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벌의 어원(語源)을 찾아서
글쓴이 / 도재국
미리벌 즉 <밀불>의 한문식 문자는 <추화 推火>라는 뜻입니다,
신라 초기에 밀양을 <추화군 推火郡>이라 했습니다,
그후 경덕왕 때 우리말 이두식 지명을 중국식 한문으로
전국의 군현 郡縣의 지명을 변경하면서 전투적 지명인
<밀성군 密城郡>으로 변경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전투적 지명인
<밀양도호부 密陽都護府>를 거쳐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평화적 지명인 <밀양 密陽>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밀불은 <밀 밀다 推>, <붉다, 벌겋다의 불 또는 벌이 火>로
한문식으로 변했습니다.
밀양은 추화산성(밀양의 중심 산성)을 중심으로
분지 둘레에 수많은 산성이 있습니다,
밀성군이었을 당시 밀양을 둘러싼 성(城)이 많이 있었습니다,
즉, 密城郡 영역인 북쪽의 청도읍 구역에는 오례산성,
상동면 여수마을 뒷산에 철마산성,
서북쪽 청운마을 뒷산에 가산산성,
동쪽인 백마산에는 백마산성, 추화산에 추화산성,
활성리에 자씨산성, 덕대산에 덕대산성,
삼랑리에 삼랑산성, 영남루 주변의 밀양성 등 입니다
미리벌과 연관된 미리미동국은
고대 밀양의 읍락국가의 국명 國名입니다,
미리벌로부터 이어온 밀성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가야시대로부터 밀성군이라는 명칭을 가진 시대까지
많은 산성을 축조했으며, 이 기간동안 밀양은
왜구, 가야, 신라 등이 각축을 벌이는 전략적 요충지의
중간에 위치했습니다. 전시 각축장이 된 밀양을 방어하고,
서진 西進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라는 추화군에서 <밀성군 密城郡>으로
전투적인 지명으로 개명했습니다,
즉 密城郡의 뜻은 성 城이 빽빽하게 많다는 뜻입니다,
전투적 지명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리벌 즉 <밀불> = <推火>입니다,
밀불 즉 미리벌도 전투적 지명입니다
그 옛날 밀양 권역 둘레에는 평화의 날보다
전쟁의 날이 더 많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의
밤에는 밀양분지 둘레의 수많은 성벽과 그 주변에는 붉은피와
시커먼 연기, 성벽과 산야를 태우는 붉은 불기둥이
하늘을 치솟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들이 수많은 세월을 두고 기름진 밀양,
즉 미리벌을 서로 점령하기 위해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산성에는 피아간 혈전, 붉은 불꽃, 죽어간 군사의 시체더미,
시커먼 연기가 범벅이 되고, 피아간 군사와 물자를 산성으로
밀고 당겨 올리는 전투가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산성으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군사와 장비, 보급물자를
운송하는 주력의 표현이 "밀(밀어 올려주다)
밀다 추 = 推"로 상상해 봅니다
밀양에는 이런 전쟁의 역사를 거쳐, 조선시대 다시 임진왜란을 거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리벌의 넓고 넓은 들판은
우리나라에서 배고픈 국민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보급창 역할을 한 가장 큰 지역 중의 한 곳이 밀양입니다,
특히 벼는 햇빛과 물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작물입니다,
그래서 농경의 평화적인 지명인 햇빛이 가장 많이 내리 쬐는
밀양 密陽으로 지명이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의 하나로서
1970년대 배고픈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정부는 식량의 주력 작물인 벼 다수확 재배를 위해
우리나라에 3곳의 벼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기호(경기)지방을 관할하는 <수원작물시험장>,
호남지방을 관할하는 익산의 <이리작물시험장>
이리는 익산의 구 지명입니다,
영남지방을 관할하는 밀양의 <영남작물시험장>입니다,
이 3개의 작물시험장 중에서
당시 4000만 배고픈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밀양의 <영남작물시험장>이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즉 영남작물시험장은 벼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전국에서 주도적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