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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am report of Gurdjieff in Egypt
우선 비디오의 내용이 매우 깊고 넓었기 때문에 각자의 인상을 따로 모아 보는 것이 필요했다.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I. 비디오를 보면서 느낀 새로운 인상
- 지난번 과제였던 태양의 영향권의 이야기하고 이집트 문명의 이미지가 겹치는 느낌이다.
- 태양신의 숭배, 동지에 태양이 일직선으로 비추게 되는 카르낙 신전 등을 보면 고대 이집트가 지난
토론에서 나왔었던 태양의 영향권이었다 느낌이 든다.
- 인상깊었던 것은 자신의 본질의 완전체적 상태로 도달하는 것인데 그것이 제 4의 길이고 거기
도달하려면 영적 본성과 동물적 본성이 통합되는 것이 큰 줄기로 생각되었다. 호러스와 셑
- 개념적인 부분들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면 좋겠다. 방법적인 부분들을 더 자세히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기독교의 고대의 원형적 부분들이 살아 있었다는 게 특히 놀랍게 다가왔다.
- 지난 번 과제와 연결되는 느낌이고 비전의 가르침, 학교에 대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분명 같은 질문을 수없이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깊이가 너무나도
다르다. 무엇이 이런 퀄리티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까?!
- 카르낙 신전에서 보는 동지의 햇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동지에 해가 가장 짧아진 시점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일출을 본다는 것은 아주 밑바닥에서 차고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아틀란티스에서
고대 이집트로 이어진 비전의 가르침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었다는 것에서 지구상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
상관없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 스핑크스가 피라미드 훨씬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 현재의 인류보다 더 뛰어난 인류가
그때 있었다는 것인가? 일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받는 인상, 충돌 그런 게 다 공부라는 것,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어간다.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알게 되며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다.
- 호러스와 셑의 진정한 결합. 셑이 없어지면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부정적 감정을 잘 다루어야지, 없애려고 하면 내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혐오해 왔고, 그런 감정에 빠지는 나 스스로를 혐오해왔던 것 같다. 부정적 감정에 지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싶다. 선의 힘이 커질수록 악의 힘도 균형에 맞춰 커지는 것인지도?
부정적 감정이 아예 없애려고 하면 되게 무감각한 사람이 된다.
“제4의 길이란 일상 안에서 펼쳐진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인상들과 부정성 및 고통과
불확실성, 허상 등의 내적인 처리 과정을 삶 속에서 배워가는 것. 내적으로 처리해가는 과정을 배운다는
것은 일상이 곧 진정한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 길의 아주 초입에 있는 것 같다. 쉽지 않지만
폭풍우와 태풍 바람을 온 몸으로 견디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나가고 싶다.
II.길잡이 질문 1의 세부 질문들에 답하자면:
1.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의 줄거리는 구르지예프 방식의 수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패터슨이라는 사람이 구르지예프의
이집트 여정을 추적하고 구르지예프, 스크리들로프 교수, 유리 루보베츠키 왕자가 함께 무엇을 발견했을지
추측해 보는 내용이다.
사막화 이전의 고대 이집트에 있었던 인간의 자기 변형을 추구하는 고대 종교(이른바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고대의 가르침이 이후 여러 곳에 퍼지고 사르몽 형제회도 그 일부인데, 그런
흔적들을 찾아서 많은 방랑을 한 후 구르지예프는 여러 곳에서 만난 이 고대 종교의 핵심을 가지고 제 4의 길을
수행하는 학교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제 4의 길은 다른 3개의 기존의 길들과는 달리 세속의 시장통에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2. 구르지예프. 어떻게 당신이나 나처럼 평범한 아이로 태어난 한 소년이 그처럼 높은 의식적 계발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처럼 깊은 이해에 도달한 인간 존재를 이룰 수 있었던 걸까?
우리가 토론에서 도달한 지점은 구르지예프가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오쇼도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진화할 수 있다고, 오쇼 자신도 불완전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르지예프의 의식의 계발이 이르른 단계,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놀랍다.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돈이 많거나 교육을 많이 받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 불리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자산은 오히려 아버지의 담대함, 자연과의 교감,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등에서 아주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경지에 이르를 수 있었던 이유를 따져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환경, 살다 보면 있는 전환의 계기들의 영향.
●아버지 등 그를 이끌어줄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어서 한 세대 만이 아닌 오랜 시간의 준비가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스스로 통합된 사람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높은 가능성의 아이였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사람들) 그룹을 만들어 같이 찾았다.
