務安(綿城)朴氏 (무안박씨) 유래
무안을 관향으로 하는 무안박씨는 시조왕(一世) 혁거세의 28대손 경명왕의 제6자 완산대군 휘 언화(諱 彦華)의 8대손 휘 진승(諱 進昇)께서 고려조 국학 전주(國學 典酒)로 기자팔조지교(箕子八條之敎)로서 민심을 순화한 공으로 무안군(務安君)에 봉(封)하고 무안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관향지로 하였으며 공(公)을 중조(中祖 一世)로 하여 일천여년을 이어 오면서 경향각지에 22파(派) 삼만여세대에 70,000여명이 분포되어 세거(世居)하는 씨족이다.
역사적으로 문중을 빛낸 많은 인물중 대표적 인물로 2세 섬(暹)은 고려 현종 원년 거란(契丹) 2차 침공(侵攻) 시(時) 호종공신으로 초상(肖像)이 능연각(凌煙閣)에 게상(揭上)되고 좌복야(左僕射)에 올랐으며 7세 문오(文晤)는 정승(政丞)이며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으로 그 자손이 한동안 면성박씨라 하기도 했다. 공의 아우 문정은 국자감 중시에 61인중 장원급제로 호부상서에 올라 고려팔만대장경창제공신이다 이는 KBS 역사스폐셜 19회차 팔만대장경편에 소개되었다.
10세 풍정공 의룡(楓亭公 義龍)은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으며 태조 실록에 「개국공신 91인중에 수공신 조준, 남재 등 52인과 김운보. 박의룡 등 39인에게 주니 이를 받는 사람과 후손에게 죄가 많아도 연유를 묻지 말고 용서 할 것이며 병이 나면 의원과 약을 보내 구호하고 부고가 오면 반드시 임석하여 같이 슬퍼하고 부의를 극히 후 하게하여 예로서 끝까지 장례를 마치고 공신을 모두를 극히 후 하게하여 예로서 끝까지 장례를 마치고 공신을 모두 이 같이 하라」는 사단서철권(賜丹書鐵券)을 하사 받았다.(출처 : 태조조실록 전주이씨동광문종 초래)
14세 임경(臨卿)은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文)의 婿(사위)로 종로에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屍身)일부를 야반(夜半)에 도습하여 현재의 노량진 묘역에 매장한 후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에 올랐고 공의 차자(次子) 암천처사(岩川處士) 증(增)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외조부의 충절을 흠모하여 계룡산 암래(岩川) 은거(隱居) 외손(外孫) 봉사(奉祀)의 유훈을 남겨 그 청풍고절(淸風高節)이 백이숙제에 비유 되었으며 公의 아우 호(壕)는 문과급제 참찬(參贊)에 올라 정간(貞簡)의 시호를 받았다. 公이 충청도백 재임 시 형(兄) 증(增)의 초상을 그려 각 관원(官員)에게 보이고 이 사람이 본관의 형인데 충청지방에 은가 한다는 짐작(斟酌)은 있으나 알지 못하니 혹 아는 자있는지 알아보라 청한바 노성 현감(魯城 縣監)이 아뢰기를 노성암천에 선비 한분이 은거한다 하므로 암천에 형을 찾아가서 조정출사(朝廷出仕) 할 것을 권한바,
이제 겨우 은거에 정착하였는데 아우가 알았으니 다시 찾아오면 은거 지를 옮길 수 밖에 없다 하여 아우가 다시는 형을 찾지 못하였다 한다. 公의 유훈(遺訓)으로 매죽헌 성산문의 위패를 외손 봉사 하던 중 지역 유림의 청원(請願)으로 철종(哲宗) 12년 모곡서원(矛谷書院)의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어 위패를 봉안 한 요여(腰輿)가 무안박씨 노성파 문중에서 관리해 오다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제20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14세 익경(益卿)은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화란(禍難)으로 관향(貫鄕) 지(地) 무안에 은거할 때 공의 종제(從弟) 호(壕)가 전라도백(全羅道伯) 재임 시 찾아 왔으나 아우와 나는 신분이 다르니 대면동석 할 수 없다 하여 만나지 않으니 공이 사는 마을을 절개(節槪)가 높은 분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고절리(高節里)라 불린다.
公의 증손 17세 제(悌)는 임란시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아 전남 무안 함평지역의 왜병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진위장군(振威將軍)에 올랐고 부인송씨 또한 항전자결(抗戰自決)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세웠다.
17세 경파(京派) 무영군(務寧君) 상(瑺)은 무과급제하여 함경북도 길주목사(吉州牧使) 재임시 이괄의 난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등록(登錄)되고 무영군에 봉(封)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공의 현손 휘 신(信)은 임란의병장으로 문열공 김천일장군의 휘하에서 맹활약하였으며 특히 진양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아우 이(伊)와 충무공 이순신 진지에서 부장으로 분전하시다가 형제가 함께 순절하였다. 천성이 강개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에 친명(親命)으로서 참전 창의사 김천일을 도와 진주로 입성하여 역전 분투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가서 많은 적을 참살하고 부장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에 사천싸움에서 아우 이(伊). 기효곤 이강선 등과 함께 합모분격(合謨奮擊)하다가 활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형제가 함께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록(錄)되고 이조참의를 증(贈)하였으며 송사(松沙)사 기우만(寄宇萬이 비문을 撰하였다.
