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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9) 2024. 8. 14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왕상3:16-28
<듣는 마음을 구한 솔로몬>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굉장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현듯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과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안전장치인데, ‘산당’을 찾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고, 기브온 산당에는 여호와의 성막이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된 이후에도 ‘산당’은 훼파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오래도록 산당 제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정략결혼’을 통해 얻은 여러 이방신을 섬기는 부인들로 인해 우상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변 나라와의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이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고, 나라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기브온의 산당에서 ‘일천번제’라는 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자신을 비롯한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도자의 일종의 ‘속죄 예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백성은 많으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구하였습니다. ‘듣는 마음’이란 ‘재판하는 데에서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즉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도 주고,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넘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결정적인 재판이 벌어집니다. 이름하여 ‘창기의 재판’이 그것입니다.
<다툼의 이유>
그럼 ‘창기’ 두 여자가 재판을 받으려고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16~22절 “그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17 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18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20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22 다른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솔로몬이 지혜를 받은 그즈음에, ‘창기’(娼妓) 두 사람이 재판을 받기 위해 솔로몬에게 왔습니다.
‘창기’는 몸을 파는 ‘매춘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조놋’(zonoth)은 본래 주류 판매 허가를 받은 ‘술집 주인’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이 두 사람은 한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먼저 해산을 한 후, 사흘 후에 다른 여인이 해산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기가 밤에 자다가 그만 자기 엄마에게 깔려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외적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DNA 검사를 하면 친자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시대에는 누가 친엄마인지 분별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아기가 엄마를 알아볼 만큼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진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대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지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솔로몬은 명판결을 내립니다.
25절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혹자들이 비평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이 명령은 결코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한 불확실한 모험이 아닙니다. 기브온 산당의 일천 번제 이후 솔로몬은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통찰력과 총명한 지혜를 하나님께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두 창기 사건의 본질을 명쾌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아이를 죽인 어미는 자신의 부주의와 소홀로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과 수치감, 그리고 산 아들을 품고 있는 어미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순간 아이를 바꿔치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실제로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그 산 아이에 대해서 진짜 어미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적 모성애(母性愛)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솔로몬은 신적(神的) 지혜로 이미 간파했고, 따라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솔로몬은 이처럼 산 아이를 칼로 잘라 두 여자에게 반씩 나누어 주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즉, 아이에 대한 모성애를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진짜 엄마라면 칼로 쪼개어 나누어주라는 판결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26절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진짜 엄마의 마음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아들의 아픔이 엄마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붙는 것이지요.
결국, 진짜 엄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를 포기합니다. 분명히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가짜 엄마에게 주어서라도 살리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엄마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고 반응합니다. 그녀에게는 ‘모성애’도, 함께 아파하는 ‘긍휼의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짜입니다.
솔로몬은 진짜 엄마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판결을 내립니다.
27~28절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 28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그 아이를 진짜 엄마의 품에 돌려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을 두려워하였다’는 말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왕으로서 권위가 세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왕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모셔 들였더니 하나님의 지혜가 그 속에 자리 잡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제대로 세워진 것입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첫 번째로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지금처럼 인권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창기’는 여성 가운데서도 가장 멸시받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재판은 지방의 백부장과 천부장에게 배당된 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능히 해결하지 못하자 솔로몬에게까지 온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은 가장 최하위층의 사람들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그 땅의 가장 낮은 사람들을 보호라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땅이나 구역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속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최하층인 ‘창기’들이 가장 지혜로운 왕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아래로부터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사61:1-3)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곳에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가장 낮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두 여인의 다툼을 통해 우리는 자기중심적 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이를 압사시키고 남의 아이를 빼앗아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자기 잘못을 숨기려는 의도, 상대 여인에 대한 질투심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경제력과 기업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들은 노년에 자신을 공양할 기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해하고 속이면서까지 거짓 주장을 늘어놓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자기 것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사한 협잡을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을 해하는 악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종교에서도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를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 15).
우리 자신이 이런 탐심을 극복해야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셋째,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안다”는 것입니다.
바꿔치기 당한 어머니는 ‘죽은 아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혹시 자신이 자다가 실수로 깔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두 번째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안다”는 것입니다. 진짜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압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특징을 금방 기억합니다.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21).
자기가 낳은 아들을 대충 보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뚫어져라 사랑의 눈으로 구석구석 보았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만져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습니다만, 어머니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시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시고 우리의 특징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 생활의 필요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넷째,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마음이 불붙는 사랑’입니다.
솔로몬의 판결을 들은 어머니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26절).
깜짝 놀란 진짜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하고 말합니다. 반면에 가짜 어머니는 솔로몬 왕의 판결에 그거 좋겠다고 맞장구를 치며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산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26)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불붙는다’는 말은 ‘심장이 타는 듯한’ 아픔을 뜻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마음이 불붙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마음이 불붙는 사랑’은 어디서 들어보신 사랑 아닙니까?
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마음이 불붙는 사랑’입니다.
호11:1~2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고통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해하는 아이를 팔에 안으시고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토닥거림처럼 사랑하셨습니다(호 11:3).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건만,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하게도 마치 자기들 스스로 성장한 양 교만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어 풍성한 수확이 많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잘해서 잘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신 7:13). 성공하여 잘살게 된 것이 마치 자신들의 치적인 양 행동을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염려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러한 경고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신8:12~14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슬프게도 하나님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줄 이방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부르셨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앗수르의 지배라는 매를 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이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여기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망한 도성입니다. 그들 같이 완전히 망하도록 두시지는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매를 드시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애끊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라면 배신을 당했다면 분노에 불처럼 타올라서 좀처럼 꺼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호11:9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는 순간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것’같아서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 선지자의 결혼 생활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고멜’이라는 음녀를 만나서 결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매를 낳았지만, 고멜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멜이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노예로 잡혀 살고 있는 고멜을 찾아가, 주인이 제시한 노예 값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구해 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방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값을 치르면서까지 자신의 곁에 다시 두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까지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말씀하시면서(눅15:20),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신 사랑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친자 확인 소송 판결’을 통해,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사랑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얼마나 크신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오늘 현실 속에서 버림받는 듯, 혹은 징계를 받는 듯한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아니 버리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불붙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통과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시고, 회복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끝없이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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