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8세기의 문학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온 사실이나 용어가 한글로 되었을뿐 아니라 작품의 형식도 소설이나 사설시조와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작가도 양반으로부터 서리와 같은 하급신분 출신으로 변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요컨대 이들 문학작품이 양반이 아닌 새로운 독자층을 위한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숙종 15년(1689)경에 양반 출신인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九雲夢)』 같은 것은 김만중 자신이 한글로 쓴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의 바탕에 흐르는 기조는 부귀영화에 도취된 양반문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꾼과 연결된 대부분의 한글로 된 소설은 새로운 성격의 문학이었다.
한국소설은 그 내용이 가지가지였다. 광해군 때의 허균(許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서얼차대를 비롯하여 빈부차별 등 사회적 모순을 통렬히 비판한 사회소설이었다. 『장화홍련전』, 『창선감의록(昌善感義錄)』, 『심청전』, 『흥부전』, 등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또 『임진록(壬辰錄)』이나 『임경업전』 같은 군담소설(軍談小說)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널리 읽혀진 것은 『옥루몽(玉樓夢)』, 『숙향전(淑香傳)』, 『춘향전』등의 애정소설이다. 이러한 소설들의 내용에는 유교도덕을 강조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작가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들 소설은 하급신분층의 숨김없는 감정이나 사회적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많았다. 당시의 소설 중에서 최고봉으로 불리는 『춘향전』은 상민이나 천민도 양반과 동등한 인격의 소우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소설뿐 아니라 시조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초기의 시조는 단가(短歌)의 형식을 취하고 유교도덕이나 도피사상이나 무인의 호기를 읊은 양반문학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조는 하급신분층의 것이 되었다. 이에 그들은 단순한 감상적 기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시조에 담고 싶어 하였다. 이에 따라 비록 세부분으로 나뉘는 것은 옛 평시조와 같은나 그 형식은 장시로 변하고 묘사는 사실성을 띠게 되었다. 주제도 변하여서 남녀간의 애정, 가정생활의 고민, 대로는 노골적으로 음란한 것까지 다루어졌다. 이러한 시조의 작가로는 영조때의 김천택, 김수장 등 서리 출신의 인물을 비롯하여 몰락한 양반이나 기녀와 같은 하급신분 출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는 때론 작가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이름을 숨기는 경구가 많았다. 과거의 인습의 제약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설시조(辭說時調)의 출현은 소설문학과 아울러 새로운 문학이 대두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들 서리 출신 가객인 김천택과 김수장에 의하여 각기 『청구영언(靑丘永言)』-영조 4년 1728, 『해동가요(海東歌謠)』-영조 39년 1763의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과거의 양반작가의 것 이외에 유명 무명의 하급신분 작가들의 것들이 많이 수록 되었다.
전통시가는 가사를 통한 문학성과 이를 노래로 드러내는 음악적 특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 특히 시조는 오랫 동안 우리 민족의 정서와 언어에 적합하도록 정형화된 시형이다. 즉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시대적 현실을 4음보의 율격으로 조화롭게 표현한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가이다.
시조라는 말이 문헌상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동국통감>에 있는 1296년 기록에 '원상이 시조를 지어 태평곡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서도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시조가 언제부터 창으로 불리어졌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신광소는 자기의 저서 <석북집>에서 곡조로서의 시조는 당시 서울의 이름난 가수였던 이세춘(李世春)이 처음으로 창작하였다고 썼다. 이것은 종래의 가곡창과는 양식상 구별되는 새로운 시조창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조창이 나타나게 된 동기는 이 시기에 시조시와 가사 창작이 성행함에 따라 전문적인 가창기량을 요구하는 가곡이나 가사음악과는 달리 일반 애호가들도 그것을 본격적으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곡조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는 데 있다.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여 주로 정형적인 시조시를 음미하는 방향에서 가곡보다 평이한 선율로 읊조릴 수 있는 시조창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설시조는 말 그대로 '사설'이 많은 시조이다. 그러나 평시조의 장단을 축소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평시조 장단법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자수가 많은 장형시조를 채택할 경우에는 한 박자 안에 두세 자씩을 부르게 되므로 그 리듬에 변화를 일으킨다.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서 의견들이 분분할 따름이다. 한 예로, 1940년에 출판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 시대에 만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그러는 한 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즉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 판소리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당대에 성행했던 판소리의 규모와 내용 등을 익히 짐작하게 한다.
