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七代
휘 수번(諱 守藩)이시며, 관직(官職)은 무과괴 내금위 장호군(武科魁 內禁衛 將護軍)이시며,
배위 숙부인조씨(配位 淑夫人曺氏)는 창령 조희익의 여식((昌寧 曺希益之女也)이다.
양위묘소(兩位墓所)는 하절산에 있다.(在夏節山)
-백중숙씨(伯仲叔氏) 있으니, 백씨(伯氏) 휘 의번(諱 宜藩)이시며, 호 백암(號 栢巖)이시며, 임진난(壬辰亂)에 경주성(慶州城)에서 순절(殉節)하셨다.
중씨(仲氏) 휘 지송(諱 之頌)이시며, 이하 전하지 않는다.(以下不傳)
숙씨(叔氏) 휘 안번(諱 安藩)이시며, 관직(官職)은 사과(司科)이시며, 그 아랫대 십팔대(十八代) 휘 호인(諱 好仁)이시며, 호 양계(號 暘溪)이시고, 관직(官職)은 진주목사(晉州牧使)이시며,
계씨 휘 호문(季氏 諱 好問)이시며, 관직(官職)은 종사낭(從仕郞)이시다.
호인(好仁) 아랫대 십구대(十九代) 휘 시행(諱 時行)이시며, 계씨 휘 시연(季氏 諱 時衍)이시며, 호 학암(號 鶴巖) 이시며, 후예(後裔)는 김천봉계(金泉鳳溪)에 성거(盛居)하였다.
휘 시간(諱 時衎)이시며 호 취성당(號 醉醒堂)이시며, 후예(後裔)는 자양신방(자양신방)에 성거(盛居)하고,
시행(時行) 아랫대 이십대(二十代)에 휘 석주(諱 碩冑)이시며, 호 양곡(號 暘谷)이시고,
그 아랫대 이십일대(二十一代)에 휘 만양(諱 萬陽)이시며, 호 훈수(號 塤叟)이시고, 계씨 휘 규양(季氏 諱 葵陽)이시며, 호 지수(號 篪叟)이시니 형제(兄弟)를 합(合)해서 양수(兩叟)라 한다.
**숙부인(宜人): 정3품(正三品) 당상관 부인(堂上官 婦人)에게 내린 봉작(封爵)
十八代
휘 호신(諱 好信)이시며, 호 삼휴(號 三休)이시며, 관직(官職)은 승의낭(承議郞)이시며, 병자난(丙子亂)에 의병을 일어키셨다.(창의:倡義)
배위 성씨(配位 成氏)는 찰방(察訪) 창령 성이직의 여식((昌寧 成以直之女也)이다.
양위묘소(兩位墓所)는 영천 고경면 초일동(永川 古鏡面 草日洞)에 있다.
비에 새겨져 있기를(갈명:碣銘) 치성송이씨(治城宋履氏)가 짓(찬:撰)고, 지명(誌銘)에 오대손(五代孫) 생원 하준(生員 夏濬)이 기록(기:記)하고, 행장(行狀)에 종증손(從曾孫) 참의(參議) 중기(重器)가 기록(기:記)하다.
-백중씨(伯仲氏) 있으니, 백씨(伯氏)휘 호의(諱 好義)이시며, 호 명계(號 明溪)이시며, 관직(官職)은 승의낭(承議郞)이시며, 병자난(丙子亂)에 의병을 일어키셨다.(창의:倡義)
둘째 동생(이제:二弟)과 상화문집(常華文集)을 함께 지어(합작:合作)시고 낙산정(樂山亭)에 함께 사셨다.(동거:同居)
낙산정을 정정정(亭亭亭)이라고도 한다. 후예(後裔)는 석동등지(石洞等地)에 성거(盛居)하였다.
중씨(仲氏) 휘 호예(諱 好禮)이시며, 백부 백암공(伯父 佰巖公)의 뒤를 이어(계후:繼後)로 갔으며, 정묘(丁卯) 병자(丙子) 양란(兩亂)에 의병을 일으키(창의:倡義)셨으며, 해남현감(海南縣監)의 직무를 수행(행직:行職)하셨다. 후예(後裔)는 대전 선원 매곡(大田 仙源 梅谷) 각지(各地)에 성거(盛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