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고고학
뜻:약탈
바사국의 서편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지방. 앗수르어갈두의 희랍어역 갈디아에서 온 이름.
(1)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는 이 남쪽 바벨론을 말한다(창11:31, 느9:7).
(2) 노아의 증손 니므롯이 니느웨 르호보딜 레센 갈라의 4성을 건설(창10:11).
(3) 그후 이곳에서 세계를 정복한 4대 강국이 일어 났다.
갈대아(주전 2300-1370). 앗수르(1370-606). 바벨론(주전606-538). 메대파사.
(4) 갈대아 인이 욥의 재산을 약탈해 간 일이 있다(욥1:17).
(5) 여호와가 갈대아인의 노략군을 보내어 여호야김과 유다를 쳐서 멸하셨고 (왕하24:2). 유다왕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빼고 구리줄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데려감(왕하25:6-15).
창세기의 11장에는 셈과 아르박삭의 후손들이 잠깐 나열된다. 다시 대홍수 이후의 족장들의 나이가 후계자가 출생할 때까지로 주어진다. 이 출생 이후에 그가 산 연도도 또한 주어진다. 이들 족장들에게 주어진 전체 나이는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셈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는 602년으로 주어져 있지만(이것 자체도 므두셀라의 969년에 비하면 훨씬 감소한 것이다), 여덟 세대 후인 데라(Terah)1)는 겨우 205년만 살았고, 그의 직계 후손은 200년도 되지 않는 수명만을 살았다.
나이들을 합쳐보면, 데라의 아들인 아브람(Abram)은 홍수보다 292년 후, 즉, 대략, 기원전 2100년에 태어났다. 이것을 성서 외의 어떠한 자료와도 점검할 수 있는 방도는 없지만, 만일 그의 출생이 역사적으로 약간 나중에 놓여진다면, 아마도 기원전 2000년 직후 정도가 된다면, 성서의 나중 사건들이 일어난 때가 더 잘 들어맞게 된다.
지금에 와서, 아브람과 그의 직계 후손들이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을 나타내는지, 혹은 니므롯의 경우에서처럼, 여러 사람을 끼워 맞춘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성서의 이야기를 액면가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개별적인 한 사람이며, 잘 서술된 사람이기도 하다. 창세기는 그가 실존했건 아니건, 역사적인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아브람(그의 이름은 나중에, 지금은 더 잘 알려진 이름인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된다2))은 후세의 유태인들이 육체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신들의 혈통을 거슬러 가는, 최초의 족장이다. 그보다 먼저 있었던 사람들에 비해 아브라함이 중요한 이유는,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는 처음으로 가나안으로 간 사람이고,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전설에 따르면, 그는 우상 숭배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충실한 일신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서는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제작자였고 아브람이 화가 나서 그것들을 깨버렸다고 설명한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성서의 처음 11 장의 중심이었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역에서 시작한다.
창세기 11:27. . . .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Nahor)과 하란(Haran)을 낳았고 하란은 롯(Lot)을 낳았다.
창세기 11:28. 하란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idees)에서 자기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따라서 우르(Ur)가 아브람 가족의 고향이며 아브람 자신의 출생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르는 최소한 기원전 3500년 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 세워진 수메르 도시였다. 그것은 바빌론에서 남동쪽으로 약 140 마일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의 오른쪽 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의 페르시아 만 해안이 바로 부근이었다. 그곳은 수메르 시대에 중요한 도시였으며, 달의 신, 씬(Sin)3) 숭배의 중심지, 장엄한 지구라트의 소재지였고, 해안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아마도 중요한 원양 교역으로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우르는 “1 왕조(first dynasty)” 치하에서 상당한 권력의 기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 세기 반 만에 끝이 나는데, 그 때 우르는 루갈자게씨, 나중에는 아가드의 사르곤의 개선군에게 함락 당했다.
우르의 거주자들과 역사가들은 이 정복자들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것이다. 만일 니므롯이,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루갈자게씨와 사르곤의 흐릿한 기억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유태인의 전설에서 니므롯이 아브람이 출생할 때의 바빌로니아의 왕을 나타내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아브람을 죽이려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일이다.
아카드 제국의 몰락 이후, 우르는 “3 왕조(third dynasty)” 치하에서 또 한번의 위대하고 상업적으로 윤택한 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수메르 정권의 이 마지막 시기는 기원전 2050년과 기원전 1950년 사이에 해당하며, 그 시기 동안이 아브람이 태어난 시기이다.
우르는 구약의 시대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존재하였으며 기원전 324년이나 되는 최근에도 문서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창세기가 쓰여지던 시기에, 우르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쇠퇴해버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게 된 마을에 불과했다. 아브람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덕분에 독자들에게 엄청난 흥미를 끌게 된 마을을 언급하게 된 창세기의 저자들은 어느 정도 그곳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카스디인들의 우르(Ur kasdim)”, 즉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 혹은 그보다 낫게는, 현대어역판에서처럼 “갈대아인의 우르(Ur of the Chaldeans)”라고 불렀다.4)
갈대아인들는 기원전 약 1150년 무렵, 아람인들의 뒤를 바로 이어(54쪽 참조), 남쪽으로부터 바빌로니아로 압박해 들어온 아라비아인 부족이었다. 따라서 우르가 실제로 갈대아 영토의 일부가 된 것은,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 거의 천 년이나 지나서였다. 갈대아인들이 도시 바빌론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9세기(900년-800년)였고, 잠시나마 패권을 다투었던 것은 기원전 700년 무렵이었다. 당시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앗시리아왕 샬만에쎄르 5세가 죽자, 722년 갈대아 족장이었던 메로다흐 발라단(Merodach-Baladan)이 바빌론에 입성해 바빌로니아 왕임을 선포했다(열왕기하 20:12-19 참조). 여기에 나오는 ‘갈대아의 우르’는 이 때를 반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의 시기 동안, 갈대아인들은 바빌로니아 인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족이었으며, 따라서 “갈대아의 우르”는, 그 시대착오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마을을 알게 해 주는 가장 경제적인 말이었다.
--------------------------------------------------------------------------------
1) ‘테락흐’라는 발음이 맞으며,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발리크 강 분지에 있는 <틸투라히>와 이름이 일치한다.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아브라함의 증조부이자 테락흐의 할아버지인 ‘세룩’(공동번역 성서에는 ‘스룩’으로 나와 있다)의 이름도 하란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도시의 이름과 같다.
2)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3) 씬(Sin)은 아카드어로, 수메르 어로는 쑤엔(Suen), 난나(Nanna)라 했으며, 때로는 난나쑤엔이라고 하기도 했다.
4) ‘갈대아’는 공동번역 성서에 나온 명칭이며, 실제 발음은 ‘칼데’일 것이다. 또한 이것이 히브리어로 ‘카스딤’ 즉 ‘카스디 인들’이 된 것은 히브리어에서 <르(l)> 발음이 <드(d)> 앞에서 <스(s)>로 변한 경우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이민수 옮김>
갈대아 우르(우르 카스딤)
하란 지역에서 우르를 찾으려는 시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바로 ‘갈대아 우르’라는 구절이다. 갈대아 민족은 서기전 900년경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하며 서기전 612년 이후 앗시리아를 점령하고 새로운 제국 바빌로니아를 건설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는 바빌로니아의 한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창세기의 여러 구절에서는 분명히 족장들의 고향이 밧단 아람, 즉 하란 지역으로 나타나는데 왜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이 생겨났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본격적으로 창세기를 편집할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세력은 바빌로니아, 즉 갈대아 민족이었으며, 이 지역에는 우르로 불리는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브라함 고향의 두 후보지인 이라크 남부의 우르와 터키 동부의 하란은 모두가 달신을 섬겼던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 때문에 당시의 기록자들이 하란과 우르를 혼동할리는 없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록하며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왕이면 아브라함을 당시 세계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로니아의 우르와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로마 교황은 서기 2000년 대희년 성지순례의 여정에 당연히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우르행이 취소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속사정은 아직도 우르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잘 모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국민일보 2001.02.10 김 성 교수(협성대·성서고고학)>
1929년 3월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의도는 그가 창세기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원래 그의 고향인 우르에서는 엄연히 대도시의 귀족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나아가 아브라함은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의 법과 도덕,천지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T.E.Lawrence)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 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우르는 1922년 울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즉 역청의 언덕’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울리와 우르의 발굴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증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앗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왕들의 무덤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세계 신문의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
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발견자라는 공로로 울리는 1935년 영국의 조지 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지만,그의 해석은 아브라함의 고향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당시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우르는 오늘날 터키의 하란 북쪽에 위치한 우르파(Urfa)라고 여겼기 때문이다.<국민일보 2001.02.09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제3장 족장 시대 : 아브람함. 이삭. 야곱
-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름심으로 시작한다.
- 노아의 아들, 셈의 계보에서 데라와 나홀과 하란이 나온다.
-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유브라데강가의 수메르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1. 아브라함의 연대
(1) 족장 기사의 시대 배경
- 태어난 시기 : 주전 2166년 (이하 주전 생략)
- 아카디아 제국 종말 되는 시기, 메소포타미아 전역 암담하던 때
- 하란을 떠난 시기 : 아브라함 75세, 즉 2091
: 우르가 구티족으로 알려진 야만 산지족에게 이미 함몰된 시기
(2) 족장 기사에 대한 고고학적 도움들
-족장기사를 중기 청동기시대Ⅰ(2200-2000)와 중기 청동기시대Ⅱ(2000-1750) 사이 시기로 보는 것이 옳다.
(3) 성경외적 증거
- 누지 (Nuzi) 문헌과 마리 문헌의 증거는 성경 기사와 상당부분 일치.
(가) 이름
- 인명들은 제2천년기에 널리 알려진 아모리족 주민의 이름과 거의 일치
( 야곱 →야굽엘, 나홀 →나쿨, 틸투라키 , 세룩 → 사루기 )
(나) 관습
- 2000년기 초기의 관습에서 본다면 쉽게 이해됨
- 누지 자료는 15세기 후리족의 문서지만, 아모리족의 관습법을 반영하고 있다.
- 오래된 법률 전승을 구체적으로 표현
① 친아들이 없으면 입양된 종이 주인 임종시 상속자 ⇒ 엘리 에셀
② 남편에게 첩 허락 ⇒ 사라와 하갈
③ 드라빔 훔친 사건
④ 아내를 여동생으로 간주 할 수 있었다.
(다) 족장들의 삶의 형태
- 유목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
- 성경은 천막생활을 하며 목초지에 따라 여행하는 반유목민적 도시민
(라) 역사적 상황
- 20세기 - 18세기 상황
- 야곱과 라반의 사건 18세기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상황과 일치
- 주변에 대제국이 없었으므로 자유로운 교육 가능
2. 처음 족장 아브람함 ( 창12:1-25:18)
(1) 아브라함의 배경 :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인가 ?
- 맛소라 성경 : 갈대아 우르
70인역 성경 : 갈대안인의 땅
일부 표현 : 밧단 아람
- 우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2) 이주와 정착 (창11:27-12:20)
-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유래
- 고대 문명의 중심지이며 우상 숭배의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한 사람을 지명하여 옮기셨다.
가) 우르에서 하란
- 부친 데라는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하란으로 이동
- 아마도 유브라데스 강을 따라 바벨론과 마리를 거쳐 상류 발리크 계곡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나) 하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 팔레스타인으로 출발 할 때 75세(2091년)
- 에발산과 그리심산 중간의 세겜 도착
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다.(창12:4-9)
- 당시 중기 청동기 시대로 주된 민족은 가나안족이었다.
- 처음 거주 한곳 세겜 ⇒ 단을 쌓고 정착 ⇒ 토착민, 반대세력 없었다.
라) 이집트로 여행하다.(창12:10-20)
- 네겝 도착 후 이집트로 나아감
- 이집트의 세력 약화시기 (첫 중간기 제10왕조나 11왕조)
-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불신앙의 모습
(3) 아브람의 가나안 땅 생활 (창13:1-25:11)
가) 아브라함과 롯의 분리 (창13:1-18)
- 벧엘과 아이 부근 정착한 롯과 아브라함
- 롯 : 벧엘 동편 요단계곡의 소돔 외곽 도착
- 아브라함 : 헤브론의 마므레 정착
나) 롯의 구출과 동쪽의 왕들 (창14장)
- 롯 위기에 처함 :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동맹국과 함께 소돔. 고모라 주변 도시 습격
- 아브라함 롯 구출 : 마르레, 에스골, 아넬과 연합하여 다마스커스북쪽 호바에서 구출
- 살렘왕 멜기세덱 : 구출후 돌아오는 길에 십일조 바치고 여기서 “엘 엘리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사용
- 이 사건으로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다) 잘못된 약속 수행 (창15:1-4)
- 엘리에셀을 후사로 언급 → 하갈에게서 이스마엘 얻음 → 이스마엘은 후에
이스마엘족의 조상
라) 언약과 약속된 아기를 기다림(창15:1-17:23)
- 모든 과정의 중심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이다.
