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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금요월례토론회 현장 중계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이 좋은 책인가
정리 : 편집부
● 최은희 : 원래 천안에서 하기로 했는데, 장마철이어서 에어컨이 없는 곳은 힘들 것 같더라고요. 더운 건 둘째 치고 끈끈할까 봐 이 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평론가도 아니고, 이론가도 아니에요. 저는 좋은 그림책이나 좋은 어린이책을 가지고 내가 아이들하고 어떻게 즐기면서 놀고 있다 하는 소박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요. 저는 그 이상은 나눌 능력이 안 됩니다. 마음의 눈높이를 낮추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 유영진 : 선생님께 제가 먼저 질문을 드릴게요. 요즘 창작 그림책 시장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창작 그림책을 한 권 내려면 2, 3년 이상 걸리는데 팔리는 건 둘째 치고 제대로 평가도 못 받지요. 검증된 책들만 팔리고 말이에요.
좋은 그림책이 나오는 건 창작자나 편집자의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이론적인 부분들, 담론을 형성하고 그 담론에 따라 그림책을 끌고 가는 힘도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걸 끌어갈 이론가조차 많지는 않죠. 그래서 선생님처럼 현장에서 아이들과 직접 만나고,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것을 토대로 평가하고, 어떤 것이 독자의 반응을 가져오고 마음을 휘어잡는가 이런 작업이 아주 소중하다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에 나온『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최은희 지음, 우리교육, 2006)를 보니, 정작 선생님 작업은 창작 그림책보다 이른바 ‘명작 그림책’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이 점에 대해 이야기 들었으면 합니다.
● 최은희 : 제가 그 책을 쓰게 된 것은 월간 <우리 교육>에 연재를 하면서예요.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존 버닝햄 글 ․ 그림, 박상희 옮김, 비룡소, 1999)같은 작품은 어린이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이미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것도 모르는 분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제가 선생님들 강의를 가서 “이 책 보셨지요?” 하면 70명 중에 대여섯 명밖에 안 본 거예요. 저는 월간 <우리교육>을 읽는 사람 가운데 이러한 분들에게 창작 그림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꼭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한 거예요. 또 한 달은 외국 그림책, 한 달은 우리 그림책 이렇게 계획해서 맞추다가 나중에 단행본으로 엮어지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비중이 외국 그림책, 명작 중심으로 된 거예요.
저 역시 우리 그림책들을 많이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그림책들은 아직 싹도 제대로 못 틔운 형태고, 그걸 극복하려면 아이들하고 그림책을 가지고 많이 놀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반응을 돌려주는 것이 현장에서 어린이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은 유치부, 그러니까 여섯 살, 일곱 살까지만 보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집류의 책들을 많이 사요. 제 책에 언급된 그림책을 보고, 이건 낡은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 할 수도 있만 사실은 보지 않은 것들도 많고요. 그런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들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이미 그림책을 공부한 사람들이 볼 때는 낡은 작품들이구나 생각했을 듯해요. 제가 우리 그림책 수준을 낮춰 본다거나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고 보는 건 아니에요.
● 임정자 : 『끝지』(이형진 글 ․ 그림, 느림보, 2003)를 『여우누이』(이성실 글, 박완숙 그림, 보림, 1997)와 같은 연령층에게 읽히고 비교한다면 두 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나 즐거움이 반감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끝지』는 고학년 이상인 독자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재창작할 때, 반드시 기존 옛이야기 서술방식과 틀을 따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재창작은 나름의 방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끝지』같은 경우는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여우누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되었고, 그 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말씀처럼 끝지와 오빠의 갈등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점 등 문제점은 있지만,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우누이』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어간 것은 그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라고 보거든요.
비록 옛이야기라해도 접근 방법이나 제기하는 문제가 소설적이라고 한다면,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이’가 구체적으로 2학년이라든지 3학년인지, 그리고 그 연령에 적합한 것을 골랐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어요.
