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을 떠나 어느 결에 반시간이나 지나온 이곳은 서해 한 바다, 10월 11일 오후 2시. 여기 이 바다, 홀로 일없는 갈매기 두셋, 배 앞을 돌아 배 뒤로 빠져 멀리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 이제 창망(蒼茫)한 바다, 하늘과 닿았는데, 물결소리 밖에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군데군데 이름없는 바위섬-천만년 세찬 비바람에 깎이고 깎인 우뚝솟은 돌부리-가파른 낭떠러지 아래 부딪치곤 깨어지는 물결의 연기-거기 반사되는 가을 석양-석양을 띠고 어디론지 떠가는 조그마한 고깃배-그 속에 앉은 머리 허옇게 센 늙은이와 어린 아이-이같은 정경쯤 처음보는 것은 아니건마는, 오늘 별로 내 마음이 왜 이같이 흔들립니까, '다정'은 잠깐 버려두고, 몸만 이 배에 오를 것을....."월미도 멀리 돌아 어드메로 가는 길고/ 강도 구십 리 반이나 벌써 지났나뵈/ 끝없이 지는 해 따라 물로 물로만 가고지고" 무심코 이 노래를 부르고서, 나는 내 가슴 속에 깃들이고 있는, 표랑의 신이 아직도 잠들지 않은 줄을 알았습니다.
생각하면 바랄 무엇 없는 곳에 거의 관성적으로 머물러 있어 사노라 사는 것이 사내의 족히 할 일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내 하늘이 없는 사람에겐 간 곳마다 그 하늘이 내 하늘이요, 내 양식이 없는 사람에겐 간 곳마다 그 양식이 내 양식이니, 오늘 여기 오히려 은전으로 남겨준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다만 저 표랑의 길이겠습니다.
영종도를 지나며 나는, "영종도 산언덕에 잎지는 가을나무/어가(漁家) 몇 집인고 사람은 안 보이네/누고서 그림이라노 그림이래도 슬프구나" 읊었습니다. 다른 섬을 감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영종도의 적막한 어촌만 바라보고 섰습니다. 사람은 이런 외로운 섬 풍경을 볼 적마다 혹은 평화를 노래하고 혹은 화의(畵意)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림이라 하고 보아도 가슴에 이는 슬픈 정을 눌러 놓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요, 괴로운 실생활의 한 개 표본임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영종도를 지나 얼마쯤 가노라니, 뱃길이 어디로 열렸는지 알 수 없도록 사방이 산으로 막혔습니다. 어디로 가도 언덕에만 대일 호수의 형세입니다. 그래도 배는 섬과 섬, 산과 산 사이로 용케 알고 빠져나갑니다. 산은 갈 길을 막으려 하고 물은 애써 터주려 하여 심상치 않은 조화의 재미나는 장난이 여기 한바탕 벌어져 있습니다. 두 팔을 벌려 가는 길을 막는 듯하면서도 웃으며 옷자락을 잠깐 걷어 지나갈 곳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미소 가득한 예쁜 여인의 짓같이 생각도 됩니다. 자연은 가는 곳마다 제 생긴 그대로 신기와 재미를 간직할 줄을 다시 한번 알겠습니다. 이같이 막힐 듯 열린 길로 '손돌목'이란 곳을 지나갑니다.
갑곶에 배를 대고
해상을 지나오는 동안, 시간은 두어 시간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고고(孤苦)한 생각을 못버리는 나그네에게는 아깝고, 알뜰하고, 고맙고, 느꺼워 그렇게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강화도(江華島)! 둘레 삼백리가 채 못되는 섬, 삼면은 황해로서 실로 그 요충이 되고, 일면은 경강을 끼어 또한 그 목구멍이 되니, 천성으로 험절한 곳이라, 그로 인하여 연출된 역사를 바로 전대의 왕조에서 보는 것이며, 해양을 향하여 선 여기 곧 국도(國都)의 관문인 곳이라, 그로 인하여 이루어진 역사를 근대에서 보는 것입니다.