- 언약의 구체적 내용
① 후손으로 큰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될 것
② 아브라함을 불러낸 이 땅이 그 나라의 본토가 될 것
③ 전 세계에 축복이 되며 복의 근원이 될 것
- 오직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 원칙이 아브라함의 역사를 통해 나타남
-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연기 나는 풀무와 횃불로써 쪼개진 고기 사이 지나가시므로 언약 체결 ⇒ “엘 샤다이 (전능자 하나님)”
- 언약의 징표로 아브람함의 모든 남자 할례 지시
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창18:1-19:38)
- 롯과 두 딸 제외하고 모두 멸망.
- 두 딸은 아버지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함 ⇒ 모암과 벤암미 태어남
⇒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모압족과 암몬족의 조상
- 도시 멸망 2067년경 추측
바) 아비멜렉과 블레셋족 (창20-21)
- 평야의 도시 멸망 직후 가데스 바네아와 술사이를 거쳐 북단 시나이반도 어딘가에 그랄왕 아비멜렉과 더불어 정착
- 또 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그랄왕에게 속임
- 블레셋족이 족장 시대에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었다.
- 2066년 이삭이 태어난 후 서로의 경계와 우물을 존중하는 언약체결 ⇒ 브엘세바
사) 이삭의 번제 명령 (창22장)
- 14세 이스마엘 쫒겨남
- 이삭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제사 지시
아) 사라의 죽음과 장례 (창23장)
- 127세 (2029년)사라 죽음 ⇒ 이삭 37세
- 막벨라 굴에 장사
자) 이삭을 위해 아내를 구하다.(창24:1-25:11)
- 종을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보내어 아내 구함
- 나홀성에서 리브가 데려옴
- 아브라함 사라 죽은 후 그두라와 재혼 ⇒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등 6명의 아들을 더 낳는다.
3. 아브라함과 야곱의 연결 고리 : 이삭 (창25:9-26:35)
- 이삭
① 순종하는 사람
② 아버지의 희생 제단 앞에서는 무서워하지 않음
③ 리브가와 결혼
④ 아내를 누이라 속임
⑤ 결혼 후 20년간 자녀를 기다리는 믿음과 인내
⑥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계속 양보하는 온유한 성품
4. 야곱 (창25:19-36장)
1) 장자권과 축복을 도적질 하는 야곱 (창25:19-34, 27:1-45)
- 이삭 40세에 결혼
- 20년 후 쌍둥이 아들
-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권을 샀다.
- 에서의 축복마저 빼앗았다.
2) 하란에서의 야곱 (창27:46-28:22, 29:1-30)
- 야곱은 하란(밧단아람)으로 도피
- 벧엘(루스)에서 사닥다리 꿈 ⇒ 언약 확인
- 라반에게 속임 당함 ⇒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으며 20년간 그곳에서 일함
- 이곳에 야곱은 11명의 아들과 1명의 딸, 가나안으로 돌아와 베냐민 출생
3) 가나안으로 돌아온 야곱 ( 창32:1-33:20, 34장-36장)
-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 바뀜
환도 뼈를 다쳐서 절뚝거림
- 이때 나이 97세 ⇒ 겸허한 인간으로 변화
5. 요셉 : 족장의 아들에서 국무총리로 (창37-50장)
1) 꿈꾸는 요셉 (창37:1-36)
- 색동옷을 입히는 등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 받음
- 꿈 이야기로 형들의 시기
-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으로 올라감
-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였으나 르우벤에 의해 살아서 이스마엘이나 미디안 대상에게
팔아버렸다.
-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감
2) 유다와 다말 (창38장)
- 과부인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로부터 잉태하여 아이 낳음
- 요셉의 생애 가운데 상당히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되었다.
3)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창39:1-20)
가)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간 시기
- 중왕국 시대 (10-12왕조)
- 1916년출생 → 1899년 종으로 팔려감 → 1889년 감옥에 갇힘 → 1886년 총리로 세워짐
- 그의 전 생애는 중왕국의 제12왕조와 부합한다.
나) 보디발 집에 팔려온 요셉 (창39:1-20)
-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가정 , 총무
- 보디발의 아내 유혹 거절로 감옥에 가게 됨.
4) 통치자 요셉 (창39:21-41:36)
가) 감옥에서 국무총리로! (창39:21-41:36)
- 감방장을 돕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던 관원의 꿈 해몽
- 세소스트리스 2세의 꿈 해몽
( ① 7년 풍년 후 7년 기근 ② 기근을 대비하여 “지혜있는 사람”세울 것)
- 총리로 임명, 이집트 이름 얻고, 아스낫을 아내로 얻음
나) 이집트를 통치한 요셉 (창41장)
- 이집트의 ‘치리자’, ‘총리’, ‘바로의 아비’, ‘제2인자’
- 이집트 문헌 속에 총리 역할
⇒ 이집트의 제2인자, 직접 왕에게 소속, 모든 정부기관 감독, 모든 행정문헌 보관,
하부 직급자 임명, 모든 외교관을 받고 농업, 상업 관장
- 세소스트리스 2세와 3세 밑에서 총리로 일했다.
다) 요셉이 형들과 재회하다. (창42-45장)
- 제회 할 때 몇 가지 시험
① 형제들을 정탐질을 하였다고 우겼다.
②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형제 중 한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③ 베냐민이 도착하여 시몬이 풀려나고 베냐민 특별한 대접
④ 유다가 베냐민을 아버지에게 데려가기 위해 목숨을 다해서 강변
- 요셉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형들 위로
라) 이집트로 내려온 가족들 (창46-50장)
- 야곱이 바로보다 나이가 많아서 바로에게 축복을 베풀었다.
- 야곱이 자손들을 축복하고 야곱의 죽음과 장사, 요셉의 죽음과 이집트에 묻지 말라는 유언으로 끝맺는다.
6. 성경에 나타난 야곱과 요셉의 연대기
1916년 - 요셉 출생
1899년 - 이집트로 팔려감
1889년 - 감옥
1886년 - 요셉 30세 총리됨
1886 - 1879년 : 7년 풍년
1879 - 1872년 : 7년 흉년 ⇒ 형들 첫 번째 방문 : 1878년, 두 번째 방문 : 1877년
1876년 - 야곱의 모든 가족 이집트로 이주
1859년 - 야곱 죽음
1806년 - 요셉 죽음
↑↑↑↑↑↑↑↑
다운 받아 사용하세요.
성경연대표는 여럿이 있습니다.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성경공부시 도움이 되는 보편(?)적인 성경연대표를 올립니다.
BC ? 천지창조ㆍ타락
? 노아 대홍수
? 바벨탑 사건과 인류 분산
족장시대
2166 아브라함의 출생
2091 아브라함의 하란 출발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
2080 이스마엘의 출생
2067 할례언약 체결
2066 이삭의 출생
2006 에서‧ 야곱의 출생
1915 요셉의 출생
1885 요셉의 애굽 총리 발탁
1876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이주
1805 요셉의 죽음 ? 욥의 시대
1527 모세의 출생
1487 모세의 미디안광야 도피
1447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
출애굽과 가나안정복 (1446-1375)
1446 출애굽 시내산 율법 수여
1445 성막건축 인구조사 레위기 율법계시 제사장 위임식 시내산-광야 방황-가데스로 진행
1406 아론의 죽음 모압광야 도착ㆍ2차 인구조사 요단동편 점령 및 분할 모세의 고별설교(신명기 기록) 후계자 여호수아 등장 모세의 죽음
1405 가나안 입성 및 성전 수행
1400 가나안 정복완료 및 가나안땅 분할ㆍ도피성 설치
1390 여호수아의 죽음
사사시대 (1375-1050)
1374 웃니엘사사의 활동(1367-1327)
1316 에훗사사의 활동(1309-1229)
1216 드보라사사의 활동(1209-1169) 바락사사
1169 기드온사사의 활동(1162-1122)
1103 사무엘의 출생 입다사사의 활동(1078-1072)
1091 사무엘이 소명 받음
1075 삼손사사의 활동(1075-1055) 미스바의 회개운동
통일왕국시대 (1050-930)
1050 사울이 기름부음 받음ㆍ왕정시대의 시작
1040 다윗의 출생
1025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
1020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
1017 사무엘의 죽음
1010 사울의 죽음 다윗의 등극(1010-970)
1003 다윗의 예루살렘성 정복 언약궤의 예루살렘성 안치
991 다윗과 밧세바 사건
990 솔로몬의 출생
979 압살롬의 반역
973 다윗의 인구조사와 대재난
970 솔로몬의 등극(970-930) 다윗의 죽음
966 솔로몬이 성전건축 시작
965 아가서 기록
959 솔로몬이 성전 완공 솔로몬왕궁 건축시작
946 솔로몬왕궁 완공 ? 지혜문학의 발달ㆍ욥기 저술 추정
938 여로보암의 반역
935 전도서 기록
분열왕국시대 (930-722)
930 솔로몬의 죽음ㆍ분열왕국시대 시작 르호보암 유다왕 등극(930-915) 여로보암1세 이스라엘왕 등극(930-909)
875 엘리야선지의 활동(875-848)-이스라엘에서
874 아합 이스라엘왕 등극(874-853)
863 아합왕의 죽음
858 오바댜선지의 활동(858-840?)-유다에서
853 여호람 유다왕 등극(853-841)
848 엘리사선지의 활동(848-797)-이스라엘에서 나아만장군 치유
841 예후 이스라엘왕 등극(841-814) 아하시야 유다왕 등극 아달랴의 선정
835 요아스 유다왕 등극(835-796) 요엘선지 활동(835-796)
797 엘리사선지의 죽음
796 요엘선지의 활동 종결
793 여로보암2세 이스라엘왕 등극(793-753)
790 4차 남북전쟁 개시
785 요나선지의 활동(785-775)-이스라엘에서
760 아모스선지의 활동(760-750)-이스라엘에서
759 요나의 니느웨 사역
751 요담 유다왕의 등극(750-735)
750 호세아선지의 활동(750-715)-이스라엘에서
748 앗수르의 침입
742 아하스 유다왕의 섭정
740 이사야선지의 활동(740-681) 미가 선지의 활동
735 아하스 유다왕의 등극(735-715) 반앗수르 동맹
733 앗수르의 1차 이스라엘침입
732 앗수르의 2차 이스라엘침입
728 히스기야 유다왕 등극(715-686) 및 종교개혁
724 앗수르의 3차 이스라엘침입
722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남유다왕국시대 (722-586)
714 앗수르의 유다 침입
697 므낫세 유다왕의 등극(697-642)
681 이사야선지의 활동 끝남
642 아몬 유다왕의 등극
640 요시야 유다왕의 등극(640-609) 나훔선지의 활동
630 하박국선지의 활동 스바냐선지의 활동
626 예레미야선지의 활동(626-585)
622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및 성전수리
612 앗수르의 멸망
609 요시야왕의 전사 여호아하스 유다왕의 등극
608 여호야김 유다왕의 등극(609-598)
606 바벨론의 1차 유다 침입 다니엘 등이 바벨론의 1차 포로 됨 애굽의 멸망
597 바벨론의 2차 유다 침입 여호야긴, 에스겔 포로되어 감
593 에스겔선지의 활동(593-571)
588 바벨론의 3차 유다 침입
586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예루살렘 함락)
유다백성의 포로 및 귀환 (BC586-432)
586 유다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감
580 다니엘 세 친구의 풀무불 기적
562 느부갓네살의 죽음
550 다니엘의 네 짐승 이상
539 고레스 바사왕의 바벨론 정복(바벨론의 멸망)
538 고레스 바사왕의 포로귀환 칙령 다니엘과 사자굴
537 1차 포로귀환(스룹바벨의 인도)
536 스룹바벨의 성전재건 착공ㆍ중단
530 다니엘의 죽음
520 학개, 스가랴선지의 활동(520-480) 성전재건 재개
516 성전재건 완공
483 아하수에로왕의 잔치ㆍ왕후 와스디 폐위
479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의 왕후로 피택
474 하만의 음모 및 하만의 죽음
473 부림절 제정
470 스가랴선지 사역 종결
458 2차 포로귀환(에스라의 인도)
에스라의 개혁운동
444 3차 포로귀환(느헤미야의 인도) 예루살렘성곽 수축 완공, 낙성식
433 바사로 돌아간 느헤미야
432 느헤미야가 귀국 및 개혁운동 시작
410 말라기선지의 활동(410-400)
신구약 중간시대 (BC432-AD5)
343 바사의 애굽 정복
331 헬라의 바사 정복
37 유다대제로 헤롯 즉위(BC37-4)
27 로마의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황제 즉위(BC27-AD14)
4 세례 요한 탄생 아구스도의 호적령
그리스도의 탄생
4 예수의 탄생
AD 8 예루살렘 성전의 예수
26 로마의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부임(AD26-36)
27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그리스도의 공생애
2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예수의 공생애 시작ㆍ가나에서의 예수 첫 이적
요한이 제자 됨 베드로가 제자 됨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적
28 세례 요한의 죽음
12제자 임명ㆍ12제자 파송ㆍ베다니 전도
29 예수의 오병이어 이적ㆍ변화산 사건ㆍ베드로의 신앙고백
30 삭개오의 구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최후의 만찬, 십자가 수난과 운명, 부활, 승천
초대교회
30 오순절 성령 강림과 교회 형성 스데반의 순교
34 사울의 회심
37 바울의 1차 예루살렘 방문 베드로의 투옥
44 야고보사도의 순교 베드로의 투옥과 출옥
45 팔레스타인 대흉년 바울의 2차 예루살렘 방문(구제헌금 전달)
47 바울의 1차 전도여행(47-49)-남갈라디아 방문
49 바울의 3차 예루살렘방문 예루살렘 종교회의
바울의 2차 전도여행(49-52)-북갈라디아 방문-고린도에서 1년6개월 체류
50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
51 데살로니가전서/후서 기록
53 바울의 3차 전도여행(53-57)-에베소, 마게도냐, 고린도, 드로아,
밀레도 전도-에베소 체류
54 네로 로마황제 통치(54-68)
55 고린도전서 기록
56 갈라디아서 기록
57 고린도후서 기록 로마서 기록
58 바울의 체포와 로마 호송
60 베스도 유대총독 취임(60-62)
61 바울의 로마감옥 투옥(61-63)
62 빌레몬서, 야고보서 기록, 주의 동생 야고보의 순교 빌립보서 기록(62-63)
63 에베소서 기록 골로새서 기록 바울의 석방 디모데전서 기록(63-65)
64 로마의 대화재와 네로의 기독교 박해(64-68) 베드로전서 기록
66 디도서 기록 베드로후서 기록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란
디모데후서 기록(66)
67 바울사도의 순교
68 베드로사도의 순교
70 디도의 예루살렘 점령 유다서 기록(70-80)
81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90-96)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기록
95 요한사도의 밧모섬 유배 요한계시록 기록
100 요한사도의 죽음 (96~100)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수메르인 Sumerian'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 (Black Headed People)라는 뜻이다. 크래머 같은 학자들은 주위에 원래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살았다고 하여 '인종의 섬'이라하는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 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 있는 이 수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수메르 문제 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 문명이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 그 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수밀이국>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
<한단고기 삼성기(三聖記)>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
<수밀이국의 대이동>
그러면 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 근처에 있던 <수밀이국>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환국말기인 약 6천년전에 인구가 증가하고 기상이변으로 시베리아 지역이 점점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2환국의 한 갈래가 성지 태백산(백두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내려온 것(환웅의 배달국)이 바로 오늘날의 한민족이다. 이제 그 환국의 대이동 경로를 따라 갈라져 나가 오늘날 여러 민족의 뿌리가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문명화된 땅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선 (그 주위에서) 수메르가 최고 발달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도시는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수세식화장실도 이용했다. 이집트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더 나아가 바빌론과 그리스 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받았으니...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 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 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이 수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수메르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 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들이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이것이 수메르 문제의 화두이다. 그들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어느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면 먼저 언어의 특징이 같아야 하고, 문법 구조가 같아야 하고, 유사한 언어 특히 수사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인도와 유럽의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인도 샨스크리트어가 모두 이 세 가지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물론 수메르어와의 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생각키로는 이 세가지 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같은 언어는 우리 한국어가 아닌가 한다.