● 최은희 : 올해 저는 2학년을 맡았거든요. 작년에는 1학년이었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아이들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끝지』에서 패러디해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솔직히 어른인 제가 읽으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분명히 패러디라는 걸 알고 있고, 그림이 가진 서사성이 있을지 몰라도 명료하지 않고 뭣 때문에 이런 질문들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아이들은 2학년이니까 더 그럴 수 있었겠지요.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개입하는 것이 어른을 상정하고 쓴 것인지 패러디를 이해할 수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것인지……. ‘꼬랑지 오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과연 6학년이나 중학생이라는 아이들에 맞는 언어인가 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고 봐요.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 가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어린이문학 작품이 1차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외면 받는다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또 옛이야기의 서사 구조를 지켜나가지 않았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글과 그림의 관계도 굉장히 모호했거든요.
제가 아이들에 대한 개념 정의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은 글을 쓰면서 놓친 커다란 실수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대부분 그림책의 연령이 저학년에 딱 맞고, 이런 건 도식적이라고 봐요. 『지각대장 존』은 6학년이나 1학년이나 어떤 어린이들에게 주어도 굉장히 재밌어 하거든요. 적당한 연령이 어딘가 하는 건 현장에 있으면 경계가 모호하고 부질없어요. 높은 연령의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작품들은 분명히 있어요. 그렇지만 경계를 분명히 그어놓고 만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부질없다고 느껴요.
창작자들에겐 독자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지나치게 그 틀에 매어서 작품이 풍요롭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동화든 그림책이든. 그걸 느슨하게 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요즘 ‘초등학교 1, 2학년이 읽을 수 있는 동화’, ‘초등학교 3, 4학년이 읽을 수 있는 동화’, ‘초등학교 5, 6학년이 읽을 수 있는 동화’ 이렇게 해 놓잖아요? 그러면 저는 그것부터 가슴이 갑갑해져요. 왜냐 하면, 이미 작가나 출판사나 서로 요구에 의해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건 세계들을 축소시키는 작업이라고 봐요. 애들은 절대 그러지 않아요. 물론 그 기준이 틀이나 뼈대는 이룰 수 있지만, 그걸로 작품을 써 내고 보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해요.
● 진현정 : 선생님 말씀은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그 책이 좋은 책이다 아니다 판단하는 말로 들리는데,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좋은 책이라 판단하고 고르는 게 괜찮을까. 어릴수록 자극적이고 흥미 위주의 책들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또 제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내가 재미있어 해서 읽어주었을 때 그렇지 않을 때 반응이 괜찮은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 최은희 : 제가 전제 조건을 안 깔아서 문제가 되는 것 같군요. 제가 책을 먼저 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지요. 그런데 그 판단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많거든요. 게다가 어른의 눈으로 책을 보고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전제 조건이 있지요. 자극적이고 이런 책은 제가 안 고르겠지요. 그런데 내가 나름대로 괜찮은 책이라고 판단해서 가져갔는데 아이들 반응이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 진현정 : 책을 읽어줄 때 명작 그림책과 우리 그림책을 번갈아 읽어주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의문이 들거든요. 선생님이 쓰신 책에 우리 그림책이 세 권밖에 없더라고요. 이태수 씨 작품 같은 경우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책이 나왔고 그 이후에도 나왔잖아요? 그런 책을 충분히 아이들에게 읽혀주고 난 다음에 외국 그림책을 읽어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유관순을 먼저 접하고 잔다크르를 접할 때하고, 잔다르크를 접한 다음에 유관순을 접하는 건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 최은희 : 민족적 정서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민족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잔다르크를 먼저 읽건 유관순을 먼저 읽건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관순이나 잔다르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또 그걸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것을 많이 안다고 해서 민족적 정서를 갖게 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 작품들만이 민족적인 정서를 갖고 있는가 하는 건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것을 많이 읽히는 건 친밀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죠. 그렇지만 문학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내 삶을 만들어 나가고, 내 삶을 비추어보기도 하고, 낯선 세계로 체험을 떠나기도 하고, 자기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문학 작품이 갖는 장점이잖아요? 그렇다면 굳이 경계를 지어서 우리 작품을 보아야 한다고 하고 거기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저는 의문이 들어요.
