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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사시대
구릉과 평야가 발달하고 중, 소 하천이 많고 바다가 인접한 평택지방은 선사시대 사람이 살만한 지형조건을 갖췄다. 이 같은 지형은 사냥과 채집활동을 하며 이동생활을 하였던 구석기시대보다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 이후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에 사람이 살만한 조건이다. 평택지방에서 구석기 유적의 징후가 있거나 유물이 발견된 곳은 포승면 원정리 멍거니, 희곡리, 홍원리, 석정리, 안중면 현화리, 대반리, 송담리, 현덕면 운정리, 청북면 용성리유적이 있으며, 신석기시대 유적도 고덕면 방축리, 오성면 양교리, 포승면 원정리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지역은 구릉이 형성되었고 바다와 가깝거나 조수가 유입되는 하천과 갯뻘 주변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형은 소규모 농경을 할 수 있고, 물고기와 어패류가 많아서 어로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청동기유적으로는 포승면 원정리, 안중면 현화리, 대반리, 청북면 백봉리, 후사리, 토진리, 안화리, 진위면 견산리, 현덕면 기산리유적이 있다. 이 지역의 공통점은 바다나 하천과 인접한 반도이고 구릉과 작은 협곡이 형성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은 배산임수 지형으로 청동기시대 보다 발달된 농경과 목축 그리고 주거환경으로 적합하다. 그러므로 청동기, 초기철기인들은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활동과 어류와 어패류를 채집하여 생활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평택은 북쪽으로 한강, 남쪽으로 안성천, 서쪽으로 아산만과 서해바다를 두고 있으며, 중국의 황하유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일찍이 해로와 수로교통이 발달하고 해양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이다. 삼한시대에 평택은 마한(馬韓)의 영역이었다. 평택주변에는 화성군에 원양국, 상외국, 수원 부근에 모수국, 양성방면에 신분활국, 직산에 목지국과 같은 군장국가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평택지역에 영향을 주었을 나라는 교통이 발달한 수원의 모수국, 양성의 신분활국, 직산의 목지국이었을 것이다. 특히 직산의 목지국은 가장 강력하여 마한을 영도했던 나라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평택지방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고구려로부터 온조세력이 직산방면까지 남하하였다가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평택지방은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온조세력이 직산의 위례성에 자리를 잡았다가 곧 한강 부근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근거이다. 백제는 서기 9년과 18년에 마한의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아산만 지역을 확보했으며, 서기 238년에는 고이왕이 지금의 진위면의 부산(釜山)에서 사냥을 했을 만큼 이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 평택지방은 백제의 영향권에 확실히 포함된다. 이 시기 “근초고왕이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 왕을 사신을 보내 나무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웅천(熊川)은 지금의 안성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제가 평택지방에 관심을 보인 것은 대 중국 교류의 전진기지였던 한강하류지역의 배후지역이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백제는 5세기 후반(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안성천 북쪽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 평택지방도 현재 팽성읍 지역에 있었던 하팔현만 백제의 영토로 남고 부산현(진위현), 용성현, 광덕현 등 대부분의 지역이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점령지의 지명을 바꾸고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는데, 백제 때 송촌활달이라고 불렸던 옛 진위현이 부산(釜山=솟뫼)로 안중방면에 있었던 용성현이 상홀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오래되지 않아 백제는 국력을 회복하고 한강남쪽지방을 재정복하기 시작하였다. 한강유역을 빼앗긴지 8년이 지난 482년에 백제가 한산성(한강유역)을 말갈족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이 때쯤이면 평택지방과 한강 남쪽지방이 다시 백제영역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국력 회복으로 백제 성왕은 538년에는 부여로 도읍을 옮겼고, 551년에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하류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다시 빼앗기면서 한강 남쪽지방은 혼란에 빠졌다.
