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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 본 문 : 사무엘하 18장 28절 - 33절 (구약성경 494쪽)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다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충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 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멘!
서로 축복 /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한대로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선포한 대로 됩니다. 내게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저를 따라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 “예수님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 그런데 자신의 아내한테 꼼짝 못하는 애처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가 아양을 떨며 남편에게 묻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소중해?” “물론 당신이지!”
“두 번째는? - 우리 아들이지!” “그러면 세 번째는? - 그야 당신을 낳아주신 우리 장모님이지!”
“그럼 네 번째는 누구야? - 우리 집 복스러운 강아지!” “그럼 다섯 번째는? 우리 어머니이지!”
“그럼 여섯 번째는? 우리 아버지이지!” 이 소리를 문 밖에서 들은 아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을 냉장고에 붙여 놓고 집을 나가셨습니다. - “1번 보아라. 6번 경로당 간다.”
현대인들의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를 풍자한 글입니다. 저를 포함한 불효자들 잘 들으십시오.
키우던 애완동물 병이 나면 가축병원으로 급히 달려가도, 늙은 부모님이 병이 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 자식을 키운 부모님 하나같이 정성을 다해서 키웠건만, 열 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기고 있네.
자기 자식을 위해서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고 쓰건 만은, 부모위해 쓰는 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기 자식들은 손을 잡고 계속해서 외식을 하지만은, 늙으신 부모님을 위해서는 외출한번 하지 않네.
자기 자식들이 장난하면 좋아라고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 싫은 표정이네.
자기 자식 시끄러운 소리는 잘한다고 손뼉치며 좋아하지만, 부모님의 아파하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네.
과자봉지 들고 와서 자기 자식 손에 쥐어주며 먹으라 하나, 부모위해 고기 한 번 사올 줄을 모르네.
사람이 철이 들기 전에는, 도저히 부모님의 크고 높은 사랑을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슬픈 것은 우리가 철이 들 때쯤 되면, 부모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효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섬기지 못해 부모님의 가슴이 아프면, 그건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바로 부모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말씀에 절대 청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해드려도 부모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불효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청개구리처럼 돌아가신 후 울며 후회하는데, 아닙니다.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통곡의 눈물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잘 생기고 영리한 아들이 바로 압살롬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지략이 뛰어나고, 용기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압살롬의 마음속에 이기적인 야망과 절제되지 않는 야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고, 4년 동안이나 아버지 몰래 군대를 훈련시킵니다.
아버지 다윗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 성에서 쫓아내고 왕좌에 앉습니다. 그리고 아예 아버지 다윗을 죽여 버리려고 뒤쫓아 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군대와 아들의 군대가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이보다 더 불행한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이 싸움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의 전쟁은 아버지 다윗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의 소식을 듣지만,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왕의 체면도 생각지 않고 성곽에 올라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합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 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였더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비록 자신을 죽이려 한 아들이지만, 그 이들을 향한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부모님의 사랑은 끝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첫째로,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아멘입니까?
다윗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님들은 압살롬처럼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자식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보게 되면, 아버지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 압살롬은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쏟았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분노하게 되고, 당장 잡아서 목을 치라고 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싸우러 나가는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 장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다 듣도록 명령합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어떻게 보면 전쟁을 일으킨 주범을, 너그럽게 대해주라는 다윗의 명령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윗은, 혹시 압살롬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문에서 아들에 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이미 자기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이 무사하기만을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 자녀 삼으신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배반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이것입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가장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시면서도, 끝까지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게 하시므로 하나님 사랑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명령했습니다.(출 21:15-17)
이 말씀은 부모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때로 자식은 부모를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못된 자식이라도 끝까지 감싸 안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해주십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이게 바로 부모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살아온 것을 안다면, 마땅히 부모 공경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부모님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둘째로,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불행을 모두 다 자기 탓으로 여기시는 사랑을 하십니다.
자식이 부모인 자신에게 아무리 잘못했어도, 자식이 잘되기만 하면 부모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식이 못됐어도 자식이 불행해지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면, 아들 압살롬의 불행한 종말은, 아버지 다윗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밧세바의 남편을 고의로 살인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다윗이 꼬꾸라져 참회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범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은 면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0절에 보면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므로 집안에 무서운 재앙이 일어나고, 태어난 아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바로 자신의 범죄의 결과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에,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심한 자책을 합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못되면, 나 때문이라고 자신을 자책하며 슬퍼하십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잘 되면 그 공을 자식에게 돌리지만, 자식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부모 자신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들의 불행을 모두 다 자기 탓으로 여기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셋째로, 우리 부모님들은 자신의 생명과 왕관보다 더 소중하게 자식들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모든 관심은 아들 압살롬의 생사에 있었습니다.
비록 아들과 벌이는 전쟁이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패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달려온 전령이 다윗 왕에게 보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았다고 보고합니다. 다윗은 마땅히 승리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승리를 보고받은 다윗이 던진 첫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32절에 보면 “압살롬은 잘 있느냐?”
비록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고자 전쟁을 일으킨 못된 아들이었지만,
다윗에게 아들 압살롬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야할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전령으로부터 왕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은 물론 아들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윗은 차마 신하들 앞에서 울 수 없어서, 문 위층으로 올라가 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은 차라리 자기가 죽고, 아들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통곡을 합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보다도, 자신의 나라와 왕권보다도, 아들 압살롬이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아들이라도 사랑합니다.
자신의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라도 그 자식의 죽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을 다 주고 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애틋한 아비의 심정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내가 죽었더면...” - 이 다윗의 절규가 바로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마음을 가지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오늘의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말할 주제는 못 됩니다.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조차 자주 여쭙지 못하는 불효자식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압살롬의 모습이 바로 저 자신의 모습이고, 여러분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형편없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어버이는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자식의 잘못, 자식의 실패를 모두 다 자신의 탓으로 여기시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꿔서라도, 죽음 앞에 있는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의 젖을 먹고 자랐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압살롬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얼마나 부모님을 잘 섬겼느냐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왕대밭에 왕대 나듯이 효성을 다하는 부모 밑에 효성스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르신들을 잘 공경할 때, 우리의 자녀들이 보고 배웁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평생을 나와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섬겨야 합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사랑할 때는 앞모습만 봅니다. 그러나 철이 들기 시작하면,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은 찾아 온 자식이 떠날 때면, 먼저 들어가시라고 해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자식은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이 언제부턴가 커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식의 눈에 보이는 그 등으로 업어 키워주셨습니다. 그 등으로 자식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셨습니다.
부모님들은 그 등으로 오직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등골이 휘도록 고생하셨습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의 뒷모습이 점점 커 보이는 자식이라면, 그 자식은 그때부터 철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입니다.
언제나 우리 맘속에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부모님의 이마 주름살은 내 인생의 자선전입니다.
흰 머리카락은 나를 위한 고생의 여정입니다. 갈라진 손과 발은 나를 위한 영광의 흔적들입니다.
자식 된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라는 시입니다.
심순덕 님의 시인데, 주보 뒷면에 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며 함께 낭독하겠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굼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알았습니다.
한 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심순덕 님의 시!”
다같이 눈을 감고 “어버이 은혜!” 1절만 부르며 부모님 은혜를 마음에 새겨 보겠습니다.
♬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