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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시조의 고향성 연구 -전통으로서의 고향의식 김민정
Ⅰ. 서론
艸丁 金相沃은 시와 시조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시인으로, 또는 시조시인으로 불리며, 서예가이기도 하다. 시조집으로는 草笛(47), 三行詩(73), 향기 남은 가을(89), 느티나무의 말(98), 눈길 한번 닿으면(01) 등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는고원의 곡(48), 이단의 시(49), 衣裳(53), 木石의 노래(56), 墨을 갈다가(80) 등을 간행하였고, 동시집으로석류꽃(52), 꽃 속에 묻힌 집(58) 등이 있으며, 산문집 詩와 陶磁(75)가 있다. 김상옥은 1920년 음력 3월 15일 경남 통영(충무)시 항남동 64번지에서 출생했다. 갓일을 하시던 아버지 箕湖 金德洪과 어머니 驪陽 陳씨 사이에서 6녀1남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7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그는 고집이 세고 영특하고 남달리 꿈과 인정이 많았던 소년시절1)을 보냈는데, 학교 교육은 별로 수학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김상옥의 문학수업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육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韓在鉉의 격려와 글씨에 뛰어났던 李瓚根, 묵죽에 빼어났던 金址沃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영화, 연극, 무용에 일가를 이루었던 蘆提 張春植 등이었다. 김상옥은 한때 <南苑書店>이란 책방을 경영하였는데, 거기에서「임꺽정전」도 팔고, 독립운동의 아픔과 애절함을 노래한 浪山의 한시를 써붙였다가 영창에 가기도 하며,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된 식민치하에서 독학으로 한글 詩作을 계속하느라 네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7년에는 김용호, 한윤수 등과 함께 시동인지맥(貊)2)을 창간하고, 임화, 윤곤강, 서정주, 박남수 등이 후일 합류하기도 하였다. 1939년 文章지에 「鳳仙花」를 발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동아일보 신춘시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해방되던 해 2월에는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윤이상과 함께 상경하여 동아일보에 시조로 등단했던 이호우의 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인장가게서 도장을 파기도 하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이호연, 오세창 선생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어 가람 이병기가 군정청의 교과서 편수관이 되자 「봉선화」를 국어교과서에 싣게 된다. 그 해 가을에 전국 효시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해방기념제전’이라는 이름으로 글짓기 대회가 열렸는데, 이주홍, 김정한, 김수돈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내려갔던 젊은 그는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직접 선수로 시부에 출전해서 매일 다른 시제가 걸리는 3일 동안 계속 장원을 하였다. 이어 삼천포에 내려가 삼천포중학교의 교사를 시작으로 통영중학교, 통영여고, 마산고, 경남여고 등에서 20년 가까이 교편을 잡았으며, 삼천포중학교에서 박재삼, 마산고에서 이제하, 경남여고에서 허윤정 등을 길러내기도 했다. 김상옥은 1947년 첫시집 草笛을 발간하면서 직접 닥종이를 고르고,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의 전과정을 혼자서 하였다. 그 후 김상옥은 향리에 다시 돌아와 남망산에 충무공의 시비를 세운다. 이 비문에 새긴 충무공 예찬은 통영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데 ‘한 민족의 윤리를 일컬어 진실로 한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나니, 이로써 충무공은 비로소 그 진리 앞에 成仁한 교주시니라’는 내용이다. 교사, 인쇄소 직공, 서점 경영, 도장포 경영 등의 직업을 거친 김상옥은 62년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표구사를 겸한 골동품가게 ‘亞字房’을 내어 72년까지 경영하면서 동아일보․중앙일보 등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범부 선생의 신라사 강론을 경청하기도 하고, 옛 고서들을 가까이하면서 백자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론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국립박물관 초청으로 백자에 대한 사랑과 예술정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에도 독학 정진하여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마산, 진주 등지에서 그림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72년에는 쿄토의 융채당화랑에까지 초청을 받아 일주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1945년 아동 문학지인 참새를 간행하면서, 통영 문인협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로 이주하기 전에는 주로 경남지방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제1회 노산 문학상(76), 제1회 중앙 시조 대상(83)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상옥 시인이 자란 시기는 일제 시대였고, 그가 문단에 등단한 시기는 일제 말인 1939년이었다.3) 그가 시조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이유는 1930년대 우리말의 공백기나 다름없는 시대에, 즉 일제의 우리말글의 말살정책 상황에서 ‘시조’로 등단하였으며, 많은 시조 시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김상옥은 그것에서 탈피를 시도하여 변혁을 꾀하고 있으며, 현대시조 발전의 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문학 속에 나타나는 ‘고향상실’ 의식은 민족사의 현실과도 관련이 깊었다. 그 이유로는 우리 민족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고향에서 생존이 어려워 고향을 등지는 유랑민이 많이 생겨 공간적 고향상실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한편 근대 사회의 소외의식과 관련된 고향상실감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서의 시대의식과 허무의식4)에서 오는 상실감이라고 볼 수 있다. 농민들이 생존이 어려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농사지을 땅이 없거나5), 농사를 지어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고 나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이다. 