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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위열전 ⑪
선인봉 거미길
‘행복 메모장에 우정을 새기다’ 글·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sohnbal@orgio.net
‘아, 여보세요. 빨리 오시잖고 뭐 합니까 형! 후배가 먼저 와서 기다리게 하면 됩니까.”
할머니가게에 정시에 도착한 리더 왕봉순 씨. 요즘 후배 얼굴이 금쪽이란 걸 잘 아는 그는 선배 앞에서 더 없이 당당하다. 줄창 산에 와서 권력과 사랑을 차지해도 매사에 바쁜 후배들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가? 오늘의 주인공 김경훈 씨도 그의 말에 반기를 들 수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구조대 야영장에 도착하자 왕가의 세도는 바닥이 드러난다. 그곳엔 진짜 후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등반대장 권문상 씨와 김장원 씨 그리고 그의 동기인 명경자 씨. 30대 초반인 장원 씨 정도면 젊은 피를 수혈 받아야 할 입장인 우정산악회에선 보물이나 다름없다. 조금은 거만하거나 응석을 떨어도 그만이지만 그의 표정은 깔끔하고 겸손하다. 그의 아내이자 동기인 명경자 씨도 우정의 비전을 증명해주는 사람이다. 경자 씨는 눈에 튀게도 현역 육군 대위다. 여자의 몸으로 중대장까지 해낸 캐리어 여군이지만 산악회에선 아직도 ‘밥순이’일 뿐이다. 그가 선배들과 어울림을 즐거워하는 것은 우정이 맘 붙일만한 곳이라는 반증이다.
거미길 등반을 제의했던 작년 이맘 때 이월출 회장은 난색을 표했었다. 등반활동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서 부담 없이 선등할 친구들이 뜸하기 때문이란다. 그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듯이 잠잠했어도 썩어도 준치는 되는 우정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 어떤 처방을 썼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시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 이 회장 자신도 전성기 때보다 바위에 더 많이 매달린다. 바위를 그만 둔 시점보다 지금이 더 어려운 등반을 하고 있다면 그 사실은 입증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마치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분위기는 앞으로의 등반에 과제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내년의 요세미테 등반과 그 이후 알프스 등반, 그리고 어디가 될지 모를 큰 등반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 감지된다.
안전하지 않은 등반은 무모하다
오늘은 아침 7시에 만나서 가차 없이 올라온 덕이기도 하지만 선인봉 전체에 오로지 우리밖에 없는 것에 너도나도 신기해한다. 더구나 평소에도 손님이 뜸한 거미길엔 왕봉순 씨의 우상이라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지난번 춘천의 용화산을 다녀온 김경훈 씨는 새삼 품이 넓은 인수와 선인이 정말 좋은 곳이라는 칭찬에 침이 마른다. 목소리 큰 어떤 아줌마의 고함소리 때문에 용화산 등반은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운전자가 보행자를 신경 쓴다는 것은 다소 생소했었다. 그런데 자가용이 천만대에 달하는 요즘은 운전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너무나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위를 즐기는 인구가 많아진 요즘 질서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암벽은 그야말로 위험한 장난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서두르지 맙시다.”
“오늘 날씨가 바위하기 너무 좋네요.”
“1973년 개척 때와 같은 길로 올라보지요.”
“능률적으로 이어진 지금의 선을 버리고 예전의 길을 따라서 오를 A조엔 장원 씨와 개척자의 한 사람인 김경훈 씨가 정해졌고, 지원을 자처한 B조는 이월출·왕봉순·김옥란·권문상 씨가 배정되었다. 거미길의 첫 마디는 요즘 우측의 혹점이 있는 슬랩으로 많이 오른다. 그 곳에서 직선으로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쌍방향으로 넓게 벌어진 완경사의 넓은 크랙의 왼쪽을 레이백으로 10여m 오르면 소나무를 우회하여 오른쪽으로 쌍볼트가 있는 곳까지 쭉 뻗어가야 한다. 장원 씨가 첫 마디를 끝내고 내 차례가 되어 출발을 하려는데 박종수 씨가 황급히 나타난다. 땀도 훔치기 전이지만 그도 역시 A조에 편성된다.
줄 당겨. 당겨부러.”
B조의 왕봉순 씨는 언제나 바위 앞에 서면 신이 나는 사람이다. 오늘 선인봉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우정의 중흥을 꿈꾸는 일에 그의 열정은 없어선 안 될 에너지다. 거기에 자상한 성품의 경훈 씨와 함께 꾸미고 있는 원정등반은 틀림없이 새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이 엿보인다. 우린 다시 짧은 슬랩을 거쳐 크랙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른다. 어렵지 않은 크랙이지만 몸가짐을 조심히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운 법. 마디가 끝나는 피톤엔 테라스가 없어 오른쪽 벽으로 넘어서서 확보를 하는 것이 편하다.
피톤과 테라스를 A조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B조의 권문상 씨는 중앙의 가는 크랙을 선택한다. 이 길은 정확한 거미길은 아니며 한 스텝이 애매한 곳이어서 망설임이 따른다. 몇 달 전 인수봉에서 만났을 때보다 문상 씨의 몸은 살이 빠지고 근육이 단단해진 듯하다. 쉬지 않고 바위를 오르며 갈고 닦는 중이라는 감이 느껴진다.
“안전하지 않은 등반은 무모함을 말하는 것이지요.”