고려대로부터 조선조까지 한국민족의 발전사상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사실들이 거의 이 해상과 섬을 무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도 하려니와 진실로 개인 운명의 승침(昇沈), 민족 세력의 흥망이 미묘도 하고, 무상도 하고, 쓰린 생각에 눈물지다가도 돌아서 그 유머에 웃지 않을 수 없고, 허무하여 버리고 싶으면서 도리어 엄연한 현실과 맞붙여 보고도 싶은 온갖 심정을 맛보는 곳이 여기 이 해상인 줄을 알겠습니다.
이같이 무겁고도 괴로운 생각에 잠긴 채 강화도라 갑곶(甲串)에 배를 대니, 때는 거의 석양에 가깝습니다. 갑곶, 강화의 가장 오랜 옛 이름의 자취를 홀로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강화는 고려 고종 때에 이곳으로 천도한 일이 있었던 까닭에 강도(江都)라 부르게 되었고, 이외에 심주(沁州)란 별칭도 있었지만, 이곳을 부르던 옛 한국말은 갑비고차(甲比古次=가비고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지'란 말이 '곶'이란 뜻으로 쓰였고, '고지'란 말은 원래 '입(口)'이란 뜻에 틀림없습니다. 육지가 바다속으로 쑥 내밀어 입주둥이처럼 생긴 곳을 '고지'라 하는 것이니, 이곳 옛지명의 명칭이 혈구니 해구니 하는 구(口)자의 명칭이 그 형상으로 생긴 말인 동시에 '고지'란 한국어의 대역이라고도 볼 것입니다.
갑곶진(甲串津)에서 내려, 북으로 뻗친 신작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갑곶에 대한 어의를 생각하는 동안, 운치있는 주막이 내 발을 잠깐 머물러 유혹도 하건마는, 원래 한 잔의 취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산 모퉁이 솔밭 그늘 밑 풀 뚝방을 빌려 앉았습니다. 강도에 해는 저물어 느린 별살이 질펀한 들판 먼길에 가로누웠고, 어깨 위 머리 위에는 석양을 아껴 우는 저녁 새들이 유난히도 재잘거립니다.
쉬지 않고 지나가는 길손도 있거니와 내 곁에 와 같이 앉았다 일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늙은이 쉬어가며, 너무도 오래 앉아 있는 내가 수상도 한지, 말은 없되, 날 한 번 보고 해 한 번 보는 것이, '해 다 저문데 저 사람 왜 안 가노'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스스로 노래 한 장을 불렀습니다. "해 다 저문데 저 나그네 / 오래도 쉬는구려 // 읍이 예서도 / 십리하 한참인데 // 새 소리 그치건 가지요 / 당신이나 먼저 가시소"
옷깃에 젖어드는 밤비소리
강도의 대동맥이 되어 흘러내리는 동안 동락천(東洛川)! 냇물을 끼고 더듬어 황혼에야 읍으로 찾아들어가 숙소를 정하고서 저녁밥 기다리는 동안 창에 지쳐 견자산(見子山) 저문 빛을 바라봅니다. 밤! 여관의 내 방 등불 아래는 주인과 나그네 몇 사람이 둘러앉아 고도와 사적을 이야기하기에 시간가는 줄을 모릅니다. 삼경이 넘어 서로 다 헤어지고, 등불마저 낮추고서 피로한 몸을 목침 한 개에 의탁하여 누웠으나, 칠백년 강도 풍운이 어지러이 나타나 다감한 나그네의 눈에는 잠이 오지를 아니합니다.
목침을 세웠다 뉘었다 마침내 일어앉아 주인에게서 빌려온 [강도지(江都誌)]의 책장을 넘깁니다. 실로 강화의 역사는 비극 아닌 자가 없습니다. 멀리 단군의 성적은 비켜두고라도 고려조 이후 7백년에 이른 온갖 사적은 눈물없이 적을 수가 없을 겝니다. 이미 눈물로 적힌 글이라 또한 어찌 눈물없이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적게로는 한 사람의 기구한 운명, 크게로는 국가에 영일(寧日)이 없었던 것, 그리하여 치욕의 작년은 비애의 금년을 낳고, 비애의 금년은 불행의 명년을 낳아 놓은 것입니다.