먼저 언어의 특징이란 수메르어가 교착언어인데 교착언어란 우리말의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붇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와 인도어는 일단 교착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수메르어와는 그 특징에 있어서 같지 않다.
다음으로 문법 구조에 있어서 수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는 같은 구조이다.
수메르어와 한국어 발음과 뜻 비교
슈메르어 발음과 과 뜻
한국어 발음과 뜻
아누(Annu) 최고신
하느님 上帝
안(An) 하늘, 天
하늘, 天
기르(Gir)
길 (Gil) 路
라 (Ra) ...에서
로 (Ro) 조사 (助辭)
아비 (Abi) 아버지
아비, 父, 지아비 (夫)
움마 (Uhma) 엄마
엄마 (Uhma) 母
니므 (Nim) 님, 任
님 (Nim) 사람
바드 (Bad) 밭 田
밭 (Bat)밭, 田
나 (Na) 나, 일인칭
나 (我) 일인칭
그 (Ge) 3인칭
그 (Ge) 3인칭
이. 1일칭
이. 지시대명사
영국학자 '크래머'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 인들'이 문명을 다 가지고 들어와 수메르문명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다.
언어 이외에 수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수메르의 문화 속에는 Ziggurat 이라는 인조산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받드는 군사부 일체 제도가 있었는데 동방 한민족의 문화와 거의 유사하다.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 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 지역까지 수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정교일치: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제천의식: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천문학: 인간의 운명이 천체 운행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태음력: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으로 만들었다.
-60진법: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민족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조희선교수님홈에서)
수메르 사람들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의 평야에 나타나 살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로 시대를 구분하는 통상적인 시대구분법에 따른다면 이때는 목축과 농경생활이 막 시작된 신석기시대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지대에는 수메르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여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이들 보다 우월한 문화를 지니고 이주하여 이내 이들을 압도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서 기원한 민족인지, 그리고 이들의 초기 역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한 정설이 없다. 이들의 기원이 매우 불명확한 반면, 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이 너무도 두드러지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수메르인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도 있었다.
"수메르 문헌의 제시된 증거에 기초해 볼 때, 기자의 피라미드는 시나이 사막에 위치한 우주 기지에서 끝나는, 우주관제센터의 착륙복도의 일부로서 외계인들에 의해 유도 장치로 쓰일 목적으로 건설된 듯 하다"
이글의 저자에 따르면 고대 수메르인들은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일종의 행성간 버스 정거장으로 사용했던 우주 여행자들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바로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대피라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인의 기원에 관한 이 저자의 추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모든 것의 이전'이었던 문화가 갑자기 등장하여 복잡한 문자, 경제체제, 그리고 잘 구성된 사회구조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을까?"
이 저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의 문화적 유산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당시 겨우 석기를 사용하던 원시시대 인간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고도의 첨단문명을 가지고 외계에서 이주해온 우주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업적이 매우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글의 필자가 생각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메르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부단한 실험과 개량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교착어를 사용한 검은 머리의 사람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인들이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교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동양의 일부 사학자들은 이들을 동아시아의 민족들과 연관시키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바 "재야사학자"들 중에 수메르인을 우리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단군 이전에 한민족이 세운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수밀이(須密爾)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재야 사학자들은 바로 이 수밀이국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그 수메르국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수메르 역사를 정통으로 연구해 온 서양학자들은 수메르민족의 기원을 오늘날의 동아시아 민족들과 연계시키는데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사무엘 크레이머는 수메르인들 자신들은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에 태어나 그 곳에서 살아온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저명한 아랍사학자인 히티(Philip K. Hitti)는 수메르어가 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 등에서 발견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점을 제외한 다른 어떤 특성도 이들 언어 또는 기타의 우랄 알타이어나 몽고어와 비슷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각종 부조물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의 생김새를 보아서는 그들이 긴 머리의 지중해 인종과 넓은 이마의 북동부 산악지대인인 아르메니아족과의 혼혈로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수메르 유적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와 역시 고고학자인 독일인 세람(C. W. Ceram) 등은 수메르인들이 계단 모양의 신전을 만들어 그 곳에 신을 모신 것을 본다면 산악지대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신들은 높은 언덕 위에 산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수메르 축조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목조건물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나무가 무성한 고지대가 그들의 발원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더 케이트(Arthur Kate)는 인더스강 계곡이 수메르인들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까지 어느 것이 맞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어쨌거나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민족이 지금의 중동 민족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 아니고 어찌 보면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웠고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설형문자들을 발견하고 판독해 가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출처 : Tong - para33님의 역사속으로..통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 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성서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중요한 종교 도시인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다고 전하는데 본디 우르 사람이었던 그가 수메르 문명아래서 60여년을 살다가 가나안땅으로 가서 살적에 어느 나라의 말을 사용했고 그가 썼던 문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명해진다.
수메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야훼의 창조이야기, 에덴동산설화, 노아홍수 이야기, 욥기,아가서,바벨탑사건...등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지자 성서학자들은 충격과 참담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슈메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무려 1천년 전의 문명이라는데에 고고학자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슈메르인들이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의 사용으로 옷을 물들여 입고 다닐 당시 히브리인은 문자도 없었으며 동물가죽을 벗겨입고 다녔었다.
성서학자들은 인류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동산도 그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슈메르유적(지금의 이라크에 위치함)의 발견은 그야말로 전세계 크리스트교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수 없기 때문이다.
슈메르에는 이미 에덴동산 설화가 있었고 에덴동산과 남자 여자가 등장하며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까지 성서와 너무나 흡사한 설화가 있었고,노아의 홍수와 흡사한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노아라는 이름은 지아슈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는 성서가 슈메르 문자의 판독으로 이제 한낮 휴지조각에 처해지게 된 것에 성서학자들은 참담함을 감출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Tong - para33님의 역사속으로..통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설형문자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습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대홍수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훼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신석기 4기 빙하기가 끝날 무렵 간빙기 기원전 1만년 경에 북반구의 빙하가 갑자기 대거 녹아내리면서 대홍수가 일어났고 실제로 이사건으로 고대의 저지대 문명의 대다수가 멸망했습니다. 이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신화에 적혀있고 이후에 유태인들이 바이블에 그것을 자신들의 일인냥 기록한 것입니다. 홍해 갈라짐 현상은 현재에도 지구에 여러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과학적인 현상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수 메르 문명 발굴의 처음 목적이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덴과 전설을 증명하는 것이었지요. 발굴결과 중 길가메시 서사시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길가메시를 비롯한 수메르 신화를 카피한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성경에서 유태인의 시조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우르 출신으로 이집트로 이주한 불법 체류자였습니다. 수메르 문자 해독으로 성경은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여러 설화들을 섞어서 만든 것임을 입증한 셈입니다.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민족
수메르 사람들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략 기원전 4500~4000년 사이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평야에 나타나 살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로 시대를 구분하는 통상적인 시대구분법에 따른다면 이때는 목축과 농경생활이 막 시작된 신석기시대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지대에는 수메르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여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이들보다 우월한 문화를 지니고 이주하여 이내 이들을 압도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서 기원한 민족인지, 그리고 이들의 초기역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한 정설이 없다. 이들의 기원이 매우 불명확한 반면, 이들이 남긴 문화유산이 너무도 두드러지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수메르인들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한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는 것도 있었다.
"수메르 문헌의 제시된 증거에 기초해 볼 때, 기자의 피라미드는 시나이 사막에 위치한 우주기지에서 끝나는, 우주관제센터의 착륙복도 일부로서 외계인들에 의해 유도장치로 쓰일 목적으로 건설된 듯하다"
이글의 저자에 따르면 고대 수메르인들은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일종의 행성간 버스정거장으로 사용했던 우주여행자들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바로 이집트 기자에 있는 대피라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인의 기원에 관한 이 저자의 추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모든 것의 이전'이었던 문화가 갑자기 등장하여 복잡한 문자,경제체제,그리고 잘 구성된 사회구조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의 문화적 유산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당시 겨우 석기를 사용하던 원시시대 인간들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고도의 첨단문명을 가지고 외계에서 이주해온 우주인들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업적이 매우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필자가 생각한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메르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부단한 실험과 개량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교착어를 사용한 검은 머리의 사람들
수메르인들은 자신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인들이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교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동양의 일부 사학자들은 이들을 동아시아의 민족들과 연관시키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재야사학자"들 중에 수메르인을 우리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단군 이전에 한민족이 세운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수밀이(須密爾)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재야 사학자들은 바로 이 수밀이국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그 수메르국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수메르역사를 정통으로 연구해온 서양학자들은 수메르민족의 기원을 오늘날의 동아시아 민족들과 연계시키는데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사무엘 크레이머는 수메르인들 자신들은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에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온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저명한 아랍사학자인 히티(Philip K. Hitti)는 수메르어가 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 등에서 발견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점을 제외한 다른 어떤 특성도 이들 언어 또는 기타의 우랄 알타이어나 몽고어와 비슷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각종 부조물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의 생김새를 보아서는 그들이 긴 머리의 지중해 인종과 넓은 이마의 북동부 산악지대인인 아르메니아족과의 혼혈로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수메르 유적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와 역시 고고학자인 독일인 세람(C. W. Ceram) 등은 수메르인들이 계단 모양의 신전을 만들어 그곳에 신을 모신 것을 본다면 산악지대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신들은 높은 언덕 위에 산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수메르 축조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목조건물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나무가 무성한 고지대가 그들의 발원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더 케이트(Arthur Kate)는 인더스강 계곡이 수메르인들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어느 것이 맞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어쨌거나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민족이 지금의 중동민족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 아니고 어찌 보면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슈메르인은 한국인이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로 유명한 사뮤엘크레머 교수는 최초의 창조설화를 비롯한 교육제도, 사법제도 등 인류 최초의 39개 사건이 모두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펀주: 수메르문명 -> 에게문명 -> 이집트,그리스)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지역을 의미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며, 이 동산마저 이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북한학자들은 '대동강문명'이라고 하여 검은머루 유적지 발견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더 오래 된 문명이 대동강유역에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수메르인 Sumerian'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 있는 이 수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수메르 문제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나일강유역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 인도 인더스강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문명이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 그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지금 발견되고 이번 전쟁으로 도난당한 토판들은 거의 경제거래 문서들로서 이는 거래를 한 다음 남긴 계약문서들이다.
