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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문화의 향 원문보기 글쓴이: 평통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얌생이와 모리배 <새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9) 2011년 07월 20일 (수) 15:14:51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가을도 깊어들자 일본에서 살던 일가들이 돌아왔다. 나의 재종조부인 죽서할배, 중산할배 그리고 도동할배들이 돌아오셨다. 이들은 나에게 모두 할배들이지만 나이는 모두 당시 30대의 청년들이었다. 죽서할배와 중산할배는 일본에서 철공소의 선반기술자로 일했고, 도동할배는 치과의사로 일했다. 죽서할배는 일본에 있을 때 철공기술자였고 특히 발동기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며 노동운동가로서 노동조합 일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중산할배는 전문적인 기술은 없지만 철공소에서 일하며 그날그날 어렵게 지냈다. 도동할배는 치과의사로 일해서 돈도 좀 모았고 그 돈으로 그의 아버지인 나의 종증조부인 한목할배에게 집도 장만해 드렸고 시집온 지 몇 해 안되는 부인인 도동할매가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기에 귀국해서도 삶의 터전이 건실했다. 죽서할배도 학식도 좀 있고 기술도 있어서 당시에 조그만 정미소가 많이 생길 때라 일거리도 많이 있어서 곧 생활이 안정되었지만 중산할배는 일본에서도 어렵게 살았고 나와서도 자영할 수 있는 경제적 기술적 기반이 없었기에 살기가 막막했다.
중산할배의 식구들은 얼마동안 그의 아버지인 한목할배에게 와서 기거했지만 곧 따로 나와야 했고, 그래서 있을 곳을 찾은 것이 동문 밖에 있는 귀환동포 마을이었다. 이 할배 식구들이 사는 마을에 나는 자주 들렸다. 서너 살 되는 아재들이 남루한 옷을 입고 흙바닥인지 방바닥인지 모를 곳에서 먼지 속에서 옹기종기 어머니 치마 결에 모여 있으며 그 어려운 환경을 느끼고 있는지 쳐다보는 그 천진하고 애잔한 눈망울은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한 곳에 모여 살 길을 잃은 채 아무도 돌보지 않고 내팽개친 동포들의 가긍한 모습은 나의 어린 가슴에도 비애감이 쓰며들어 마음 옥죄이었다. 집이래야 꼬챙이 같은 것으로 사방에 세우고 거기에다 마분지나 함석쪼가리로 가린 판잣집도 못되는 움막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내다버린 기명물(그릇 부신 물)로 질척거렸고, 좀 떨어진 곳에 구덩이 파고 사방을 가마니때기로 가린 변소에서 넘쳐나는 똥물로 악취가 진동했으며 변소 가는 길목은 발 딛을 곳이 없었다. 이집 저집에서는 아이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고 가마니때기로 가린 방문 앞에는 할머니가 일본에 있을 때 입었던 왜놈 솜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퀭한 눈으로 지나가는 나를 초점 없이 쳐다본다. 왜놈 밑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이제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반갑게 돌아온 가난한 동포들에게 그 해방조국이 안겨준 가난인 것이다. 아직도 친일 역적들은 따스한 구들방에서 명주이불을 덥고 보얀 쌀밥을 먹고사는 데 말이다.
그래도 인정 많은 젊은 중산 할매는 장손인 나에게 무엇인가 못 먹여서 야단이다.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밀겨울이 불긋불긋하게 섞인 수재비를 끓여서 점심대접을 했다.
“재구야, 맛없지만 많이 먹어라.”
나는 아무 것이나 잘 먹어서 맛있게 먹었다. 중산 할매의 인정도 함께 먹었다.
