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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 쿠르르릉, 쩡 꾸릉!’
지난해 1월 어느 추운 날 산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어디 먼 전장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같은 귀에 익은 소리가 간헐적으로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난 처음에는 이 소리의 정체를 몰랐다.
저수지 옆 승용차를 주차 시켜놓은 곳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과히 강하지 않은 그 소리는 알고 보니 어릴 때 많이 들어보던 소리, 얼어붙은 저수지가 우는 소리였다.
어릴 때는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몰랐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종합하여 분석을 해 보면 화학적으로는 똑같은 성분 H2O인 ‘물’과 ‘얼음’의 부피의 차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리이다.
이런 소리는 평상시는 잘 안 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거나 갑자기 따뜻해질 때, 짧은 시간에 한하여 우는소리가 나는 것이다.
액체인 물은 부피가 줄거나 늘거나 소리가 나지 않지만, 물이든 얼음이든 어느 쪽의 부피가 변하게 되면 부피 조절을 위하여 고체인 얼음이 갈라져 소리가 나게 된다.
대부분 추워지는 것은 새벽녘이므로 이때는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추운 날 한낮에 햇빛을 받아 온도가 순간적으로 오르게 되면 물과 얼음의 부피가 변하게 되므로 얼어 고정되어 있던 얼음이 갈라지게 되는데 이때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물위의 얼음 전체가 울림판이 되어서 소리를 부드럽게 울려 퍼지게 전해주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큰물인 저수지나 강물이 언 곳에서만 나는 것이지 물을 댄 논이나 작은 시냇물이 언 곳에선 들을 수 없다.
어려서 썰매를 타려고 얼음판에 들어섰다가 이런 소리가 나면 혹시라도 얼음이 깨어져 물에 빠질까봐 얼른 도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소리가 날 때는 상당히 날씨가 추운 상태에서 나는 것이므로 거의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날씨가 풀려 얼음이 녹아 깨어질 정도가 되면 얼음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리가 어렸을 당시 겨울에는 참으로 날씨가 무척 추웠다.
입성이 부실하여 추운 겨울에도 겨울 내의 하나에 얇은 겉옷 하나만 입고 지냈으니 오죽 추웠으랴!
나는 변변히 장갑도 끼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노화현상의 일종으로 발에서 땀이 나지 않아 발뒤꿈치가 갈라져 피가 나기도 하고 아프고 하여 연고를 바르고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하지만 어려서는 발에서 땀이 무척 많이 났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고무신 바닥이 땀에 미끈거리곤 했다. 그래서 방에만 들어오면 축축한 양말을 벗어놓는 것이 일과였고, 이것은 습관이 되어 땀이 나지 않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식당에 갔을 때 작은방으로 우리끼리만 들어가게 되면 양말을 벗어놓고 있다가 밥을 먹고 나올 때에야 신고 나온다.
가끔 결혼이나 기타 집안 큰일 같은 것으로 사촌누나들을 만나게 되면 지금도 물어보는 수가 있다.
“야, 너 지금도 양말 안 신고 다니냐?”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지간히 추운 날이 아니면 양말을 신지 않고 살았는데 교사가 되어 첫 발령을 받고부터 군대에 가게 되어 휴직을 하게 될 때까지도 나는 남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출근을 하면 구두를 벗을 때 양말까지 같이 벗어 구두 속에 넣고 신발장에 두었다가 맨발로 실내화를 신고 있다가 퇴근을 할 때에야 양말을 신은 다음 구두를 신었다.
34개월의 군대 생활동안에도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이 고된 훈련이나 내무생활이 아니라 하루 종일 두툼한 군용 양말에 군화를 신고 있다가 잠잘 때에야 군화를 벗는 것이었다.
군화 밖으로 땀이 배어 나와 군화를 깨끗이 닦아도 얼룩지고 광이 잘 나지 않았다.
군에서 제대를 한 이후부터는 많이 습관이 된 탓으로 집 밖에서는 거의 양말을 벗지 않는다.
그렇게 양말과 장갑을 사용하지 않은 때가 많아서인지 겨울마다 손발에 가벼운 동상 증세인 얼음이 배겼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 손마디가 굵어져서 모양이 잘 안 나고 반지를 끼우고 뺄 때 불편하다.
옛날의 추위는 어렸기 때문에 지독히 추웠던 것으로 느낀 것이 아니라 실지로 추웠다.
그 증거로는 지금보다 눈도 훨씬 더 많이 와서 해마다 쌓인 눈으로 소나무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많았고 물이 거의 겨우내 얼어 있어서 동네 앞 개울이나 물을 댄 논에서 날마다 아이들이 모여 썰매를 타거나 팽이치기를 하고 놀았다.
