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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무위복승분 제11
https://youtu.be/b8eDYhTRi7w?list=PLvuPNgc2GwXY2EiKCiQ8uhwJOL1VpY2cS
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如恒河中所有沙數如是沙等恒河於意云何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但諸恒河尙多無數何況其沙
須菩提我今實言告汝若有善男子善女人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得福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
佛告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爲他人說
而此福德勝前福德
제11,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無爲福勝分]
“수보리야,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그렇게 많은 항하강이 있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의 수는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저 모든 항하강의 수 만 하여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그가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준다면 이 일의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무위법의 뛰어난 복덕
무위복승(無爲福勝)은 ‘무위복이 수승하다’ ‘무위복이 아주 뛰어나다’라는 뜻입니다.
무위복에 상대되는 것은 유위복입니다. 불교에서는 유위나 무위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지요. 유위란 조작함이 있는 것, 뭔가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무위는 해도 하는 것이 없는 것, 많이 하는데 하는 것 같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대개 상을 내고 생색을 내지요. 일은 눈꼽만큼 하고 생색은 주먹만큼 낸다면 이것은 유위 중에도 상유위예요.
그런데 무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특히 남을 위해 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가 한 것에 대해 전혀 어떤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무위는 바로 금강경의 이치입니다.
금강경의 근본취지는 무상위종(無相爲宗)이기 때문입니다. 상없는 것으로써 으뜸을 삼는 것, 관념이 사라진 것,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세상에 어떤 공헌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관념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 이러한 무위의 이치가 금강경의 이치이지요.
須菩提如恒河中所有沙數如是沙等恒河於意云何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
수보리야 여항하중소유사수하야 여시사등항하가 어의운하오 시제항하사가
영위다부아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경전에는 항하강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항하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훌륭한 강을 중심으로 평야가 발달하고 도시가 번성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항하강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교화영역은 항하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는 항하강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금강경의 이대목에서는 ‘항하강에 있는 모래의 숫자 만큼 항하강이 또 있다고 했을 때 그 항하강의 모래숫자가 많겠는가’ 하고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항하강의 모래는 우리나라 한강 모래의 열 배, 스무 배로 입자가 곱지요. 모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루를 잔뜩 쌓아놓은 듯한 고운 모래입니다. 그 모래알 하나하나에 또 항하강이 있다면 그 항하강의 모래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대 ‘매우 많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많지요.
但諸恒河尙多無數何況其沙
須菩提我今實言告汝若有善男子善女人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得福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
단제항하도 상다무수어든 하황기사리잇가
수보리야 아금실언으로 고여하노리 약유선남자선녀인이 이칠보로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하야 이용보시하면 득복이 다부아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항하강도 오히려 무수한데 하물며 모래숫자와 같은 항하강의 모래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고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야 내가 실다운 말로써 그대에게 고하리니’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실다운 말은 진실한 말인데, 부처님이 평소에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지요. 실다운 말이란 방편이 없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앞서 예를 든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히 채워서 보시에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얻는 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칠보는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진주, 호박을 말하지만 요즘은 칠보라고 하는 것이 큰 가치가 있는 보석이 아니니 금은보화라고 해석해도 되겠습니다. 또 삼천대천세계는 우리가 사는 지구라고 보면 되지요. 이 지구와 같은 별이 항하강의 모래수처럼 많다고 가정하고, 그 곳에 온갖 금은보화를 채워서 사람들에게 보시를 했다면 얼마나 복이 많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복이 많지요.
그래서 수보리가 말하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남산만한 금덩이 하나를 희사를 하거나, 그것으로써 선행단체를 설립하거나, 복지단체를 만들었다면 신문에 대서특필될 것입니다. 전세계 매스컴에서도 1년은 기사로 다룰 거예요. 그 공덕과 복을 찬사하는 비석을 곳곳에 세우느라고 야단일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예를 든 것처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항하강, 또 그 항하강의 모래수 같은 지구를 금은보화로 다 채워서 세상에 보시한다면 그 복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다음에 나옵니다.