한국 강신택교수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분야 연구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창세기 창조설화와 홍수설화 등이 수메르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 그런데 슈메르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먼저 따먹는다는 둥 그리고 홍수가 사람들이 다 죽는데 지아슈드라는 의인이 있어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은 구제한다는 둥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급문화 수메르에 대하여 히브리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한다. 서양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적 이성과 히브리의 감성적 신앙이라는 두 물줄기로 이루어진다. 이 두 물줄기는 고대 수메르문명에서 만난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우르 남무왕국이 멸망하면서 슈메르문명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올림푸스신전의 원형이 수메르의 딜문 동산의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히브리인들의 정신적 유산은 그대로 수메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라크가 저렇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문명의 정신적 고향이 황폐화되거나 말살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펀주: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학자들의 언어학 분류로 <우랄-알타이어>이다.
이라크(메소포타미아)지역과 한국은 그토록 멀리 떨어져있는 데도 같은 언어로 분류된다.) 특히 조사를 사용해서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는 '교착어'의 유일한 특징이라 할수 있다.
~로, ~가, ~의 , ~를 와 같은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는 '교착어'가 유일하다. 교착어를 쓰는 종족은 전세계적으로 어떤 민족인가? 동이족 계열 뿐이다.
터키도 교착어를 쓴다. 어순체계가 약간 다른데, 터어키에서는 현재에도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터키 역사교과서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펀주: 터키는 수메르문명에 의하여 문명이 일어난 부근에 후에 '돌궐(투르크)'의 일부가 다시 이동하여 생긴 나라로 보임. 물론 그지역 사람들과 피가 많이 섞여서 지금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다름. 돌궐은 배달민족은 아니지만 가까이 있던 민족.
말하자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족'이 아니었나 추정. )
그외 지구촌의 소수종족 중에 교착어를 쓰는 곳이 그외 몇몇 종족은 중국의 묘족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교착어를 사용한다. (펀주: 묘족 - 동이(東夷)계열 민족. 인디언 - 만주와 시베리아의 고대한국에서 이동한 것으로 밝혀짐.)
출처 : Tong - para33님의 역사속으로..통
슈메르어(발음)[ 뜻] 한국어 발음[단어 뜻] 슈메르발음[단어뜻] 한국어 발음[단어 뜻]
아누(Annu)[최고 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 [3인칭 ] 그 Ge [ 3인칭 ]
라 (Ra) [~ 에서 ] 로 (Ro) [ 조사 ] I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 Abi [ 아버지 ] 아비 (Bo) [ 夫 ] Uhma 움마[엄마 母] 엄마 Uhma [엄마 母]
니므 Nim [ 님 任 ] 님 (Nim) [ 사람 任]
출처 : Tong - para33님의 역사속으로..통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수메르의 주신은 안누(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우리말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과 같은 의미이다. 중세 이전에 쓰던 한눌님으로 기준하면 이 단어는 전부 같은 발음이 된다. (펀주: 고대 한국어에서 한 과 안 은 같은 말로 쓰임.)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 (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부모로써 떠받드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천지부모의 자식이란 뜻이 언어 속에 그대로 전해진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근본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슈메르어 안(An)은 하느님을 뜻한다. 또한 이 '안(An)'은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왕의 표상이 되었다. 고대 한국에서 원래 제왕이란 우주의 최고신을 대신하여 이땅을 다스리는 성인을 말한다. 고대에서는 그 시대의 최고의 지혜와 덕을 갖춘 성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가지 폐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래 왕조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선출방식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습제로 바뀌면서 여러가지 폐단도 같이 발생하게 된다. )
한민족은 하늘과 땅의 민족이란 뜻이고 천손(하늘의 자손)민족의 뜻이다. 제왕은 (원래는)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그런 존재이다. 또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을 더 살기 좋고 이롭게 한 존재이다.
슈메르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5行)흔적, 한단고기의 12환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수메르는 같은 뿌리라고 단언할수 있다. (편주: 어떤 학자분 - <'수밀이'는 원래 '소머리' 라는 말이다. 만주의 '우수하(牛首河)' 가 원래에는 '소머리강' 인 것처럼. 그러므로 '소머리' -> '수메르'가 된 것이다.>)
영국학자 '크래머'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 인들'이 문명을 다 가지고 들어와 수메르문명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짐.- 언어 이외에 수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지역까지 수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기원전 3500년경 과연 그 찬란한 고급문명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과연 어딘가?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60진법,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아시아의 대제국 환국과 그들의 후예 슈메르문명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는 네 권으로 이루어져있다. 환인과 환웅 역사를 기록한 삼성기, 단군조선 역사가 담겨있는 단군세기,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 역사를 기록한 북부여기, 마지막으로 태백일사에는 상고시대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책 속에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일만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단군조선이 있기 이전에 5천년 역사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에 환국이 있었고, 환국의 뒤를 이어 신시라 불리는 배달국이 있었다. 그리고 단군조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후 고구려 전신인 북부여, 북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 대진국이라고 하는 발해, 고려의 역사로 펼쳐진다. 특히 상고시대가 찬란하다.
일만년 전 탄생한 최초의 국가 환국. 환국은 3300년 동안 일곱 명의 환인이 통치했다 한다. 그후 신시 배달국은 열여덟 명의 환웅이 천 오백년 이상 다스렸다고 한다. 환국과 신시 배달국이 오천년 정도 이어진 후, 마침내 단군조선이 탄생하는데, 마흔일곱 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한다. 윤명철교수(동국대 사학과)
환단고기의 특징은 우리민족의 위대성을 강조, 광활한 영토를 기술, 민족의 정체성을 자극한다.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삼성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삼성기 하편)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호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만년 전에 탄생한 환국의 영토는 아시아를 넘어선다. 당시 환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이 땅에서 열두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나라 중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 수밀이국을 고대 수메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일으켰던 수메르민족이 우리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길림성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널방 오른벽에 그려진 씨름도와, BC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슈메르의 구리향로가, 똑같은 '왼씨름'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
출처 : Tong - para33님의 역사속으로..통
신의 인봉
그레이엄 핸콕은 현대의 중요한 발상들 가운데 하나, 즉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고대의 위대한 문명이 선사시대에 존재했다가 사라졌을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핸콕의 여러 저서와 TV 프로그램은 전문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 수백만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인류문명의 기원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다.「신의 지문」 이후 그레이엄 핸콕이 7년 만에 새로 출간한 이 책 「신의 봉인」은 더욱 독창적이고 중요하다. 그는 「신의 봉인」에서 주목할 만한 해저세계 탐험을 한다.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의 고대 신화에 의하면, 전 세계적인 홍수에 수몰되어 사라진 문명의 폐허유적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핸콕은 실제로 고대 신화와 일치하는 지역에서 잠수 탐사를 하여 5년여에 걸친 치밀한 연구 조사 끝에 풍부한 사진 자료와 과학적 수몰지도를 곁들인 이 책「신의 봉인」을 완성했다. 현재 인류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북반구는 마지막 빙하기 때 두께 3킬로미터의 대륙빙하에 뒤덮여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당시 고대인들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한 적도 부근 남쪽의 해안과 계곡의 저지대에 살며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다. 빙하기가 끝나던 1만 5000년 전-8000년 전에 대륙빙하가 녹아내려 몇 차례 전 세계적인 대홍수가 발생했다. 빙하기에 선사문명이 존재했을 경우 그 유적이 당시의 대홍수로 120미터 이상 수면이 상승한 바다 속에 잠겼으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핸콕이 선사 고대문명의 유적을 5대양 6대주의 해저에서 열심히 찾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인도, 수메르, 비미니, 몰디브, 몰타, 일본, 대만, 중국 근해의 해저에서 잠수탐사를 하여 선사 문명의 폐허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고대 신화에서 홍수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의 진위를 가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핸콕은 첨단 과학을 길잡이 삼아 마지막 빙하시대 말기에 일어난 대재앙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치밀한 조사를 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5,000년 전에서 8,000년 전 사이에 전 세계의 빙하가 녹게 되자 해수면이 상승하여 인간이 거주 가능한 2,50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육지가 바닷물 속에 잠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세계의 모양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핸콕은 세계의 변화하는 해안선을 지도로 나타내는 최신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그것들이 고대의 여러 홍수전설 내용과 놀랄 만큼 일치하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는 갖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중 탐사를 실시하여 신화에 명시된 지역에 정확하게 위치한 해저의 유적을 찾아낸다. 고고학자들은 그러한 유적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 벵골 만과 아라비아 해의 해저에 있는 고대 도시들의 유적, 일본 근해의 건축물 폐허, 지중해와 대서양의 고대 구조물이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냈다.「신의 봉인」은 역사 탐험, 수수께끼, 모험, 발견을 주된 내용으로 삼은 책이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잊혀진 매혹적인 일화에 대한 확고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문명의 기원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제1부 발단
제1장 유적
제2장 대홍수 이전 시대 도시들의 수수께끼
제3장 해빙
제2부 인도(1)
제4장 잊혀진 도시들, 고대의 문서들, 인도의 아틀란티스
제5장 인도 순례
제6장 배가 내려간 장소
제7장 잃어버린 인도
제8장 산 위의 악마와 문명의 재탄생
제3부 인도(2)
제9장 동화의 왕국
제10장 붉은 산의 수수께끼
제11장 쿠마리 칸담의 탐사
제12장 감추어진 연대
제13장 피라미드 군도
제14장 수중의 유령들
제4부 몰타 탐사
제15장 몰타의 연기와 불
제16장 해골의 동굴
제17장 의혹의 뿌리
제18장 그린 북의 가면극
제19장 대홍수
제20장 새로운 세계가 열리다
제5부 고대 지도
제21장 미지의 땅
제22장 지도에 숨겨진 기억
제23장 잃어버린 섬을 찾아서
제24장 안틸리아 섬의 변신
제6부 일본, 대만, 중국
제25장 신들의 사랑을 받은 땅
제26장 기억
제27장 요나구니에 맞서다
제28장 1만3,000년 전의 일본 지도와 대만 지도?
제29장 게라마에 마주 서다
제30장 게이트의 상어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역사적 수수께끼를 조사한 다수의 베스트셀러 저자이다.「신의 지문」, 「신의 암호」등은 20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400만 권 이상이 팔렸다.
