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라 계하(季夏)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대우(大雨)도 시행(時行)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 소리 난다.
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베어내고 늦은 콩팥 조 기장은
베기 전에 대우 들여 지력(地力)을 쉬지 말고 극진히 다스리소.
젊은이 하는 일이 기음매기뿐이로다.
논밭을 갈마들어 삼사차 돌려 맬 제 그 중에 면화밭은
인공(人功)이 더 드나니 틈틈이 나물밭도 북돋아 매어 가꾸소.
집터 울밑 돌아가며 잡풀을 없게 하소.
날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때 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坐次)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단술 먹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운 후에 청풍에 취포(醉飽)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농부야 근심 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오조 이삭 청태콩이
어느 사이 익었구나.〃
농가월령가중 6월령이다. 농가월령가는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월령체 장편가사로서 농가의 행사, 세시 풍속뿐만 아니라 당시 농촌사회의 모습과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듯 표현하고 교훈적 내용도 담겨져 있다. 정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서 양주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실학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문인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음력으로 유월은 농사일이 가장 바쁜 철이기도 하지만 한낮에는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한 숨씩 자도 될 만큼의 여유가 생겨나는 달이다. 지금이야 모를 심거나 곡식을 심은 후에 제초제를 치고 뿌리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지만 예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매주어야 했었다. 그래서 남정네들은 한가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여인네들은 예외였다. 대중가요로 불린 ‘콩밭 매는 아낙네’는 정착생활이 시작된 오래전부터 이 땅에 사는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먹고 사는 것이야 지금보다 못했겠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고 전원생활의 푸근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산자락 밑 한 뙤기 내 소유의 땅을 장만했었다. 천수만의 짠 갯냄새도 나는 고향 가까운 곳이었다. 직업이 농사꾼은 아니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의 꿈이었고 소망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내가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고 가끔은 ‘안 되면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지’하며 바람 든 무 씹은 것처럼 팍팍한 현실의 애처로움을 달래기도 했지만 고향엔 한 뼘의 내 소유 땅도 없었기에 현실적인 도피처가 되기도 어려웠는데 어째든 ‘비빌 언덕’은 마련했다는 안도감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도 있었다.
중학생 시절에 읽은 소설‘상록수’와 70년대 새마을 운동, 그리고 한편으로는 암울한 당시의 현실들이 모아져 농업학교를 다녔었고 실제로 농사꾼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내가 ‘농사꾼’이 정말로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거나 뭔가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까이꺼 안되면 농사나 짓지’ 하는 식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단기 복무로 시작했다가 이제 20년이 넘어선 군 생활, 보람과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쉬움과 회오가 더 많았던 것 같고 그래서 답답하고 자신이 안쓰러울 때에는 마찬가지로 ‘그까이꺼 안되면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자위를 하곤 했었다.
그랬었는데,
지난해 처음으로 내 소유의 땅을 마련하고 올 봄에는 그곳에 대추나무며 감나무며 산수유 가시오가피나무도 심었었다. 밭에는 아까워서 심을 생각을 못하고 둑과 산 밑으로 심었었다. 심은 후에 물도 주고 했어야하는데 돌보지 못해서인지 감나무는 열 그루 중 두 그루만 잎을 피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밭에는 반송묘목을 심으려고 했는데 구하지 못해 밭을 비워두게 되었었다.
요즘에는 농촌에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 누구에게 맡길 사람도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정서상 농토를 놀린다는 것은 농부가 아닌 현실이라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시간은 지나 아카시아 꽃도 지고 찔레꽃이 구름처럼 피어나더니 유월을 넘어서고 있었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일부러 거름을 낼 필요가 없고 손이 덜 가는 콩을 심기로 하였다. 콩은 자연시간에 배운 대로 콩의 뿌리에 달린 뿌리혹박테리아가
토양 속에 있는 질소성분을 단백질로 변환시켜주는 것이다. 즉 대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 식물이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꿔 공급해주기 때문에 별도의 거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종자로 쓸 콩을 따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서 밥에 넣어 먹으려고 있던 것과 장모님이 주신 것으로 하고 이른 새벽 출발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콩을 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 등의 들짐승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대부분 모판을 만들어 모를 부었다가 이식을 하는 식으로 콩을 심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그만큼 들짐승의 개체수가 늘어났고 그 피해또한 심각해지는 실정인 것이다. 최근 산간지역에서는 멧돼지로부터 고구마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동물원에서 호랑이의 배설물을 뿌려 놓으면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둘러볼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그러지도 못할 사정이니 심기도 전에 엄청난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 종자에 까치나 비둘기 등이 기피할 수 있는 약품을 섞어 심기로 하였다. 만약에 농사를 짓는다면 유기농 농법으로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자괴감이 앞섰지만 그 붉은 빛깔을 액체를 콩 종자에 부어 버무려야 했다. 마을 사람 중에 도와주시기로 약조한 분이 한 분 있었는데 집안에 일이 생겨 혼자 심어야 했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가지만 해도 ‘그까이꺼 별 것 아니겠지’ 평온한 마음이었다.
호미로 콩 심을 곳을 파내고 서너 개의 콩을 넣고 다시 호미로 덮어나가는 단순한 일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장시간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물론 어려서 보리밭이나 콩밭 매는 일을 도와드린 적도 있지만 한 줄 매고 십 분쯤 쉬었다가 하거나 흉내만 내다가 동무들과 놀러가곤 했으니 말이다.