숙종 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또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그 밖에 동편제의 시조(始祖)인 남원 운봉의 송흥록, 중고제의 시조(始祖)인 경기도 여주 염계달의 활약도 두드러지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서편제의 시조(始祖) 박유전 역시 판소리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 시대가 판소리를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유파로 분화시켰던 시기였다면, 후기 팔명창 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여 널리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 1930년대까지는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일컬어 진다. 이 때 활약했던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부르곤 하는데,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
판소리는 본래,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예술 장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는 업적을 세웠다. 또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탈놀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연기자가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본래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로 분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의 일종이다. 한국 탈놀이의 기원은 농경의례설, 기악설(伎樂說), 산대희설(山臺戱說)의 세가지로 논의되어 왔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과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각종 가면희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재의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드라마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탈춤의 기원은 문화기록보다는 훨씬 앞서서 인간들이 사람들의 능력을 초월한 무엇인가를(神)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므로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 시작한 '굿' 형태에서 찾아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본다. 이것은 곧 어떤 제례식보다는 생활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연희의 장소는 실제 그들 삶의 현장이고 연희의 시간 은 바로 삶의현재인 것이다. 즉, 농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이 노력을 초월한 어떤 영험한 신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상한) 돌, 나무, 별, 달 이 모든 것이 신의 대상이 되어 농사를 짓기 전에 제단을 쌓아놓고 빌기 시작했고, 추수 때는 풍요로운 수확에 감사를 빌며 다음 해의 농사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활 속에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상이 되는 신은 점차 늘어나게 되고, 그 중에 액신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얼굴에 탈을 쓰고 시작한 탈춤의 기원으로 생각되며, 내용도 처음에는 간단하여 대사가 없는 묵극에서 점차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그 배경에 비례해서 대사가 늘어나고, 그 안에 사이사이 여흥도 끼게 되어 지금의 탈춤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탈춤은 농촌마을 자체에 깊이 뿌리를 박고 전승되었으며, 판을 단순한 굿에서 물려받은 갈등 구조에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갔다.
또한 탈춤은 환경에 따라 농촌탈춤과 도시탈춤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 탈춤은 여러 가지 허용해 주는 범위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고, 마을굿을 떠나서는 공연할 수 없었으며, 탈춤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경제적 능력도 갖기 어려웠었다. 이렇게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농촌은 식민지적 근대 문화와 부딪치자 쉽게 위축되고, 일제의 탄압을 거치면서 대부분이 전승이 중단되어 현재는 대본이 채록된 하회별신굿탈놀음 하나뿐이다.
이에 비해 도시 탈춤은 상인, 이속의 경제력과 생활의 여유를 배경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비록 위치는 농민들의 위치와 다를 바 없었으나, 도시에서는 양반의 지배력이 농촌만큼 강하지 않고, 도시의 상인과 이속이 양반과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능력에서 농민보다 앞섰기 때문에 전부터 있어 온 농민의 농촌 탈춤을 기반으로 하여 이를 더욱 높은 수준의 것으로 계승 발전시켰고, 우리 문화재 내지 예술에서 탈춤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고하게 성립시겼다.
여기 까지가 사실 서민 문화의 대두를 살펴본 것이고, 예술의 변화까지 통틀어 조선 후기의 문화를 모두 마스터(?)해볼까여~?^^
예술은 참 많죠~^^
그림, 문학, 서예, 자기 공예, 건축 등
예술 그 첫번째~!!