창조
? 노아시대
바벨탑 사건 (창 11:1-9)
B.C
2166 아브라함의 출생 (창 11:27)
2166 우르에서 하란까지 (창 12:4)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 (창 12:56)
2067 할례 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 (창21:23)
? 욥이 고난 받음 (욥 1:12-19, 2:7-11)
욥이 축복받음 (욥 42:10-15)
욥의 죽음 (욥 42:17)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 (창 25:26)
1991 아브라함의 사망 (창 25:8)
1929 야곱의 하란도피 (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 (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 (창 30:24)
1898 애굽으로 팔려감 (창 37:36)
1886 이삭의 죽음 (창 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 (창 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 (창 46:7)
1859 야곱의 사망 (창 49:33)
1805 요셉의 사망 (창 50:26)
1527 모세의 출생 (출 2:12), 모세의 시 (시 90)
1447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 (출 5:1)
1446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라암셋 출발 (출 12:37)
홍해 도착 (출 14:11)
만나,메추라기 시작 (출 16:13)
시내광야 도착 (출 19:1), 십계명 받음 (출 20:3-17)
1445 성막 건축 (출 40:33), 레위기의 규례 지시< 1-2월 >, 첫번째 인구 조사 (민 1:2)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민 33:16-36), 70인 장로선정 (민 11:24)
가데스 정탐군 파견 (민 13:3)
1406 모세의 유언 설교 (신 1장 - 신 33장), 모세의 죽음 (신 34:5), 아론의 죽음 (민 20:28)
모압 광야 도착, 두번째 인구 조사 (민 26:1), 발람과 발락의 사건 (민 22장 - 민 24장)
후계자 여호수아 임명 (민 27:23), 요단 동편정복 (민 32:1)
1405 요단강을 건넘 (수 3:17), 이스라엘의 가나안 도착, 두번째 유월절 (수 5:10)
만나 그침 (수 5:12), 요단 동편땅 분할 (수 13:15-31)
1400 요단 서편땅 분할 (수 14장 - 수 17장), 실로에 회막 세움 (수 18:1)
1390 여호수아 사망 (수 24:29)
1375 사사 통치의 시작
1384 옷니엘 < 40년 사역 > (삿 3:9-11)
1316 에훗 < 80년 사역 > (삿 3:15-30)
1236 삼갈 (삿 3:31)
1216 드보라와 바락 < 40년 사역 > (삿 4장, 삿 5장)
1169 기드온 < 40년 사역 > (삿 6장 - 삿 8장)
1120 돌라와 야일 (삿 10:1-5)
1117 룻과 나오미
1103 사무엘의 출생
1085 입다 < 6년 사역 > (삿 11:1-33)
1079 입산.엘론.압돈 (삿 12:8-15)
1075 삼손 < 20년 사역 > (삿 13장 - 삿 16장), 사무엘의 사역 < 75년 > (삼상 7:3), 미스바 대회개 (삼상 7:3-11)
1050 사울 치하의 통일왕국시대 (삼상 10:24)
1040 다윗의 출생 초기생애 (시 7:11-13,17,22,23,34,35,52,54,56,57,59편)
1025 기름부음 받은 다윗 (삼상 16:13)
1020 다윗과 골리앗 (삼상 19:1-15)
1017 사무엘의 죽음 (삼상 25:1)
1010 사울의 전사 (삼상 31:6, 대상 10:6), 다윗의 등극 < 헤브론 > (삼하 2:4, 대상 11:3),
왕정 초기 (시 8, 9,15,16,18-21,24,26,29,36,58,60,68,101,108,110편)
1003 다윗의 통일왕국 (삼하 5:5), 예루살렘 천도 (삼하 5:9, 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 (삼하 6:16, 대상 15:29)
991 다윗의 간음죄 (삼하 11:1-21), 범죄 후 망명 전 (시 5,6,32,38-41,51,55,64편)
990 솔로몬의 출생 (삼하 12:24)
979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0-12), 망명시기(시 3,4,27,28,31,61,63,69,70,143편), 아삽의 시(시 50, 73-83편)
고라 자손의 시(시 42,44-49,84,85,87,88편), 헤만의 시 (시 88장), 왕정 말기 (시 3,37,103,139편)
973 블레셋의 침입 (대상 20:4), 다윗의 인구조사 범죄(삼하 24:1-7) (대상 21:1)
970 다윗의 죽음(왕상 2:10, 대상 28:11-21), 솔로몬의 등극 (왕상 2:12), 솔로몬의 시 (시 72,127편)
966 성전 기공 (왕상 6:1, 대하 3장, 4장)
965 아가서 기록
959 성전 완공 < 7년 > (왕상 6:38), 왕궁기공(왕상7:1)
솔로몬의 잠언(잠 1장 - 잠 9장, 잠 10:1-22, 16:25-29,31장), 아론의 잠언 (잠 30장)
935 솔로몬의 전도서 기록
931 솔로몬의 죽음 (왕상 11:43, 대하 9:31), 왕국 분열 (왕상 11:43-12:20)
926 애굽왕 시삭의 침입 (왕상 14:15-28)
910 아사의 유다왕 즉위 (왕상 15:8, 대하 14:1)
885 오므리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3)
875 엘리야의 사역 시작
874 아합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9)
872 여호사밧의 유다왕 즉위 (왕상 22:41, 대하 17:1)
853 벤하닷의 사마리아 침입, 아합의 전사 (대하 18:34)
848 엘리사의 사역 시작 (왕하 2:13)
841 예후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0:30), 아달랴 왕후의 유다 섭정 (대하 22:12)
835 요아스의 유다왕 즉위 (왕하 11:21), 요엘의 사역 시작
814 여호아하스의 이스라엘왕 즉위
797 엘리사의 사역 종결 (왕하 13:20)
796 요엘의 사역 종결
793 요나의 사역 시작,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4:23)
790 웃시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26:1)
783 살만에셀 4세의 앗수르왕 즉위
772 앗술단 3세의 앗수르왕 즉위
760 아모스의 사역 시작 (암 1:1)
759 요나의 니느웨 전도 (욘 3:1-10)
755 아모스의 사역 종결
754 앗술니라리 5세의 앗수르왕 즉위
753 스가랴의 이스라엘왕 즉위, 요나의 사역 종결
752 살룸의 반란,살룸이 시해됨
751 요담의 유다왕 즉위
746 호세아의 사역 시작 (호 1:1)
742 미가의 사역 시작, 브가히야의 이스라엘왕 즉위, 아하스의 유다왕 즉위
740 이사야의 사역 시작 (사 6:1)
733 르신과 베가의 침입 (사 7:1)
732 호세아의 이스라엘왕 즉위, 다메섹의 함락
728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왕하 18:4, 대하 29-32장)
724 앗수르의 3차 침략 (왕하 17:5), 호세아의 사역 종결
722 북왕국 이스라엘의 함락 (왕하 17:6), <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
미가의 예언 성취 (미 1:67)
714 앗수르왕 산헤립의 침입 (대하 32:1)
701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697 므낫세의 유다왕 즉위 (대하 33:1)
695 미가의 사역 종결
669 앗술바나팔의 앗수르왕 즉위
663 테베의 멸망
681 이사야의 사역 종결
642 아몬의 유다왕 즉위
640 요시야의 유다왕 즉위(왕하 22:1, 대하 34:1), 나훔, 스바냐의 사역 시작
630 스바냐의 사역 종결
627 예레미야의 사역 시작 (렘 1:1)
622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612 니느웨의 함락,앗수르의 멸망, 나훔의 예언 성취 (나 2, 3장) 힐기야의 율법책 발견(왕하 22:8, 대하 4:14),
하박국의 사역 시작
609 요시야왕의 전사,여호야김의 유다왕 즉위
608 하박국의 사역 시작 < 유다 >
605 갈그미스 전투 (왕하 24:1), 바벨론의 1차 침입 < 1차 포로 >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감 (렘 46:2, 단 1:12)
602 여호야김의 반 바벨론 정책
601 애굽과의 재동맹 (렘 22:13-17)
598 바벨론의 2차 침입 < 2차 포로 > (왕하 24:10)
597 시드기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36:11),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감, 하박국의 사역 종결
593 에스겔의 예언 시작 < 바벨론 > (겔 1:12)
586 남왕국 유다의 함락 < 3차 포로 >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 포로가 됨(왕하 25:8, 대하 36:17),
하박국의 예언 성취 (합 1:5-11), 스바냐의 예언 성취 (습 1:8-18)
예레미야의 사역 종결 (렘 39:1-18), 오바댜의 사역 시작
583 오바댜의 사역 종결
580 다니엘의 풀무불 (단 3:19-25)
570 에스겔의 사역 종결
562 느부갓네살의 사망
559 바사의 고레스 즉위
550 다니엘의 4짐승 환상 (단 7:1-8)
539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단 5:30)
538 다니엘의 사자굴 (단 6:16-24),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대하 36:23)
537 1차 귀환 (스 2:1) < 스룹바벨 >
536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스 3:8), 성전 재건 작업 1차 방해,중단(스 4:4-23)
530 다니엘의 사망
522 다리오의 바사왕 즉위
520 학개,스가랴의 사역 시작 (슥 1장 -슥 8장), 성전 재건작업 재개 (스 5:2, 학 1:1) <학개, 스가랴의 사역 시작>
516 제 2성전 완공 (스 6:15), 스가랴의 사역 (슥 9-14장)
486 아하수에로의 바사 통치
480 그리이스의 바사 침공
479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에 2:17)
475 스가랴의 사역 종결
474 하만의 책략 (에 3:9)
473 부림절 제정 (에 9:28)
465 아닥사스다의 바사 통치
458 2차 귀환 조서 (스 7:11), 2차 귀환 (스 7:9) < 에스라 >
444 3차 귀환 < 느헤미야 > (느 2:9-11), 성곽 중수 필역 (느 6:15)
435 말라기의 사역 시작
433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야 (느 13:6), 말라기의 활동
432 느헤미야의 2차 귀국 (느 13:7)
37 헤롯의 유다왕 즉위
5 세례 요한의 탄생
4 예수 탄생 (마 2:11), 헤롯의 유아 학살 (마 2:16-18), 헤롯 대왕의 죽음
>> 목차고리 : 신구약 중간사
--------------------------------------------------------------------------------
A.D
8 유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12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황제 즉위
26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막 1:4)
본디오 빌라도의 유다 총독 부임
27 예수의 공생애 시작 (마 3:13-17, 막 1:14, 눅 1:36)
예수의 제1차 갈릴리 사역
가나안의 첫 이적 (요 2:1-11)
니고데모의 전도 (요 3:1-21)
28 12제자를 세우심 (마 10:1-4, 막 3:13-19)
예수의 제2차 갈릴리 사역
29 오천명을 먹이심 (마 14:13-21, 요 6:1-15)
물위를 걸으심 (요 6:16-21)
베드로의 신앙 고백 (눅 9:18-22)
예수의 제3차 갈릴리 사역
30 승리의 입성 (마 21:1-11)
성전 숙정 (눅 19:18-22)
주의 만찬 (막 14:22-25)
예수의 수난과 부활 (마 27, 28, 막 15:24-16:8, 눅 23:26-24:12, 요 19:17-20:10)
그리스도의 승천 (행 1:9-11)
오순절의 성령강림 (행 2:1-4)
스데반의 순교 (행 7:60)
32 사울의 다메섹 회심 (행 9:1-9)
35 바울의 예루살렘 1차 방문 (행 9:26, 갈 1:18)
44 요한이 형제 야고보의 순교 (행 12:12), 베드로의 투옥 (행 12:4)
45 대 기근 <글라우디오 치하 >
47-48 바울의 1차 전도여행 (행 13:1-14:28)
49 예루살렘 공회 (갈 2:1),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
50-52 바울의 2차 전도여행 (행 15:36-18:23, 살전 1:56, 3:1-6)
51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53-58 바울의 3차 전도여행 (행 18:23-21:16), 로마서 기록, 고린도전.후서 기록
54 네로의 로마황제 즉위
56 갈라디아서 기록
58 바울 체포 (행 21:27-39)
59 베스도의 유다총독 부임, 바울의 로마여행 (행 27:1-28:15)
60 히브리서 기록
61 바울의 로마 투옥 (행 28:16, 엡 3:16, 엡 1:12)
62 야고보서 기록,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에베소서 기록, 빌립보서 기록, 골로새서 기록, 빌레몬서 기록
63 바울 석방, 디모데를 권고하여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함 (딤전 1:3), 디모데전서 기록
64 로마 대화재, 네로의 박해 < 1차 박해 >, 베드로전서 기록
66 유대인의 반란, 디모데후서 기록, 디도서 기록, 베드로후서 기록
67 바울의 순교
68 베드로의 순교
69 베스파시아누스의 예루살렘 침입
70 예루살렘 함락, 산헤드린 공회 폐지
70-80 유다서 기록
81-96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 2차 박해 >
90 요한계시록 서신서 기록
95 요한의 밧모섬 유배 (계 1:6), 요한계시록 기록
96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100 얌니아 회의, 사도 요한의 죽음
인류 最古의 文明,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
아래의 글에서 참조, 발췌, 편집하였다.
동아원색세계백과사전, 1982
世界史를 西洋人의 눈으로 보지말고 東洋人의 눈으로 보자,
謝世輝 著, 1986
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 저, 이희수 옮김, 1998
메소포타미아, 장 보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1998
http://kr.ks.yahoo.com/service/wiki_know/
http://www.donga.com
http://www.crystalinks.com/meso.html
http://www.fordham.edu/halsall/ancient/asbook03.html
http://kin.naver.com/search
서언
----
2004년 12월 26일 발생한 인도네시아 해안 지진은 그 규모가
리히터 규모 9.0에 이르고 이로 인한 해일 피해는 동남아 11개
국에서 17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한국인 피해도 2005년
1월 9일 현재 사망 12명, 실종 8명에 이르고 있다. 동남아에서
발생한 이번 재앙은 그 피해가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이번에 사망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며, 앞으로 닥칠
여파는 전염병의 확산, 기후의 변화는 물론 세계의 정세까지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며 우리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이번의 자연재앙을 계기로 세계 각국이 처음으로 하
나가 되어 유엔을 중심으로 서로 경쟁적으로 피해복구를 지원하
기로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자연재앙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류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한편 이라크에서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인간
들이 자초하였으며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이라크에서의 파괴는
동남아에서 발생한 자연재앙보다도 더 커다란 정신적, 문화적
재앙이다. 이라크가 바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문명
의 발생지이며 인류 最古의 문화유적지이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에 대해
고대 그리스인이 붙인 지역명으로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그리고
강을 따라 있는 광범위한 지역,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터
어키 일부를 포함한다. 바그다드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신이
부여했다'라는 의미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곳에 Al-Qurna라는 메소포
타미의 옛 도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전설과 성서가 전하는 에덴
의 동산이 있다. 아담은 이 성스러운 지상의 낙원, 에덴의 동산
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담의 나무를 길렀다.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기도하던 때는 BC 2000년이라고 옛 글은 전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
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이기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보여준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
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 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
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오늘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인류 최고의 문명지 메소포타미아
의 역사를 둘러봄으로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살펴보고 우리의 앞
날을 그려보자.