佛告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爲他人說而此福德勝前福德
불고수보리하사대 약선남자선녀인이 어차경중에 내지수지사구게등하야 위타인설하면 이차복덕이 승전복덕하리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만약에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 경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그 이치를 남을 위해서 해설을 하여준다면 복덕은 앞서 예를 든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불교에서는 사람을 아주 훌륭한 남자분, 훌륭한 여인분 하는 뜻으로 선남선녀라고 표현합니다. 이왕이면 그렇게 표현해 주는 것이 좋지요. 선남선녀가 경전체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닌다는 것은 이것을 마음에 아로새기고 자기인격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위타연설 할 것 같으면 이 행위는 항하강의 모래숫자와도 같이 많은 항하강, 그 항하강의 모래숫자같은 지구에 칠보를 쌓아서 많은 사람에게 보시를 했을 경우에 얻는 복보다 수승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위복이 유위복보다 수승하다는 내용이지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을 보시하더라도 유위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항하강 모래의 억만배 항하강이 있고 그 억만배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숫자와 같은 지구에 칠보보다 더 값나가는 다이아몬드만 잔뜩 쌓아서 모든 사람에게 보시했다손 치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작이 있고 하는 것이 있고 한계가 있는 것은 유위이지요. 그런데 금강경이나 내지 금강경의 사구게 이 이치 하나만 우리가 꿰뚫고 보시하거나 남을 위해 공헌할 것 같으면 그 행위가 작거나 크거나 간에 함이 없는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위복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취할 것은 그것입니다.
큰 복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위복이지요.
금강경 서두에서 걸식이야기를 할 때 ‘부처님께 밥 두 숟가락을 주는 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밥을 두 숟가락 주고는 기억했다가 나중에 ‘내가 당신에게 밥 두 숟가락 줬는데 그 때 잘 먹었느냐’고 생색낼 사람은 없습니다. 받은 사람도 별로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일곱 집에서 걸식하라는 뜻으로 7가식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집에서만 얻어먹으면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그 은혜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작은 복을 짓듯 큰 복을 짓든간에 무위로 지어라.’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지어라’‘그러면 그것은 영원할 것이고 항상 그 복 속에서 우리가 살게 될 것이다.’이것이 교훈입니다.
만약에 큰 복을 지어놓고 생색을 낸다든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마이나스 복을 짓는 것이지요. 우리가 자기 딴에는 늘 하느라고 하면서 사는데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고 쪼들리는 것은 상을 내는 우리들의 마음씀씀이 때문입니다.
절에 있다보면 ‘이 대웅전을 내가 지었다’고 하는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그래 당신이 어떻게 이 대웅전을 지었느냐’고 하면 ‘그때 내가 대목수 밑에 들어와서 대패가는 일을 했다’고 자랑합니다. 옛날 목수사회의 규칙은 엄격해서 초보자에게는 대패 가는 일만 시킵니다. 요즘은 전부 전기 대패지만 옛날에는 손으로 미는 대패니까 대패 가는 것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지요. 한 삼 년 대패 갈았다고 해서 나무를 깎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패를 갈면서 물건을 나르고 힘든 일을 시키지요. 깎는 것은 구경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대패 가는 일을 해놓고 ‘이 법당을 내가 지었다’고 자랑 한다면 그 사람은 수없이 복을 까먹는 것이지요. 지어놓은 복이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이 됩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생색내고 과시하고 어떤 관념에 떨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자기 삶에 크게 마이너스가 되는 중요한 일인데도 이치를 잘 모르니까 슬기롭고 현명하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항하강의 비유를 했습니다. 한 항하든 억만 항하든 항하강의 모래수같은 물질적 보시를 했어도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유위복이 되고 아무리 작은 일을 했어도 금강경의 정신에 입각해서 보시를 하면 무위복이 됩니다.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무위복입니다. 그 복은 영원한 것이어서 세세생생 누리고 씁니다. 예를 들어서 단돈 만원을 보시하고도 정말 내 마음에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 만원을 보시한 복은 영원합니다. 1억을 보시하고도 그 관념에 사로잡히고 생색을 내게 되면 마이너스 2억 3억의 손실을 가져옵니다. 정신적인 세계에서의 통장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복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아마 빚이 쌓였을 것입니다.