거리에는 일제 때 왜놈 등쌀에 살지 못해 타국으로 가서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서러움을 받고 살았던 동포들이 해방을 맞아 조국을 찾아 들었으나 해방된 조선은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지 못했다. 처음 「건준」 때와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수 있을 때는 약간의 배급과 잠자리할 곳을 주선받기도 했지만 그들이 미군과 그들이 만든 경찰에 의해 해산되자 원호의 손길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 귀환동포들은 다가올 겨우살이를 맞아 먹을 곳도 잠자리할 곳도 없어 거리를 헤매어야 했다. 거리에는 귀환동포들이 하루하루의 삶을 위하여 지게를 지고 기차역이나 버스 정류소에서 남의 짐을 날라주고 몇 푼 안 되는 삯전을 얻기 위하여 아우성이었다. 조그만 어린이와 할머니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껌이나 과자 나부랭이를 상자에 담고 팔러 나왔다. 청년들은 거리에 나와 부랑자로 흘러들어 가는 자도 많았고 젊은 여자들은 몸을 파는 자도 많았다. 미군부대 옆에는 이런 아가씨들이 모인 사창굴이 번창했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했다. 도둑, 소매치기, 폭력 등 온갖 범죄가 들끓었다. 이들은 친일지주들이 던져주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빈속에 몇 잔의 술을 마시고선 진보적 애국자들을 테러하는 데에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만주나 중국 같은 험한 곳에서 돌아온 주먹깨나 쓰는 자들은 「혈맹회」니 「맹호단」이니 하는 스산한 이름을 붙인 정치 조직깡패를 만들어 「한민당」이나 친일지주들과 흥정해서 테러와 암살에 동원되기도 했다. 여운형 선생은 이들에게 가장 주된 표적이었고 몇 번이나 총격을 당했으며 폭행을 당했다.
귀환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은 일제 통치자들이 지은 식량창고나 무명창고, 누에창고 등이었고 왜놈들이 두고 간 신사나 일본 절 따위였는데 수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아무 칸막이도 없이 모두 한데 어울려 살고 있었다. 특히 아이들은 영양부족으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커다란 머리통에 푹 꺼진 눈망울로 쳐다보는 천진한 눈동자를 볼 때 동포의 처참한 비애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밀양의 귀환동포들은 가까운 일가들이 있는 사람들은 일갓집에 가서 아래채나 헛간에 방을 들여서 살 수 있었지만 일가가 모두 솔권해서 타국으로 간 사람들은 우선 들어갈 곳이 없었다. 「건준」이 있고 「인민위원회」가 행정을 맡아하던 때는 창고나 관공서의 부속건물을 비우고 우선 한동을 면하도록 했지만 군정청이 터 잡고부터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군정청이 들어서고부터 모국귀환이 더욱 많아졌는데 아무도 이를 주선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라 이들은 읍내 산자락 빈터에 짚을 얻어다가 주어온 나무막대기로 이엉을 걸쳐 토막을 지었다. 그래서 곳곳에 토막집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밀양에서 제일 큰 그런 마을이 동문고개너머에 생겼다. 이 마을은 나중에 사과상자의 판자나 마분지 상자를 뜯어 벽으로 하고 지붕은 함석쪼가리와 판때기로 덮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판잣집 동네로 되었다. 그리고 겨우 60년대 들어서 지방예산으로 벽을 치고 기와를 이었지만 이것 또한 어설픈 연립주택으로 여러 세대가 칸칸이 살고 있었다.
앞서 말한 할아버지의 사촌인 중산 할아버지도 일본에서 철공소에서 일하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했는데 있을 집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귀환동포 수용소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이러한 동문 밖의 귀환동포 마을에서 터 잡고 살았던 것이다. 나중에 그곳 연립주택을 한 칸 얻어서 살았는데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8.15해방이 해방이 아니라 가난의 구렁텅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종숙인 예림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식구를 대리고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의 아들 3형제 중에서 막내가 우리 또래가 되는 아재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초등학교 6학년이어서 나와 같은 학년이지만 조선말은 하나도 모른다. 아마 일본에서 조선사람 행세를 하면 구박을 받기 때문에 식구들 모두가 집에서도 일본말을 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도 조선말을 못하기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2년을 늦추어 4학년에 들어갔다. 일본에 있을 때는 조선 사람이 잘 살기야 했을까만 그런대로 옛날 우리 동네였던 통바우 동네에 살던 예림 할아버지의 조카집이 있어서 그 이웃에 초가집을 하나 싸서 살았다.
