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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
고린도전서2:12-16
여러분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시대의 흐름을 잘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글을 보면 7대 블루슈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블루슈머'(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경쟁력을 키우다는 의미의 블루오션(blue ocean)과 소비자의 합성어)를 발표했다. 1. 기후 양극화를 대비하는 사람들이다. 2. 관객에서 선수가 되고 싶어 한다. 3.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4. 은퇴한 부유층이다. 5. 글로벌 미식가이다. 6. 유통단계를 뛰어넘는 소비자다. 7. 페달족이다.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측을 잘해도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관계를 잘하려 해도 말을 잘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열린 마음입니다. 정직한 마음입니다. 진솔한 마음입니다. 그래야 대화가 될 수 있습니다. 선입견이 있는 이상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을 잘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다음으로 관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실과 상황과 상대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면밀한 분석과 자상하게 배려있는 언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관찰을 할 때 상대의 환경과 여건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는데 나도 모르지만 상대방에 대해서 모르면서 어떻게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상대방의 중심에 있는 마음을 알아야 공략을 하든지 감동을 시키든지 설득을 시키든 방어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곳은 눈입니다. 상대의 눈을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관찰력과 통찰력이 있어야 사건이나 문제나 거래의 결론을 유리하게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말을 잘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하고 승리하려면 가장 먼저 상대방의 눈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눈은 마음의 거울이란 말이 있습니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눈이 혈관의 거울이라고 해야 옳다고 합니다. 눈은 몸의 기능에서 유일하게 몸에 칼을 대지 않고 혈관을 외부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혈관의 모양이나 색깔을 통해서 질병의 유무까지 짐작할 수 있는 곳이 눈입니다. 그래서 암웨이에서 홍체로 사람들의 건강을 진단해서 건강식품을 권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안과의사가 망막의 혈관을 관찰해야하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 당뇨 환자라고 합니다. 많은 당뇨 환자들이 혈액이나 소변의 당(糖)수치에만 관심을 갖지만 실제는 당뇨 합병증으로 가장 손상되기 쉬운 부위가 바로 망막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혈압 환자입니다. 망막 혈관을 보면 고혈압으로 얼마나 혈관이 상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대학 연구진이 최근 1만 여명을 대상으로 망막 혈관을 조사한 결과 망막 혈관의 손상이 심한 사람은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6배나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심장의 입장에서 보면 눈과 뇌가 머리 속 거의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눈의 혈관을 보면 뇌의 혈관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체 구조상 눈은 열지 않고 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결정체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다고요. 마음이 담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잘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3초 안에 첫인상을 발견할 수 있고 3분 안에 말을 잘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상대방을 이미 설득의 단계를 넘어서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눈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으니까 3분간의 말로 상대방을 제압시키든 설득시키든 감동을 시킬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심방 가서 설교하다가 내가 은혜를 받은 내용이 있어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준을 첫째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정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느끼게 됩니다. 감동받습니다.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받은 은혜를 알기에 받은 사랑에 감격하는 자입니다. 그 감격이 충만해서 늘 주님을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오직 주님 오직 교회 오직 선교 오직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적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충성할 수밖에 없고 헌신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주님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식과 이성을 관리하는 머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머리에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말씀의 진리로만 판단하고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내 머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의 지식을 분토만도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셋째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은 몸으로 행동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힘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힘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처럼 힘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새 생명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주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이처럼 인격을 지정의라고 분석할 때 정지의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에 마음이 있고 지에 뜻이 있고 의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담긴 눈이 그윽합니다. 말씀을 듣는 눈이 초롱초롱합니다. 매사에 두 눈이 저를 향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몸짓을 할까 어디를 가실까 무엇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뜻이 같습니다. 생각도 같습니다. 논리의 전개도 같습니다. 왜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교회부흥과 평안과 하나님의 나라건설만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이루고자 하는 인생이요. 목표요. 꿈인 것입니다.
