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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般若波羅蜜經
제5강 정신희유분 제6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生實信不잇가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着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以是義故로 如來常說하사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제6,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거나, 글귀를 보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한 뒤, 최후의 오백 년 경에도 계(戒)를 받아 지니고 복(福)을 닦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이러한 글귀에 신심을 내고, 이러한 이치로써 진실을 삼으리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다.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글귀를 보고 한 생각이나마 청정(淸淨)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다 보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더 이상 나라는 상(相)이나, 남이라는 상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수명에 대한 상이 없느니라. 그리고 옳은 법(法)이라는 상도 없고, 그른 법[非法]이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만약 옳은 법이라는 상을 취하여도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집착하게 되며, 만약 그른 법이라는 상을 취하여도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반드시 옳은 법을 취하지도 말고, 반드시 그른 법을 취하지도 말라. 이러한 이치에 근거한 까닭에 여래는 늘 말하기를, ‘그대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처럼 알라.’ 라고 하였노라. 옳은 법(法)도 오히려 반드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른 법[非法]이겠는가?”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정신희유 (正信希有)란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아주 귀하다’는 뜻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불교를 바르게 믿는 사람은 참 귀합니다. 희유합니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生實信不잇가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파유중생이 득문여시언설장구하고
생실신부잇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자뭇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언설이나 장구를 얻어들었다면 실다운 믿음을 내겠습니까”
‘파 (頗)’자는 ‘자뭇’, ‘부족하나마’ 이런 뜻이고, ‘득문(得聞)’은 ‘얻어듣는다’는 뜻입니다. ‘장구(章句)’는 ‘글귀’인데 ‘이와 같은 언설장구’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견중생(相見衆生)이라고 해서 형상을 봐야 마음이 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형상을 허망하게 생각하고 형상에서 형상 아닌 것을 봐야 곧 여래를 본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누가 진정 부처님에 대한 마음을 내겠느냐고 수보리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인 수준과 상에 사로잡혀 있는 말세 사람들의 정신상태까지 수보리가 잘 감지하고 질문한 내용이지요.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有持戒修福者가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불고 수보리하사대 막작시설하라.
여래멸후후오백세에 유지계수복자가 어차장구에
능생신심하야 이차위실하리니
佛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답하십니다. “자네는 형상을 떠난 부처님의 진실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가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여래 멸후 후 500세라는 것은 여래가 열반한 뒤 다섯 개의 오백년 중에 제일 마지막인 제5오백년을 말합니다. 여래 멸후 2500년경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로 봐도 좋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로서 ‘계를 가지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서 이 구절에 능히 신심을 내어서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여래는 형상이 아니야. 32상 80종호도 아니야. 또 80세를 살다간 역사적인 사실도 아니야.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난 것에 여래의 실체가 있어. 그것은 가르침이요, 진리요, 그 진리를 만 천하에 선포하신 자비와 원력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여래의 실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2천 5백년이 아니라 2만 5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그사람의 타고난 성품에 달렸고, 수행하기에 달렸고 공부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형상 아닌 것에서 여래를 보는 차원의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오백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멸후 제1 오백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 해탈이 성할 때입니다. 제2오백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 선정이 성한 때이고, 제3오백년은 다문견고(多聞堅固) 다문이 성할 때라고 표현합니다. 제4오백년은 탑사견고(塔寺堅固) 사원과 탑을 건립하는 사람이 많은 때입니다. 제5오백년은 투쟁견고(鬪諍堅固)라고 해서 자기의 설을 고집하여 서로 싸우는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꼭 시간상으로 그렇게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경전에서 굳이 500세를 잘라서 이야기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여년 후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 운동은 불교역사에 있어서 마치 부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온 것과 같은 커다란 사건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00년 뒤에 일어난 불교 역사의 큰 변화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에는 5백년이라고 하는 말, 5라고 하는 숫자를 특히 많이 씁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 삶의 과정, 또는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우수한 경지가 해탈이라면 그 다음은 선정이고 다음으로는 다문, 그다음은 탑사 또 다음은 투쟁입니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갈등과 투쟁과 시시비비에 온 정력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쯤 부처님 도량에 왔다면 보고 듣고 하는 그 사실만으로도 뭔가 마음이 달라집니다. 절에 모셔진 부처님이나, 탑이나 전각이나 아주 수려한 산세 등등 이런 것을 보고 상당히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시비와 투쟁으로써 일관하다가 절에 와서 그 환경만 보고도 ‘신선 같이’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문득 ‘이런 좋은 환경과 이런 좋은 시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존재할까’ 좀 알아보자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책도 구해보고 법문을 들어보기도 하고 스님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불교가 어떤 것이기에 저런 근사한 시설이 천 년, 이천 년, 삼천 년의 세월에 걸쳐서 그렇게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빛날까’ 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많이 듣는다는 다문(多聞)입니다. 불교를 알고 싶어하는 것, 법문을 듣고 경을 공부하고 강의를 듣고 하는 이 사실을 다문이라고 합니다. 다문을 많이 하고, 이론도 많이 알고, 교리도 많이 알고 경전내용도 알게되면 이것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지.’ 해서 좌선을 한다든지 사유를 한다든지 명상을 합니다. 그동안 이론적으로 공부한 것, 소위 다문한 것을 마음속에 아로 새기고 나의 인격으로 만드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근래에서는 주말참선이나 일요참선 시민선방에 참여해서 그동안 보고 듣고 많이 배운 것을 깊이 사유하고 나의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선정입니다. 선정이 깊어지면 결국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아주 대자유인이 되는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처음 500년은 해탈이 무성한 시대다’ ‘그 다음 500년은 선정이 성한 때다’‘다음 500년은 다문이 성한 때이고 그다음 500년에는 절 짓고 탑을 쌓고 하는 불사가 성한 때이다’ ‘다음 500년엔 투쟁을 많이 한다’고 하였지만 이것을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볼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역으로 보아도 똑같아요.