그림 속으로 풍덩~~
5. 진경 산수화
회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뚜렷하였다. 우선 이 시대에 진경산수화가 출현하였다. 중국 화보를 모범으로 하여 이상향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는 한국의 자연을 그림으로 나타내게 된것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숙종~영조때의 정선이었다. 그는 진경산수화를 그림에 따라서 독자적으로 구도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또 바위산이 많은 한국의 자연을 강렬한 묵색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 걸작으로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이 있다. 이에 대해서 같은 진경산수화라도 영조, 정조 때의 김홍도는 나무, 산, 물 등을 필선으로 그려서 정선과는 대조적인 측색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대표작품으로는 『총석정도(叢石傳導)』가 있다
사실 한국의 민화가 언제부터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문헌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그리고자하는 욕망이 있고 또 거기에 색을 칠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바 인류회화 발달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민화란 제대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런 가식 없이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 민화의 발생은 한국회화사와 때를 같이 했다고 하겠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 이문된 간단한 선 점문등은 토기의 표면을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벽사와 진경을 기대했던 그 믿음과 마음은 정통사회의 한국 사람들이 집 안팎을 그림으로 메꾸었던 뜻과 같았다.
청동기시대의 울주의 암벽화에 호랑이, 물고기, 사람과 같은 그림과 고구려 고분벽화와 천정그림은 그 내용과 양식이 전성기의 민화와 대동소이한 점은 민화의 발전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일상생활 풍속과 산수: 동서남북 중앙을 나타내는 용, 호랑이, 닭, 거북이, 황제 등 방위를 나타내는 짐승과 신, 무속에 나오는 천왕, 지신, 무덤주인공 부부 초상 등은 민화의 내용과 같다. 그 양식을 보아도 십장생계통의 해, 달, 구름, 사슴, 거북이, 등이 서툴고 투박하여 이치에 잘 맞지 않는 소박한 일반적인 민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 전에 부형된 산, 물, 구름, 바위, 나무등과 신라 토기, 고구려 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 대부분이 현존하고 있는 민화와 그 내용과 양식이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와 고려를 통하여 민화가 특징 지워지며 발전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려의 민화는 근엄한 일부 유학자들이 풍속도와 같은 속기 넘치는 화법을 무시한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까닭에 속화로서 저급하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민화는 그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민화가 제작되어 민화에 있어서 그 전성기를 형성하였다. 문인의 세계속의 편안함과 민속적인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까닭에 민화는 주거공간의 장식에 필수불가결하게 수요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국가의 정치체제로서 당쟁, 사화가 빈번하였으며 농번주의, 농경중심주의 경제하에 관혼상제의 예론과 의식을 중시하였으며 유교적 원리를 지도이념으로 삼아 서민의 생활규범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민화가 그 전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나타난 새로운 문화의 경향 때문일 것이다. 즉, 대동법 실시와 상공업의 발달, 이앙과 황작으로 인한 농업의 발달 등으로 신분상승이 이루어져 문화 전반에 걸쳐서 서민문화가 두드러지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시조의 가사도 종래의 유교적인 양반조를 지양하고 시민생활과 관련된 사랑에 관한 것이나 사회비판적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이 나타났고 작자 중에서 평민 시민이 많았으며 평민 시민의 시가작인 해동유주가 간행되는 등 평민성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녀층, 상민층을 주 대상으로 한글소설이 유행하였으며 판소리도 이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장르의 예술인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도 서민적인 양상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조 때의 겸재 정선은 중국의 화보를 모방하는 종래의 화풍을 지양하고 우리나라의 자연을 표현한 소위 '진경산수화' 를 그렸으며 '인왕제색도’‘금강전도' 등 많은 명작을 남겼고, 정조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은 그 시대 정서를 잘 나타내는 서민 생활을 주고 하는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솔직·담백한 가운데에도 서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현실감각에 뛰어난 본격적 풍속화가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이 시기는 한국 역대 회화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와 같은 시대의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등은 한국 풍속화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작가들이다.
