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인물] 짠 콘녹융 : 태국 불교 '왓 담마까야' 사원을 창건한 여성 출가수행자
Chandra Khonnokyoong
짠 콘녹융(Chandra Khonnokyoong, จันทร์ ขนนกยูง, 찬드라 콘녹융: 1909.1.20.~2000.10.10.)은 태국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t, 남방불교, 소승불교)의 일파인 탐마까이(Dhammakaya, 담마까야) 종단의 여성 출가수행자(매치[mae chi, Mae ji, แม่ชี]: [역주] 태국 상좌부 불교는 여성에게 비구니계를 주지 않고, 재가자와 출가자의 중간 지위로서 '여성 수행자'를 두고 있음)로서, 왓 프라 탐마까이(Wat Phra Dhammakaya) 사원 조직의 설립자이다.
공식적인 칭호는 아니지만, 그녀의 제자들은 그녀를 '쿤야이 마하 라따나 우바시까 짠 콘녹융'(Khun Yay Mahā Ratana Upāsikā Chandra Khonnokyoong)이라고 부른다. 또한 탐마까이 운동 내에서는 '쿤야이 아짠'(Kuhn Yay Acariya, คุณยายอาจารย์: 스승 할머님)이라고도 불린다.
1. 초년기
짠 콘녹융은 1909년 1월 29일 나콘빠톰(Nakhon Pathom) 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주1) 그녀는 정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명상 수행에 입문한 이유에 관해, 사후세계에 있는 사망한 아버지를 만나 자신이 어린 시절에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했던 귀머거리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래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주2) 그녀의 부친은 1921년에 사망했는데,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 저주를 풀어달라고 부탁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주3) |
짠 콘녹융
Khun Yay Maharatana Upasika
Chandra Khonnokyoong |
|
교단 |
상좌부 (Theravada) |
신상정보 |
국적 |
태국 |
출생 |
(1909-01-20)1909-1-20
태국, 나콘빠톰 |
사망 |
2000-9-10 (향년 91세)
태국, 방콕 |
직위 |
근무지 |
태국, 빠툼타니 도
왓 프라 탐마까이 사찰 |
칭호 |
Khun Yay Maharatana Upasika |
후계자 |
프라 텝냔 마하무니 |
종교적 경력 |
스승 |
프라 몽콘 텝무니,
통숙 삼댕판 | |
(주1) Dhammakaya Foundation (2005) Second to None: The Biography of Khun Yay Maharatana Upasika Chandra Khon-nok-yoong (Dhammakaya Foundation, Bangkok) p.12.
(주2) 앞의 책, p.16.
(주3) 앞의 책, p.17. |
2. 수행생활
2.1. 수행과 득도
프라 몽콘 텝무니(Phramongkolthepmuni, พระมงคลเทพมุนี: 1885~1959) 스님이 삶과 죽음에 관한 불교적 지식을 포함하여 탐마까이(담마까야) 분파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주4) 1927년 짠 콘녹융은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의 사찰인 왓 빡남 파시짜른(Wat Paknam Bhasicharoen, วัดปากน้ำภาษีเจริญ)에서 명상 수행을 하는 사람을 찾고자 방콕(Bangkok)으로 가 가정부로 취업했다.
그녀는 방콕의 사판한(Saphan Han)에 있던 리압 식안차논(Liap Sikanchananand) 가문을 발견했다. 당시 이 가문은 '왓 빡남 파시짜른' 소속 여성 출가스행자이자 명상 스승인 통숙 삼댕판(Thongsuk Samdaengpan: 1900~1963)을 집안으로 초청해 명상을 배우던 집안이었다. 짠 콘녹융은 통숙 삼댕판의 명상 교육을 받고 싶어 이 집안의 가정부로 취업했다.(주5) 그녀는 통숙 삼댕판의 지도 하에 2년간 수행을 했고, 자신이 담마까야(dhammakāya, 태국어-탐마까이, 法身, 眞我: 참된 자아) 경지를 체험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도 교감을 나눴다고 주장했다.(주6)
(주4) 앞의 책, p.18.
(주5) 앞의 책, p.22.
(주6) 앞의 책, p.29. |
2.2. 승원생활과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
그녀는 여성 출가수행자(매치)로 수계를 받기로 결심하고, 통숙 삼댕판을 통해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을 만났다.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은 그녀를 자신의 사찰 내에서 가장 깊은 체험을 한 명상 연구자 그룹에 합류토록 한 후,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 수계를 주었다. 짠 콘녹융은 순식간에 프라 몽콘 텝무니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됐고,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도 그녀를 "둘도 없는 첫째 제자"라고 할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간 중, 탐마까이 분파의 추종자들은 짠 콘녹융과 루웡 뽀 솟(Luang Por Sodh: [역주]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의 당시 칭호) 스님이 명상의 힘을 통해 연합국의 방콕 공습을 막는다고 믿었다.(주7) 당시 태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다. 탐마까이 신도들은 또한 짠 콘녹융이 기적을 일으켜 원래 방콕에 투하될 원자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보낸 것이라고도 믿었다. 훗날 역사학자들과 여타 종단의 불교학자들과 승려들은 탐마까이 신도들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고 조롱했다.