신라가 한강유역에 확보한 시기는 553년 진흥왕 때이다. 이 시기 안성천 북쪽지방은 신라의 영역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평택 서북부지역을 확보하면서 남양만의 당항성은 중국과 교류하는 창구가 되었다. 564년 신라는 당항성을 통하여 북제라는 나라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하였기 때문이다. 7세기 중반이 되면 신라는 안성천을 넘어서 평택현(팽성) 지역과 직산 일부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642년에 백제 의자왕이 안성천 북쪽을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는 전과를 올리면서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 때맞춰 고구려도 한강 북쪽지방인 경기도 북부지역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대 중국 교통로였던 한강하류지역과 당항성이 위협받자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강국이었던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궁지에 몰린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唐)은 신라의 협조를 받아 우환거리였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660년에는 백제가 668년에는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당나라의 한반도 전역 지배야욕을 나당전쟁을 통하여 물리친 신라는 제한적이나마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통일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평택지방은 군사적 중요성이 약해지면서 중앙정부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이 시기 평택지방은 신라의 변방이면서 수해와 염해가 많고 습지가 대부분이어서 농경에 부적합한 척박한 민중의 땅이었다. 신문왕 때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하는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이 때 평택지방은 신라의 최북단에 위치한 한산주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 설치된 서원경의 관할을 받았다. 그 후 경덕왕 때는 전제왕권강화를 위해 군현제를 근간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위지방의 부산현이 진위현으로, 양성현에 속했던 영신현이 영풍현으로 바뀌어 수성군(수원)의 영현이 되었다. 또 하팔현을 불렸던 팽성읍 지역은 평택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탕정군의 영현이 되었고, 평택 서남부 지역에는 광덕현(현덕면)이 설치되어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던 거홀현(상홀현)도 거성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수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3)고려시대
삼국통일 후 번영했던 신라는 혜공왕 때 일어난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중앙의 진골귀족들은 권력쟁탈전을 몰두하였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은 피지배층이 억압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였다.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로 살 수 없게 된 민중들은 유민이 되거나 도적떼가 되었고, 집단으로 봉기하여 지배층에게 대항하였다. 농민봉기는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던 진성여왕 때 가장 심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새 시대와 새로운 국가건설을 내세우는 호족과 같은 지방세력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죽주(죽산)의 기훤, 원주의 양길, 나주일대의 견훤, 송악과 철원일대의 궁예가 대표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민중들로부터 새시대의 비전과 지도력을 인정받은 궁예와 견훤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견훤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도, 충청도 일부지역을 배경으로 (후)백제를 세웠으며, 궁예는 송악과 철원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에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평택지역은 후삼국 초기 기훤의 영역이었다가 나중에 양길과 궁예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새 국가를 건설하면서 고려의 영역에 속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궁예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반란이 있었지만 반란과 동요가 진정되자 많은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성군(수원)의 호족 김칠과 최승규가 200여 명의 무리와 왕건에게 귀순하였는데, 그 댓가로 수원이 수주(水州)로 승격하였고 진위현을 비롯한 주변 군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성종과 현종 때 군현제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지배력이 약하여 성종 때에는 각 지방의 중심지역 12곳에 목(牧)을 설치하는데 그쳤고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이 설치되었다. 이 때 평택지방은 진위현의 경우 광주목의 통제를 받으면서 수주(수원)의 영현이 되었고, 평택현은 청주목의 통제를 받으면서 천안부에 관할을 받았다. 그 외에도 평택 서부지역의 용성현이나 광덕현 그리고 동삭동의 영신현은 수주(水州)의 속현이 되었으며, 평택현 서쪽의 경양현(계양)은 천안부에 속하였다. 일반 행정구역 외에도 향, 소, 부곡이나 장(壯)과 같은 하급 행정구역이 있었다. 평택지방에는 특히 부곡이나 장(壯)이 많이 설치되었다. 예컨대 서부(포승면 일대)지역에는 포내미부곡, 육내미부곡, 중부지역(고덕, 송탄)에는 백랑부곡, 송장부곡, 북부지역(서탄면)에는 천장부곡 등이 있었고, 고덕면, 진위면 등에 오타장, 종덕장, 신영장, 청호역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평택지방은 교통과 통신은 발달했지만 지대가 낮고 농경지가 적으며 바다에 인접한데다 하천과 습지가 많아서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실은 호(戶)수에도 나타나는데, 고려 중기의 통계자료를 보면 진위현 221호, 평택현 179호에 총 1237명(진위현 535명, 평택현 704명)에 불과했다. 이 통계에는 광덕현이나 용성현, 각 향, 소, 부곡 등이 빠졌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작은 군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수주(수원)를 비롯한 주현(군)의 수탈과 향리 및 지배층의 수탈이 심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주목되는 사건이 무신정권기에 발생한 진위민란과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다. 진위민란은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했던 고려 고종 때 발생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몽고가 강성해지면서 거란을 압박하자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여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씨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강화에만 골몰하여 사병모집에만 열중하고 거란군을 막으려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개경과 가까웠던 진위지방의 호족과 백성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호족이었던 이장대와 이당필, 김예 등이 주동이 되어 민란이 일어났다.