이들 작가의 풍속화첩(風俗畵帖)에는 서당(書堂)·무동(舞童)·씨름·검무(劍舞)·선유(船遊)·무무(巫舞)·파적(破寂)·대장간 등 갖가지 제재(題材)를 익살과 기지, 그리고 풍정(風情) 넘치는 필치로 묘사해낸 걸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인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과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히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풍속화풍의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화의 도입 이래 인물을 주제로 하는 회화는 많이 그려졌으나, 크게 내세울 만한 풍속화적 작품은 찾기 어렵고, 다만 동양화에 있어서 세태나 풍속을 제재로 다루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3. 암행어사 연보 - 암행어사ㆍ예조참의ㆍ설서ㆍ검교ㆍ대교ㆍ시강원보덕을 지내다 - 40세 1826년(순조 26) 6월 25일 충청 암행 어사로 각 지방의 부사ㆍ현감 등의 치적을 평가하여 상과 벌을 내리도록 건의하였다. - 추사체와 금석문의 대가, 또 실학자로서 명성을 드날렸다.
4. 관련 기록 ≪순조 028 26/06/25(을해). 충청 암행 어사 김정희의 서계대로 상벌을 시행하다≫ 충청우도 암행 어사 김정희(金正喜)가 서계(書啓)를 올려, 서산(瑞山) 군수 한용검(韓用儉), 예산(禮山) 현감 이명하(李溟夏), 한산(韓山) 군수 홍희석(洪羲錫), 노성(魯城) 현감 이시재(李時在), 태안(泰安) 전 군수 허성(許晟), 보령(保寧) 전 현감 송재순(宋在淳), 비인(庇仁) 현감 김우명(金遇明), 청양(靑陽) 현감 홍일연(洪逸淵), 진잠(鎭岑) 현감 황도(黃導), 결성(結城) 전 현감 조석준(曹錫駿), 남포(藍浦) 전 현감 성달영(成達榮)과 전 수사 윤상중(尹相重) 등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輕重)을 나누어 감죄(勘罪)하고, 별단(別單)의 군(軍)·전(田)·적의 대한 삼정(三政)과 증미(拯米)를 백징(白徵)하는 것과 안면도(安眠島)의 송정(松政)과 안흥 굴포(安興掘浦)의 어염세(漁鹽稅)·선세(船稅) 등의 폐단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 시행하게 하였다.
자기에 있어서는 청화백자(靑華白瓷)가 발달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는 회회청(回回靑)이란 청색안료를 중국에서 수입해 온 관계로 청화백자는 극히 귀하했고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정조때에 국산의 안료가 쓰여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청화백자가 크게 발달하여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푸른 색만을 써서 산수, 화조, 초목 등을 붓을 슬쩍 그려서 구운 이 청화백자는 청색, 홍색, 녹색, 자색 등 여러색깔을 사용한 당시의 중국이나 일본의 색채 도자기와는 판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속에는 한국적인 소박한 시적 감각이 깃들여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옹기를 조미료와 주식 부식물의 저장용구,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사용하였다. 삼국시대부터 만든 옹기는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용기이다. 옹기점의 시설로서는 토기제작장과 요성장(窯成場)이 있는데, 토기제작장에서는 날그릇을 주로 다루고, 요성장에서는 날그릇을 구워 완전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옹기는 청동기시대 무늬 없는 토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무늬 없는 토기는 모래가 많이 썩인 만큼 단단하여 실용적이였다. 또한, 홍도와 흑도가 만들어 졌는데, 모래가 섞이지 않고, 제작이 까다로우며, 수량도 적어 의식용이나, 제례, 부장품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쓰였다 청동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민무늬 토기는 지금 사용하는 옹기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국가 별로 약간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는 황갈색이나 검은색이 전형적이었고 문양이 거의 없었다, 백제는 다른 나라보다 먼저 기술을 습득하여 경질토기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만들었다. 신라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또한 신라에서는 토우라는 특징적인 예술품이 제작되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지리지 등을 보면 도기소와 옹장에 대해 기록이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옹기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옹기가 이어져 온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 대 : 조선 소 재 지 :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규 모 : 지정면적 188,048㎡ 지정사항 : 사적 제3호
조선 후기에 축조된 수원의 읍성.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산성으로, 둘레는 5,520m이다.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포루·장대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래 수원의 읍치소는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에 있었으나, 1789년(정조 13) 정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와 주민들은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이라 개칭하고 1794년 2월 영중추부사인 채제공(蔡濟恭)의 주관 아래 성의 축조에 착수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하고 10월 9일 낙성연을 하였다.