● 진현정 : 그림책 같은 경우는 글을 읽기 전에 그림부터 쓰윽 보잖아요? 그 그림이 우리 정서에 맞는 그림일 경우하고, 서양식의 공주 옷을 입은 아이가 뛰어놀고 있는 경우는 다르고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 최은희 : 그림책 같은 경우는 민족적인 색채가 많이 드러나지는 않더라고요. 동물을 통해서 아이들을 나타내기도 하고요. 물론 인물들이 우리와 생김새가 많이 다르긴 하죠. 그렇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이 어린이를 만난다고 생각해요.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요.
저는 자칫 잘못하면 편협하게 민족적인 정서를 이야기하면서 국수적인 정서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 그림책 - 전 9권』(이태수 등 그림, 보리편집부 엮음, 보리, 1996)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저는『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사계절, 1993)를 제 아이에게 300번도 더 읽어 줬거든요. 그런데 그것 역시 아이에게 는 또 다른 기쁨으로 오더라고요. 어떤 것을 먼저 읽힐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내가 퐁당 빠져서 볼 수 있도록 아이들의 세계와 마음이 잘 담겨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의무적으로 우리 것을 읽어줘야 하는 건 어른의 입장이죠. 덜 성숙되고 아이들이 덜 공감할 수 있는 걸 우리 것이기 때문에 줘야 한다고 하는 건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식적으로 접근해 가는 방식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 진현정 :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반응을 선생님이 세세하게 관찰한 걸 소개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읽어준 것하고 자기가 직접 읽었을 때의 반응은 또 다를 것 같아요. 선생님이나 엄마가 읽어줄 때는 읽어주는 사람의 감정이 섞이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읽었을 때는 또 다를 것 같아요.
● 최은희 : 다르죠. 그건 분명히 달라요. 아이들의 반응은 여러 사람이 있을 때 상승해요. 제가 경험해보니까 그래요. 집에서 두 아이들 데리고 책 사 가지고 읽히고 싶죠. 그런데 반응을 잘 안 보여줘요. 애들 혼자 읽는 것을 볼 때도 아이들 여럿이 보여줬던, 그 때 느꼈던 반응을 음미하는 정도예요. 혼자서 뭘 어떻게 반응을 나타내겠어요. 그래서 제가 애들하고 재밌게 논 거예요.
제가 마치 우리 책의 전도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좋은 책을 주고 싶은 사람이지 우리 책만 주고 싶은 사람은 아니에요. 단언하건데.
제가 <열린 어린이>에 두 달에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서평을 쓰는데 거기에서는 약속을 했어요. 한성옥 선생님은 외국 그림책에 대해 쓰고, 저는 우리 그림책에 대해 쓰겠습니다 했어요. 그런데 좋은 그림책을 가지고 아이들하고 만나고 싶어요. 조금 노력은 해야겠죠. 저는 우리 그림책이 나오면 웬만하면 꼬박꼬박 다 삽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이들의 반응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한다고 봐요.
● 유영진 :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건 맞는 이야기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림책 같은 경우는 사회적 보호 장치가 없거든요. 동화나 소설, 시 같은 경우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있어요.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원고에 대해 문예진흥기금을 주기도 하고, 또 분기별로 좋은 단행본을 뽑아 2,000권을 사서 도서관에 보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림책은 그런 게 거의 없어요.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조각배 타고 가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좀 어려운 요구일 수는 있지만 우리 그림책에 대한 애정을 가져 달라고 말하는 거죠.
● 최은희 : 저는 우리 창작 그림책도 굉장히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즐거운 비』(김향수 글, 서세옥 그림, 한솔교육, 2006)라는 책을 만났는데 그림책 공부나 어린이 문학 공부하는 사람들하고 여러 가지를 우려했어요. 그런데 그 우려가 어른들의 지나친 걱정이었구나 싶었어요. 우리 그림책 같은 경우도 『가로수 밑에 꽃다지가 피었어요』(이태수 글 ․ 그림, 우리교육, 2004)하고 『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이태수 글 ․ 그림, 우리교육, 2005) 같은 경우에 그 간극이 굉장히 크거든요. 저도 많이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좋은 작품을 읽어주는 것에 방점을 찍어요.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장도 그림도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고 봐요.