왜구는 고려말, 조선 초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해적들을 말한다. 이들이 고려에 침입이 시작된 것은 고려 고종 때였지만 충정왕 2년(1350)까지는 간헐적이었다. 그러다가 충정왕 2년 고성, 죽림, 거제, 합포에 침입한 이래 빈번해지더니 충정왕 3년에는 개경과 가까운 남양군과 쌍부현(경기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며,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그 피해가 날로 극심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해안에 위치한 평택지방에 큰 피해를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 7년(1358) 면주(당진군 면천면)를 거친 왜구가 용성현(안중면 용성리)에 침입하였고, 공민왕 9년(1360) 5월에는 평택, 아주(아산), 신평과 용성현 등 에 침입하여 10여 현을 불태웠다. 공민왕 21년에는 양광도 순무사 조천보가 용성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하였고, 우왕 3년(1377)에는 평택현과 경양현(팽성읍 노양리 일대)을 노략질하였다. 그 후에도 종덕, 송장, 영신현 등 평택지방의 여러 고을에 침입하였는데, 최공철, 왕빈, 박수경 등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4)조선시대
조선은 고려 말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나라이다. 조선은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신분제를 정비하고 유교정치이념으로 지배체제를 재편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태종 15년(14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군, 현을 정비하였으며, 세종 14년(1432)에는 전국을 330여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각 군현에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을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으로 점차 속현이나 ,향, 소, 부곡이 사라지고 장(莊)이나 역(驛)이 일반 군현에 통합되었다.
평택지방은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17개의 행정구역을 진위현과 평택현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서부지역을 직산현, 수원부, 양성현이 분할하는 형태로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진위현에는 기존의 영신현(永新縣), 송장부곡(松莊部曲), 천장부곡(川莊部曲), 청호역이 폐합되었으며 경기도의 관할을 받게되었다. 충청도에 속한 평택현은 전국 330여 군, 현 가운데 가장 작은 현(縣)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계양지역을 제외한 팽성읍 지역이 평택현이라고 할 수 있다. 평택현은 고려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줄 곳 충청도 땅이었다. 평택현과 진위현의 경계는 홍경천 도는 한내라고도 불렸던 안성천이었다. 그 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주변 군, 현과의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1895년에는 평택군과 진위군으로 행정단위가 바뀌었고, 근대적인 지방행정제도가 실시된 1914년에는 진위군, 평택군과 직산군, 수원군, 양성군 일부지역이 통합되어 진위군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은 가난한 고을이었다. 평야지대에 위치했지만 바다와 가까워서 염기(鹽氣) 많은 저습지가 많았고, 하천의 범람으로 홍수가 빈번했으며, 수리시설이 적고 면적도 좁아서 가뭄의 피해도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뚝을 쌓아 개간한 곳이 많아서 해일이나 태풍의 피해도 많았다. 또한 한양과 가까워서 지배층의 수탈이 극심했으며,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잡역동원이나 사신접대도 빈번하였다. 열악한 조건은 민중들의 삶을 피폐시켰으며, 토지에서 이탈하여 유리걸식하는 농민들이 속출하였는데, 정부는 실농(失農)하는 농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조세로 걷은 곡식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열악한 환경은 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예컨대 광해군 1년(1608) 영의정 이덕형이 예산을 다녀오면서 평택 및 주변의 백성들이 흉년으로 굶주리는 절박한 상황을 목도하고 왕께 보고하는 내용이 있으며, 인조 11년(1633)에는 호조가 평택 등 10개 고을에 4백여 결의 토지가 완전히 재해를 입어서 조세(租稅)를 감면해 줄 것을 건의하는 내용도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민중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지배층의 탐학과 수탈이었다.