우리도 세속에 살면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투쟁 안 하고는 못살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마음으로나 겉으로나 늘 투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세상과 다른 세상인 도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알게되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재하는가 알아보게 됩니다.
‘투쟁만 일삼는 그런 시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주 차원높은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심을 내어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세속적인 삶에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투쟁 속에 살다가도 어느 순간 한마디 탁 듣는 데서 귀가 열리고 눈이 문뜩 뜨여지고, ‘아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시비비에 취생몽사하며 산다고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취생몽사하며 살다가도 어느 한 마디에 홀연히 발심을 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當知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당지시인은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에
이종선근이라.
이어무량천만불소에 종제선근하야
문시장구하고 내지일념생정신자이니라.
그래서 여기 보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일불이불삼사오불에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무량천만억 부처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어서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형상을 초월한 여래의 경지, 역사적인 사실을 초월한 궁극적 여래의 경지에 한 순간만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훌륭한 신심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단 한순간 만이라고 일념만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수보리가 의심하고 염려하는 것을 불식시켜버립니다.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실지실견 시제중생이
득여시무량복덕이니라.
하이고오 시제중생이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하며
무법상하며 역무비법상이니라
須菩提야 如來가 悉知悉見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 얻는다고 하는 사실을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량없는 복덕이란 부처님을 역사적인 사실을 떠나서,32상 80종호를 떠나서, 궁극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궁극적 내면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궁극적 차원은 곧 우리들의 궁극적 차원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한 덩어리가 돌아온다든지 큰 돈보따리가 떨어지는 차원이 아닌 우리들 자신 속에 이미 갖추고 있는 무량복덕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지요.부처님에게 눈을 뜨는 것은 자신의 눈을 뜨는 것이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복덕입니다.
何以故오是諸衆生이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이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더 이상 없습니다. 아상은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내세워놓고 나와 남을 분별하거든요. 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는 다르다고 하는 차별의식입니다. 중생상은 열등의식이지요. 항상 부처님이나 성인 그리고 훌륭한 사람을 딱 이렇게 염두에 둬 놓고 ‘나는 중생이다 못난 중생이다’ 하는 열등의식입니다.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진 존재고 무한한 신통과 무한한 복덕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왜 중생입니까. 더 이상 그런 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자상은 한계의식입니다. 수명에 대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십대다 이십대다 삼십대다 사십대다 자기 나이에 비추어서 항상 한계를 짓고 삽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젊은 사람이 어떻다’ ‘어린 사람이 어떻다’라고 하는 관념이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것을 한계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나이 많은 것을 인정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나이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면 더 이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나이에 대한 관념, 한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궁극적 차원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궁극적 차원에 눈을 뜬다는 것은 곧 나의 내면에 눈을 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나의 내면은 저 태양처럼 밝은데 무슨 소소한 나무 그림자나 무슨 산 그림자나 이런 것에 마음 쓸 까닭이 없습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은 그림자인 것입니다.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그 다음에 또 법상이라고 하는 것과 비법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다’ ‘이것은 훌륭한 가르침이다’ 라고 하는 법상이라는 관념이 또 있는데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고 하는 사상(四相)보다는 차원이 높은 상이 되겠지만 그것마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법상은 ‘이것은 불법답지 못한 것이다.’ ‘진리답지 못한 것이다.’‘다른 종교이니까 다른 가르침이니까.’ 하는 차별에 대한 상입니다. 그러한 비법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궁극적 차원에 눈을 뜨면 이런 것은 아주 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예요. 나를 내세우고 남이라고 차별하고 중생이라고 하는 못난 생각을 갖고 또 나이를 얼마 먹었느니 하는 한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나 있는 것이지, 차원을 달리하면 이런 것이 전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구름이 얕게 떠있으면 비가 무수히 쏟아지지요. 그것을 넘어서 하늘을 뚫고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태양만 찬란하게 비춘다는 사실입니다.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着我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하이고오 시제중생이 약심취상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
하이고오 약취법상이라도 즉차아인중생수자며
약취비법상이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니라
何以故오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則爲着我人衆生壽者니
‘왜 그런고 하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따라오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바로 집착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관념이라도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 같으면 이 네 가지 상은 저절로 따라와 버려요. 법상 비법상 하는 것도 전부 따라옵니다.