사라진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
----------------------------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가르쳐주는 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기술되어져야 한다. 사료란 과거를 알기 위한 흔적이다. 문헌사
료는 물론,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모든 문화유산이 귀중한
사료이며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사료들을 발굴, 해석
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여왔다. 또한 이러한 문화유산은
그 희귀함과 예술적 가치에 의하여 기호가들과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의 목표물이 되어왔으며 도굴꾼들의 목표물이 되어왔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유산이 이라크 전쟁중에 사라졌다.
제 2차 세계 당시 베르린에서 사라진 독일의 금괴, 월남의 패망
과 함께 사라진 사이공의 금괴들의 운명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이 이처럼 이라크 전쟁과 함께 사라져버렸
다는 사실은 전쟁과 혼란과 우리 인간들의 본성의 또다른 한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2003년 4월 10일부터 사흘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한 것이다. 카크(Karkh)지역에
위치한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은 28개의 전시실이 있는 중동 최
대의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로서 최초의 달력이라
고 여겨지는 만년전의 돌결무늬가 있는 가죽과 5000년전의 수메
르인(Sumerian)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유물 등이 있었
다. 이곳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에서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 17만여점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이라크 지역 박물관 9곳에서 2000여점
의 유물이 사라졌다. 일부 유물은 시민들이 반환을 했거나 서방
언론사 직원들이 갖고 국경을 넘으려다 들켜 반환됐다. 전문가
들은 사라진 유물 대다수가 국제적 유물 암시장에서 거래돼 개
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재발견
--------------------------
매일 전해오는 이라크의 뉴스는 우리에게 '바그다드'뿐만 아니
라 '모술'이라는 도시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술이
야말로 우리에게 잊혀진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세계인에게 처
음 알게 하여준 곳이며 한때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모술은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
강 상류의 서쪽 연안 위치하며 이라크의 제 3의 도시이다.
3000여 년간의 영화를 자랑하던 메소포타미아문명지는 알렉산더
가 BC 331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후 이라크는 종교적으로나 다
른 어떤 측면에서도 아랍 지리학자들 이외의 어느 누구의 관심
도 끌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지인 이라크는 시리아-아랍사
막 건너편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팔레스타인만 기원 첫세
기부터 많은 사람들, 서양인들의 발길이 닿았다. 기독교의 모태
가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AD 363년 로마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이 지역을 원정갔다가 현지에서 사망하고 난 후로
는 이곳은 세계인으로 부터 완전히 망각되어버렸다.
이 변방 메소포타미아를 잊혀진 사람들의 망각 속에서 처음 발견
한 사람은 프랑스 남서부와 스페인 북부에 걸쳐 있던 옛 왕국
나바라의 유대교 목사 뱅자맹 드 튀델이었다. 그는 1160년경에
모술과 그 주변을 방문하여 형태도 가늠하기 어려운 폐허를 보았
다. 찬란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남긴 잔해였다. 그후 로
마인, 프랑스인, 덴마크인 여행자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
서 이곳이 한때 어떤 문명의 중심지였었다는 것은 인식하기 시작
하였으나 19세기에 이르도록 그 이상의 지식은 가질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진상이 현대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
들의 설형문자의 비밀이 1803년 독일의 라틴어 청년 교사에 의하
여 밝혀지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모술 즉 니네베의 폐허를 처음 발굴하여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BC 721-705)의 거주지였던 고대 두르샤르킨, 즉 코르
사바드의 성벽을 발견한 것은 1842년 프랑스 영사관의 발령을 받
고 모술에 도착한 폴-에밀 보타에 의해서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개요
========================
초기 농경사회(BC 9000-BC 5000)
------------------------------
인류 최초로, 가장 오래된 BC 9000년의 농촌유적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북방에 있는 산기슭(Karim Shahir in Zagros
foothills)에서 발견되었다. 인류가 씨를 뿌려 야생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개와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식
량을 채취하던 인간이 손을 써서 식량을 생산하는 문화, 즉 농업
을 시작 한 것이다.
BC 7000년의 주거지인 자르모(Jarmo)에서는 천연의 진흙 집들과
밀, 염소, 양, 돼지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들 북방의 농업인들의 이주는 BC 6000년에 이르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렀다. 티그리스강 상류, 모술에서 남방
40km에 위치한 하수나 문화(Hassuna culture)는 벌람하는 강의
홍수로부터 작물을 지키고 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관
개망을 구축하였으며 도기, 영구 주거 등을 도입하였다. 1000여
년 계속된 이들 문화는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 연안까지의 교역
도 지배하였다.
수메르(Sumer) 이전 시대(BC 5000-BC 3500)
----------------------------------------
식량생산의 진보에 따라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
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 이러한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새로운
일을 하게되었다. BC 5000년경 우바이드 사람들은 이렇게 최초
로 분업을 도입하였다. 진흙 벽돌로 도시를 건설하였고 최초의
작은 신전을 에리두에 세웠다.
BC 4000년경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로부터 유목민 셈족이 메소
포타미아 남부로 친입하여 우바이드 사람들과 혼합되었다. 銅
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속시대의 시작이다.
수메르(Sumer) 시대(BC 3500-BC1900)
----------------------------------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BC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
동하여 강력한 왕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를 출현시키고, 인류 최
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생시킨 것은 수메르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이미 靑銅器를 사용할 줄 알
았다. 청동은 구리에 8-12%의 錫을 섞어 만든 양질의 합금으로
청동시대는 이후 3000년 동안 계속됬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로
그림문자로부터 쐐기문자(설형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였으며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
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
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
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
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청동기를 사용하는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
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
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수메르는 채색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
으며 최초로 맥주를 빚어 마셨다. 12 진법과 태음력을 사용하였
다. 인류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세계 최
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우르남무라
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들은 도시국가 체계를 만들어 왕은 독재정치가 아닌 어느 정
도 민주주의적인 성격으로 통치하였고 국가가 중심이 되어 경제
문제를 주도해갔다. 도시국가들도 자립하였지만 위기시에는 군
사적으로 연합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이 후대의 제국
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
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
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되었다.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
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라
신전은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
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
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
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노아의 홍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으며 기
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바빌론과 앗
시리아인들은 길가메쉬 서사시를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
고 있다.
아카드(Akkad) 시대(BC 2350-BC 2100)
-----------------------------------
BC 235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족)들
이 수메르와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처음으로 통일왕국을 세웠다.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21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림
*셈족:
구약성서 창세기에 셈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는 민족으로서 셈제
어(諸語)를 사용하는 제민족의 총칭이다. 셈어는 다음과 같이
대별된다.
1. 동(東)셈어파(메소포타미아):
아카드어(바빌로니아어, 아시리아어)
2. 북서(北西)셈어파(시리아, 팔레스티나):
아무르어, 우가리트어, 가나안어(페니키아어,
헤브라이어), 사마리아어
3. 남서(南西)셈어파(아라비아반도, 이디오피아):
아라비아어, 이디오피아어
고(古)바빌로니아(Babylonia) 시대(BC 2100-BC 1531)
-------------------------------------------------
아무르인들이 BC 21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아무르 왕조의 바빌로니아 왕국를 세웠으며 수메르문화
의 색채가 농후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제 6대 함무라비 대왕
(Hammurabi, BC 1792-1750)은 바빌로니아 전토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며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
립하였다.
이 시대를 '아무르시대'라고도한다. 아무르인은 고대의 서(西)
셈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아모리인이라고도 한다. 아카드어로
아무루, 수메르어로는 마르투이다. 아무루는 서방을 뜻한다.
아모리인은 지중해 연안 가나안 주변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해
BC 3000년 무렵 시리아의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정착했었다.
古바빌로니아는 BC 1531년 카시트(Kassite)에 의해 멸망되었
다.
카시트(Kassites)와 히타이트(Hittites)의 시대(BC 1531-BC 717)
------------------------------------------------------------
흑해 너머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히타이트는 인도유럽
어족으로 BC 2000년 경 말, 전차,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현 터어
키인 아나톨리아를 장악하고 오리엔트 최강국가(BC 2000-BC 1190)
를 이룩하였다. 히타이트는 우선 시리아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였
다. 히타이트왕 무르실리슈 1세는 함무라비왕이 죽은 뒤 국력이
쇠퇴한 바빌론 제 1 왕조를 BC 1531년에 멸망시키고 약탈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왕국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카슈인이 바빌로니아에 카시트왕조(카슈왕조)를
세웠다. 카슈인은 이란 서부 자그로스산맥 지방을 원주지로하는
산악민족으로 BC 2000년 무렵부터 바빌로니아지방을 침입하였다.
카슈인은 히타이트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계통이다.
카시트왕조는 왕이 신하에게 준 면세지 봉토로 국토가 분할되어
왕가의 권위가 약해진 지방분권적 봉건사회였다. BC 1169년 아시
리아에게 멸망되었다.
아시리아(Assyria) 시대(BC 1169-BC 612)
--------------------------------------
아시리아 원주민은 셈족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
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
력을 가지게 되고,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그 중심이 된 아수르는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되었는데,
수메르 문명의 북변(北邊)의 전진기지(前進基地)이기도 하였다.
수메르인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악조건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
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
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 ·보석 ·목재 ·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軍事)국가로서 발전하였다.
BC 13세기에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세기 전에는 히타
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 8∼BC 7세기에 이르자 사르곤 2
세(재위 BC 722∼BC 705) 등의 용감한 왕들이 나와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를 정복하여 일찍이 없었던 세
계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
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
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
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
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
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
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
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
를 수집 ·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신(新)바빌로니아 시대(BC 612-BC 538)
------------------------------------
BC 612년 아시리아는 메디아에게 멸망되었으나, 칼데아의 나보
폴라사르(재위 BC 625∼BC 605)가 재차 바빌론을 수도로 칼데아
제국, 즉 신(新)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 시대(BC 538-BC 331)
----------------------------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에서
비롯되었다. BC 815년경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
에는 파르스지방을 영유하였고,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
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을 일으켰
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
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
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도 허
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다리우스 1세(BC 521-BC 485)는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
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
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 2,400 km의 왕도를 건설하고, 역전제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
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
로로, 전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
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
년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
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
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
었다.
다리우스 1세 이후 페르시아는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
고 국세의 쇠미가 뚜렷이 드러났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
더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도처에서 페르시아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하더니 BC 331에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BC 331)
----------------------------
BC 331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
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
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
를 분할하였다.
카산드로스 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
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등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
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레니즘문화는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이다.
BC 331년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
(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
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메소포타미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거쳐 파르티아와 로마,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셀레우코스(Seleucos)왕조 시대(BC358-BC163)
------------------------------------------
셀레우코스왕조는 귀족 안티오코스가 세운 왕국이라 안티오코스
(혹은 안티고노스)왕조라고 한다. 셀레우코스1세(BC358-280)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바빌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시리아제국의 셀레우코스왕조를 건설하였다. 메소
포타미아는 이때 셀레우코스왕조에 편입되었다. 그는 한때 에우
메네스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회복하여
영토를 이란과 마케도니아와 그리고 인도 북서부까지 다스리고
찬드라굽타와도 관계를 맺었다.
안티오코스1세(BC280-262)는 광대한 영토에 자기 이름의 도시를
많은 건설하여 지배의 기초를 만들었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에게 패하여 영토를 잃었다.
안티오코스2세(BC261-247)는 부왕이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안티오코스3세(BC247-187)는 알렉산더처럼 되려고, 그를 흉내
내어 그가 간 길을 따라 인도까지 침공하였다. 지중해로 진출하
려다가 동진 해오는 로마와 충돌하여 제1차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하였다. BC191년 로마에 대패하여 소아시아를 분할하여
주었다.
제1차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로
마와 싸운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전쟁에 패하여 이곳으로 도망
왔으나 로마가 신변을 요구하자 한니발은 자살하였다.
안티오코스4세(BC215-163)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현존하는
신)이라고도 자칭 하였다. 로마서 볼모로14년간 있다가 부왕의
죽음으로 즉위하여 헬레니즘문화의 제국을 건설하려고 유대교를
박해하다가 마카베오(마카비)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에 패
하여 하스몬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C163년에 동
방원정에서 죽고 왕조는 쇠퇴하였다.