이름께나 잇는 권세가들은 신분과 권력를 이용해서 평택현에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평택현 땅은 안성천 하류에 갯벌이 넓게 형성되고 저습지가 많아서 개간이나 간척이 쉬웠기 때문이다. 실례로 세종 때 예조참판이었던 이명덕(李明德)이라는 사람이 평택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성종 때는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이 부당한 방법으로 삼기언(三岐堰)의 논을 강탈하여 자신의 농장으로 만들었다. 중종 때에는 중종의 여섯째 왕자 봉성군이 한서운이라는 사람과 제포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간척지가 많다보니 자연히 궁궐소유의 궁방토도 많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농민들 소유의 토지는 거의 없었고 국가와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이 심했던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악한 경제여건은 임진, 병자호란 이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더욱 나빠졌다. 보리고개나 약간의 재난에도 민중들은 토지에서 이탈하기 일쑤였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바다와 인접한 평택지방은 흉년에 해산물로 연명하려는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바다와 가깝고 교통로가 발달하여 토지가 박하고 인심도 사납지만 흉년을 나기에 좋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지대가 낮고 저습지가 많다보니 홍수나 해일에 의한 피해도 많았다. 지배층 및 홍수와 해일에 의한 농민들의 고통은 1862년 임술민란 때 평택현에서 일어났던 민란(民亂)의 성격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해일에 의한 제언의 파괴문제 때문에 평택현 서면(안정리 방면)과 북면(내리, 동창리, 원정리)에서 일어난 민란은 17~18세기에 신축되었던 서면과 북면의 14개 제언이 해일 등으로 무너져 농사를 망쳤는데도 불구하고 관아에서는 각종 잡세와 물세를 징수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와 함께 같은 시기에 지주였던 정규원, 정광형이 주도한 봉기도 있다. 이 봉기는 궁감(宮監)이었던 한양사람 현응선이 지위를 빙자하여 논문서를 강제로 빼앗고 저수지를 개간하여 저수지 아래에 농사짓던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자 지주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민란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평택현은 궁궐과 지배층의 수탈 대상지였고, 지리적으로 생산기반이 열악했던 가난한 민중들의 땅이었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에서 일어난 큰 사건이라면 소사벌 전투와 청일전쟁이다. 소사벌 전투는 정유재란 때 소사벌에서 전개된 전투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북상하던 왜군과 평양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 한 후 남하하며 왜군을 압박하던 명나라 군대가 소사벌에서 전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원숭이를 이용한 특이한 전술로 왜군을 대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왜군은 북상의 의지가 꺾였으며 전쟁은 조, 명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독점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된 청나라와 일본이 아산만과 안성천, 소사벌을 사이에 두고 평택과 아산방면으로 나뉘어 벌인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를 조선에서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지금도 평택지방에는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라든가, “망군다리”, “청망평”, “왜몰보”와 같은 지명들이 청일전쟁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5)근대의 평택
우리나라의 근대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이다. 갑오, 을미개혁(1895년) 이후 조선정부는 기존의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바탕으로 하는 전국의 행정제도 개편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공주부로 이속하여 진위군으로 개편되었으며, 평택현도 평택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공주부에 속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팽성읍 본정리, 노양리 일대(계양지역)와 오성면, 안중면, 청북면, 포승면, 현덕면은 수원군과 양성군, 직산군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다시 개편하면서 계양지역이 평택군에 이속되었고, 양성군의 월경지였던 포승면 일대가 수원군으로 옮겨왔다. 평택지역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였다. 이 시기 행정구역 개편은 기존의 군, 면 지역을 통합하여 한자로 된 새로운 지명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월경지와 견아상입지역이 사라지고 인구와 교통로, 행정적 편의를 고려하여 새로운 행정구역 분할이 이뤄졌다. 그래서 기존의 진위군과 평택군을 중심으로 수원군에 속하였던 현덕면, 안중면, 오성면, 청북면, 고덕면 일부지역, 양성군에 속하였던 포승면, 청북면 지역, 직산군에 속하였던 안중면, 오성면 일부지역 그리고 기존의 평택군이 통합되어 진위군이 되었다.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교통과 통신망의 변화가 있었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평택지방의 주요 교통시설은 도로와 조운(漕運)이었다. 예컨대 평택지방에는 한양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로 내려가는 삼남대로와 충청도 서부지역으로 내려가는 충청로가 지나갔으며, 군물진, 이포진, 다라고비진, 항곶진, 계두진 등 많은 나루가 발달하여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하지만 1905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목적으로 건설한 경부선 철도역이 진위군 병남면 통복개와 군물포 부근 황무지에 “평택역”이라는 이름으로 신설되면서 교통과 행정, 경제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철도역은 일제의 자원수탈에 용이하고, 거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후원하기 좋은 요지에 설치하였다. 식민지 초기 일제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자원은 쌀이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에게는 전통의 교통시설이나 상업지역은 식량수탈에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 그곳은 토착세력의 힘이 강해서 일본인 이주자들이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성천 주변의 황무지는 일제 강점 이전부터 철로용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많은 토지가 확보되었을 뿐 아니라 황무지 개간, 역둔토나 궁방토 수용과 같은 방법으로 일제소유의 토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거기에다 식민지 침탈에 걸림돌이 되는 토착세력이나 저항세력이 적었고, 군문포나 둔포를 통하여 서해안의 수운(水運) 및 포구와 연계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군문포는 평택지방 교통의 요로(要路)이면서 평택, 안성지방에 수입상품과 아산만의 어물과 해산물을 공급하는 나루였으며, 둔포는 평택평야의 곡물을 유통하는 포구였다.
