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태니커
소격서 [昭格署]
소격서 [昭格署]는 조선시대 국가적인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을 말한다.
국가적 도교의 제천행사로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청성진(三淸星辰 : 上淸·太淸·玉淸)
에 초제(醮祭) 즉,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제사를 주관하는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관원으로 제조 1명, 별제 2명, 종5품 영(令) 1명, 종9품
참봉 2명을 두었으며,
영과 별제는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고려시대 부터 유례 되어 내려온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는데 유생들의
꾸준한 소격서 타파 논의가 이어저 내려왔다.
1396년 (태조 5)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 (세조 12) 관제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덕목에 의한 실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격서
혁
파 논의가 구체적으로 대두 되었다.
최초의 혁파논의 상정은
1479년(성종 15)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식과 기우제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고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혁파 할 수는
없다
하
여 비용을 줄이거나 청결하게 제사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 연산군 2년에 다시 혁파 논의가
발생했는데, 소격서가 비용만 많이 들고 국가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이에 소격서를 안양군(安陽君) 항(行)의 집으로
옮겨 공식적으로는 혁파된 셈이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는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혁파 논의가 강하게
대두 되었다.
이들은 소격서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1518년(중종 13) 유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와 같은 소격서의 혁파와 복설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유교 사상과 토착 신앙과의 오랜 갈등에서 비저진 문제였다.
결국
소격서는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전당 손실과 ,총기류등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미신적 제사 의존도 보다 과학적 국력 배양에 치중하면서 정치정서 변화로 인하여
완전히 폐지되었다.
브리태니커
소격서 [昭格署]
소격서 [昭格署]는 조선시대 국가적인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을 말한다.
국가적 도교의 제천행사로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청성진(三淸星辰 : 上淸·太淸·玉淸)
에 초제(醮祭) 즉,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제사를 주관하는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관원으로 제조 1명, 별제 2명, 종5품 영(令) 1명, 종9품
참봉 2명을 두었으며, 영과 별제는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고려시대 부터 유례 되어 내려온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는데 유생들의
꾸준한 소격서 타파 논의가 이어저 내려왔다.
1396년(태조 5)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덕목에 의한 실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격서 혁파 논의가 구체적으로 대두 되었다.
최초의 혁파논의 상정은
1479년(성종 15)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식과 기우제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고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혁파 할 수는 없다 하여 비용을 줄이거나 청결하게 제사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 연산군 2년에 다시 혁파 논의가
발생했는데, 소격서가 비용만 많이 들고 국가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이에 소격서를 안양군(安陽君) 항(行)의 집으로
옮겨 공식적으로는 혁파된 셈이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는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혁파 논의가 강하게
대두 되었다.
이들은 소격서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1518년(중종 13) 유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와 같은 소격서의 혁파와 복설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유교 사상과 토착 신앙과의 오랜 갈등에서 비저진 문제였다.
소격서는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전당 손실과 ,총기류등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미신적 제사 의존도 보다 과학적 국력 배양에 치중하면서 정치정서 변화로 인하여 완전히 폐지되었다.
소격서 [昭格署]는 조선시대 국가적인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을 말한다.
에 초제(醮祭) 즉,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제사를 주관하는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관원으로 제조 1명, 별제 2명, 종5품 영(令) 1명, 종9품 참봉 2명을 두었으며, 영과 별제는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고려시대 부터 유례 되어 내려온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는데 유생들의
꾸준한 소격서 타파 논의가 이어저 내려왔다.
1396년(태조 5)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덕목에 의한 실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격서 혁파 논의가 구체적으로 대두 되었다.
최초의 혁파논의 상정은
1479년(성종 15)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식과 기우제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고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혁파 할 수는 없다 하여 비용을 줄이거나 청결하게 제사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 연산군 2년에 다시 혁파 논의가 발생했는데, 소격서가 비용만 많이 들고 국가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이에 소격서를 안양군(安陽君) 항(行)의 집으로 옮겨 공식적으로는 혁파된 셈이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는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혁파 논의가 강하게
대두 되었다.
이들은 소격서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1518년(중종 13) 유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와 같은 소격서의 혁파와 복설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유교 사상과 토착 신앙과의 오랜 갈등에서 비저진 문제였다.
소격서는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전당 손실과 ,총기류등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미신적 제사 의존도 보다 과학적 국력 배양에 치중하면서 정치정서 변화로 인하여 완전히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