천안 시내 운동구점이나 문방구 앞에는 겨울마다 스케이트를 잔뜩 매달아 놓고 팔았다.
요즘은 한 겨울에도 천안에서는 스케이트 파는 것을 구경할 수가 없다.
또 얼음이 얼어도 며칠 안가 다 녹아 버리고 얇아서 아무도 얼음판에 들어가 노는 사람이 없다.
시내 주변 논이나 방죽 같은 곳에는 일부러 물을 가두어두었다가 겨울에 물이 얼면 새끼줄로 울타리를 치고 입구에서 돈을 받는 유료 스케이트장도 여럿이 있었다.
특히 청수동 방죽은 훌륭한 무료 스케이트장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구두가 붙어 있는 스케이트를 사서 타는 어린이는 없었다.
나무를 발 크기보다 약간 크게 깎아서 밑에 굵은 철사를 구부려 대고 양 옆에는 못을 4-5개씩 박아서 만든 무늬만 스케이트에 발을 올려놓고는 고무줄로 발등의 이쪽 저쪽을 감아서 타고 놀았다.
우리는 이것을 ‘스케이트’라고 불렀고, 제대로 공장에서 만든 구두가 달린 스케이트는 스테인레스로 만들어 하얗게 칼처럼 번쩍이므로 ‘칼 스케이트’라고 불렀다.
칼 스케이트는 어쩌다 도시에서 손님으로 온 어린이가 타는 것을 구경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나무 스케이트를 만들어 탔는데, 이것은 칼 스케이트보다 타기가 매우 힘든 ‘고난도’ 기술이다.
대개 한 쪽 발에만 신고-그래서 외발 스케이트라고 함- 몇번 도움닫기를 한 후 한 발을 들고 한 발로 타면서 관성의 법칙이 다 할 때까지만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중간에 멈추거나 계속하여 진행할 수는 없다.
그마저 스케이트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중심 잡기가 어려워 수 백번을 얼음판에 나뒹굴면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머리통을 부딪쳐서 콧속에서 고춧가루 냄새가 나고 혹이 두어 개씩 달리기를 1-2주일은 족히 해야 비로소 외발로 설 수가 있다.
요즘 같이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어 몸이 두부살에 바늘뼈를 가졌고 참을성이 없는 아이들이라면 십중팔구는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쨌건 병원에 입원을 여러 번 해도 배울까 말까이다.
그래도 배워둬야 하는 것이 스케이트를 탈 줄 모르면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멀쩡한 바보 취급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처음 외발로 타기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좋다.
자다가 오줌 마려워 일어나서도 좋아서 웃다가 오줌 누는 것은 잊어버리고 다시 잠들 정도로 기분이 좋다.
6학년쯤 되면 양쪽 발에 타는 ‘양발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가 있는데 이건 정말로 어렵다. ‘초고난도’ 기술이라고나 할까?
한 반에 탈 수 있는 어린이가 몇 명 안 된다.
나도 당연히 타지 못했으며 균형 감각과 운동 신경이 매우 발달하지 않고는 곤란하다.
썰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타거나 올라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짧은 꼬챙이로 얼음판을 찍으면서 탄다.
초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썰매타기 시합을 하면 백전백패이다.
중급 단계는 썰매위에 두발로 올라섰다가 쪼그려 앉아서 타는 것인데, 처음에는 미끄러운 얼음판에서 썰매 위에 올라앉기도 어렵다.
가까스로 올라 앉았다가도 처음 양손으로 힘껏 얼음을 찍고 앞으로 나갈라치면 몸은 뒤로 벌렁 나가자빠지면서 주인이 타지 않은 썰매만 쏜살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래서 겁이 많은 여자아이들은 다 커서도 거의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타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 고급단계는 꼬챙이를 길게 만들어서 썰매 위에 일어서서 탄다.
이것 역시 몸무게의 중심이 위로 올라가므로 중심 잡기가 어려워서 자칫하다간 쓰러지기 알맞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양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다.
넓은 얼음판을 빙빙 돌면서 양발을 번갈아 이쪽 저쪽 옮기면서 계속 얼음을 지치는 모습은 정말 상상만 하여도 멋지다.
이건 완전히 전문가 프로단계이다.
요즘 같으면 그런 멋진 모습을 보면 여자아이들이 ‘오빠! 오빠!’하며 요란을 떨 것이다.
나도 진작 그걸 배워두었어야 하는 건데......!
그 후에는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쯤 ‘비행기 썰매’라고 해서 비행기처럼 날이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썰매가 유행을 했었는데 이것은 거의 여자아이들은 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케이트는 양발 타기가 더 어려운데 썰매는 외날 타기가 더 어려운 것이 재미있다.
