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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믿습니까?”
+ 본 문 : 마태복음 6장 7절 - 13절 (신약성경 8쪽)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점쟁이나 무당, 그리고 절을 찾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성전을 찾아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은 점쟁이나 무당들, 그리고 절간의 중들이나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써 주는 부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 곧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히 여깁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굿 한 번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이 지불하는 액수를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액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신앙인” 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신을 좇고 있다.” 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신은 내게 있는 돈이나 재물이나 달란트나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소유로 신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럴 때 나는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신을 변화시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며, 그런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미신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나의 마음과 삶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압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할렐루야! 아멘’ 를 외쳐도, 나의 마음과 삶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내 목적만 성취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신을 좇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목적이 성취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므로 마음과 삶이 변화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주님 앞에서 날마다 마음도 삶도 변화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아무리 내게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늘 먹고 사는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8절 말씀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증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러분! 아멘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묻겠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야 할 것을 어린아이 자신이 더 잘 압니까? 아니면 부모가 더 잘 압니까?
당연히 부모가 더 잘 압니다. 아이가 지금 밥을 먹어야 할 때인지, 아니면 무엇을 보아야 할 때인지,
지금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때인지, 부모가 더 잘 압니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매끼 “엄마! 밥 주세요.” 라고 요구하고서야, 부모로부터 밥을 얻어먹습니까?
오히려 자식은 노느라고 밥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부모가 다 알아서 밥 먹으라고 챙겨 줍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달라고 조르는 것은, 대부분 과자나 초콜릿이나 만화책처럼 없어도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미리 알고 챙겨 주는 것들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없으면 안 되는 좋은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기도해서 생명인 공기를 얻습니까?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에 아침에 태양이 떠올랐습니까?
우리가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비가 내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곡식이 주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정작 있어야 될 것들은 우리가 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고 이미 주셨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값을 지불하지 않고 다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늘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는 것은, 실상 우리 삶에서 없어도 좋을 것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신다.’ 는 것을 믿으면, 우리 믿음의 질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를 별 생각 없이 되뇌입니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는 새로운 성숙한 삶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결단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나님! 내가 지금 살아가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신앙고백적인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자족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자족의 결단, 더 이상 세상 것에 얽메이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기도인 주기도’는 새로운 성숙한 삶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결단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늘 드리는 주님의 기도인 주기도처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나머지는 모두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믿음만 가지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참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9절 -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멘! - 여러분! 이 기도응답의 말씀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개업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있어도 폐업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없습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실패한 바로 그 때에, 더 좋은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나의 계획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비록 실패하여 가게를 치울 수밖에 없을 때에라도, 폐업 감사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의 계획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는 믿음이 있다면,
비록 직장에서 퇴출되었을지라도 퇴직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안 드립니다.
여러분! 내가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 실패 속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기 원하시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실패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하기 때문에, 정말로 인생의 전환기가 될 수 있는,
실패를 맞이하고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담는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질병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질병 속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합니다.
이걸 아십시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그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걸 믿는다면,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더 좋은 축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형 에서에게 사기를 쳤던 야곱이 20여 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다가,
그곳에서도 불의하게 재산을 모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야곱이 고향 땅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 에서에게 얼마나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지, 일행을 세 떼로 나누어서 선물을 보내고,
그렇게 그의 가족들과 종들이 얍복강을 다 건너간 후, 마침내 자신만 홀로 남아 밤새워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밤을 새워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철야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응답하셨습니까? 야곱의 환도 뼈를 꺾어서 다리를 절게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발 살려 달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오히려 그의 몸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만약 야곱이 그에게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인생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자신을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형 에서가,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다가 동생의 몰골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180도 달라져 동생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습니다. 만약 야곱이 20년 동안, 사기 친 결과 모은 재산으로 비단옷을 입고,
기름기가 흐르는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여지없이 에서의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의 모습은 밤새워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옷은 구겨져 있었고, 땀에 젖어 있었으며,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져 다리까지 절고 있었습니다.
그 때, 형 에서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의 형제 사랑이 회복되었고, 이제 불구자의 몸으로 돌아온,
불쌍한 동생 야곱에게 뛰어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모든 미움을 다 털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리가 부러져 절게 된 일은 고통이나 형벌이 아니라, 야곱을 살려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 모든 통치권자들은 나라의 권력을 홀로 독점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예비하신,
그의 나라 - 곧 하나님의 나라를 송두리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에서 겪는 생노병사가 없는 영생 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상대를 마구 짓밟고 일어서야 하는 처절한 경쟁사회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높아지기를 원하느냐? 먼저 남을 섬기는 종이 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네 손을 펴서 나누어 주라. 그러면 차고 넘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인격도,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린 채 동분서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몸에 좋다면, 오만가지 약을 다 먹으면서 더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정말 영원히 살고 싶으냐? 그러면 먼저 죽어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셨던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제왕 같은 모습이 아닌, 나사렛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자의 자녀로 태어나셨습니다.
나를 믿고 따라오라던 하나님의 아들이, 정치 세력들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무참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온전히 내어놓기까지,
죄인들인 우리 인간들을 섬겼던 예수님께서는 종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섬김을 받고 계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미련없이 버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으셨던 주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성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성공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잘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알고, 잘 믿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는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아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제까지 일하시는 분!” -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왜 많은 성도들이 걱정과 근심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까? 왜 많은 성도들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 멋대로 삽니까? 하나님이 만유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돈을 더 믿는 것은,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만유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고 내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신앙은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주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가는 모험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이라는 욕망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모험 여행입니다.
세상의 모험은 그 결과가 불확실하며, 그 동기가 욕망에 있기에 세상의 모험은 투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모험은 그 결과를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에 너무나 확실한 투자가 됩니다.
비전과 꿈이 있는 신앙인은 세상의 길에서 영원한 십자가의 길로, 그 길을 바꾸는 모험을 합니다.
바로 그 모험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모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위한 영적 모험의 여정에 나서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던질 때, 그가 두 발 딛고 있는 지점이 아무리 작고, 또 그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이 세계를 반드시 변화시키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사도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고, 사도 바울이 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소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 땅 끝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바뀌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믿었고, 위하여 자신의 삶을 모험으로 던지게 하셨던 하나님이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대한민국의 땅 끝, 이 작은 해남읍에 비록 살고 있다할지라도,
우리 해남 땅은 물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주님을 위한 모험에 뛰어듭시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물론, 세계역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서커스단의 곡예 중에서 가장 스릴이 넘치는 곡예 종목은, 뭐니뭐니 해도 공중곡예일 것입니다.
대개 한 사람이 공중사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또 한 사람이 이 사다리 저 사다리를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밧줄을 발에 걸고서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공중을 나는 사람을 잘아 줍니다.
우리가 보면 그 날아다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역할은, 상대방이 자신을 받아 줄 줄로 믿고 날아다니는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과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 손 붙잡고 함께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달려 갈 길을 마친 다음, "아버지! 지금 제가 갑니다." 하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 갈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 영원한 손으로 잡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신껏 살다가, 주님 부르시는 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내용을 정리하면,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부모와 자식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식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인사하면 다시는 그 부모를 뒤돌아보지 않지만, 부모는 떠나가는,
자식의 등 뒤를 한없이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으면 높은 동산 위에 올라가서 자식 가는 길을 바라보고,
그래도 사랑하는 자식이 보이지 않으면, 더 높은 나무 위에 올라서서 자식을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심정으로 자식을 키웠듯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런 심정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나와 항상 함께 하시고, 한없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나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전혀 새롭게 펼쳐지며, 나로 인하여 우리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아는 믿음에서부터,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시작하여,
자녀가 받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