철도역이 건설되자 역(驛) 주변지역은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역(驛)을 중심으로 청낭에서 성환을 거쳐 평택을 지나가는 1번 국도가 건설되었고, 평택, 안성, 죽산, 장호원으로 이어지는 신작로(38번 국도)와 평택역에서 팽성읍과 둔포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건설되었다. 철도역 주변에는 일본인들과 조선상인, 중국상인들이 모여들었으며, 기존의 전통도시와 개념이 다른 근대적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도시 평택은 일제의 의도에 따라 정치, 사회, 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평택역 주변이 발전해감에 따라 진위군 읍내면(봉남리)에 있었던 행정기관들이 하나 둘씩 평택역 근처로 옮겨왔으며, 세무서, 경찰서를 비롯하여 총독부 통치기구들과 금융기관, 상업시설들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1920년대가 되면 평택은 군청과 경찰서, 세무서, 우편소, 학교조합, 지방 금융조합, 조선상업은행지점, 조선흥업주식회사 파출소, 진위흥농주식회사, 미쓰이물산 대리점, 초등학교 등이 자리잡은 근대형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발전에 따라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 구 시가지에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가 신설되었고, 1926년 4월에는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38년에는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편되었고 평택면이 평택읍(邑)으로 승격되었다. 1915년에 일제가 발행한 “경기도 안내”라는 책자에는 경기도의 저명한 시가지(市街地)로 인천, 수원, 개성, 영등포, 안성과 함께 평택을 들고 있으며, 일본인의 비율이 전체인구 중 40%에 이를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6)현대사회와 평택
평택은 1946년 병술년 대홍수와 6.25전쟁으로 엄청난 피해와 변화를 겪었다. 병술년 대홍수는 안성천 변에 건설한 근대도시 평택을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하였으며, 홍수의 피해를 채 복구하기도 전에 발발한 6.25전쟁은 구 시가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전쟁 중 미군은(호주비행기) 통복천 건너편의 인민군을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가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하기 위해 기차역에 집결하였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군청, 경찰서, 세무서, 금융기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한 시가지 거의 대부분을 초토화되었다. 전쟁 후 폐허된 시가지에서 관공서와 철도역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옮겨다니다가 1950년대 중반이 되면서 구 시가지 건너편으로 이전되었다. 철도역과 관공서가 이전되면서 구시가지의 상인들과 공무원 가족들도 함께 이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구 시가지는 개발이 정지되고 슬럼화되었다.
새 시가지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의 도로망과 경찰서, 군청, 시장, 상가, 극장, 시외버스정류장 등이 자리잡았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부채살처럼 퍼진 방사선 도로망 안에 건설된 공공기관과 상가, 병원, 시장, 종교시설들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구한말부터 시작된 평택평야의 간척사업이 1973년 아산만 방조제 준공으로 완결되면서, 평택지방은 도시와 농촌, 산업과 농업이 균형 있게 발전된 전국 최고의 도농복합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송탄은 구한말에는 탄현(炭峴)면과 송장면으로 이뤄졌던 지역이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송장의 송(松)과 탄현의 탄(炭)을 합하여 "송탄(松炭)"이라고 이지명을 개편하면서 현재와 같은 이름이 되었다. 일제시대 송탄(送炭)의 중심지역은 경부선 서정역 주변이었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 후(1952년) K-55 미군기지가 건설되고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도시의 지형이 크게 변하였다. 팽성읍 안정리도 미군기지와 함께 발전한 기지촌이었다. 이곳은 일제 말(1939년) 일명 302부대라고 하는 일본해군시설지원부대가 비행장과 보급부대를 주둔하면서 군사기지로 변모하였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 중 미군이 비행장을 접수하며 안정리 K-6 공군군기지가 되었고, 기지 주변에 상가와 인구가 증가하면서 기지촌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기지촌은 인구의 급증과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급격한 도시팽창을 가져왔다. 결과 1963년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송탄시로 발전하였으며, 안정리도 1972년에 안정출장소가 설치된 후 1979년에는 팽성읍으로 승격하였다. 철도역 건너편으로 시가지를 옮긴 평택시는 완만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다가 1986년에 시(市)로 승격하였고, 1995년에는 평택시, 송탄시, 평택군의 통합되면서 "통합 평택시"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1989년에는 오성면 안중리가 안중면으로 분리 독립하였으며, 2002년에는 안중읍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