얼음지치기는 겨울방학 내내 계속되다가 늦추위가 있는 해에는 2월말의 봄방학 때까지도 이어지는 수가 있었다.
얼음이 녹을 때가 되면 얼음이 금이 가면서 신축성이 생겨서 아래로 약간 밀린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괜찮지만 속도가 느리면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고 만다.
얼음은 점점 약해진다. 그걸 일명 ‘고무다리’라 부른다.
그러면 모험을 좋아하는 사내아이들은 순서를 정하여 누가 빠지지 않고 ‘고무다리’를 통과하는가 승부를 건다.
승부라기 보다는 일종의 재미이다.
몇 바퀴 돌다보면 결국 얼음은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깨지면서 한 아이가 물에 빠진다.
거기 있던 모든 아이들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누구누구 메기를 잡았다!’라고 소리치며 좋아하고 물에 빠진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재수 더럽게 없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 타던 썰매를 손에 들고 콩팔칠팔 투덜거리며 철부덕철부덕 얼음을 깨면서 걸어 나온다.
보나마나 그 아이는 집에 돌아가면 양말과 옷을 버려왔으므로 빨래를 하려면 개울에 가서 찬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저희 엄마에게 뒤지게 혼이 날 것이다.
어떤 아이는 혼나는 것이 두려워 개울가에 불을 피우고 양말을 빨아 옷과 함께 말린 후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양말 말리다가 불길에 구멍을 내어 더 혼나는 수도 있고.....!
우리 동네는 김해김씨 집성촌으로 전체의 6할 정도가 김해김씨이다.
항렬이 제일 높은 집이 ‘○植’으로 부터 ‘顯○-○培(또는奎)-錫(또는鏞)○-○泰-榮○-○兼’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英培’ 즉 ‘培’자 항렬이므로 중간 보다 높은 편이다.
집 근처에는 사촌과 육촌, 팔촌도 살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같이 노는 때가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이거나 한두살 아래는 없고 모두 두세 살 위이면서 재수가 없게도 모두 거칠거나 덩치가 큰 형들 뿐이었다.
물론 나의 수호천사이신 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5학년 때까지 나를 잘 보호를 해 주셨지만 세세하게 구석구석까지 따라다니실 수는 없으므로 알게 모르게 나는 개구지고 못된 형들에게 심한 고초를 겪는 일이 많았다.
그들의 신상을 열거하자면,
바로 옆집의 석원이-나보다 세 살 위이나 팔촌형님의 아들이므로 내게는 조카뻘이다. 동네 안에 필적할 상대가 없을만한 대단한 개구쟁이이다. 나를 괴롭힌 무리 중 두목급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만나면 아저씨 대접을 깍듯이 한다.
못뒤 연못 밑 외딴집에 사는 사촌형 천배, 나보다 두 살 위이며 곱슬머리에 눈이 왕방울같이 크다. 피부도 검은 편이어서 일명 ‘알리’라고도 불린다. 한 성질 한다.
뒷골 올라가는 길목 끝집에 살던 강배형, 세 살 위이며 아버지 육형제중 가장 위인 큰아버지네 셋째번 사촌형인데 나를 크게 괴롭힌 기억은 없지만 위 두 사람과 늘 붙어다님으로서 알게모르게 나에게 피해를 입힌데 크게 협조를 했다. 그런데 학교도 들어가기 전 도고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나를 괴롭힌 기간이 매우 짧다. 다행?
그 외에도 여럿이 있지만 그 나머지는 어쩌다 한두번 등장하는 조연 내지 엑스트라 역 밖에는 안되므로 비판할 수준이 못된다.
그렇다고 그들을 쫓아다니지 않으면 같이 놀 사람이 없으므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얻어터지고, 궂은일은 도맡아하며, 때로는 본의 아니게 나쁜 일의 하수인이 되기도 하면서 따라 다녔다.
칡뿌리를 캐러 갈 때도 삽이나 괭이는 어린 내가 낑낑대며 들고 갔으나 자기들은 낄낄대며 장난을 치며 앞서가고, 다 캐고 나서도 좋은 것은 자기들끼리 다 나눠 갖고 나는 자잘하고 못생긴 것만 준다.
그래도 어쩌랴? 내 힘으론 그나마 캐지도 못하는 걸!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우리 집에 아버지가 아끼는 그물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나는 혼날까봐 싫지만 안 데리고 간다고 협박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나온다.
함부로 사용하여 그물을 구멍을 내놓거나 하여 집에 가서 혼나는 것은 나의 독차지이다.
