀> 등이 있다.
2) 카로사 Hans Carossa; 1878년 독일에서 출생.결핵내과전문의. 독일 제2의 괴테로 불림. 가톨릭적 색채가 강한 좋은 의
사들이 주인공. <의사 뷔르거씨의 운명>,<루마니아 일기>, <의사 기온 .,<성년의 비밀>. 말년에 명예 문학박사 학위 받았
다.
3) 슈니츨러 Arthur Schnizler; 1862년 오스트리아 출생. 빈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대 표작으로는 <눈먼 제르니모와
그의 형>, <늙어가는 사람들>, <독일인의 사랑>, <가면무도회> 등이 있다.
4) 슈타인 Gertrude Stein; 1874년 미국 출생, 여류작가. 작품으로는,<세 삶>(소설), <부드러운 단추>(시집), <피카소>,
<아이다>(평론집)등이 있다.
5) 크로닌 Archibad Hoseph Cronin; 1896년 스코틀랜드 출생. 영국 그래스고 의대 졸업. 후에 미국 이주. <사냥꾼의 성>,
<별이 내려다본다>, <성채> 등이 있다.
6) 윌리암스 William carols Williams; 1883년 미국 출신, 현대 시인.펜실바니아 의대 졸업, 소아과 의사. 퓰리쳐상과 다이
얼 상 수상, <패터슨>(시집) 등이 있다.
7) 벤 Gottfried Benn; 1886년 독일 출생, 피부비뇨기과의사. 존재론적 현대시로 중요한 업적을 남기다.
생명과학의 도전과 미래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기계 장치에 의한 시험관 아기가 인구 기획에 의하여 공장에서 생산된다. 이 소설은 일 세기가 지나서 실현되어, 이십 수년 전 실제로 산부인과 의사와 생리학자의 합작으로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다. 뉴욕타임스는 사흘간을 1면 기사로 다루었다. 이제 이 기술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부산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이 의학의 코뚜레를 잡고 당기는 짓이 아닌가. 수천 년 전의 연꽃 씨앗이 꽃을 피우는 일은 이제 상상력이 아닌 실제의 상황이다. 과학의 신기술이 해내는 일이다. 과거의 신기술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나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같은 공상적 문학이 앞장섰고, 생명과학은 의학의 기관차가 되어서 앞에서 달려가고 있다.
소설, <비밀>에서 체세포 복제로 태어난 여자 아이가 엄마에게 분노하고 다투면서 그 책임을 묻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창조한 박사에게 묻는 말과 유사하다.
“나의 창조자여, 당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미워 멸시하지만, 나와 당신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 묶여 있소,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이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 하시오.”
엄숙해 지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과학의 신기술이 탄생되고 그 행로를 의심받는 것은 의사소통과 오해에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의학과 문학의 연결, 그 사이의 의사소통은 필수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세분화된 나머지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학문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과 다를 바가 없다. 무엇보다 시회 전반적으로 과학 기술에 익숙해져 학자들의 발견에 일비일희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성숙되기를 바랄 뿐이다.’(황우석, 의료기술에 대한 문학적 과정, 2005)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세포가 합법적으로 접합되었다. 무병장수에 대한 강열한 욕구와 거대 자본이 어우러진 생명과학의 연구 속도는 윤리의 규제로 묶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얻는 것, 그 이후에 우리가 갚아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 ‘그 대가를 사회 전반에 인식시키고 문학을 포함한 문화를 통하여 그 충격을 완충할 수 있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야 되는 것은 아닐까’.(송기원, 생명에 대한 생명과학의 도전,2005) 시대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한다. 전문가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모두가 동참하여 ‘사람의 생명을 위한 장場’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문학은 선도역을 감당해야 한다. 원만한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그것이 창작인이 감당할 유산 만들기가 아닌가 한다.
생명과학은 인간의 신체를 위하여 계속 발전하고 있으나 뇌의 신비를 해결하는 길은 아직 미결의 장에 있다. 정신분석, 분석심리와 종교적 명상을 통한 도전은 자기를 깨닫고, 개인화
에 이르게 하는 노력이다. 창작활동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좋은 수단임이 분명하다.
더 좋은 미래의 의료교육을 위하여, 의학과 문학의 소통을 위하여 의사 출신 작가들과 문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모임과 저술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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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문협회지 <문학도시>2007 게재
**김종길, <창작수필>등단(2003), 김종길신경정신과의원(의학박사, 전문의),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예리한 지적과 깊은 식견에 거듭 공감합니다. 의사에게 문학은 또 떼어놓을수 없는 동반자나 다름없다는 말씀에 한참 숙연해 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꼼꼼히 읽어보니 참 유익하였습니다.
“나의 창조자여, 당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미워 멸시하지만,
나와 당신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 묶여 있소,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이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 하시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 싶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만이 태어나게 하고 양육해 준 은혜를 일생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고, 해야 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숭고한 것이라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순수하게 아가페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문제도 참 유익했습니다.
꼼꼼히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감사.
많이 배웠습니다.대단한 집중력입니다. 제목 하나 문장 하나 인용 하나에 신경을 써서 쓰신 글 같습니다.
깊은 이해력이 부족한 제 탓입니다 . 두고 두고 음미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들이 다 해 놓은 작업일 뿐임다~~일반 문학인들에게 의사로 부끄하지 않고 욕 안먹으려고 집중을 좀 한 거 뿐이라요~
아, 진즉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문학과 의학>에 대해서 이토록 학술적인 글을 쓰신 김선생님께
부끄러울 일이 제게 곧 닥칠 것 같아요.
별 말씀을...단행본 <의학과 문학>을 구입하여 공부해 보시기를 강추~ 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