●그가 가진 의문의 절실함.
●엄청난 적극성: 뭐든지 빨리 배우고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 4의 길을 찾는 여정 속에서 모든 센터가 고루 계발되어 대단한 시너지 효과가 난 것 같다. 그는 뉴맨의
표본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3. “놀라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접하게 된, 구르지예프의 성장과정 (성장배경)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구르지예프의 아버지는 아들을 과보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침대에 뱀이나 개구리를 넣는 방식으로 담력을
키워주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벌거벗은 채 달리기를 하는 식의 극기훈련에 가까운 훈육을 받았고, 저항하면 무섭게
처벌받았다. 그에게 고난난은 그저 지나가는 일이었을 뿐 회피할 것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는 힘”을 얻었다.
●제도권 교육 안에서 자라지 않았고, 보르쉬 신부, 보가체프스키 신부 및 다른 스승들과 아버지에게서 1:1
교육 형태로 가르침을 받았다.
●구르지에프는 아버지 사업이 파산하여 11세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구르지에프는 아버지가 자신 안에 심어준 ‘행복한 충동의 씨앗’과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기억하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용기의 원천으로 삼는다.
● 러시아정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 이슬람교, 야지디교 등의 영향이 교차하는 지역에서 자랐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가 영적으로 상당히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4. 어린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탐구의 여정에서 그는 얼마나 자주 죽음과의 대면을 경험했는가?
그는 죽음과 상당히 자주 대면한 것 같다.
단지 죽음과 대면해서 새로운 이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사건들을 살펴보자.
보르쉬 신부와 보가체프스키에게 수업 받던 소년시절 여동생의 죽음을 경험
심령술(죽은 영혼과의 교신)에 관심
1882년 오리사냥에서 오발사고로 죽을 뻔함
1883년 포탄 사격장에 숨어서 친구와 결투
이즈루민 계곡으로 가 보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혁명가들 사이의 전령 역할을 하다가 개에게 쫓겨 죽을 뻔한 일
1896년 크레타섬 민중혁명 현장에서 총상을 입음
1898년 이집트 원정 중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만나 죽을 위기
1902년 산악 부족 간의 싸움에서 두 번째 총상을 입음
1918년 과학원정대로 가장한 원정: 소비에트 탈출 (하트만의 책 내용) 조금만 잘못되었어도 집단이 몰살되었을
것.
1948년 자동차 사고
그 외 동행한 친구가 사고를 당해 죽을 뻔하거나 죽은 일은 많음 (놀라운 사람들과의 만남)
—> 이런 죽음과의 대면이 어떤 작용을 그에게 한 것일까?
우리 자신의 죽음에 가까이 갔던 경험들을 되새겨 보면,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되고,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해지고,
삶이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도 올라오게 된다.
순식간에 인생의 온갖 장면들이 확 지나가면서 내가 의미 있게 한 게 뭔가 곱씹어보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다시 돌아보았다.
우리 중 아직 소수의 사람만이 죽음에 가까이 가보는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죽음이 먼 어떠한 것
혹은 어느 시점에 찾아올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죽음과의 대면의 경험은 확실히 우리의 삶이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공포로 무너지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고 생동감 있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열쇠일 것 같은데, 그것은 리어왕의 사례에서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5. 리어왕이 죽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내적인 환희를 더 이상 담고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의식의 끈을 놓은 채 실신했다. 그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 리어왕은 더 이상 방금 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돌아온 그는 내적인 변형을 완료지은 인간존재에 도달해 있었다!
이러한 변형을 가능케 한 열쇠는 무엇인가?
●상당히 중요한 열쇠는 리어왕이 아주 풍족한 왕의 삶을 살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거대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고통을 성장의 먹이라고 하듯이, 지난 숙제에서 지적되었던
것처럼 고통은 성장과 변형을 위한 조건이다.
고통에 대한 에드가의 대사를 한번 인용해 보자. (민음사판 113쪽):
“우리의 비참함을 적으로만 볼 수 없다. (...)
비통함이 짝을 얻고 인내심이 친구 두면
마음은 큰 고통을 진정으로 건너뛴다.”