불빛 깜박이는 등불 아래 말없이 앉아, 고요히 눈을 감고 천고의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듣노라니, 소소한 밤비소리-고도에 내리는 가을 밤비 소리가 옷가슴 속속이 젖어듭니다. 나는 이 괴로운 밤비 소리를 아니 들을래야 아니 듣지 못하는 '빗소리에 포로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빗소리가 다른 데서 듣는 심상한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을비 하룻밤이 지나간 12일 아침, 나그네를 위하여 날은 다시 밝았습니다. 지금 나는 도중 노방에 있는 선원상공충의비 앞에 서서, 3백년 전 인조 병자란의 치욕적 역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려 고궁 폐허의 가을풀을 밟아보려 합니다. 이곳 북방 언덕 위 수림 속에 있는 행궁(行宮)의 옛터를 찾으니 지금은 거의 유적조차 알 수 없을만큼 가을풀이 우거지고 우수수 나뭇잎만 떨어질 뿐입니다.
위 아래 두곳에, 하나는 장녕전, 하나는 만녕전이라고 전하여 일러오매, 또 무덤앞 빗돌도 남아 있어 아직은 지날 손이 자취쯤은 알 수 있어도 이것이나마 안 사람이 마저 없어질 날도 얼마 아니하여 오리라고 생각하매 더 한층 무상한 가슴을 채웁니다.
나는 고궁 폐허에 오르자마자 노래 몇 장을 부르며 산모퉁이를 돌아 더듬어내리는 동안 잠깐 고궁 사적을 헤아려봅니다. 장녕전은 숙종 때 유수 김구가 세운 것을 그 다음 경종 때의 유수 홍계적이 개건한 것이요, 만녕전은 유수 조태로가 세운 것으로 영조 때에 명명한 것입니다. 이곳을 흔히 고려 고종 때의 고궁지처럼 말하는 이도 있고, 또 강화사람들까지 그렇게 아는 모양이나 실상 이는 인조 병자란을 치른 다음 숙종조 이후에 행궁으로 세운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고궁지는 동남에 있는 견자산입니다.
철종의 잠저, 용흥궁
그렁저렁 어느덧 정오의 시각, 고궁폐허를 돌아내려 마을의 한 조그마한 초가를 찾아드니, 철종 잠저(潛邸)의 옛터라 합니다. 좁다소라한 골목쟁이를 돌아 5척키도 오히려 크다 할, 흔들거리는 조그마한 문안으로 기어드니, 마당귀에는 손바닥만한 채전(菜田)이 있고, 거기엔 잎사귀를 일부러 자르지는 않았으련만, 고갱이만 남은 배추 몇 포기 어쩌다 흘린 씨알에서 난 것 같이, 군데군데 마지못해 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꽂힌 듯하고, 헐어진 돌담 위엔 닭이 두 마리, 그 아래 노파 얼굴이 하나, 그들은 움직일 줄 모르는 환등기의 한 장면 같습니다.
이렇듯 호젓하고 쓸쓸한 집이 바로 한 나라 군왕의 옛집이었다는 것은 만일 여기 이 마당에 잠저비가 없었더라면, 어느 사람도 믿기 어려운 말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일이라, 조선사에서도 최근대에 속하는 일인만큼, 우리 오늘의 현실과 더욱더 인연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마는 헌종이 23세에 후사없이 하세하여, 순원왕후 김씨가 영조의 증손되는 전계군의 자를 맞아 위에 올리니, 이가 곧 철종입니다. 과연 운명이란 모를 일입니다. 강화의 농가집에 엎드려 새끼꼬고 신삼는 빈한한 생활을 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군왕의 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소설 이상의 소설일 수밖에 없고, 또한 동시에 인생행로의 유모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강도를 순례하는 사람으로 선원상공비를 보고, 궁지를 보고, 철종 잠저를 지나면, 강도에서 난 사람, 강도에 살던 사람으로 우리가 과연 오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조의 시인으로 동방대가의 칭을 받던 백운거사 이규보는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어 골육조차 이곳 흙에 묻혔으니 가위 강도의 시인이라 할 것이며, 저 고려 때의 문무전재의 행촌거사 이암(李 )도 그가 방외의 벗을 삼았던 명승 식영암과 더불어 강도의 잊을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말의 목은 선생은 소시에 이곳으로 와 화개산중에서 독서하였고, 임란 적 권율장군은 만년을 여기 와 별업에 거하였으니, 이 또한 강도와 함께 기억할 인물입니다. 오류천에 집을 짓고 소요자적한 시인은 권석주였거니와 정송강 또한 이곳에서 무슨 단가(短歌)를 불렀고, 선원 김상용은 이미 말하였고, 병란 당시 삼학사 중 윤집과 홍익한은 다 여기 거하던 이였으니 어찌 우연한 일로만 볼 것인가, 이밖에도 정하곡같은 학자며 이영제 같은 문장 등 많은 인물을 셀 수가 있습니다.