이 예림 할아버지의 장남인 큰아재가 귀국할 때 어렵게 가지고 온 삼륜차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것으로 영업을 하려면 차번호도 새로 달아야 하고 영업감찰도 내어야 했다.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당시의 공무원들이라는 게 거의가 사기꾼이나 다름없는지라 돈만 숫하게 뜯기고 빚이 늘어 마침내 그 빚으로 삼륜차를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귀환동포들은 갑자기 그들이 살던 곳과 문화가 다르고 이때껏 살던 곳과 말도 달라 의사가 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러 귀환동포들 중에는 그 험한 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푼푼이 모은 재산을 팔아 나중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으로 해서 한 재산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발랑 까진 본토박이 사기꾼은 그런 돈의 냄새를 용하게 맡고 접근해서 어수룩한 이들의 돈을 발겨 빼앗았다.
우리 조선 사회는 왜놈시절에는 겨레의 원수가 바로 곁에서 살았고 그들의 행패를 직접으로 당해서 남의 고난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인정도 생겨났지만, 8.15해방 후 이들 귀환동포들은 해방의 기쁨으로 조국에 돌아와서 얻은 것은 가난과 멸시뿐이었다. 그래서 도로 그 지긋지긋한 원수 놈의 나라로 밀항선을 타고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특히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군정경찰의 탄압을 피해,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에 밀항선을 타고 도로 들어갔다.
얌생이와 모리배
한편 미군부대에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그 짧은 혀로 몇 마디 흉내를 내는 영어로 통역관이랍시고 미군 지프차 뒤 칸에 올라타고 으스대는 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거기에다 운전하는 미군 옆자리에 양공주(이들도 대부분이 귀환동포였다.)와 더불어 그것은 바로 미국 점령군의 전형적 그림으로 됨 직하다.
이들 통역관이나 양공주들을 통해 수많은 미군의 전쟁 잉여물자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의 경제유통은 우리 조선 경제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일제의 압제에서도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전쟁 중 그 자취조차 없어졌던 수공업적인 제과업이나 생활필수품의 제조업이 돋아나올 터를 완전히 짓밟아버리고 만 셈이다.
미군이 주둔해 있는 곳의 창고에는 경비병을 따돌리고 창고를 터는 도둑들이 성행했다. 미국은 과연 물풍한 나라였다. 부산 부두에 있는 미군 군수품의 하역장은 거의 모든 창고를 다 쓰고도 모자라 그냥 근처 밭둑에 쌓아놓고 말뚝을 박아 철조망으로 둘러놓고 있다. 영악한 조선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엇에 쓸 것인지도 잘 몰랐으나 통역관이나 양공주들을 통해 미제 물품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자 그 수요가 점점 늘었고, 그런 통로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군의 하층 병사들은 개인적으로는 소박하고 영악하지 않다. 조선 사람들 가운데 영악한 놈들은 양공주를 데려가거나 통역관이 경비병과 한 구석에서 수작을 걸거나 해서 눈을 딴 데로 돌리게 하거나 해서 야적된 물품을 훔쳐내었다. 이런 행위를 당시에 ‘얌생이 몬다.’는 말로 유행되었다.
이 ‘얌생이 몬다.’는 말의 유래는 참말인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산 부둣가에는 일제 때부터 철조망이 쳐져있었는데 그 밖은 널따란 초원이었다. 그 근방에 사는 농민들은 이 초원에 염소를 몰고 와 풀을 먹이고 있었다. 해방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부둣가에는 엄청난 양의 미군 물품이 야적되기 시작했다.