못된 형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다음에 크면 두들겨 패주려고 했지만 요즘 어쩌다 만나면 반갑기만 하다. 복수는 언제 할지 원!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한두 해 전 늦겨울, 아마 봄방학 때쯤 일 것이다.
나의 고향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암리이며 이웃한 송촌리와 합친 큰 마을 이름은 대동(大東)이고 작은 단위의 이름은 ‘중리’이다.
중리의 가장 뒤쪽에는 ‘못뒤’라고 해서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는 과히 크지 않은 연못이 하나 있다.
어찌하여 이 연못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봄이 되어 일철이 나서기 전 날씨가 따뜻한 때를 골라 이 연못 주변에서 마을 사람 전체가 모여 들놀이를 하는 것을 몇번 보았다.
매년 한 것 같지는 않고 2-3년에 한번 정도 한 것 같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먹고 노는데 이날은 밥, 국, 술 등이 넘쳐 난다.
아마 봄이 되어서 본격적인 일철이 시작되므로 힘든 일을 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의 결속을 다지면서 금년 농사를 잘 지어 보자는 요즘말로 일종의 단합대회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생각한다.
이 연못의 깊이는 어른들의 목 정도 차는 곳으로 항상 물이 고여 있지만 우리들은 여름에는 이곳에서 목욕은 하지 않았다.
시냇물처럼 맑지 않고 탁하며 모래나 돌이 없어서 발에 진흙이 묻어 목욕 후 닦을 곳이 없고 옷을 깨끗이 입기가 곤란해서이다.
그러나 겨울에 얼음이 꽝꽝 얼면 얼음지치기는 많이 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며칠동안 계속 날씨가 추워서 형들을 따라 얼음지치기를 했다.
내가 자유로이 썰매를 타고 싶을 때 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싫도록 타다가 싫증이 나면 나에게 기회를 준다.
그동안 나는 팽이나 치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 할 일이 없다.
갑자기 날씨가 확 풀려버렸다.
그날도 형들이 가자고 나를 데리러 왔다.
나를 크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썰매를 들고 가게 시키려는 목적이 더 크다.
나는 몇번 타보지도 못할 썰매를 얼굴이 빨갛도록 힘들여 둘러메고 간다.
덩치 큰 형들은 가볍게 들고 갈 수도 있으련만......!
날씨가 워낙 따뜻하여 얼음이 걱정스러운지 연못 밖에서 한발로 살살 굴러본다.
이상이 없다고 느꼈는지 나보다 세 살이 위이지만 항렬이 조카인 ‘석원’이가 얼음판에 들어섰다.
그 순간 ‘우직!’하고 발밑에서 소리가 난다.
석원이가 얼른 튀어나오더니 나를 보고
“야, 영배야. 네가 먼저 타라!”
세상에, 내가 어리긴 하지만 바보냐?
깨지는 얼음판을 두눈 멀뚱멀뚱 뜨고 봤는데 들어가게?
“싫다!”
하고 냉큼 되받아 소리쳤다. 그랬더니,
“얌마, 너는 작아서 괜찮아 임마. 너 지금 안타면 이따가는 안 태워 줘. 그리고 칡뿌리 캐러도 안 데려 갈꺼야!”
야, 정말 치사하다. 여기서 그런 카드를 내밀다니!
여기저기서 이놈 저놈이, 아니 이런 실수를! 이형 저형이 맞장구를 치며 자꾸 협박성 권고를 한다.
나는 앞날을 생각해서 하는 수 없이 형들이 놓아준 썰매 앞으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정말 형들 말대로 괜찮은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다.
야, 정말 다행이다.
잘하면 오늘은 겁 많은 형들 때문에 일찍부터 싫도록 썰매를 타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른 썰매 위에 올라서서 꼬챙이로 힘껏 얼음판을 찍었다.
그런데 손바닥에 반작용으로 와 닿아야할 충격이 없이 허당을 찍는 기분이다.
이어서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 옆 꼬챙이로 찍은 범위 안의 한뼘도 더되는 두께의 얼음이 그대로 폭삭 내려앉으며 나는 썰매와 함께 늦겨울의 차디찬 연못물 속으로 퐁당 들어가고 말았다.
-*주의: 해빙기에는 아무리 두터운 얼음이라도 아래로 결이 생겨서 힘없이 부서짐-
깜짝 놀란 나는 맥없이 얼굴까지 물속으로 잠겼다 나왔다.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팔다리를 마구 내두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바로 옆에서 조심스레 지켜보던 형들이 재빨리 손을 뻗쳐 팔을 잡고, 머리, 목을 닥치는 대로 잡아당겨 건져내었다.