●그러나 고통만으로 내적인 변형이 다 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고통에 단순히 무너지고 굴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리어왕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외적으로는 미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패터슨의 비디오를 보면 충격을 받는 순간에 서로 다른 욕구 즉
영적인 욕망과 물질적인 욕망의 갈등이 극에 달할 때 그것을 견뎌내면 케스잔체 (Kesdjan Body)라는 결정체가
쌓이게 되고, 그것이 불멸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리어왕도 아마 그런 과정을 거쳐간 것이 아닐까?
이 부분에 대한 작업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환희의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환희를 그저 큰 기쁨이라고 생각하는데, 리어왕이 죽음을 대면해서 만난 환희는 단순한 기쁨이라고
하기에는 깊이와 넓이가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객관적 물질적 조건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생사와
득실을 떠나 진실과 대면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상태일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기를 덮고 있던 죽은 껍질이 다 벗겨져나간 홀가분함을 느끼고 그전에 허용하지 못하던 감정을
전적으로 허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환희는 그냥 기쁜 게 아니라 크고 감동적인 가슴 벅참이고 고통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감정일 수도 있다.
광야에서 기절했다가 일어났을 때의 그는 막내딸 코델리아를 포함해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죽기 직전에
가서 그는 딸이 자신을 진실로 사랑했고 후회없이 죽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영혼의 눈으로 딸의 입에 걸린 미소를
보고, 영혼의 귀로 딸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케스잔체가 쌓였으면 가능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보았다.)
그러한 환희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고통을 온전히 경험한 그이기에 환희도 역시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고 놀라운 내적 변형이 일어날 수 있었다.
III.길잡이 질문 2의 세부 질문들:
1.도전적인 상황들을 통과해가면서 에드가는 인간(어른 남자)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오스왈드와 에드몬드를 죽인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 Affirming 그리고 부정 Denying 이라는
두 가지 힘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세 번째 힘(삼위를 이루는 세 번째 요소인)인 통합(혹은 화해로 해석되기도 함) Reconciling은 무엇인
가?
이 질문은 서로 대립하는 긍정, 부정의 힘들과 세 번째 통합, 화해, 어떤 새로운 단계를 만드는 힘이라는 세 개의
요소가 만들어내는 3의 법칙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인 것 같다.
어떤 현상도 이 3의 법칙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과연 제 3의 힘은 무엇인가?
우스펜스키 책의 4장에도 이 제 3의 힘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불명확하다.
구르지예프는 제자들이 게으르게 설명을 듣고 아는 것보다 스스로 찾아내서 아는 것을 원했으리라.
그는 우리가 제 3의 힘을 잘 관찰하지 못한다고 했고, 중립적인 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편의적인 설정이라고
했다. 긍정- 부정의 힘이 상대적 세계에 속하는 데 비해 이 제 3의 힘은 진실한 세계의 자산이며 예컨대 새로운 지
식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게 말하자면 오쇼가 말씀하시는 수직적 힘 (vertical force)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서 살면서 겪는 역경, 충격, 고통은 변형의 계기가 되지만 제 3의 힘 자체인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제 3의 힘의 일부일지는 모르지만.)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무너지는 사람도 많은데 무너지지 않고 변형
을 이루는 사람은 제 3의 힘의 도움을 얻은 것이다.
진실한 세계, 상위 차원에서부터 오는 제 3의 힘이 인간 안에서 작용하는 형태가 무엇인지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
과 같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오랜 세월 쌓여온 지혜, 근성, 노력, 인내, 사적인 감정을 넘어 중립적 본질을 볼 수 있는 힘, 선악을 넘어서는 우주
적 관점점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서로 동의한 지점은, 간단히 말해서서 그것이 ‘깨어있음’일 것 같다
는 점이었다.
영상에서 유사한 장면과 문장을 빌려 서술하자자면 테베의 사원은 태양의 세계(동지에 태양이 떠오르는 광장)에
서 부터 어두운 습지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며, 여기에서 다시 태양을 향해 자라는 파피루스 식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기둥을 상징화한 사원은 마치 창조의 빛이 절대에서 시작해 3차원 물질세계에 도착한 뒤에 진화하여 다시
창조의 빛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벽화에 그려진 왕이 쓴 2개의 왕관을
동물적 본성과 영적 본성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다른 한 요소로 표현된 한 개의 눈은 깨어있는 의식, 즉 영혼이
라고 하였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와 신성함이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는 존재이며 이 두 가지를 통합할 수 있는 제
3의 힘은 하나 있는 눈, 즉 ‘깨어있는 의식’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2.당신이 어머니를 구하되 아버지를 제외시킨다면, 과연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공동 프로젝트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냥 분리된 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요소가 복합되어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대개의 집안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한 사람이 악당이라고 찍혀서 배제되어 있지만, 두 존재 중 한 존재의 힘이
세다거나 제외된 상태라면 결국 나라는 존재 역시 균형적인 상태를 벗어나 있게 되는 것이다. 불균형상태에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답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왜 나왔을까?