그 어린시절, 콩을 심다가 남은 밭이랑을 쳐다보면 까마득했다. 문득 어려서 억지로 어머니 손에 붙들려 콩밭 매러 왔던 일이 생각났다. 얼마쯤 매다가 밭이랑을 쳐다보면 가물가물 ‘언제 저기까지 가나’ 한숨을 푹푹 내쉬면 어머니는 내 속을 들여다보듯이‘ 사람의 몸에서 머리는 언제나 저 긴 이랑을 끝내나 하며 절망부터 하고 손발은 그와 상관없이 일을 해나간다’는 말씀을 해 주시곤 했었다. 그동안에는 아무리 힘든 일을 했더라도 결국 ‘남 일’이었고 ‘누구를 도와준다.’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일’ 이었다. 누가 나에게 ‘수고한다.’ ‘고생했다.’라고 공치사 한마다 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혼자 하는 일이니 여유 있게 쉬지도 못하고 찬물 한 대접 가져다주는 사람도 없었다. 날씨가 덥다는 핑계로 위에는 민소매 옷 하나만 입었는데도 땀이 흘러 반바지마저 다 젖어가고 있었고 평상시에 써먹지도 않던 근육을 써대니 온 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훨씬 지나가고 있었고 배가 고픈지 어쩐지 감각조차도 없어져갔다. 지난 해 달렸던 100km 울트라 마라톤 뛰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고 고통스러웠다. 아마 혼자 하는 일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백오십 평은 넘어서는 것 같은데 아직 준비한 종자가 남아있기에 버릴 수도 없고 한군데 전부 묻어버릴 수도 없었다. 아 그래서 옛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지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평범하게 생각되었던 말이 심오한 철학이 담겨진 말처럼 가슴에 다가왔다. 콩 열개를 심으면 열개가 나고 한 개를 심으면 한 개가 나는 것이다. 온갖 거짓이 판을 치고 세상, ‘벌거벗은 임금님’우화처럼 자신이 벌거벗은 지도, 아니면 ‘임금님이 입고 있는 옷이 아름답다’고 외쳐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오를 한참이나 지난 시간 이젠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그까이꺼 안되면 농사나 짓지’했던 생각은 엄청난 착오였음을 스스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는 그저 한낱 취미생활이나 심심풀이로 택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십계명보다 땀 흘리는 노동이 먼저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석 유영모는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따로 예수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며 기독교인에게 지탄? 받을 표현을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즐긴다며 농촌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농사일’을 좋아할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농촌은 젊은이들은 대부분 떠나고 떠날 곳 없는 부모 네들만 남아 그야말로 농촌을 지키고 있다.
바가지에 담겨있던 콩들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남아있는 밭 자리가 아직 많았지만 바가지에 담긴 콩만 심고 마무리를 했다. 오후 세시가 지나는 시간, 땅벌에라도 쏘인 것처럼 머리에 열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다행히 일을 마치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간단히 몸을 씻고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날 일어나니 온 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 모습을 보고 아내는 ‘그래가지고 농사꾼 되겠어! 라며 빈정대며 놀려댄다.
파종 후에 바로 비가 내려 가뭄걱정은 덜 되었지만 그래도 비둘기, 까치가 그냥 둘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심은 콩인데 다 빼먹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일주쯤 지나 그곳에 사는 아저씨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하니 ‘싹이 잘 나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한 달 후엔가 내려가니 콩밭은 완전히 풀밭이 되어 있었다. 밭 가운데로 토끼가 그랬는지 싹을 다 잘라먹은 상태였다. 그래도 일부분이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콩밭사이로 난 풀을 매기 시작했다. 칠순이 넘으신 나의 아버지도 밭으로 들어오신다. 아마도 한동안 젊은 시절을 농부로 보내긴 했지만 김매기는 처음이신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전부 어머니 몫이었을 테니,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하니 콩을 심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점심은 사가지고 간 김밥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꿀맛이다. 지난 오월 초, 콩을 심기 전 거름을 얻어다 내고 서너 구덩이 호박을 심었는데 환삼덩굴이 다 덮어버렸다. 봄에 환삼덩굴 싹이 날 때는 앙증맞은 모습인데 어느 정도 자라면 사람의 접근도 막아버릴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간다. 줄기에는 작은 가시가 달려 스치기만 해도 살이 베어져 나가고, 지난번에 와 쳐주었는데도 다시 대추나무를 감아가고 있었다. 김매기를 끝내고 밭둑에 그악스런 환삼덩굴도 쳐내고 밭둑에 앉아 땀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그까이꺼 하며 세상일이 안 풀리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결코 농사가 아니란 걸, 진정한 농부가 된다는 것은 수행자가 되듯이 고되고 험한 길이란 것을 그때야 깨달음 같은 것이 왔다. 그래도 지금은 경제성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데도 이정도이니. 지난 가을 김장채소 값이 폭락하여 무와 배추를 밭에 그대로 방치했던, 그리고 불어난 물에 수확을 앞둔 벼가 흙에 묻혀버린 농부의 심정은 당해보지 않고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리라.
이제 한 번 더 김을 매주고 날씨가 도와준다면 얼마정도의 콩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고, 교통비나 인건비를 따질 수 없는 나에겐 귀한 수확물이 될 것이다.
완전초보농부의 생애 최초 수확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마음속에 새기며 농부를 준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