그들은 국외로 떠나 유이민의 길을 떠나거나 국내에서 떠돌며 유랑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의 ‘완전식민지화’를 하루바삐 앞당기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제국의 통감 이등박문이 설치한 ‘동양척식회사’는 청일전쟁 당시 2만여 명에 불과했던 일본인 수를, 1904년 러 일 전쟁 직후부터 추진된 ‘일본 내 과잉인구 흡수정책’에 상응하게끔 ‘합방’ 당해연도인 1910년에는 17만 1천 5백 43명,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에는 33만 7천명으로 급증시켰다. 또한 그 산하에 4만 6천 정보(1914)에 달하는 광대한 땅(가장 비옥 한 논)을 소유함으로써, 그 결과 조선농민은 급속히 분해되었다. 그리하여 소작농․농업노동자로 금방 전락하거나, 화전민․도시노동자로 전환하는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국내에서 유리 걸식하는 자,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이농민 및 하와이․멕시코 지역으로의 값싼 노동이민으로 이주해 가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이같은 대규모 ‘농민이향’의 결과가 당대 농민들로 하여금 국외 유이민으로 전락하게 하거나 도시노동예비군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비참한 것이었다.6) 위에서처럼 비참한 것이었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희망도 잃고 正體性도 없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시기에 뜻있는 애국지사들이나 문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희망을 잃은 이 민족에게 희망과 자존심을 줄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민족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민족에게 자긍심을 주고, 민족애를 갖게 할 수 있는 힘, 민족혼을 일깨울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이러한 자각의 일환으로 최남선은 1926년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조선문단에 발표함으로서 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문학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어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과 같은 이들이 시조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때, 이 민족의 정서와 민족혼을 찾으려는 노력을 김상옥은 시조작품에 기울였다. 정신적인 맥을 찾고 전통을 찾아 민족정서를 지켜 가는 것이 곧 민족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향토인 조국강산을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우리민족의 정신적 뿌리감정인 전통의식, 전통미를 찾는 일은 곧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고향을 찾아 주는 일이었고, 일제하에서 할 수 있는 조국사랑과 민족사랑이었다. 잃어가는 전통을 찾아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 주는 일이며 고향상실감과 국토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鄕愁란 원래 故鄕에 대한 思慕이지만, 그 故鄕이란 반드시 有形임을 요하지 않는다’7)고 볼 때, 우리는 無形의 정신적 안식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신적 고향인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일은 곧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민족이 삼국통일을 하여 현재의 영토를 지녔던 신라시대부터 찾아보는 일이었다. 문화와 과학이 발달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적 유물과 역사적 유적을 찾아보고 그들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김상옥은 신라의 문화 유물과 역사적 유적들에 관한 시조를 쓰기 시작했고, 그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우리의 지나온 역사와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또 그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서 우리민족이 가장 오래 사랑해 왔던 문학장르인 <시조>를 택했다. 그의 첫시조집 草笛의 제3부 ‘노을빛 구름’에서는 신라․고려․조선의 유물․유적을 노래하는 한편, 작품「선죽교」등을 통해서는 고려충신 정몽주 등 민족의 위인들을 노래했다. 정신적 뿌리를 찾으려는 그의 의지는 바로 우리민족의 유물․유적․인물에서 정신적 고향을 발견하여 시조작품화 하였고, 그것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 김상옥의 이러한 고향의식은 훗설의 ‘故鄕의 意識的이고 形而上學的 측면을 볼 때 그 고향의 本質은 不變하고, 永久的이며, 또 그것은 自然的 空間만이 아닌 것이다.’8)라고 한 정의와 슈프랑어의 ‘故鄕意識은 정신적인 뿌리감정(Geistiges Wurzelgefuhl)’9)이라고 정의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문화에의 접근은 자연적․처소적 공간이 아닌 ‘정신적인 고향’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계전의 ‘시인들의 정신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고향의식은 실제 자신이 태어난 구체적인 고향에 대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보다 일반적인 것이며, 개인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줄 ‘상상적인 어머니’를 뜻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어머니’ 라는 것은 이미지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현실의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국’이라는 남성적 존재와 대비되는데, 조국이 강력한 권력과 이념, 즉 ‘아버지’적인 것을 통해 지탱되는 것과 달리, 이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은 내밀하며, 뚜렷한 이름도 없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었던 영혼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신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다.’10) 라고 한 주장과도 관련시켜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김상옥의 고향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두 가지로 나누어 파악해 보고 분석하고자 한다. 하나는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을 중심으로 한 토속적 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전통문화유산을 통한 전통정신으로서의 고향이다.