파르티아(Parthia)왕조 시대(BC 247-AD226)
----------------------------------------
파르티아왕조는 BC 247년 이란 북동부에 살던 이란계통 유목민
인 파르니족의 족장 아르사케스가 셀레우코스왕조로부터 탈출하
여 세운 왕국으로 건국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라 아르사케스
왕조라고도 했다. 그 뒤를 이은 동생 틸리다테스는 시리아의 셀
레우코스 2 세에게 패배하였으나 그 뒤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BC 171년 무렵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1 세의 치하에서 왕국은 광
대한 영토를 얻었다.
미트리다테스 1 세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지역의 박트리아왕국
과 셀레우코스왕조의 영토를 정복하고 바빌로니아에도 침입하였
다. BC 123년 무렵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2 세 시대에 아르메니
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팽창해온 로마제국과 충돌하였다. 왕은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었으나 그 뒤에도 양국간 싸움은 계속되었
다. 파르티아의 조직화된 경무장 기병은 로마의 중무장한 보병
에 대해 승리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도 왕위계승분쟁과 북방민
족의 위협 등 여러 문제가 있었으므로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파
르티아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전투로 국력이 탕진되어 226년 파르
스지방에서 일어난 신세력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 세
에게 멸망하였다.
사산(Sassan)왕조의 페르시아 시대(AD226-AD651)
---------------------------------------------
이란민족이 고대에 페르시아제국을 만들어 알렉산더에게 망하고
후에 파르티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대 페르시아인 들이 다시
파르티아제국 위에 페르시아제국을 재건설한 국가가 사산왕조이
다. 사산은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사산(Sassanian)
손자이며 군주인 파파크의 아들 아르데시르 1세가 창시하였고,
이 나라는 신정(神政)국가이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260년 시리아에서 로마황제 P.L. 발레
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등 사산조의 기초를 굳혔다. 샤푸르
2세 때 발전기를 맞이하였고, 쿠스루 1세 때는 인도 굽타왕조와
국경을 맞대고 활발히 교역을 하였으며, 시리아·예멘을 점령하
여 사산조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동쪽으
로는 돌궐 등 유목민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시
리아·아르메니아 영유권을 둘러싸고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간
에 항쟁과 평화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그 항쟁은 종교전쟁의 성
격을 띠었는데,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사산조는 그
때까지 보호하였던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이미 로마제국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는 조로아스
터교로의 개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에 패배하자 신
앙의 자유를 승인하였다.
쿠바드 2세 이후에는 혼란기를 맞아 아랍인 이슬람교도의 침입
을 받았다. 예즈디기르드 3세가 642년 네하벤드싸움에서 패전함
으로써, 이란 전국토가 이슬람 교도에게 정복되어 갔다. 예즈디
기르드 3세는 호라산의 메르프로 망명하였지만, 651년 암살되었
다.
사산왕조는 국가 체제가 모범적으로 잘되어 후에 무굴제국과 회
교국에 계승되었다. 이란민족의 힘을 잘 발휘한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아라비아에게 망하였다. 이란인은 스스로는 아리야
(Ariya)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귀한-숭고한' 뜻으로 쓰인다.
평화의 조화를 연꽃으로 상징한다고 한다.
이슬람제국의 시대의 개막(AD651)
-------------------------------
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단은 계속된 전쟁으로 쇠약해진 사산조 페르
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슬람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예언자 마호메트(570-632)는 교우들에게 성전 코란과 공동체 및
무슬림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의 모범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여러 부족들의 배교로 한때 붕
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칼리프)로 선발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 아부 바크르(Alb-Bakr 632-634)가 다시
통일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Umar 634-644)는 대정복을 시작하
여, 이슬람 세계를 아라비아반도의 동·서로 확대시켰다. 이 정
복을 수행한 세력은 아랍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 전사
단이다. 그 뒤 3대 칼리프 오트만(Othman 644-656)으로부터 4대
알리(Ali 656-661)로 넘어가자 공동체는 다시 내란 위기에 직면
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
었으며, 이에 깊이 관련된 파가 하와리지파였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파이며,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에 의한 세속화를 종교적 위기로 보아,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 두 파와 싸웠다.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되자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이 났으며,
이후 90년 간 공동체 지도권은 옴미아드가(옴미아드왕조)가 독점
했다. 이러한 기존 이슬람체제(훗날의 수니파)에 대하여, 공동체
지도권은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 속한다고 주
장하는 시아파 그룹과 옴미아드왕조 체제를 비非이슬람적이라 하
여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지파는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이라크의 대다수는 시아파이나 지난 70여년을 인구의 20%에 불
과한 수니파가 이라크를 통치했다. 소수인 수니파인 후세인은 이
라크를 공포와철권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란은 시아파다.
옴미아드 왕조 시대(661∼750)
----------------------------
반反옴미아드왕조 움직임에 대하여 옴미아드왕조는, 신앙은 행
위(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무르지아파의 설을 근거로 체제
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탄압을 가했다. 이 옴미아드 왕조
시대에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으나 정복에 의해 즉시 이슬
람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
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
유를 누렸다. 옴미아드 왕조 말기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서쪽으
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북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옛
비잔틴제국령 및 에스파냐, 동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
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더스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영역확대에도 불구하고 옴미아드 왕조 시대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않았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과 아랍을 중시
하는 정책이 비非아랍무슬림 및 경건한 신도들의 불만과 반발을
낳았으며, 이것이 시아파·하와리지파 등의 운동과 결부되었다.
또한 아랍의 부족대립이 이것과 얽혀 반정부운동이 자연발생적
으로 일어났다. 750년 옴미아드 왕조는 붕괴되고 정권은 아바스
왕조로 넘어갔다. 옴미아드 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공동체를
확대하고, 그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유지, 발전시켰지만
공동체를 이슬람적인 성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무엇이 이
슬람적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
초기 옴미아드왕조시대에 이슬람제국의 중심은 시리아에 있었으
나, 아바스왕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이라크의 알쿠파·바
그다드에 설치되어 당(唐)나라의 장안(長安), 비잔틴제국의 콘
스탄티노플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
---------------------------
아바스 왕조는 국가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 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
가통치의 기초를 구했다. 그리하여 쿠라이시족 출신의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아래 단일국가로 지배하는 정치형
태를 실현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달과 함께 고대오리엔트·헬레
니즘·기독교 및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1세기 뒤 칼리프의 실권은 약해졌으며,
각지에 독립·반(半)독립 왕조들이 나타났다. 특히 10세기 무렵,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가 칼리프를
칭했으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시아파 내 카르마트파가 지배했
다. 에스파냐에서는 같은 수니파인 후後옴미아드 왕조가 칼리프
를 칭하면서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시아파 부
와이 왕조의 아미르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
서 일어난 수니파의 셀주크 왕조에 의해 칼리프의 권위는 회복
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세계의 혼
란과 분열을 한층 깊게 한 것은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의 침
공이었으며, 1258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아바스 왕조 칼리프
가 멸망했다. 몽골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세계에 타격을 주
었으며, 아랍적인 고전이슬람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
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역
사는 새로운 담당자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AD 1258년: 아바스왕조는 재난을 초래한 홍수피해로 갈팡질팡하
는 사이에 몽골족의 침입으로 멸망당했으며 칼리프는 처형당했
고 바그다드는 황폐화되었다. 더욱이 14세기 말에 티무르가 이
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들어와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개시
설을 파괴하였다.
AD 1534년: 오스만 터키의 손에 넘어가 속주(屬州)로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여러 차례 터키군과 사파비왕조의 이란군이 싸우
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내부 반란과 이란을 비롯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AD 1899년: 오스만 터키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철도부설권을 내준
바 있으며 이에 자극 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기간중
이라크를 강제 점령해 버렸다.
한편 제 1 차세계대전 때에는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측에 참
전하였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이 바스라 부근에 상륙하여 1918년
터키를 제압하고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이라크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0년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의 위임통치권을 승인받은 영국은
21년 메카의 하심가(家) 출신인 파이살 1 세를 국왕으로 맞아들
여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였다. 파이살국왕은 그 뒤 여러 차례 영
국과의 조약을 개정하면서 독립으로 나아갔으며, 32년에는 국제
연맹에 가입하여 독립을 성취하였다.
AD 1932년: 이라크의 완전한 독립이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친 독일정책을 고수해 1941년 영국에 재점령되었으며, 대전
후에는 정치소요가 계속됐다.
제 2 차세계대전과 전쟁 뒤의 혼란이 석유이윤으로 인해 경제가
윤택해지기 시작한 53년에, 젊은 파이살 2세가 즉위하였다. 국왕
의 지지 아래 누리 아사이드가 총리로서 독재적인 지도력으로 정
국도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8년 7월 카셈 준장이 이
끄는 군사쿠데타로 국왕·황태자와 많은 왕족과 총리 등이 살해
되고 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AD 1958년: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진 뒤 군사쿠데타가 계속되
다가 1968년 사회주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1979년 바트당
의 막후 실력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사담 후세인이 최고 권
력자로 등장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쿠웨이트 침
공에 따른 걸프전쟁(1991), 미국의 대 이라크전(2003) 등이 잇
따르게 되었다.
연이은 전쟁과 저항세력의 공격으로 현재 이라크의 사회 인프라
는 철저히 붕괴된 상태다. 전화보급대수는 인구 100명당 3대에
불과하고, 지상전화 교환기가 완전 복구되지 않아 수도인 바그
다드조차 시내전화 상당수가 불통되고 있다. 전력난 또한 심각
해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
전기를 필수품으로 구비하고 있다. 의료장비 및 시설도 크게 부
족해 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108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이라크로부터 전해 내려온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화재
들도 전쟁과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다량으로 약탈당하거나 유실
됐다. 요행히 전쟁의 참화를 면한 문화유적이나 시설물들도 시
급한 복구와 개·보수를 요하고 있다. 이라크는 사우디에 이어
1120억 배럴에 달하는 세계 2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지만
채굴시설 미비로 일일 생산목표 600만 배럴 달성은 2010년이 되
어서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300불
내외에 머물러 있다.
결언
----
오늘날의 이라크의 분쟁은 오늘날만의 분쟁이 아니며 그 분쟁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하였다 아니할 수 없다. 비
록 희망적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노력하고자함은 세계평화,
인류의 평화가 어느 한지역의 분쟁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정이 또한 그러할 진대 대저 어찌할 찌고!
- 끝 -
부록
메소포타미아신화
----------------
신화와 전설은 오늘날 종교들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신앙
과 의식의 기초이다. 신화는 고대인이 인생의 의미와 더불어
신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이다. 여러 신화들에는 창조,
홍수, 거짓 신과 반신 반인, 불멸의 영혼, 태양 숭배 등이 공통
줄거리로 나타난다. 또한 역사적 사실의 핵심 내용이나 인물 혹
은 사건이 나중에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신화가 된 경우가 매우
흔하다.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의 신(神)들의 체계와 신화는 선주민인 수
메르인이 그들의 문자·종교·제도와 함께 탄생시켰으며 바빌로
니아인·아시리아인·가나안인·히타이트인 등이 계승·발전시
켜 대성한 것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
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세계관에 영
향을 끼쳤다. 자연의 혜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 데 힘써야 했
던 수메르 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
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현세적 다신교로
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
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
인 특징이 강하였다.
수메르 신들의 체계는, 태초에 안(하늘)·키(땅)와 엔키(물)등
이 있었으며, 안(하늘)과 키(땅)는 결합하여 엔릴(大氣)을 낳았
는데, 이 엔릴(大氣)은 후에 키(땅)의 지위를 빼앗았다. 엔릴
(大氣)에게서는 난나(또는 난나르;月)가, 난나(月)로부터는 우
투(태양)와 이난나(사랑과 아름다움;金星) 등의 신들이 생겨났
다고 한다. 이 체계가 바빌로니아·아시리아에 들어와 안(하늘)
은 아누(하늘)가 되고, 난나(月)는 신(月), 우투(태양)는 샤마슈,
엔키(물)는 에아, 이난나(사랑과 아름다움;金星)는 이슈타르로
이름이 변하였다. 또한 에아(물)와 이슈타르(金星)는 아다드
(폭풍)와 함께 아누(하늘)의 자녀가 된다. 수메르의 엔릴(大氣)
은 바빌로니아에서는 단순히 벨[主]이라 하며, 정중히 숭배되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BC 1750년경) 이후에는 바빌론의 토착신
마르둑이 이것을 대신하였다.
창세신화
--------
수메르에서는 창세신화라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발견되지 않으
며, 주로 바빌론의 마르둑신의 유래설화인 《에누마 엘리슈(전 7
장, 현존하는 것은 약 1000행)》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바빌론
의 신년제(新年祭;아키투祭) 때에 낭송된 것으로 추측된다.