어떤 거지가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구걸이나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땅을 쳐다보고 한 줌의 빵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 건너 이층에 살던 화가가 거지를 모델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깡통을 차고 때 묻은 얼굴을 한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거지의 눈을 다르게 그려 넣었습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야심찬 표정을 그려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에게 선물로 줬더니 거지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화가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입니다. 라고 하자 거지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게 되었고 희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눈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남편과 아내만 보이십니까? 자녀만 보이십니까? 일만 보이십니까? 아니면 돈만 보이십니까? 과연 여러분에 눈에 교회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빌게이츠 눈에 무엇만 보였습니까? 컴퓨터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중퇴할만큼 컴퓨터에 미쳤습니다. 그런 그에게 법학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컴퓨터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보십시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그 판단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느냐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영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것인지 세상적인 것인지 이것이 교회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분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과연 성령의 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의 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세상적이고 일반적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이고 일반적이란 말을 반증하는 실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한 말과 악한 말, 부드러운 말과 사나운 말, 사랑의 말과 미움의 말처럼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거룩하고 속된 것으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중심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아끼시고 인정하시며 마음이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불평을 하고 악담을 하고 좌절하고 절망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면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의 중심 언어가 어떤 저의를 가지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저의에 따라 그것이 지혜로울 수도 있고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고 거룩할 수도 있고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 있고 인간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자신의 말의 진정성을 양심적인 판단을 해보십시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성령에게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우면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과정과 열매를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주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칭찬을 받은 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니까 그럴 수 없다고 예수님을 꾸중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이때냐고요. 답답합니다. 영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경험과 전통과 신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생활하고 경험해오고 깨달은 바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이 어떻다고 합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의 역사와 기사를 바알세불이라는 귀신의 역사로 치부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종교적 교만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조차 자신들의 지식밑에 두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뭐라고 하십니까? 그것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모르기도 하지만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사오정이 심령 부흥성회를 다녀왔습니다. 여동생이 오빠 은혜 많이 받았어라고 묻자 응 나 앞으로 미 자를 쓸 줄 알아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하자 왜(여동생)라고 했더니 글쎄 강사님이 자꾸 미 씁니까? 미 씁니까? 하고 묻는거야 그래서 자신이 미자는 못쓰는 줄을 어떻게 알았지 해서 많이 찔렸다고 합니다. 모든 말을 자기 기준에서 듣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까? 먼저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고 올인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 육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적당히 가고 교회일도 적당히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도 적당히 하는 것이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하기 싫어합니다. 충성하기 싫어합니다. 헌신하기 싫어합니다. 돈 내놓는 것에 너무나 인색하게 됩니다. 매사에 세상적으로 따지고 계산합니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해 순종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교회에 전적인 충성도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고 말씀하면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면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까? 계시록 3:17절에 보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네게 곤고하다, 가련하다, 가난하다, 눈이 멀었다, 벌거벗었지만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열심을 낼 것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문을 열라고 열라고 요한사도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문을 열고 하나님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있으니 어떻게 영의 일을 알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바닥 안에 있는 핸드폰이 풍요의 상징입니다. 차가 풍요의 상징입니다. 문화생활이 풍요의 상징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저렴하지만 내가 사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풍요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마음만 먹으면 가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에 과연 하나님이 계시냐? 영의 일이 보이느냐? 안보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고 편당하며 교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은 14절 하반절 말씀처럼 그것들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아무리 말씀을 잘 가르쳐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넬료도 율법적인 선한 행위는 있었어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들으며 성령을 받고 난 이후 다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사람만이 영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습니까? 누가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가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자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미련한 5처녀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다 아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잤느냐 안잤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충만하게 준비했느냐 아니했느냐의 문제입니다. 결정적으로 신랑이 오실 때에 기름이 없어 못들어가는 신세가 된 것도 기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문제는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충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족하면 핑계가 많고 자기 중심적으로 따지고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영의 사람을 비방하고 문제를 삼아 곤경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오직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사망의 몸에서 구해주신 그 은혜를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바로 이 은혜 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리스도를 간증하고 자랑하고 선포하며 증거하며 헌신하는 성도들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