● 문소영 :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셨을 때 남학생하고 여학생하고 반응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자기 동일화가 잘 되는 그림책이 아이들을 매료시킨다고 했을 때, 그걸 작품으로 비교해서 알려주세요. 『안 돼, 데이빗!』(데이빗 섀논 글 그림, 지경사,1999)은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고, 『종이봉지 공주』(로버트 먼치 글, 마이클 마르첸코 그림, 김태희 옮김, 비룡소, 1998)같은 책은 여자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거든요.
● 최은희 : 『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 같은 경우에는 그 속에 사내 아이들의 모습이 더 많이 들어있더라고요. 특히 소심한 모습들이요. 그런데 『종이 봉지 공주』는 여자 아이들에게서 더 반응이 잘 나타나요. 남자 아이들은 어정쩡해요. 이쪽 편에 섰다가는 비판을 받을 것 같고, 그렇다고 종이 봉지 공주 편에도 확실하게 서지 못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남자 아이들은 이런 쪽을 확실하게 더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은 이런 쪽을 확실하게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듯해요. 대개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여자애들이 훨씬 더 많이 매료 되죠. 자기 이야기처럼 느끼고요. 시소로 치면 무게 중심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같이 읽어야 한다고 봐요.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속에서 경험해야 한다고 봐요. 동일화도 좋지만,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세상과 삶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 문소영 : 여자 아이들이 『뛰어라 메뚜기』(다시마 세이조 글 ․ 그림, 정근 옮김, 보림, 1996) 를 보면서 주인공은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남자 아이를 이해해 주는 선에서 읽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메뚜기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해리 포터』 같은 경우에도 작가가 원고를 출판사에 가져갔을 때 편집자들이 “남자가 주인공인 동화는 여자 아이들도 읽는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인 동화는 여자 아이들은 읽지만 남자 아이들은 읽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거예요. 여자 아이들은 남성 주인공이라도 자기를 맞추며 읽는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최은희 : 『긴 머리 공주』(안너마리 반 해링언 글 ․ 그림, 이명희 옮김, 마루벌, 2001)를 아이들과 함께 읽어 봤어요. 긴 머리 공주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아서 애정의 도피 행각을 하는 내용이에요. 남자애들이 그 때 “어!” 하면서 야유를 퍼부었어요. 그랬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그리라고 했더니 야반도주하는 장면을 그렸어요.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남자와 여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거예요. 야유를 하면서도 말이죠. 그 전에 곡예 쇼 하는 장면도 많았는데 그건 인상적이지 않았나 봐요. 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남자하고 여자가 자기의 모든 지위와 영광을 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떠나가는 데에 가장 많은 인상을 받고, 그게 본질적이라는 걸 찾아내더라고요.
남자애들이 약간의 성향 차이는 보였지만, 성별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르게 보지는 않았어요. 조금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차이, 그런 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저는 보지 못했어요.
● 한수아 : 장소 변경이라는 글씨만 보고 멋모르고 왔어요. 출판사 사람들이 많았으면 출판사 입장이나 서점 입장에서 이야기할 텐데, 저 혼자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요.
처음에 그림책에 아이들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앗, 드디어 들켰구나.” 했어요. 저희가 그림책을 선정할 때 아이들만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부모님을 보고 낼 때 도 있고, 아동문학비평가들을 대상으로 낸 적도 있어요. 유명한 작가의 것이니까 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책은 꼭 내야 하나 하면서도 내는 경우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그림책은 어린이가 1차 독자지만, 어른들 중에서도 그림책 마니아들은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림책으로 아이들 마음만 읽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림책에 나타내고 싶은 내용 중에는 아이들 마음만이 아니라 어른들이나 본인의 마음도 있다고 보거든요. 그림책이 꼭 아이들만의 것이어야 하나 생각해 봤어요.