화성의 축조 방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기의 발달과 중국성제의 장점을 종합하고 있다. 성벽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돌과 모래로 다진 뒤 그 위에 배흘림을 준 규형의 벽을 쌓았다. 치성과 같은 시설은 중국식 성제를 따르고 있으며, 성곽 주위의 호는 산지 부분에서는 두르지 않았으나 평지 부분은 둘렀다.
이 성의 축조에 소요된 인적·물적자원은 막대한 것으로 동원된 노동력만 보더라도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미장이 295명을 비롯하여 기술자가 총 1만 1,820명이었다. 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은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데, 이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시설이 설치되었고,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망루의 역할과 총안으로 적의 침입을 막게 되어 있는 공심돈이다. 또한 돌과 벽돌을 섞어 사용한 과감한 시도, 녹로·거중기 등의 과학기기를 활용하고 용재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삼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이 성곽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이러한 축성 내용은 정조의 명으로 착수하여 1801년(순조 1)에 간행된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가 전해오고 있어 197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시행되었던 복원공사에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이 성은 당시의 실학사상을 반영해 과학적으로 축성했으며, 벽돌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조선 후기 성곽의 걸작품으로 인정받아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정헌군의 정성과 편집에 기울인 시간에 박수를 보냅니다. 내용도 자세히 들여다 보며 읽어본 흔적이 완연하군요. 다만 과제에는 이모티콘을 쓰지 않기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유의하기 바랍닏다. 일일히 글자와 링크 색깔까지 바꾸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렇게 수정을 해 주니, 다른 친구들도 정헌군의 노력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정헌군의 숙제를 보며, 한가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다음에 과제를 낼 때는 한가지 주제나 테마를 잡아 그것과 관련한 것으로 찾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 문학, 미술, 학자, 정치, 경제 등등 말입니다. 권두어에 정헌군 같이 조사하려는 주제를 제시해 주고 단어를 조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의 지평을 늘리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송영심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정헌군,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이미 다른 학생이 조사한 내용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검색을 통해 자신이 조사한 단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하기 바랍니다. 수정해 주세요. 그리고 내용을 읽어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설문도 해주세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항에 대해 수정을 완료하였고, 설문은 이전에 하였습니다. 읽어보지 않은 것 같지만
복사 해놓고, 글자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숙제를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방금 다른 사람이 제가 조사한 단어가 있는지를 확인하였으나 없었습니다.
정헌군의 정성과 편집에 기울인 시간에 박수를 보냅니다. 내용도 자세히 들여다 보며 읽어본 흔적이 완연하군요. 다만 과제에는 이모티콘을 쓰지 않기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유의하기 바랍닏다. 일일히 글자와 링크 색깔까지 바꾸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렇게 수정을 해 주니, 다른 친구들도 정헌군의 노력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정헌군의 숙제를 보며, 한가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다음에 과제를 낼 때는 한가지 주제나 테마를 잡아 그것과 관련한 것으로 찾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 문학, 미술, 학자, 정치, 경제 등등 말입니다. 권두어에 정헌군 같이 조사하려는 주제를 제시해 주고 단어를 조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의 지평을 늘리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