(주7) Cheng, T-J & Brown, D.A. (2006) Religious Organizations and Democratization: Case Studies from Contemporary Asia (New York, M.E. Sharpe) p.95. |
2.3. '탐마까이' 가르침
1959년 프라 몽콘 텝무니 스님이 사망(입적)하자, 쿤야이 짠 콘녹융이 '왓 빡남 파시짜른'에서 '탐마까이 전통'의 새로운 세대를 이끌었다.(주8) 그녀의 가르침은 너무도 큰 인기를 얻어서, 1975년에는 명상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왓 빡남 파시짜른' 사찰이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이상으로 불어났고, 결국 새로운 명상센터를 설립하게 됐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제자들이 대학을 졸업하자 그들에게 수계를 주어 출가를 시켰다. 그녀의 제자 중 최초로 출가한 이가 [오늘날 '탐마까이 재단'의 이사장인] 프라 텝냔 마하무니(Phrathepyanmahamuni: 1944~ ) 스님이다.
귀족 여성인 패타야퐁 위수다티폿(Lady Prayat Phaetayapongsa-visudhathibodi)은 새로운 사찰 건립을 위해 32만m2(약 10만평) 면적의 토지를 기증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왓 프라 탐마까이' 사원 단지이다. 짠 콘녹융이 이끌던 '탐마의 후예들'(Descendants of Dhamma)이란 단체는 당시 자신들 명의의 소유라곤 현금 3,200바트(=80달러)가 전부였지만, 다음과 같은 맹세(=서원)를 한 후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나섰다.
우리는 탐마까이의 길을 따르면서, 새로운 명상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살과 피, 육체와 영혼, 지식과 부를 부처님 전에 바치겠나이다. |
그녀는 비록 문맹이었지만 학문 외적인 불법 수행의 실례로서 명성을 얻었고, 그녀에게 이끌린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대학 졸업자였다.(주9) 그녀는 빠툼타니(Pathum Thani) 도에 위치한 '왓 프라 탐마까이' 사찰의 창건자로 인정받고 있다.(주10)
(주8) Heikkilä-Horn, M-J (1996) Two Paths to Revivalism in Thai Buddhism: The Dhammakaya and Santi Asoke Movements, Temenos 32, pp.93~111.
(주9) Gombrich, R. (1996) Freedom and Authority in Buddhism, in: B. Gates (Ed) Freedom and Authority in Religions and Religious Education (London, Cassell), p.11.
(주10) Scott, R.M. (2006) A new Buddhist sect?: The Dhammakāya temple and the politics of religious difference, Religion 36(4) p.222. |
2.4. '왓 프라 탐마까이' 사원
새로운 사찰은 남방불교의 명절 마카 부차(Magha Puja Day, 만불제) 날인 1970년 2월 20일 준공됐고, '순 푸타짝 빠띠빠띠탐마'(Soon Buddhacakka Patipatdhamma: 담마수행센터)라고 명명됐다.
재원의 조달은 짠 콘녹융과 프라 텝냔 마하무니가 담당했고, 공사 책임은 당시엔 재가 신도였던 프라 파와나 위리야쿤(Phrabhavanaviriyakhun: 1941~ ) 스님이 맡았다. 사원 경내로 이어지는 운하의 굴착과 건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의 손으로 이뤄졌고, 경내의 나무들 역시 수작업으로 조경됐다. 나무들의 조경 당시, 짠 콘녹융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그녀는 '쭐라롱꼰 대학' 소속의 한 의사의 간호를 통해 회복했고, 다시금 사원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원의 건설기에 짠 콘녹융은 사찰 재정의 확보 뿐만 아니라 사찰 생활의 규칙들도 제정했다. 오늘날 '왓 프라 탐마까이' 사원의 승려들은 자신의 손님들을 자신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아니라 반드시 공개된 방에서만 맞이해야만 한다. 또한 그녀의 지침에 따라, 남녀 수행자들은 법당에서도 각기 양편으로 나눠서 앉는다.
3. 말년의 삶
쿤야이 짠 콘녹융은 말년에도 사찰 내 활동에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찰의 성공적인 교세 확장을 본 후, 왜소한 문맹의 여성 출가수행자가 이곳의 운영을 관장한다는 사실에 많이들 놀라곤 했다.
2000년 9월 10일, 그녀는 방콕의 '까셈랏 병원'(Kasemrat Hospital)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2002년 2월 3일 그녀의 장례식(다비식)이 거행됐을 때, 태국 전역의 사찰 3만 곳에 온 승려 10만명이 마지막 존경심을 표시했다.(주11)
(주11) Rajakaruna, J. (2008) Maha Dhammakaya Cetiya where millions congregate seeking inner peace, Daily News: Sri Lanka's National Newspaper, 2008-2-20. |
|
(동영상) 쿤야이 짠 콘녹융 스승의 다비식을 기록한 동영상. 규모도 거대하지만 이 교단이 지닌 의례형식의 독특성(?)이 눈길을 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군사문화적 요소가 짙게 배어 있다. |
* 출판된 전기
- Dhammakaya Foundation (2005) Second to None: The Biography of Khun Yay Maharatana Upasika Chandra Khon-nok-yoong (Dhammakaya Foundation, Bangkok) ISBN 978-974-92746-6-8
|
첫댓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종단의 종교 의례에는 뭔가 묘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뭔지 모르겠네요..
뭔가 한국의 천태종 구인사 같은 느낌도 좀 있고..
신천지나 통일교와 유사한 느낌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또 명상을 위주로 한다니..
그게 또 의아하고 말이죠,,
정말 평가가 안 되네요..
장례식 동영상을 보니..
불사조 상여의 크기가 캄보디아 시하누크 전 국왕의 상여보다
몇배는 더 크겠네요.. 어마어마합니다..
2013년에 사망한 태국 승왕 장례식보다도
규모가 큰 것 같은데요..
기분이 그로테스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