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종교가 귀하면, 남의 종교도 그만큼 귀한줄 아는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의 신만이 우주를 주재하는 '실존하는 유일한 분'이라고 맹신하는 사람들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불기 2549년 부처님 오신 날인 15일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다. 법정(전 길상사 회주)스님과 3000여 명의 불교 신자가 모인 자리였다. 천주교 지도자가 부처님 오신 날 사찰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고령(83)인 김 추기경은 최근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의 선종 후 두 차례 바티칸 해외여행을 강행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에 길상사 측은 이날의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천주교가 운영하는 입양시설에 기부함으로써 멋진 화답을 연출했다. 종교 간 벽을 넘어선, 사랑과 자비가 만난 아름다운 밤이었다.
오후 7시30분부터 시작된 음악회의 주제도 '사랑과 화합을'이었다. 길상사 극락전 앞뜰을 장식한 연등 아래에서 열린 행사에는 이계진(국회의원)씨의 사회로 팝페라 가수 임형주씨, 가수 해바라기, 연극인 윤석화씨 등이 출연했다. 분위기는 시종일관 뜨거웠다. 임형주씨가 '아베마리아'를 부를 때에는 모두가 하나가 돼 열광적으로 앙코르를 청했다. 이 순간만큼은 굳이 종교를 가를 이유가 없었다. 또 글라리타 수녀가 수녀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가곡 '내 마음의 강물' 등을 부르자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함께 박수로 격려했다.
이에 앞서 김 추기경은 불교 신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음악회장에 입장했다. 그는 음악회 도중 예정에 없던 인사말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을 대표해 이 자리를 마련해 준 길상사 측에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또 한번 박수가 터졌다. 이날 김 추기경은 법정 스님, 원불교 박청수 교무 등과 함께 음악회 내내 아름다운 종교 화합의 모습을 보여줬다. 추기경 뒷좌석에는 20여 명의 수녀도 함께했다.
길상사 주지 덕조 스님은 "이번 음악회는 성북동의 이웃사촌인 천주교 성가정입양원(원장 레지나 수녀)을 돕는 행사로 만들겠다. 오늘 접수한 연등 값 등을 성가정입양원에 전달해 미혼모 어린이들의 국내 입양사업에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의 음악회 방문은 덕조 스님이 종교간 화합을 위해 지난 10일 레지나 원장수녀와 함께 추기경 집무실을 방문, 김 추기경을 초청하면서 성사됐다. 김 추기경은 성가정입양원을 특히 아껴 매년 5월 입양원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이날 오전(11시)에도 성가정입양원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미혼모 문제나 이혼 등으로 인해 아이들이 버려지는 건 생명 경시 현상 때문"이라면서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김 추기경은 2000년 심산(心山)상을 받은 뒤 유교 지도자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 앞에서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유교식 큰절을 올리기도 한 '열린 종교' 지도자. 법정 스님도 같은 해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서울대)교수에게 '성모 상을 닮은' 관음보살 상 조각을 맡겨 길상사 구내에 세워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배타적 종교관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두 거인은 닮은 점이 있다.
가장 좋은 계절 '가정과 생명의 달'에 다시 한번 부처님 오신날(15일)을 맞이한다. 불자만이 아니라 평화와 자비의 세상이 실현되기 바라는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함께하는 경축일이다. 한국 사회는 지구촌에서 가장 전형적인 종교 다원 사회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은 매우 비관적이고 한국은 불안스러운 종교적 갈등 사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는 종교 간 대화.협력이 가장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놀랄 만한 나라로 세계인의 칭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화계사 가까이 위치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운동장에서는 청명한 가을날, 같은 지역의 조계종 화계사, 개신교 송암교회, 그리고 수유5동 천주교회 신도들이 장애아동 치료를 돕는 사랑의 바자를 몇 년째 계속한다. 최근 대구.부산.광주.전주.인천.원주 등 지역마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11일 대구시 시지동 천주교 고산성당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천주교.불교.개신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섬김과 평화의 촛불을 밝히고 108배 연합 봉축행사를 가진 것은 파격적이라 할 만큼 한국 종교인들의 열린 자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일, 북한과 세계의 난민돕기, 전쟁과 테러를 극복하는 평화운동에 한국 종교들은 놀랄 만한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일부 종교인 중에는 자신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체계에 절대적 헌신을 하려면 다른 이웃 종교들을 경계와 경쟁과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배타적 태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참으로 많이 성숙되었다. 서로 다양한 가치관과 견해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관용과 포용이 시민정신의 주류를 이뤄가고 있다.
세계 종교들은 귀중한 종교 전통을 공유하는 신앙 공동체들을 통하여 살아 숨쉬며, 그 전통유산을 이어가는 것이다. 각각의 종교들은 그들 공동체 안에 귀중한 진리체험과 인간해방의 길을 담지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들은 보화 같은 진리경험을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 안에 지니고 있지만, 진리 자체와 생명은 역사적 종교들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위대하다. 유교와 원불교와 천도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와 생명은 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이며, 모든 종교는 진리와 생명에 봉사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와 생명이 온누리에 막힘없이 햇빛처럼 실현되는 세계를 향해, 각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검증한 방편을 제시하면서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는 길벗이다. 대화와 협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각각 종교들의 특색이 없어지고 혼합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개의 일곱 색깔이 뚜렷해야 더욱 아름답게 보이듯, 개별 종교들은 자기 샘에서 막 떠온 싱싱한 물맛을 보여야 한다. 종교의 진면목은 사랑과 자비와 어짐 등으로 나타나는 평화와 봉사의 꽃을 피워내는 데에 있다.
마침내 대화와 협력이 깊어질수록 서로에게 배우면서 자신이 귀의하는 종교의 신도로서 책임을 다하지만, 이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진리이해와 생명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장미.국화.무궁화, 그리고 이름없는 작은 들꽃들이 모두 자기다운 고유한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지니면서 같은 들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듯, 종교 간 대화.협력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이 서로 간의 배움과 성숙 단계로 진입해 가고, 진리와 생명은 종교들보다 더 크고 근원적이라는 자각이 더욱 또렷해지기를 기원한다.
김경재목사님의 글이다. 이런 목사님이 많아졌으면 참 좋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