Ⅱ. 土俗的 정서 공간 김상옥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고향의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의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나타낸 것들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고향으로서의 이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에 바탕을 둔 고향이다. 향토란 ‘시골, 고향’이란 의미로 사전에는 풀이되어 있다. 흔히 향토성이란 어떤 지방 특유의 정취나 풍습 등을 말한다. 토속성이란 말도 같은 의미로 쓰여 그 지방만의 특유의 습관이나 풍습을 말하고 있다. 향토로서의 고향의식은 1920년대의 김기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초 팔봉 김기진은 신경향파 문학 전개과정에서 <力의 예술>을 주장하면서 계급문학의 정당성을 내세웠는데, 그에게서 향토로서의 고향의식이 나타난다.
우리의 향토 - 나는 여기서 국가라는 말을 쓰기 싫다- 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살림이 아니고, 우리의 살림이 우리의 조직- 손에 있지 아니하다. 우리의 살림은 빈객인 저 사람들의 손아귀에 있다. 남산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한강이 우리의 것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살림도 우리의 것이 아니요, 앞논, 뒷밭이 저 사람들 것인 동시에 우리 집 마당의 타작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저 건너 이판서나 강참판댁의 노적가리로 들어갈 것이다.…….11)
여기서 김기진은 현재 우리의 근원적 고향을 ‘향토’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남산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한강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앞논, 뒷밭이 저 사람들 것”이라고 하여 김기진이 생각하는 향토의 개념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기진은 30년대초까지 향토를 중심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2) 김상옥의 작품 중에서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공간적 차원으로서의 고향의식이 나타나는 작품들은 곧 향토적, 토속적 정서를 나타내는 것들과 연결된다. 그가 태어난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을 중심으로 回歸不可能한 시간과 공간인 어린 날에 대한 그리움과 토속적인 정서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고 있는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구비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白楊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山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로운 꽃찌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요 -「思鄕」 전문
題名이 암시하듯이 고향의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 화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 구비가 잦은 풀밭길이 보이고, 개울물이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인다. 송아지를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는 저녁노을처럼 붉고 아름답게 산을 둘러 퍼져 있다.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이라고 하여 생각은 다시 한번 비약하고, 후각적 이미지 묘사로 생생한 느낌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저녁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진 진달래의 붉은 빛, 그것은 다시 어머니의 그리운 솜씨인 진달래꽃으로 꽃지짐(花煎)을 붙이던 모습으로까지 상상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어질고 고운 고향마을 사람들은 지금쯤 멧남새(산나물)도 캐어올 것이다. 집집이 끼니때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그 고향을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도로 애젓하게 저려온다. 그는 이 작품에서 향토적인 고향과 토속적인 정서를 그리워하고 있다. 풀밭길, 개울물, 길섶, 백양숲, 사립, 초집, 송아지, 진달래, 저녁노을, 산, 어마씨, 꽃찌짐, 멧남새. 집집, 마을 등 그가 고향을 생각하며 쓰는 소재들은 우리의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속적인 풍경이며 정서다. 이 작품에 대해 나재균은 ‘지금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절실히 그리워 부르는 향수의 노래’13)라고 하여 잃어가는 것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라 하였으나 토속적인 정서에 대한 그리움으로 볼 수 있다. 유년시절의 꿈을 꾸던 당시에도 갈등과 아픔과 시련이 그 꿈과 함께-어쩌면 현재의 삶보다도 더 강도 높게-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회상이라는 여과기에 걸러져 버리고 오로지 비현실적인 회상 가운데 꿈은 행복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시인의 상상력 속에 되살아나는, 그리하여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꿈은 행복한 이미지만을 이끌어 들이고 불행의 경험을 거부하는 이른바 이미지 중심인 것이다.”14) 때문에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가 추억이란 이름으로 걸러지고 좋은 기억들만 남아 있다. 봄이면 가난하여 봄나물을 캐어 끼니를 이어갔겠지만 그것조차 화자에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이 그것이다. 봄의 생생력적인 힘이 그대로 살아나는 생동감 있는 표현이다. 그리하여 향수는 인간에게 언제나 감초를 씹듯 향기롭고 감미롭게 다가온다.
