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관련된것을 찾다보니 섯알오름희생자추모비가 있는곳이 있었다.
이곳또한 찾아가는것이 그리 쉬운것은 아니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직후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실시된 예비검속 과정에서 344명을 구금하고 그 중 252명을 군에 송치했으며, 1950년 7월16일부터 7월20일, 그 해 8월20일 두차례에 걸쳐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 및 암매장한 사건이다.
알뜨르비행장
제주사람들은 대정읍 알뜨르 평야에 건설했던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을 이 지역 이름을 따 이렇게 부른다. 해안가에 맞닿은 알뜨르비행장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 처음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1차로 이뤄졌다.
일본군은 1937년에 비행장 확장계획을 세워 기존 20만평에서 2차로 1945년까지 80만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의 해군항공대 2500여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다. 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주민들이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알뜨르 평야에는 당시 건설된 20여개의 격납고가 해안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5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으나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져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부근에는 대공포 진지와 정비고, 막사로 사용했던 건물들의 흔적도 있다. 또 비행장 동북쪽 탄약고터는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그 안에는 2개의 탄약고와 2층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있다. 몇년전 당시 일본군 장교로 알뜨르비행장에 근무했던 일본인들이 이곳을 방문한 뒤 이 지역의 한 학교에 성금을 전달하려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송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섯알오름. 일제강점기에는 탄약고가 있던 자리였다.
제주4·3이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던 50년 8월20일. 이곳 섯알오름에 양민학살 광풍이 몰아쳤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7∼8월에 걸쳐 보도연맹원 등을 대량으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이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위 예비검속에 의한 학살사건이다. 제주지역 역시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대정, 한림, 안덕면 예비검속자 344명 가운데 뚜렷한 법적절차도 없이 250여명이나 희생됐다.
섯알오름의 경우 한림항 어업창고와 모슬포 절간창고에 있던 수감됐던 190여명의 사람들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몇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50년 음력 7월7일 새벽녘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조일손지묘에도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지금도 당시 철근조각들과 휘어진 콘크리트 등을 확인 할 수 있다.
백조일손유족회가 세운 양민학살터 안내판이 서 있다. 유족회는 학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촘촘하게 적어 놓고 있어 처음 찾는 이들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90년대 대정나라사랑청년회에서도 작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유족회 안내판 인근에는 유족회가 관리하고 있는 유물보관소가 있다.
보관소에 들어서면 뼈 조각을 비롯해 탄창, 의류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섯알오름 학살터 현장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그러나 당시 제주,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의 경우 그 전모가 다 드러나지는 않았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조차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섯알오름 학살터를 제주지역 주요 4·3유적지로 정비방안을 마련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올해 제주도와 4·3연구소 등은 도내 18곳의 4·3 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기로 했으며 섯알오름 학살터도 그 대상에 포함돼 있다.
백조일손지묘
"백 할아버징 한 자손" 누군지 알 수 없어 한곳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는 뜻인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섯알오름 학살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이다.
계엄당국의 은폐 등으로 인해 유족들은 사망이후 6년여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곳으로 이장해 올 수 있었다. 이미 시신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유골들을 모아 한 사람씩 수습했다고 한다. 132기의 봉분이 있다.
주로 모슬포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등이 학살됐다.
1959년에 제작된 깨진 비석과 안내문은 살아남은 자들 역시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강제철거 과정을 거쳤던 이 비석은 99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아픔을 간직한 곳인 만큼 제주역사기행을 할 때 빠지는 않는 곳이 됐다. 묘역도 정비가 이뤄져 깔끔하다 싶을 정도로 정돈된 느낌이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소주 한병이 쓸쓸하다.
나도 소주라도 한병 꽃이라도 한다발 들고 갔었어야 했는데...
국가차원의 관리가 아니라 4.3사건 희생자 관련분들이 관리하다보니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으리라 본다.
어디 성금이라도 모금하는지 찾아봐야 겠다.
그 아픔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대략 4.3평화기념관과 북천 너븐숭이4.3위령성지를 제외한 나머지 곳들은 이정표 표시도 열악하고 아직 제주에서 4.3관련의 진실을 찾기에는 멀은것 같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백조일손지묘의 묘비의 파편
입구 게시판 추모의 글을 써서 붙인곳에 찾아온이의 글들을 읽어 보았다.
어느순간 그 사람이 집권하고 있을 당시의 메모는 없었다.
북촌 너븐숭이 4.3위령 성지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 문학적 양심으로 고향의 아픈 역사에 대한 팬데를 들이댄 작가가 현기영이었다.
그는 북촌리의 4.3을 다룬 작품 "순이삼촌"을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하면서 침묵의 금기를 깨고 논의의 한복판으로 끌어내었다. 그러나 작가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썻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돌에는 순이삼촌의 문장이 써져 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샀다.
순이삼촌해서 이름이 순이인 삼촌(남자)인줄 알았는데, 제주에서는 가까운 친척을 성별불문하고 삼촌이라고 부른다 한다.
즉 여기서 순이삼촌은 나이먹은 여자이다.
북촌리에서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성 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발사된 총탄은 어김없이 산목숨에 꽂혀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
시체 산 피 바다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히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젖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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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아픈곳이다.
제주 그 자체가 아픔이다.
조금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웃고 떠들고 마시는곳이 제주가 아님을 알아 줬으면 하는 작은바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