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업 후 ♣
․ 개업하고서는 원명이라는 한의사 도반의 소개로 사상의학회에 나가서 공부를 조금 하다가 남구 분회장이었던 김태국 선배에게 공부를 배우면서 소문학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분은 연세가 100세가 가까운 분인데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꼬장꼬장하게 마르신 분이었다. 무위당 선생님도 불교공부에 깊으셔서 부산의 유명한 백봉 김기추 거사님께 공부하셨다. 내가 마음공부하는 선생님인 춘당 선생님도 백봉 김기추 거사님의 법제자이기 때문에 더욱 잘 되었다. 두 분이서 잘 알고 계셨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초창기에 한의학 가르치실 때 5분이 공부하셨는데 그 때 춘당 선생님도 함께 공부하셨다고 하신다.
(나중에 드는 생각이지만 마음공부가 모든 공부의 근본이기에 마음공부에 먼저 발을 담근 후에 한의학 공부에 발을 깊이 담그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의학이란 하나의 학문에 빠져 있었을 것 같다. 지금도 한의학이란 학문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고, 한의사라는 집단 이기주의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무위당 선생님의 큰 아드님 댁의 2층 무위당 선생님의 방에 모두 옹기종기 모여서 한의원 끝나고 월요일 수요일 저녁에 또는 일요일 2시경에 공부를 하였다. 아주 재미있고 우리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어서 좋았다. 일반 한의사들의 강의보다 격이 한 차원 높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서 내가 화요일 오전 공부를 하게 되었다. 혼자서 궁금한 것 여쭈어보고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열심히 공부하는 몇 사람 더 데리고 오라시며 요즈음 울산의 춘오 이상만이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해서 내가 전화를 내니 기꺼이 가겠다고 하면서 월봉 이천호도 함께 왔다. 그리고 나도 무계 박치후도 같이 불러서 화요 오전공부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많아져서 약 7,8명쯤 되었는데 선생님 기력이 안 좋아져서 그만 두게 되고 선생님께서 100세를 못 채우시고 돌아가셨다.
그 이후에는 나도 함께 공부하는 방식이 마음에 못 차서 그만두다시피 하였다. 언제든지 좋은 공부도반이 생겨서 공부하는 시스템도 그야말로 생기발랄하다면 언제든지 참여할 마음자세는 되어있다고 생각된다. ‘소문학회의 발전을 위하여’란 제목으로 A4지 4장의 장문의 글을 적어서 그 당시 회장에게 찾아서 담판을 짔기도 했었는데, 후후. 너무 격정적이었는지, 허허.
하여튼 무위당 선생님께 처음 배울 때는 받아들이기 바빴고 그 이후에는 내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선생님께 반론을 많이 제기했었다. 그러다가 선배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듣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쉽기는 내가 선생님께서 조금만 젊으셨다면 더 반론을 제기하고 한번 부딪혀서 내 고정관념이 꺽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 고정관념은 내 스스로 마음공부를 해서 꺾어야 할 몫인 것 같다.
어쨌든 그 당시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 그 사이에 무위당 선생님께 초창기에 춘당 선생님과 모범약국의 우석 선배님 등 5분이 공부하셨는데 춘당 선생님께서 우석 선배님을 만나서 공부해보라고 해서 약국에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더니 겸손하셔서 그런지 그냥 모른 것이 있으면 팩스를 넣어서 보내면 전화로 통화하면서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약 1년여 동안 하루에 한두 케이스씩 내 나름대로 본 것을 적어서 내 나름대로의 처방을 만들어서 팩스를 보내면 선배님이 한가한 시간에 보시고 내게 전화로 이렇다 저렇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라. 등 안내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정리하고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서 공부하면 안 되겠느냐니까 아직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고 하시며 인연이 아직까지 되지 못했었다.
나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까 소문학회 내에서도 열심히 하는 선배로 비춰졌던지 몇 명이서 함께 공부하자고 해서 같이 한 2년동안 공부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이정도 공부로는 남을 이끌거나 무슨 말을 해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껴서 그만 두었었다. 그 과정에서 한 분이 매일 팩스를 넣어주면 내가 그 팩스를 받아서 내 나름대로 보고 정리해서 또 전화를 넣어서 이야기해주고 하는 건방을 떨었었다. 그러다가 그것도 부족함을 느껴서 다른 동료를 소개해주고 그만 두었다. 그러다가 무위당 선생님께서도 돌아가시고 그래서 아예 손을 놓았었다. 어쨌든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화요공부 때문에 화요일 오전에 한의원 진료를 비우고 공부하러 다녔었고, 그러다가 매일 오전을 다 비우고 공부하러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공을 덜 들였는지 완전히 내것으로는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약을 처방낼 때는 서스럼 없이 낼 수 있는 정도는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