내 한때 豆滿江ㅅ가 邊氏村에 살았는데 고향을 묻길래 統制使 營門이던 통영 진사립 자개장롱 나는 곳이래도 모르데요.
아메야 에미네야 웃음이 마구 터지는데 가수내 이 문둥이 말끝마다 흉을 봐도 비빔밥 꽃찌짐 얘기는 숨도 없이 듣던데요.
되땅은 하로 아침길 慶尙道는 꿈의 나라 동삼 내 눈이 싸여도 한우리의 고장인데 아득한 먼 옛말같은 겨레들이 삽데다요. -「邊氏村」 전문
시인의 고향 경상도 통영과 그곳의 특산품인 자개장롱 등의 소재가 나타나는 작품이다. 같은 민족이라 정서는 비슷하지만 조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변씨촌인 두만강에서 더 가까운 곳은 중국 땅이고, 故鄕인 경상도는 멀리 있어 꿈의 나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에 우리들의 겨레들이 살고 있더라는 내용이다.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우리들의 동포들을 보고 쓴 작품이다. 자개장롱으로 유명하던 고향 통영에 대한 그리움과 토속적 정서를 그리워하며 또한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서 같은 겨레임을 발견하고, 동족애를 느끼고 있다. 같은 핏줄의 겨레붙이인 그들이 고향도 모르고 조국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화자는 그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종장에서의 간접 화법식의 ‘~데요’, ‘~다요’를 씀으로써 독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듯 힘ㅅ줄만이 서노나 -「鳳仙花」 전문
이 시조는 1939년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文章지에 실린 작품이다. 그 동안 계속 교과서에 실렸었고, 가곡으로도 만들어졌다. 이병기는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통해 그의 언어구사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하는 것이 얼마나 그립고 놀라운 일이냐. 이런 정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마는, 이런 표현만은 할 이가 그리 많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는 아니될 것이다. 쓰는 말법도 남달리 익숙한 바 <삼삼이는>과 같은 말을 쓴 건 그 묘미를 얻은 것이다. 항용 말을 휘몰아 잘 쓰기도 어려운 바, 한층 더 나아가 새로운 말법…… 우리 語感, 語例를 새롭게 살리는 말법을 쓰는 것이 더욱 용하다. 그러나 앞으로 더 洋洋한 길이 있는 이 詩人으로서 다만 鳳仙花 詩人으로만 그치지 말기를 바란다.”15)
조연현은 “동심에 가깝도록 소박하고 섬세한 감성”16)을 보여주는 시인이라 보고 있으며, 또 임선묵은 “그의 시어는 맵거나 독하지 않고 원한에 사무쳤거나 비통에 몸부림치고 있지 않다. 순수와 참여가 조화된 본연의 모습을 證示하고 있는 것이다.”17)며 시어에 대한 선택이 뛰어남을 지적한다. 작품 「鳳仙花」의 뛰어남은 위에 지적한 ‘언어의 세련미’외에도 ‘이미지의 선명함’, ‘토속적 소재 사용’에도 근거할 수 있다. 장독간, 봉선화, 꽃, 사연, 누님, 고향집, 손톱, 꽃물, 양지, 실, 하얀 손, 가락 등의 단어가 보여주고 있는 토속적 정서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난 후 장독간에 핀 봉선화 꽃을 소재로 하여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꽃으로 하여 시집간 누님이 생각나고, 자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는 소년의 동심 어린 목소리가 담겨 있다.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詩化하고 있다. 양지에 앉아서 봉선화 꽃과 잎과 백반을 함께 찧어 손톱에 얹고 손가락을 헝겊으로 싸고 실로 찬찬 매어주던 누님의 모습, 하루쯤 지난 다음 손가락을 풀었을 때 연붉게 물이 들어있던 손톱, 그러나 그러한 유년으로의 회귀불가능한 지금은 꿈속에 본 듯이 힘줄만이 선다고 한다. 유년의 추억만이 힘줄처럼 강하게 선다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다. ‘누나’ 또는 ‘누님’라는 소재는 우리 시에 많이 등장한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를 보면 누나의 이미지는 슬프다. 민간 설화에서 소재를 취했다는 김소월의 「접동새」의 누나는 죽어서도 오랍 동생들을 잊지 못해 집 앞에 와서 ‘접동접동’ 울며 다닌다는 슬픈 존재 양상을 띤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든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든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엇습니다.// 누나라고 불너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엿습니다.// 아웁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은/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 못니저/ 야삼경(夜三更) 남 다자는 밤이 깊으면/ 이山 저山 올마가며 슬피웁니다.// -「접동새」 전문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는 의붓어미의 구박을 받고 자란 누이가 혼기가 되어 혼수 장만을 많이 했건만 갑자기 죽게 되어 아홉 오라비는 슬퍼하면서 마당에서 그녀의 혼수를 태웠다. 그런데 의붓어미가 아까워하면서 다 못 태우게 하자, 화가 난 오라비들은 혼수를 태우던 불에다가 의붓어미를 밀어넣어 죽게 했더니 그 의붓어미는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죽어서 접동새가 된 누이는 밤마다 오라비들이 있는 곳에 와서 운다. 