이것을 우리 일상생활에 연결시켜서 생각해본다면 그냥 알게 됩니다. 한 가지에 집착하는 사람은 만 가지에 다 집착하게 되어 있어요.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왜냐하면 약취법상이라도 곧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 집착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집착할만하지요.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불교의 진리 불교의 가르침을 애지중지합니다.
물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불교에 심취해야 됩니다. 하지만은 그것이 어떤 관념으로 남아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병이 되면 그 병은 다른 병까지 다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아상인상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하는 병까지 다 불러오게 되고 결국은 어디서 보시를 했다 어떤 좋은 일을 했다 하면 그 '보시했다' '좋은 일 했다' '봉사했다'하는 것에 대한 관념상의 병까지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아 불법이 좋다’ ‘부처님 좋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뛰어나다’고 알게 되더라도 금강경의 안목에서 보면 이것도 집착이지요. 취하는 것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버리는 것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으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또 만약에 법 아닌 것을 취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아인중생수자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법아닌 것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以是義故로 如來常說하사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시고로 불응취법이며 불응취비법이니라
이시의고로 여래상설하사대
여등비구야 지아설법을
여벌유자라하느니 법상응사어든 하황비법이리오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그래서 응당히 법도 취하지 말것이며 비법도 취하지 말 것이다.
以是義故로 如來常說하사대
이러한 의미 때문에 여래는 늘 이야기 한다 말이예요.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입니까.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위해서 태자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렸지요. 금지옥엽 귀하신 몸이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을 했잖습니까. 얼마나 투자를 많이 했습니까.
그렇게 투자를 하시고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의해서 만중생에게 설해진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나의 설법 알기를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아라.’ 목숨을 주고도 바꾸지 아니할 소중한 설법이라 하더라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라고 말했습니다.
뗏목은 강을 건널 때 필요한 하나의 방편이요 도구입니다. 뗏목을 탔으면 강을 건너야 하고, 강을 건넜으면 가차없이 뗏목을 버리고 앞길을 가야 합니다. 강을 건너 준 소중한 뗏목이라고 해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겠어요 아니면 고맙다고 그 뗏목을 붙들고 강가에 하루 종일 있겠어요. 어리석은 사람이나 그럴 수 있는 것이지요. 뗏목은 강을 건너주는 데 필요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강을 건너게 해 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강을 건넜으면 돌아보지 말고 가차없이 떠나라는 것이 뗏목의 비유이며 교훈입니다.
‘나는 설법 한마디를 위해서 그토록 헌신했고 투자를 했다. 고행을 했다. 하지만 그 설법을 알기를 뗏목과 같이 알아야 된다.’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속이 시원하죠.
부처님은 당신 인생을 다 바쳐서 나온 법문인데도 ‘내 설법은 가차없이 잊어버려라. 버리고 앞으로 나가야 된다.’라고 하십니다. 이런 가르침은 그 어느 철학 어느 종교에도 없습니다. 이런 말 한마디 만난 것만 해도 우리 불자들은 ‘야 참 멋진 분이다. 부처님은 참 멋쟁이야’ 이렇게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진리의 가르침도 오히려 응당히 버려야 하거늘 진리의 가르침이 아닌 시시한 소리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금강경 제 6분에 있는 정신희유분은 ‘바른 믿음은 제대로 갖기가 참 희유한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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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
無法相하며 亦無非法相이니라 ..._()()()_
바른 믿음은 제대로 갖기가 참 희유한 것이다..._()()()_
‘나는 설법 한마디를 위해서 그토록 헌신했고 투자를 했다. 고행을 했다. 하지만 그 설법을 알기를 뗏목과 같이 알아야 된다.’
나무석가모니불 _()_
自他二利의 삶........10億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읍니다 고맙습니다
뗏목가 같이 하라!...눈물 납니다..()()()
부처님의 궁극적 차원에 눈을 뜬다는 것은 곧 나의 내면에 눈을 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_()()()_
,,,_()()()_
고맙습니다_()_
건강하세요, 스님! _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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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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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도 덕분에 사경하고 독송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료 너무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 _()_
일체중생 이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