무위의 이치가 그와 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9강 존중정교분 제12
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須菩提隨說是經乃至四句偈等當知此處一切世間天人阿修羅皆應供養
如佛塔廟何況有人盡能受持讀誦
須菩提當知是人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若是經典所在之處則爲有佛若尊重弟子
제12,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다[尊重正敎分 ]
“또 수보리야, 이 경을 해설하되 단지 네 글귀만 하더라도 반드시 알라, 이곳에는 일체세간의 천신(天神)과 사람과 아수라가 다 마땅히 부처님의 탑(塔)에 공양하는 것과 같이 해야한다.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모두 다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일이겠는가?
수보리야, 반드시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다.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부처님과 훌륭한 제자들이 함께 계시는 것이 되느니라.”
올바른 가르침의 존중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바른 가르침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성인의 가르침이나 온갖 주의주장도 많습니다. 불교 안에서도 참다운 이치를 가르치는 내용만이 아니라 방편의 가르침도 많습니다.
불자들은 공부를 많이 해서 무엇이 방편설이고 무엇이 진실한 가르침인가 판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판별하고 분별하는 힘이 생기지요. 그렇지 않다면 말만 좇아가고 맙니다. 우리는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존중해야 하고, 옹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널리 그 바른 가르침을 펼쳐야 합니다. 정법보다 방편을 펴는 것이 수월하고 정법이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정법을 펼치는 일이 듣는 사람에게도, 전해주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존중정교분의 내용입니다.
復次須菩提隨說是經乃至四句偈等當知此處一切世間天人阿修羅皆應供養
如佛塔廟何況有人盡能受持讀誦
부차수보리야 수설시경호대 내지사구게등하면 당지차처는 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개응공양을
여불탑묘어든 하황유인이 진능수지독송가
‘또 수보리야 이 경전을 따라서 해설하대 경 전체거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설명한다고 할 경우 마땅히 알아라 그 경전을 해설하고 설법하고 있는 그 장소는 마치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일체 세간의 천신이나 사람이나 아수라가 다 응당히 공양을 올려야 한다.’
처음 법회인유분에서부터 지금까지 금강경을 해설하였습니다.
사구게 앞에 ‘내지’가 있으면 항상 ‘경전체’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경전체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사람들에게 해설하면 그 장소는 부처님의 사리탑에 공양올리는 것과 같이 공양해야 한다’ 하물며 어떤 사람이 ‘경전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하고 서사하고 해설하는 것은 말할나위 없이 공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탑묘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탑이면서 묘입니다. 또 탑사라고 해서 절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규모를 제대로 갖춘 사찰에는 으레 탑이 있고 법당이 있고 스님들의 수행처가 있지만, 옛날 인도나 미얀마 같은 곳에는 큰 탑이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고, 수행처이고 기도처가 됩니다.
법화경에서는 오종법사라고 해서 경전수행의 다섯가지 덕목을 이야기 합니다.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受持], 읽는 것[讀], 외우는 것[誦], 쓰는 것[書寫], 누구에게 설명해주는 것[解說]이 모두 법사의 입장에서는 5종법사이고, 경전을 통한 수행에 있어서는 다섯가지 수행덕목입니다.
이 다섯가지가 그대로 수행입니다. 전통적인 불교수행은 참선도 기도도 아닙니다. 화두를 드는 수행은 송나라 때에 생긴 일이고 기도는 훨씬 후에 생겼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여러 번 검색해 보아도 ‘기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후대 불교서적에서 나오는 말이지요.
불교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잘 귀담아 듣고 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달리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이 수행입니다. 좀더 집중적으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경전을 지니고 다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다른 사람에게 해설합니다. 그것이 적극적인 수행이지요.