『끝지』를 고학년 어린이로 분류한다면 판매가 되지 않아요. 매대마다 유아 동화를 판매하는 직원들과 고학년 동화를 파는 직원들이 서로 경쟁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내용만으로 매대에 올릴 수 있다면 고학년으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그림책 내는 사람들이 솔직해져서 어른들 혹은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 최은희 : 저는 그림책으로 아이들 마음만을 읽자고 한 건 아니에요. 1차 독자가 어린이라면, 2차 독자인 어린이 주변의 어른들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 어린이문학이잖아요? 『내 생애에 가장 슬픈 날』이라는 그림책은 딱 봐도 독자가 나와요. 출판사나 작가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 사람도 안 됐고 저 사람도 안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까지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유리 슐레비치의 『새벽』(유리 슐레비츠 글 ․ 그림, 강무환 옮김, 시공주니어, 1994 )을 그림책 권장 도서로 정하는데, 저는 그 단체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많이 통용이 된단 말예요. 『내 생애에 가장 슬픈 날』은 누가 봐도 어른이에요. 이렇게 독자가 딱 보이는 것이 있어요. 좀 정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희들도 껴서 봐도 되고, 모르면 할 수 없고. 그건 아니라는 거죠. 그걸 가장하고 왔을 때 거기에 어린이 마음이 없다는 거죠.
● 한수아 : 저희는 연령을 정확하게 적어야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서점이나 교구 자료를 낼 때도 그렇고요. 정말 솔직히 혼란스러운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제일 많이 팔릴 것 같은 나이를 적게 되거든요. 이 독자들이 읽으면 가장 좋은 듯하지만 다른 독자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 최은희 : 저는 그런 걸 꼭 명시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대상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지각대장 존』은 적어도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잖아요?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고요. 글과 그림에서 정확하게 독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봐요. 굳이 연령을 써 놓지 않아도요.
『즐거운 비』에는 비 오면 좋아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어요. 초등학생 4학년까지는 그러거든요. 고학년들은 단체로 가서 비 맞자고 하면 싫어해요. 그 때 주인공의 나이, 그런 것을 좋아하는 독자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이 그림책에는 초등학교 1, 2학년이 들어 있다는 거죠.
출판사에서 ‘2학년이 보는 동화’라고 써 놓으면 일반적으로 2학년만 그 책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출판사에서 “내가 언제 3,4학년만 읽으라고 했어? 권한다고 했지.”하고 말하는 건 잘못이라고 봐요.
● 권혁준 : ‘그림책으로 어린이 마음 읽기’를 이야기하셨지만, 아이들 마음을 잘 읽은 그림책은 무엇인가 하는 말씀을 하신 건데, 사실은 동시, 동요, 동화를 쓸 때도 제일 기본이 되는 전제가 어린이의 마음을 잘 읽었는가, 어린이의 욕구를 적실하게 잘 파악했는가 하는 것 같아요. 『학교에 간 사자』(필리파 피어스 글, 햇살과 나무꾼 옮김, 논장, 2002) 같은 걸 보면, 어쩜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 심리를 잘 알았을까 싶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린이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정말로 그런가? 반응이 좋지 않아도 가치가 있는 작품은 없는가? 의문이 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 1999) 같은 작품은 어른이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안 그렇거든요. 어린이문학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볼 때 그 의미는 또 다르거든요. 교육적 기능, 이런 것도 연구해 가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유영진 : 저도 『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는 그림책을 통해서 본 아이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늘 이야기는 그림책으로 어린이문학의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 빠져드는 책만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면, 현실의 문제들 즉 사회적 문제라든가 어린이문학 장르 자체가 봉착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작품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아이들이 좋아하는가, 아이들이 빠져드는가, 물론 이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다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상업주의와 결합할 가능성도 큰 것 같아요.
또 그림책이라는 것은 서사가 있기 때문에 문학에서 다루지만 사실 조형적인 면도 강하거든요. 화가들은 그림책을 저와 같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림책에서 어린이가 빠져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동화 역시 그런 문제가 있어요. 지금 나오는 동화 속 아이들이 실제 삶 속 인물이라기보다 작가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거죠.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든지 이렇게 교육되었으면, 양육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모습을 드러내거든요. 앞으로 그림책뿐만 아니라 동화 쪽으로도 이런 문제를 다룬 글을 쓰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시간이 많이 가서 그만 이야기를 끝내야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토론하신 여러분과 최은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최은희 : 먼 곳 같이 와 주셔서 고맙고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