남대문의 봉봉하켄을 싹쓸이하다
우정산악회 40년 동안 안전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은 그렇게 말해도 시비할 일이 아니다. 우정이 그 동안 바위에서 해낸 일을 보면 정말 경훈 씨의 말대로 사고가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1960년 10월 3일 산악회 창립 이후 달성한 초등 기록을 열거하면 설악산 미륵봉, 관악산 연주암 동벽, 오봉 노을길·우정길, 인수봉 우정A·우정B·우정C·우정M 코스와 하늘길·동녘길·서면 슬랩, 우이암 우정길, 북한산 보현봉 중앙벽, 설악산 주걱봉, 월악산 서남벽·고갈봉 좌측벽, 선인봉 거미길, 거문도 상백도의 해우길 등 매물도와 홍도의 해벽에 이르기까지 외우기 힘들만큼 많다. 1976년엔 인수봉 초등 50년제와 심포지엄을 비롯해서 25개 코스의 기념등반까지 해내는 한편 백두대간의 개념이 밝혀지기 전인 1980년엔 금정산에서 설악산에 이르는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처음으로 해내는 기염을 토한다. 이렇게 국내의 다양한 초등반과 활동에 비하면 우정의 해외 등반은 해야 할 일이 많다. 가우리상카 원정 등반 이후 본격 등반이 아직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어마어마한 초등의 기록을 세워나가는 동안 단 한 건의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산악회가 엄청난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럼에도 산악회에 젊은 친구들이 나오지 않아서 거미길 등반이 어렵다고 했을 때 이월출 회장은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사실 그 대목에서는 우정에 70년대를 같이 보낸 산친구를 두고 있는 나로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째 마디의 크랙을 오를 땐 남대문의 봉봉하켄을 싹쓸이 해왔지요.”
당시 이 부분을 선등했던 정용석 씨를 그리며 경훈 씨는 당시의 일을 회상한다. 경훈 씨는 거미길이 개척된 1973년 당시 우정의 암벽부 리더였다. 그는 우정의 3,4대 선배들이 인수봉에 우정길을 개척한 이후 그들의 업적을 이을만한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래서 저지른 일이 바로 선인봉의 거미길 개척이었다.
6대 선배인 이주명·정용석과 7대인 경훈 씨가 개척의 공격조로 편성되었고, 함영기·이정호·한기원 등이 지원조를 맡았으며 우정길의 개척자 박창규 씨가 이들의 작업에 기술 지도를 담당했다. 개척에 걸린 시간은 총 3개월. 그해 가을 경훈 씨는 거미길 개척이 끝난 뒤 군에 입대했고 그 이후 산을 등졌다. 그에게 산의 전성기는 그렇게 일찌감치 왔다가 갔다. 산을 떠난 그는 오로지 직장과 사업에 충실했고 등산을 대신한 운동은 골프였다. 거미길의 세째 마디를 오르려면 거미처럼 사지를 벌려서 올라야 했던 고빗사위를 생각해서 이름 붙인 거미길이 그 동안 하늘길로 둔갑되어 불려지는 것도 모른 채 시간은 흘러갔다.
골프에 한창 빠져들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산이 생각났다. 그러나 다시 산에 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모든 시스템을 새로 배워야 하며 장비의 사용법도 다시 익혀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스로 초보자라고 생각하며 김용기등산학교에 입교해 새로운 시스템을 익혔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그런 결정은 사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겸손한 마음 때문이다.
바위에서 즐겁고 행복해지는 법
문상 씨가 드디어 변형길을 해결한 후 거미를 향해 크랙으로 차고 붙는다. 그 뒤를 따라 이월출 회장과 김옥란·왕봉순 씨까지 회원들은 제각기 요령을 피우며 오른다. 자유등반으로 5.11b의 등급이 주어진 곳이지만 후등으로는 지옥까지도 갈 수 있다는 듯 피피를 사용해 가뿐하게 해치운다. 마지막으로 땀을 훔치던 박종수 씨 차례. 그는 일찍이 고등부 시절 우이암에 우정길을 냈던 그야말로 군대말로 ‘짬밥’이 쌓인 사람이다. 오래 붙으면 힘이 더 든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그가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휘휙 직상 크랙을 지났으나 아무래도 거미에선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가장 어려운 거미를 건너선 종수 씨가 테라스에 올라서더니 땀도 마르기 전에 갑자기 내려가겠단다. 이유는 볼일이라나. 화장지 때문에 원정등반에 실패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화장지 없이 캠프에서 한 달 넘게 견딘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담배가 떨어져서 아이거 북벽 등반 도중 하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배고픔과 추위는 견딜 수 있지만 담배가 없는 등반은 정상에 간다 하더라도 낙이 없더란다. 그런 이유들은 마치 핑계처럼 들리지만 정작 화장실을 가야하는 것처럼 절실하고 급박한 일은 없다. 따지고 보면 화장실에 가는 일에 대적할 만한 귀찮고도 중요한 이중적인 세상일은 없다. 오늘 그의 중요한 임무수행은 그래서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이제 볼트만 따먹으면 거미길은 끝나는데….
고도감이 삼삼한 볼트를 지나 거미길은 끝이 나고 선인 B코스와 같이 사용하는 테라스에 이르자 더는 갈 수 없을 만큼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곳에서부터는 선인 A코스의 상단과 합쳐지며 정상까지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거미길 넷째 마디에서 끝이 나고 먹고 마실 행복만 남았다는 표정이 넘쳐흐른다. 준비해온 과일 샤베트와 냉과일이 김경훈 씨와 이월출 회장의 배낭에서 쏟아져 나온다. 여럿을 위해서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것으로 즐거워하고 행복해지는 법을 익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등반에 추호의 후회는 없다. 그러나 굳이 반성을 한다면 테라스에 함께 B코스로 오른 이름 모를 옆 사람들에게도 시원한 얼음 과일을 조금 나누어주지 못한 것 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오늘 일을 ‘행복 메모장’에 새겨두는 한편, 매번 해도 물거품이 되고 말지만 다시 또 빨간 줄 하나를 마음에 긋는다.
첫댓글 나도 거미길 해봣는데 아주 좋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