특히나 쓰는 일인 서사는 다른 말로는 사경이 되는데 읽고 외우는 일보다 훨씬 집중이 되기 때문에 그 공덕이 큽니다. 옛날에 출판업이 크게 성하지 못했을 때는 경을 전부 필사하여 유통시켰습니다. 한 권의 경전을 한 사람이 필사하면 두 권이 되고 두 권의 경전을 두 사람이 필사하면 네 권이 됩니다. 지금은 기계로 한꺼번에 수천 권 수만 권을 찍어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쓴다는 일은 경전의 내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깊이 음미하고 사유하는 데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경을 많이 권하는 편입니다.
한 생각이라도 도망가면 그 획을 잘 못 쓸 수 있고, 글자를 놓칠 수가 있고, 빠뜨릴 수가 있으며 글씨도 엉터리가 됩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총동원 되어서 할 수 있는 수행이 사경수행이지요. 영험으로 치더라도 사경이 제일 영험이 많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 경전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이 중요해요. 가족들에게 친지들에게 친구들에게 금강경 한마디를 전해주는 일은 한끼의 식사대접보다 빛나는 대접이고, 금강경을 잘 해설한 책을 법공양하는 일은 어떤 공양보다 훨씬 빛나는 공양이지요. 우리 불자들이 이런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법공양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지요.
만약에 그러한 다섯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
須菩提當知是人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若是經典所在之處則爲有佛若尊重弟子
수보리야 당지시인은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이니라 약시경소재지처는 즉위유불과 약존중제자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사람은 최상제일희유의 법을 성취했다.’
희유한 법을 성취했다고 해도 좋습니다. 제일이라는 법을 성취했다고 해도 좋습니다. 최상의 법을 성취했다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세 가지 수식어를 다 사용했습니다.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제일가는 최상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한 사람이다. 최상제일희유의 법을 성취했다.’ 이 보다 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 되고 존중할 만한 제자가 있는 곳이 된다.’ 금강경이 있는 그곳이 부처님 계시는 곳이요, 존중할 만한 제자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금강경은 일차적으로 종이와 먹으로 된 이 금강경입니다. 그런데 보다 더 차원높은 금강경이 있습니다. 우리의 긍극적 차원입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차원에는 무궁무진한 보물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끄집어내서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알고 보면 이 경지는 유위나 무위를 다 초월한 경지입니다. 그래서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과 존중제자가 있는 곳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도단체에서 삼귀의 예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다음에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싹 빼버리고 다른 내용을 쓰는 법회가 있었어요.
‘부처님의 제자’는 ‘출가승단’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단체에서는 스님들이 하는 일이 마땅치 못해서 ‘귀의승’이라는 말을 빼버렸겠지만, 그 사람들은 마땅치 못한 일만 보았지 잘하는 것은 한 번도 못 본 것이지요. 과일 나무에는 벌레 먹은 과일도 있지만, 아주 튼실하게 잘 영근 과일도 얼마든지 있는데 부정적인 것만 보아온 업을 가진 사람은 또 그런 것에만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기 좋아하고 험 잡기를 좋아하는 것은 하루 빨리 고쳐야 할 잘못된 업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존중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출가승이라고 국한시키지 않았지요. 존중할만한 제자라는 말속에는 청신사 청신녀 비구 비구니가 물론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부처님이 있다 한들 부처님의 오롯한 정신이 담긴 그 가르침을 모른다면 의미가 없고 아주 큰 스님이 있고 훌륭한 청신사 청신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분들의 훌륭한 정신과 사상 그 가르침을 전혀 모르면서 소문만 듣고 ‘그 스님이 훌륭한 스님이란다’라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요컨대 ‘경전’은 부처님과 훌륭한 제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부처님과 훌륭한 제자가 있는 곳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위(則爲)’라는 말을 썼는데 ‘있음이 된다’ 라는 말은 ‘있음과 같다’라는 말과 차원이 다르지요.
‘금강경이야말로 곧 부처님이고 곧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