까마귀는 접동새만 보면 죽이는 습성이 있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접동새는 밤에만 우는데 그러한 생태계의 모습을 보고 만든 설화이며 그것을 詩化했던 것이다. 김상옥의 「봉선화」에서 누나의 이미지는, 김소월의 시 ‘접동새’에 보이는 정서와는 다른 따뜻한 정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즉 ‘누나’의 여성성이 자상하고 따뜻한 보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그대로 살린 여성적 포근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回歸不可能한 시간에 대한 향수가 향토적, 토속적 정서와 어울려 한 층 더 애련함을 자아내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고향에 대한 보편적 그리움을 더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고향의 의미는 토속적 정서와 함께 따뜻한 모성적 여성성이다.
오오래 바다가에 외따로 살아오며 자나 깨나 물소리만 귀에 익혀 들었거니 바람 잔 고요한 날엔 가슴 도로 설레라 -「물소리」 전문
바다란 그에게 모성과 같은 장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자장가 삼아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영에 대한 그리움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동일성을 띤다. 사시사철 물소리에 젖어 산 그에게는 파도소리 그 자체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바람 잔 고요한 날엔 가슴 도로 설레라’의 표현은 특히 심리적인 묘사로서 화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김상옥에게 있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향토애로서의 고향이 더 나아가 조국애가 됨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충무공 시비에 쓴 시가 그러하다. 곧 애향정신의 발로가 확대된 결과라 하겠다.
한 구비 맑은 江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邑네로 가는 길은 꿈ㅅ결처럼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사람 보이지도 않아라. -「江 있는 마을」 전문
위 작품은 그의 고향의 한 정경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 구비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흐르는데 긴 긴 여름날이 더욱 고요하다. 이런 고요를 깨고 어딘가에서 우는 낮닭의 울음소리, 그 소리마저 귀에 살풋 들린다.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인 집들이 아름답고, 읍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아득히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적막만이 흐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고향 마을의 정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을의 평화이다. 동네 사람들은 안 보이는 어느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더워 낮잠을 자면서 쉬고 있는지 이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고요한 정서가 나타나고 향토적, 토속적 평화로운 정경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의 몇몇 작품은 위에서 보듯이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정서의 작품에 해당된다. 우리민족의 향토적, 토속적인 정서 및 생활습관 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의식, 또는 향수가 거의 토속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잘 부합되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립고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은 짙은 향수와 함께 다가오기 때문이다. 회귀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위 작품들에서 보듯 그의 고향에는 갈등적 요소가 없다. 늘 정겹고, 평온하고 꽃지짐 지지는 냄새가 나는
고향이다. 고향의 풍경도 직선적이지만 않고 곡선적이다. ‘눈을 감으면 구비 잦은 풀밭길이’ 보이고, ‘한 구비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흘러가는’
풍경이다. 완만한 곡선의 이미지가 고향에는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邊氏村」에서는 풍속과
문화적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역사와 향토문화를 내세우는 애향심이 드러나고, 「鳳仙花」에서는 봉선화 꽃을 매개로 하여 시적 화자와
누님이 고향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 외에도 「비오는 분묘」, 「입동」, 「만추」, 「누님의 죽음」, 「흰 돛 하나」,
「안개」 등의 작품에 향토적․토속적 정서가 나타난다. |
첫댓글 귀한 자료 올려놓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고 갑니다..
귀한 사료를 얻어보고 보고 갑니다
잘 살펴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