이 질문은 사실 앞의 질문에서 제 3의 힘을 이야기한 것에 이어서 두 가지 대립되는 힘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즉, 어머니만 포함하고 아버지를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셑 없이 호러스만, 에드몬드 없이 에드가만, 물질 없이
영성만 취할 수 없고 그들은 균형과 질서 속에서 공존해야 되는 두 존재의 짝이다.
호러스와 셑의 관계도 서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악마가 없으면 창조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이 없으면 성장이 불가능하므로, (비록 이것을 해내기는
어렵지만) 고통을 가져오는 사람을 포함하고 감사해야 한다. 예컨대 에드가는 자신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준
에드몬드를 포함해야 하고, 우리들도 다른 센터 중심의 사람(나를 뜨거운 분노로 타오르게 만드는) 사람들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오해를 많이 한다. 선이다, 악이다 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어떤 행위
자체가 선악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의식의 존재 여부에 의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을 보면 그것은 과연 상대적이
고, 상대성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는 정말 포함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 논의하는 게 어폐가 있었던 것이, 포함을 말로만,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포함은 어떤 느낌
이라는 것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가슴으로 감사하는 느낌,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가슴이 힘있게 신뢰하는 느낌 그런 것들이겠지 싶다.
이번 팀 토론을 통해 우리가 얻은 통찰로 보고서를 끝맺음하고자 한다.
- 알려지지 않은 신성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받을 자격을 갖추어야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베일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구르지예프가 사르몽 형제회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식에 접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그 과정은 지치지 않는 열망과 노력
이었다.
- 본질적인 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에드가에게 에드먼드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었듯,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내가 가진 허울 속의 진정한 나의 모습을 만나는 고통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고통을 통한 무기력 상태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 구르지예프는 고대의 가르침이 보존된 채 전해오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의 목적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다.
내 삶이 고단한 것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냥 가고 있기
때문에 힘겨운 것이다. 내 삶의 목적지를 알고 가야 한다.
- 가르침을 언어로만 알고 진정한 그 뜻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비난하지 말라던 의미로써의 '마하라니'라는 뜻도 최근에서야 내가 이렇게 사소하고 다양한 부분에서 내 스스로
를 비난하고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것을 바라보는것이 굉장히 힘든일이라는 것을 조
금씩 알게 되고 있다. 가르침,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들을 아는데까지의 시간을 조금 단축하고 싶다.
- 구르지예프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새로운 인상이나 에너지를 얻기 보다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어느 순간 잘 숨겨놨던 가면 속 얼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면서 불편했다. 이런 경험
도중 마주하게된 이번 영상과 팀토론을 통해 나의 중독상태와 Struggle에 대해, 그리고 통합이라는 제 3의 힘이
어쩌면 외부세계를 향했을 때는 그나마 쉬운 게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안의 부정성을 포함하고 통합시킨다는 것은 감히 상상되지도 않는다. 나는 진정 무엇을 얻고자, 무엇을 알고자
이 작업을 하고 있는가?
- 구르지예프의 초인적 노력, 엄청난 노력이 정말 경이롭다는 것을 이 비디오를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실감나게
느낀다. 한가지 센터에 의존하는 사람은 고대 이집트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평생이 걸려도 모자라다.
그의 마그네틱 센터는 그를 계속 중요한 요점이 있는 곳으로, 또 다음 단계로 안내한 것 같다.
어떻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 가며, 돈벌기와 파산을 반복하며 진리를 찾겠다는 뜻 하나로 그 많은 곳을 돌아
다니고 결국 찾아내고 정리하고 또 가르쳤을까? 진짜 놀라운 사람이다.
- 어떤 상황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힘들다, 어렵다'가 아니라 '어떻게'를 떠올려야 하는구
나가 이제 이해되는 듯하다.
- 오늘 하루만 해도 얼마나 부정적인 감정들을 많이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전에 그런 감정을 만나도 떨쳐버리고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면 앞으로는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배우고 싶다.
이제 겨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나를 격려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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