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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8) 2022. 8. 7
성령의 열매(8) - 온유
갈5:22-23 민12:1-13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8번째 열매인 ‘온유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온유(溫柔)란 말은 ‘따뜻할 온’(溫)자에 ‘부드러울 유’(柔)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나 행동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희랍어 원어의 뜻은 좀 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prautes’인데, 이것은 ‘통제된 힘’을 의미합니다.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말합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때에도 급히 분을 내지 않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온유한 삶의 모범>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온유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두 분을 보게 됩니다.
한 분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마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군사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어수선한 와중에 베드로가 칼을 빼서 한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52b-54 “…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군단’은 로마의 군대조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약 4천 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한 개의 군단만 가지고도 웬만한 작은 나라는 그냥 순식간에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압도적인 힘).
여러분, 이것은 허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당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주님의 사명은 성경이 약속한 대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이 중요한 것이지,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가 바로 온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거룩한 뜻에 따라 통제된 힘이 온유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까지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벧전 2:22-23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리고 이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마 11:29a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또 한 분은 구약의 인물 중에 온유로 대표되는 사람, 모세입니다.
모세가 그의 본처 십보라가 광야에서 죽은 후, 이방 여인인 구스(에티오피아) 여자와 재혼하였습니다.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러자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화가 났습니다.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모세를 비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해서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세의 본처 십보라는 미디안 여인입니다(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즉 모세의 첫째 부인도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법이 나오기 이전(신 7:3-4)입니다.
사실 훗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했던 이유는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라고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여인이 섬기는 우상에게 그 마음을 빼앗길까 하여 결혼을 금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의 결혼 금지법을 주신 근본 이유는 혈통이나 피부 때문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
그럼 왜? 혹시 나이도 많은데 무슨 결혼을 하느냐는 이유일까요? 그것이 비방의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피부색의 문제일까요? 구스(에티오피아) 사람이면 피부색이 짙을 수 있습니다. 흑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가 흑인 여인하고 결혼할 수 있느냐’라는 생각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비방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구스 여인 취한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에 딴 욕심이 있어서 모세를 비방한 것입니다.
2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말은 ‘모세 너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하나님의 종이다’, ‘너만 하나님의 일군이냐 나도 하나님의 일군이다’, ‘하나님이 너에게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평소 모세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시기하고 있다가, 비방할 거리를 찾은 것입니다.
미리암은 여선지자였고,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더 높고 낮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합니다. 모세의 지도자 역할도 중요하고, 아론의 제사장 역할도 중요하고, 미리암의 선지자 역할도 중요합니다. 다 중요합니다. 그들이 맡은 은사가 다르고, 직임이 다르고,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누구는 더 높고, 누구는 낮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형제 아론과 미리암의 반역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아론은 대변인, 미리암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 가장 믿을만한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한 그 어떤 반역(고라의 반역과 같은)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믿었던, 의지했던 누나와 형이 자신을 비난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모세의 정확한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면 모세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혈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움직이십니다(“...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2절b).
4-8절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모세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가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불러 회막으로 나오라 하시고는 여호와께서 직접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보통 선지자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선지자들에게는 이상이나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지만, 모세와는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 모세는 또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기도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허물이나 실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충성됨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서 귀히 보신 것은 그의 충성입니다.
그런 다음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했습니다(8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9-12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나병으로 치셨습니다. 나병은 하늘에 내리는 저주의 병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론은 이를 보고 즉시 엎드려 회개했습니다(11절). 가만히 있다가는 자기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나병에 걸릴 것 같으니까 얼른 엎드린 것입니다.
모세도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모세가 미리암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13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모세가 온유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으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반역사건으로 인해 가족 간에 피바람이 분다면 그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의 영광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40년에 걸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한순간의 반역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참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언제나 사소한 것 때문에 여러 갈래로 나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럴 때 우리 모든 구성원이 생각해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혹시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혈기 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도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바로 잡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미리암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14-16절에 보면 하나님은 미리암을 7일간 진 밖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미리암을 징계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다시 일군으로 쓰시려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7일 동안 이스라엘은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행진이 지체되고 만 것입니다 |
<온유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
성경은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범죄’한 일은 무슨 흉악 범죄나,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지은 죄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범죄한 사람’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 형제가 어떤 유혹에 넘어지거나, 부지중에 실수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도 뜻밖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의 잘못을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자,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먼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가혹하게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1절b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잘못은 잘못이기에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수제자였는데, 그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갔습니다. 이제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는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마음으로 베드로를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은 형제의 범죄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c “…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마7:2)고 말씀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판했지만, 내가 비판한 그 내용으로 나도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내가 헤아린 그것으로 나도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나는 "안 그럴 것이다"라고 장담해도 사실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드러난 범죄와 드러난 죄인’,그리고 ‘감춰진 범죄와 감춰진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요 8장에 보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끌고 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혔는데,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시더니,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의 죄성을 일깨우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말씀에 깜짝 놀란 사람은 결국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바라보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인을 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전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말씀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몸을 치면서까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인간이기에, 많은 사역을 감당하면서 유혹과 미혹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너희는>
그러면 온유의 열매는 누가 맺을 수 있습니까? 갈6:1을 다시 보겠습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신령한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를 새번역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신령한 사람들’일까요? 오히려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온유한 심령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는 보다 높은 뜻에 의해 통제된 능력이요 힘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때에 발휘할 수 있는 진정한 창조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실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맺는 말씀 – 온유한 자가 받는 복>
예수님은 산상수훈, 특히 팔복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비결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에서의 ‘새 땅’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온유의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를 우리의 삶 속에서 풍성히 맺으며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쉽게 분내지 말고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땅을 상속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