송림속 전등사의 가을밤
마을을 순람하고서 오후 1시경 삼랑성으로 향했습니다. 역사 얽힌 남문을 벗어나서 남으로 남으로 들판을 끊어 질러 신작로로 30리를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간밤에 비오던 뒤끝이라, 등에는 가벼운 땀방울이 촉촉히 맺히는 채로 바람은 가을 기운을 함빡 머금었다가 옷가슴에 뿌립니다.
삼랑성에 이른 때는 이미 황혼입니다. 삼랑성 안으로 들어서서 울창한 송림 길을 더듬어 오르자, 쳐다뵈는 언덕 위에 금빛 푸른빛의 찬란한 절집 몇 채가 멀리 온 길손을 맞아, 서로 먼저 보이려는 듯 삐죽삐죽 처마 끝이 나타나니, 여기가 저 유명한 전등사입니다. 정전 앞마당으로 들어서서 마중하는 주지화상과 명함을 바꾸었습니다. 유리궁같이 맑고 깨끗한 도량이 어떻게나 마음에 드는지 선바람에 지팡이를 그대로 끌고서 경내를 배관하고도 싶으나 한정(閑靜)을 위주하는 이곳에 조급한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우선 선원의 한 방을 빌려 들어 수족을 깨끗이 씻기로 합니다.
고요한 저녁입니다. 동쪽으로 멀리 트인 바다 위로서 등두렷한 보름달이 떠오르는 고요한 저녁입니다. 저녁밥을 먹는 체 마는 체 상 물리기를 재촉하며, 뜰에 내려 거니는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옳을는지 여기 또 한번 말과 글이 끊어지고 맙니다.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거니는 발걸음이 문득 선 곳에 장명등(長明燈)이 있어, 때마침 스님이 등에 불을 켜고 그는 또 말없이 돌아갑니다. 내가 평소부터 가장 사랑하는 장명등! 나는 잠깐 이 장명등 아래 섰습니다. 오! 이파(범어로 등. Dipa)! 신불 지혜의 광명함을 표시하는 등명(燈明)! 더구나 이름 맞추어 전등사의 장명등은 한결 더 느꺼운 인상을 줍니다.
이 전등사는 그 초창 연대를 잃어버렸고, 또 그 구명도 전하지 아니합니다마는 충렬왕 때에 정화공주가 인기(印奇)란 중을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박혀다 이 절에 두었다 하고, 또 불전에 옥등(玉燈) 하나가 있었으니, 그도 또한 공주가 시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절 이름을 전등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러한 간단한 사적이나마 사기(寺記)를 통하여 겨우 전할 뿐, 지금엔 대장경도 옥등도 간 곳을 모릅니다.
고개를 다시 드니 티하나 없는 하늘엔 둥근 달이 멀리 바다 위에, 가까이 송림 위에, 은물결 그윽한 무늬를 그림 그리는 달빛! 송림 속으로부터 불어오는 가을밤 서늘한 바람. 바람에 실려오는 뒤 언덕 작은 불당의 풍경소리. 이따금 지나가는 늙은 중의 모습. 이 아름다운 밤, 이 고요한 밤에 나는 성자 대자연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넓고 큰 장엄무궁한 진리를 적어놓은 대경전을 신독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