태초에 아프수(담수의 바다;男神)와 티아마트(염수의 바다;女神)
가 있었는데, 이들이 결합하여 라흠과 라함이 생겼고, 그로부터
운시알과 키시알이 생겼다. 다시 여기에서 전기(前記)의 아누가
생겼으며, 아누로부터 에아가 생겼다. 에아는 현명하고 민첩하여
결국에는 아프수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에아와 담키나에게서 태
어난 마르둑은 늠름해져 옛 질서를 파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티아마트는 이와는 달리 11개의 괴물을 만들어낸 뒤 킹구라고 하
는 신을 지휘관으로 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천상의 신
들은 티아마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마르둑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양쪽의 군대는 교전 상태에 들어가 마르둑의
군대는 티아마트의 군대를 격파하고, 티아마트는 죽음을 당하였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둘로 잘라 한쪽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면(水面)에 덮어 씌워서 육지를 만들었다.
또한 지휘관 킹구를 죽여, 그 피로 인간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신들을 숭배하게끔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인간들은 마르둑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바빌론시(市)를 만들고 그 중앙에 마르둑을 위
한 신전을 세웠으며, 또한 마르둑의 활을 하늘에 걸어두었다.
길가메쉬(Gilgamesh) 이야기
--------------------------
세계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길가메시(Gilgamesh)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서, BC 2000년경에 성립되었
다고 한다. 주로 니네베에서 출토된 아시리아판(현존하는 것은
약 2000행)과 약간의 바빌로니아판, 그리고 히타이트어 단편(斷
片)과 후르리어 소단편(小斷片)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수메르어판 전래의 몇 개의 신화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길가메쉬란 수메르 에레크시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이다. 후일에
서사시와 전설상으로 반인반신의 영웅이 된 실제 역사상의 위인
이다.
그는 BC 2700경에 바빌로니아의 우룩(Uruk)시에서 살았다. 우룩
시는 현재의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남부, 유프라테스강가에 위
치한다. 그가 유명하게 되었던 것은 후기의 설형문자 문헌에서
위대한 영웅과 인간 현실의 구현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
메르 문헌에서 그는 대단히 많은 신화들에서 중요 인물로 나타
난다.
즉 길가메쉬와 키쉬의 아가(Gilgamesh and Agga of Kish), 길가
메쉬와 하늘의 황소(Gilgamesh and the Bull of Heaven), 길가
메쉬와 생명의 땅(Gilgamesh and the Land of the living), 길
가메쉬, 엔키두(Enkidu) 및 지옥세계(the Nether World) 등의
것들이 있다. 길가메쉬의 성격묘사에 따르면 그는 영웅적인 미
덕.힘.충성 등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고 저차원적인
것들, 즉 책략.포학 등등의 것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문
학전승은 셈족 계통의 아카드족과 그들의 바벨론 계승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아카드 문헌에서 빈번하게 언급되
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엮어진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집은 열두개의 토서판으로 된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이 열두
개 토서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가메쉬는 그의 우룩(Uruk)시를 포학하게 다스렸다. 사람들은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여신 아루루(아를)는 점토를 침으로
이겨서 엔키두라는 야성의 사나이를 대초원에서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에게
신전의 매춘부를 보냈다. 엔키두는 유혹에 넘어가 버림으로써
평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엔키두는 길가메쉬와 겨루지만 싸움은 엔키두의 패배로 끝나고,
두 영웅 사이에서는 일생에 걸친 우정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일련의 모험을 시작했다. 불을 뿜는 거인(괴물) 훔바바
(Humbaba/후와와, Huwawa)를 샤마시의 도움으로 죽였다.
중략
이슈타르(Ishtar)가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길가메시
는 이슈타르의 변덕과 바람기 를 지적하면서 그 유혹을 거부했
다. 격노한 이슈타르는 아누에게 하늘의 황소가 지상을 파괴하
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두 영웅는 그 황소를 죽였다. 그러
나 신들의 분노가 거세어져 엔릴은 그들의 오만에 대한 처벌로
엔키두를 병에 걸려 죽게 만들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에 상처받은 길가
메시는 대초원을 방황했다.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마
법의 땅에 사는 우트나피슈팀(Utnapishtim)을 찾아갔다. 우트나
피쉬팀은 신들에 의해서 대홍수에도 살아 남기로 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토서판 XI'에는 우트나피쉬팀이 고도한 양식의 서사시로 읊은
대홍수의 기사가 쓰여있다. '토서판 XI'은 오랫동안 연구의 대
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며 창세기에 나오
는 기사와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기이하게도 유사하다. 19세기에
범바빌로니아 학파에 속한 어떤 독일 학자들은 이 전집과 길가
메쉬의 성격을 그리스도와 메시야적 직임의 가능한 표본으로 보
았다.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전적으로
배척해 왔다.
코르사바드에 있는 사로곤 2세의 궁전에서 가져다 놓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대한 부조는 사자를 목졸라 죽이고
있는 거대한 길가메쉬의 모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
다.
길가메시가 마법의 땅에 사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는 도중,
세계를 둘러싼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이슈타르의 변신인 시두리
가 말을 걸었다. 시두리는 인간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포도주
나 마시자고 길가메시를 유혹했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가 매장
되도록 좌시하지만은 않겠다고 하며 엔키두의 시체의 코에서 벌
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이레 낮 이레 밤을 애도하기만 했다. 시두
리는 길가메시에게 '신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점지하고, 자신들은
영원히 산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굴의 영웅은 마침내 '천상의 술집 주모'로부터 우트나
피슈팀이 죽음의 바다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러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루터의 사공인 우르사나피의 도
움을 얻어야만 했다. 길가메시는 사공을 찾아냈고특별한 나룻배
를 만들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 신들이 우트나피슈팀 부부에게
영원한 거처로 준 "만강(萬江)의 입구"로 갔다.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시에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말한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불사의 풀"에 걸고 우여곡절 끝에 심해에서 그 풀을 구
한다.
우르크로 돌아오는 도중, 샘가에서 자고 있는 동안에 한 마리의
뱀이 그 풀을 먹 어버렸다. 뱀은 즉시 허물을 벗을 수 있게 되
었다. 길가메시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기가 죽을 운명임을 깨닫
고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다른 문헌에는 길가메시는 이난나를
도와 뱀, 바람, 독수리가 보호하고 있던 나무를 잘라 넘어뜨리
는 얘기가 나온다. 이난나와 길가메시는 그 신성한나무로 마법
의 북과 북채를 만들었는데, 훗날 길가메시는 우연히 그것을지
하세계로 떨어뜨리게 된다.
엔키두가 그 북과 북채를 되찾아오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잊는 바람에 영원히 지
하세계의 포로가 되었다. 이 죽은 영웅의 영혼은 에아가 대지에
열어놓은 구멍 밖으로 한 줄기 바람처럼 나타나 왕자들이 하인
이 되고 지상에서의 신분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먼지의 집", 곧 저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모험이 끝난
후, 지하세계에서 왕궁을 부여 받아 죽은자들의 하위신
(lessor god)으로 숭배되었다.
2005. 1. 31
벨렉의 시대에
: 고대문헌은 성경의 연대기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In the days of Peleg)
Larry Pierce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44호
창세기 10:25에서는 노아로부터 네 세대 후에 벨렉(Peleg: 나뉨(division))이라는 의미)의 출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세상(the earth)이 나뉘었음이요.” 어떤 사람들은 그 때에 지구의 대륙들이 나뉘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은 매우 제한된 시간 간격 이내에 일어났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생기는 지질학적 격변은 굉장한 재앙이 될 것이며, 이것은 또 다른 노아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대륙이 나뉘는 것과 같은 사건은 노아의 대홍수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다.[1]
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구절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때에 민족과 나라들이 나뉜 것과 관련짓는다. (영어에서 ‘earth’ 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히브리어의 ‘erets’도 나라(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 따라서 ‘erets Yisrael’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땅, 나라, 민족 등을 의미한다.) 어셔(Ussher) 대주교가 추론한 성경 연대기에 따르면, 대홍수는 B.C. 2349-2348 년에 일어났으며, 벨렉은 약 백년 후인 B.C. 2247년에 태어났다. 이것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대의 작가들이 밝혔던 적이 있는가? 그 대답은 틀림없이 “그렇다”이다.
바빌론이 시작되다
때는 BC 331년이었다. 알렉산더 대제가 아르벨라(Arbela, 앗시리아의 고대 도시) 근처의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다리오(Darius) 왕을 쳐부순 후에, 그는 바빌론(Babylon)으로 여행을 했다. 거기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Chaldeans)이 1903년 동안 천문 관측을 한 자료들을 받았는데, 갈대아 사람들은 그것이 바빌론의 창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맞다면 바빌론의 창시가 BC 2234년이 되며, 벨렉의 출생 후 13년 뒤이다. 이것은 AD 6세기에 라틴의 작가였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가 쓴 ‘하늘에 관하여(De Caelo)’의 여섯 번째 책에 기록되어 있다. 포피리(Porphyry, 비기독교인 그리스 철학자, AD 234-305경)도 역시 같은 숫자로 추론했다.[2]
이집트가 등장하다
비잔틴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티누스 마나세(Constantinus Manasses, 1187년 사망)는 이집트인의 국가가 166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맞다면, 페르시아의 왕인 캄비세스(Cambyses)가 이집트를 정복한 BC 526년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면, 이집트의 창시는 BC 2188 년이 되는데[3], 이는 벨렉의 출생 후 약 60년이 되는 시기이다. 이때쯤 함(Ham)의 아들인 미스라임(Mizraim)이 그의 집단을 이집트로 인도했다. 그래서 히브리 단어로 이집트가 미스라임이다 [4]. (또는 때때로 ‘함의 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시편 105:23,27).
미술가에 의한 바벨탑(Tower of Babel)의 복원. 고대의 지구라트(ziggurats)를 모델로 한 이러한 그림은 실제의 바벨탑과 유사할 가능성이 있다. 바빌론을 여행하는 길에 그것을 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5세기 경)는 그것은 8층을 가지고 있었으며, 60m 높이로 거대하게 서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리스가 출발하다
4 세기에 가이사랴(Caesarea)의 감독이며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에 있는 고린도(Corinth) 서부의 그리스 도시 시키온(Sicyon)의 왕이었던 에지알레우스(Egialeus)는 그의 통치를 BC 2089년에 시작했는데, 이는 첫 번째 올림픽(Olympiad)이 열렸던 BC 776년 보다 1313년 전이다.[5, 6] 만약 유세비우스가 맞다면, 이 왕은 벨렉의 출생 이후 160년 뒤에 그의 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바빌론과 이집트와 그리스는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함을 주목하라. 이들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히브리인들의 성경에서 발견하는 성경적 계보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바벨탑 사건은 이들 다른 왕국들이 창시되기 이전에 생겼어야 할 것이다. 그 탑과 같은 지역에 있었던 바벨(바빌론)은 물론, 최초의 왕국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왕국들 중에서, 바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왕국이 가장 늦게 창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들 작가들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첫 번째가 바빌론이고, 다음이 이집트이며, 그 다음에 그리스가 창시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성(human nature)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도 한다. 바벨탑 사건이후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언어에 따라서 강제로 그룹이 나뉘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르다. 그들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부득이 할 경우에만 바벨에서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군사적 위협, 혹은 더 푸른 목초지를 찾고자 하는 열망 등은 그들로 하여금 더 멀리 이동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주기적인 이동에 의해 느리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역사가들은 바벨탑과 대홍수의 사건을 무시하고 있지만, 문명이 바벨탑이 있었던 부근의 중동에서 시작하여,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퍼져나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 연대기에서 추론한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시간 틀(time frame)을 사용하고 있다.
B.C. 3세기에 이집트의 역사를 기록했던 마네토(Manetho)로부터 흥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바벨탑 사건이 벨렉의 출생 이후 5년 뒤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7] 이것이 맞다면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이동이 어떤 기간을 두고 일어났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들 여러 나라의 확실하게 알려진 지도자들이 매우 어린 아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성경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를 재건했을 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건 하지 않건 간에, 그것이 성경의 정확도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인 연대기를 이용하여 세속주의자들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결정해야 하며, 역사에 관한 최근의 세속적 고찰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고쳐서는 안된다. 이 연구 영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가장 최근에 재건된 세속적인 인류 역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앞다투어 조작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무시해 왔다.
최근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4장과 6-9장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훌륭한 과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창세기 5, 10, 11장(및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연대기 부분)의 계보에 대해서는 세속의 역사학자들의 영향권에 조용히 복종해 버렸다. 이들 연대기에 관한 그들의 파괴적인 작업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거꾸러뜨렸다. 이제 성경적 배경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성경의 연대기에 들어있는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그 숫자들 사이에 들어 있는 말씀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불신앙을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