15세 종정(從貞) 군수공(郡守公)의 증손(曾孫) 취죽헌 백응(翠竹軒 佰凝)은 효행과 학덕으로 남도육현에 올라 해촌서원(海村書院:해남읍 해리 소재)에 배향되었으며 17세 영해파(寧海派) 수서공(水西公) 선장(善長)은 퇴계학맥을 이어 문과에 급제 그의 문집이 대학교재로 쓰이고 사대연속 문과급제의 영예로 부자가 당시 사림의 불천지위를 받았다. 公은 일직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어 후학을 기르기에 전력하였으나 나이 48세에 공의 차자 회역당 한(悔易堂 垾)이 문과 대과에 급제하여 이웃과 일가친척이 모두 즐거워하는데 공의 노모께서는 크게 기뻐하시지 않는지라 연유를 여쭈어 본 바, 노모(老母)의 말씀이 "너야 네 아들이 급제 했으니 즐겁겠지만 나는 내 아들이 급제 한 만큼 즐겁지는 않구나" 하시므로 공이 문득 깨닫기를 과거급제도 효임을 알게 되어 2년 후 문과 급제하여 효를 행(行)하고 노모가 영면(永眠) 후에 치사(致辭)하였다.
17세 무의공 의장(武毅公 毅長)은 무과급제. 임란 시 경주판관(慶州判官)으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신무기를 최초로 전장에서 사용 경주성을 탈환하였으며 임란 칠년동안 오십여 차(次)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올랐고 경주부윤 겸 경상좌절도사를 제수, 시(諡)는 무의(武毅)다. 철종12년 경주사림들이 세운 동도복성비(東都服城碑)가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公의 아우 상주목사 홍장(尙州牧使 弘長)은 임란 일본 통신사로 그 대범(大汎)한 헌신이 왜구(倭寇)를 감복(感服)케하여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 형 의장과 함께 구봉서원(九峰書院)에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경수당 세순(世淳)은 무과에 급제 임란 때 전공으로 선무원종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군자감정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창루공 돈복(敦復)은 문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지제교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 창의 한 바 있다.
근세에 26세 무안파 죽포 기종(務安派 竹圃 淇鍾)은 문과급제 관 역전(官 歷傳)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며 치사(致辭), 입시강관(入侍講官)으로 관복(官服)을 하사 받았고 여섯 차례의 상소로 간관(諫官)의 소임에 진력하였다. 27세 지평파(砥平派) 송암 두성(松岩 斗星)은 일제 강점기에 비밀결사로 한글점자를 창제하여 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다.
무안박씨 문중은 문과 급제자가 25명이고 무과급제자는 63명이며 사마시(진사)급제자 또한 58명에 이른 명문귀족이다.
또 전국에 충,효,열, 시문 등으로 배향된 서원과 사우 이십여 곳 외에 재각 또한 사십여 곳에 이른다.
■ 경기묘(景基廟)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병산(柄山)에 있으며 본전 경기묘를 비롯 경묘사(景廟祠-東廟),경조사(景祚祠-西廟), 강당이 있다.
▶ 경기묘(景基廟)에는 관조 1世 휘 진승(諱 進昇)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경묘사(景廟祠-東廟)에는 2世 금자광록대부 좌복야(金紫光祿大夫 左僕射) 휘 섬(諱 暹)을 주벽으로하고 4世 보국숭록대부 상장군(輔國崇祿大夫上將軍) 휘 유(諱 蕤) 5世 보국숭록대부 상장군(輔國崇祿大夫 上將軍) 휘 성기(諱 成器), 6世 금자광록대부 좌복야(金紫光祿大夫 左僕射) 휘 교(諱 璆), 6世 은청광록대부 밀직사(銀靑光祿大夫 密直副使) 휘 부(휘 琈). 7世 은청광록대부 영동 평장사 면성군(銀靑光祿大夫 領同 平章事 綿城君) 휘 문오(文.晤), 7世 문정 보국정헌대부 호부상서(輔國正憲大夫 戶部尙書) 휘 문정(諱 文正)의 위패를,
▶경조사(景祚祠-西廟)에는 3世 윤위 보국정헌대부 검교대장군(輔國正憲大夫 檢校大將軍) 휘 윤위(諱 允位)를 주벽으로 7世 금자광록대부 공부상서(金紫光祿大夫 工部尙書) 휘 문연(諱 文衍), 8세 흥록대부이조총랑(興錄大夫吏曹摠郞) 휘 윤유(諱 允鏐), 9世 통정대부 한성부소윤(通政大夫 漢城府小尹) 휘천무(諱 天茂) 10세 보국숭록대부 령중추부사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兵曹判書) 휘 의룡(諱 義龍), 11世 가선대부형조참판(嘉善大夫 刑曹參判) 휘 강(諱 綱), 12世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 휘 형(諱 亨)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계하(階下)에 강당 및 관리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