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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16년 7월17일(일) 오후02시 |
만남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시청역 7번 출구 |
트레킹코스 | 서울시청역 -숭례문 -안중근 기념관 -남산시립도서관 -남산야외식물원 -국립극장 -동국대 -남산 제1청사 -타임캡슐(남산골공원) -남산한옥마을 -충무로역 -(뒤풀이 및 해산) |
소요시간 및 난이도 | 3시간 (휴식시간 포함), 트레킹 난이도는 중, 하 약 : 9km |
길 안내자 | 이상년(010-4363-4000), 이길헌(010-5251-0083) 김현회(010-8579-9988), 김남선(010-5811-1188) |
해설자 | 트레킹 코스에 관련된 그곳場 그길路에 대해 해설하실 분은 까페를 통하여 신청요함 |
참석방법 | 신청/닉네임/ 하고 싶은 말 |
준비물 | 식수 및 간식, 트레킹복장, 트레킹화, 개인 안전장비, 썬 크림, 날씨에 따른 준비물 |
트레킹 중 안전에 대하여
| - 역사문화지리트레킹은 순수 비영리 공동체 트레킹으로 카페운영진과 트레킹진행자는 같은 회원으로 일시적, 한시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트레킹 중 일어나는 모든 사고는 참석한 회원 각자의 책임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카페 운영진이나 진행자에게 민, 형사상의 법적, 금전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 항상 회원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참석신청 자체가 위 사항을 확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진행 측 차원에서는 보험이 없으므로 필요시 개인적으로 여행자보험가입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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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 정시에 출발 - 회비는 없음 - 도보 종료 후 식사 시는 1/n 원칙 - 당일 코스는 길안내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 트레킹 안내
서울의 남촌(南村)
조선시대에 한양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 일대를 북촌, 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을 남촌으로 불렀다.
남촌은 청계천의 남쪽 목면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오늘날의 서울 남산을 조선시대에는 목면산 이라 불렀다. 목면산을 배경으로 조선시대 남촌에는 남인을 비롯하여 소론, 소북 등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렴한 관원과 고고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다.
남촌에 살던 청렴한 선비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가죽신이 달아 없어 질까봐 그 위에 나막신을 겹쳐 신고 걸어 다닐 때 나막신의 소리가 딸각거리고 나서 남산의 ‘딸깍발이 선비’라고도 했다.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선생, 류성룡, 이순신, 허균 등 조선을 대표하는 인재들이 살았고 그 이외에 정여창, 강세황, 김종직, 정택 등의 인물들이 살았다.
남촌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한양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숭례문)이 있는데 이 숭례문을 통하여 한양과 조선 팔도가 연결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에 북촌에는 조선인 중심의 거주 지역이 되었고 남촌지역 중심으로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남촌 지역을 왜놈들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양 북쪽은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있었던 반면 남쪽에는 일반 관청이나 군영들이 눈에 뛴다. 주자동에는 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鑄字所)가 있었고 인근에는 균역청(均役청)이 있었다. 또한 남산 기슭에는 남별영(南別營)과 남소영(南小營), 금위창(禁衛倉)과 어영창(御營倉), 금위화약고 그리고 수어화약고 등 군사 시설들이 있었다.
남촌 산기슭은 북사면이다. 거주 조건이 양호하지 않지만 목면산 자락의 조현명(趙顯命)의 귀록정(歸鹿亭)과 같은 이름난 정자가 있었다. 또한 남촌 사람들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하여 양질의 술을 빚었다.
▷남산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 ‘마뫼’라고 불리어 졌다. ‘마’는 남쪽을 의미하고 ‘뫼’는 산을 의미하니 말 그대로 ‘남산’ 이라는 뜻이다.
도성의 안산(案山)으로 산세는 동서로 길게 드리워져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상을 하고 있다. 도성민들에게 가장 친근한 산으로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태조는 1395년(태조4)에 목멱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목멱신사를 지어 나라에서는 국가차원에서 무사태평을 기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남산 북쪽 예장동에 왜성을 쌓고 1,500명의 왜군을 주둔 시키고 갑오농민혁명 때 일본군이 다시 남산에 주둔하고 1918년 조선신궁을 건립하였는데 그때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남산 국사당은 인왕산 기슭 선바위 밑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산의 능선에는 구경지역의 상황을 횃불과 연기로 매일 보고 받을 수 있는 5개의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였다.
▱남촌의 역사문화지리 트레킹 포인트
조선시대의 남촌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의 정착지이자 식민지배의 표상이었던 그때의 남촌 그리고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남촌의 시간과 장소에 대해 인문학적기반위에 조명해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