하루는 언제나처럼 어떤 농민이 염소를 몰고 야적장 곁 철조망 밖에 가서 염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는데 철조망이 허술해서 제법 큰 구멍이 나있었고 마침 경비병이 저들끼리 장난을 하느라고 이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농민은 쿵덕거리는 가슴을 안고 철조망 구멍으로 들어가 야적해 놓은 곳에 숨어들었다. 덮어놓은 커버를 들치고 닥치는 대로 한 아름 안고 들어간 구멍으로 도로 나왔다. 그 다음 그 물건을 풀밭에 숨겨놓고 염소를 집에 몰고 온 다음 해가 진 후 그 물건을 찾아갔다. 그 물건을 시장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얻었다. 그 다음날도 이렇게 해서 수입을 올렸다.
아침마다 일찌감치 염소를 몰고 나가 재미를 보던 사실을 가까운 사람이 알고 이른 아침에 이 농민을 만난 그 사람은,
“이 사람, 오늘도 얌생이 모나?”
라고 이침 인사를 했다. 얌생이는 염소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이 말이 한입 두입 건너 남의 것을 슬쩍 훔치는 것을 ‘얌생이 몬다.’는 말로 유행이 되었다. 이 말은 요즘도 하는 말인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연유나 아는지.
아무튼 이리저리 미국 놈이 들어와서 하는 일이란 이처럼 순박한 조선 농민을 ‘얌생이나 모는’ 영악한 사람 따위로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미군부대 곁에 있는 동네는 밤이 되면 불안했다. 병사들이 총을 들고 나와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여자를 내어놓으라고 행패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이놈들의 눈에는 어린이도 할머니도 보이질 않았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해대었다. 여자가 보이질 않으면 남자에게도 덤벼들었다. 가히 짐승이었다. 미군은 들어오자 말자 우리 민족을 이처럼 모욕했고 이 버릇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바로 제국주의 군대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가을은, 그러니까 해방되던 해의 가을은 보기에 드문 풍년이었다. 게다가 농민은 살인적인 소작료를 물지 않고 3할만 지주에게 바치고 나머지 7할을 옹근 자기 것으로 손에 넣을 수 있어서 해방의 덕을 일단 톡톡히 본 셈이다. 농민은 1년간의 양식을 챙겨두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래야 도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겨울부터 시장에는 쌀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는 치올라갔다. 물가는 왜놈들이 망할 무렵 조선은행권 지폐를 엄청나게 많이 찍어 뿌려놓았기 때문에 물가가 감당할 수 없도록 오르기만 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쌀이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제 조선 쌀을 일본에 싣고 가지도 않는 데도 말이다. 이게 웬 일인가.
들리는 소문으로 조선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조선 쌀을 우리가 먹기에 모자라도록 빼내고 있는가. 모리배들이라고 한다. 모리배들이 일본으로 비싼 값을 받고 쌀을 실어내고 값비싼 공산품을 들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 남포동 항구나 마산, 여수 그밖에 조그만 어항에서 통통배에 싣고 일본으로 쌀을 내다 팔고 조선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기계부속품이나 견직물 등 사치성 물품을 들여와서 비싼 값을 받고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 나오는 쌀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일본으로 실어낸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쟁 중 미군의 폭격과 잠수함 공격으로 오랫동안 조선 쌀을 실어내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했다고 하는데 이제 통통배로 실어내지만 조선 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일본 점령군 사령부도 격심한 식량난이 이렇게라도 좀 풀리게 되었으니 불법적인 밀수행위라도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에는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자 쌀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그 통에 죽어나는 사람은 조선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귀환동포들에게 그 고통의 주름이 모이게 되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먹을 것도 없고 불기 있는 방도 없고 얼어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도 「인민위원회」가 읍사무소에서 쫓겨나 그 동안 「건준」에서 「인민위원회」에서 식량배급을 받았던 것이 없게 되자 겨우살이가 막막해졌다. 그해 겨울은 유달리 더 추웠다. 관련기사 · 친일파는 다시 돌아오고…… · 석달 동안의 해방 · 새 나라를 만들자, 그러나 … · 고향 동네의 해방 잔치 · 미군은 해방군? 점령군? · 테러 · 조손간의 토론 · 국부? 이승만의 등장 안재구의 다른기사 보기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