겨울에 옷을 입은 채 찬물로 목욕을 해본 사람 있는가?
정말로 무지꽁 춥다. 나는 그때 추웠던 기억이 어찌나 강렬하게 각인이 되었던지 어쩌다 TV에서 해병대가 혹한기 훈련받는 장면을 보게되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걸 볼 때마다 그 기억이 생생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꼭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나고 하여 동네가 떠나가게 큰소리로 울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채 집을 향해 마구 걸어갔다.
“두고 봐라, 느덜 우리 할아버지한테 안 일르나!”
라고 소리치며, 또한‘나쁜 새끼들!, X새끼들!’하면서 마음놓고 형들에게 욕도 해대면서........!
형들도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자칫하다간 단체로 대형사고가 발생을 하겠다.
모두 일치단결 합심을 하여 달려와 못 가게 말린다.
지금 태산도 밀어붙일 것 같은 나의 기세를 누가 막아? 막는다고 내가 못가?
막무가내로 몸부림을 치면서 내가 고집을 피우자, 그중 덩치 큰 형이 나를 벌러덩 둘러메고 누가 볼세라 과부를 보쌈한 노총각처럼 신속히 달린다.
그 연못 바로 밑에는 ‘천배’라는 사촌형이 사는데 큰아버지는 서울로 돈벌러 가시고 큰어머니는 어디로 나가셨는지 집이 비어있다.
거기로 나를 끌고 가서는 사태 수습을 위하여 모두 일사불란하게 부산히 움직인다.
누구는 바로 안방에 이불을 펴고 젖은 옷을 팬티까지 몽땅 벗겨 나를 이불 속에 집어 쳐 넣는다.
--그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니 어찌나 추웠던지 여성에게는 없는 신체의 일부가 쌍방울은 어디로 숨었는지 종적을 찾을 길이 없고, 고추는 누에 뻔디기처럼 바싹 오그라든 것이 손가락 한마디 크기도 채 안 되었다.--
누구는 부엌에 가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옷을 쥐어짜서 소두방(=가마솥 뚜껑의 우리지방 사투리) 위에 널어놓고, 누구는 고구마를 찾아 꺼내어 깎아서 내 입에 물려놓고, 또 어디서 먹다 남은 떡 조각까지 구해다 준다!
그래도 한참을 이불을 들썩이며 울다보니 이건 꽤 할 만한 직업이다.
완전 최상급 칙사 대접이다.
점심 무렵까지 한나절을 비록 발가벗은 채이긴 하나 왕세자 동궁마마처럼 이불에 감싸인 채 드는 시중을 받다보니 점심은 안 먹어도 되겠다.
점심때가 기울어 소두방 위에다 말려준 옷을 입혀주는 대로 입어보니 그 또한 따스하고 보송보송한 것이 촉감이 매우 좋다.
이제 나는 기분이 완전히 풀렸는데도 형들은 안심이 안 되는 가 보다.
내가 우리 할아버지께 입만 벙긋하면 귀한 손자 죽일 뻔한 이 형들 모두는 며칠을 두고 심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집으로 가는 나에게 몇 번을 다짐을 하고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그래도 못 미더워 아직 완전히 해빙도 덜된 딱딱한 비탈진 언덕배기를 곡괭이로 ‘쿵쿵’ 힘겹게 찍어 돼지감자를 캐어 씻어서 내 주머니에 가득 채워주고......
이젠 내가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정도 이상의 대접에 감격을 해서.......!
여섯 살배기 왕자가 된 나는 입을 헤벌쭉 벌리며 싱글벙글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간다.
참, 누구 돼지감자를 살짝 얼려서 먹어본 사람 있는가?
날로 먹는 것인데 ‘아자작 아작’ 씹히는 맛이 진짜 기가 막히다.
달짝지근한 맛이 당도로야 사과, 배에 미치지 못하지만, 깊고 독특한 향과 풍미가 그에 비할 바 아니다. 안 바꿔 먹는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될지?
특히 점심을 굶고 먹어보면.......!
<끝>
첫댓글 알게 모르게 사고는 다 치고 다녔구만... 오빠의 수호천사였던 할아버지 얼굴은 기억하시남?
기억?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5학년때 돌아가셨는데,,,,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주름의 갯수, 수염의 길이, 머릿카락의 갯수 까지 다 기억한다!
나는소설을쓰고싶어도 문장력이업서서리.....두줄쓰면끝인데 우와달빛 형님은대단하신표현력 존경합니다형님
설마하니 머리카락갯수까지 기억할라구 오빠도 이젠 나이먹어가면서 한뻥하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