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휘가로 2003년 11월호
赤古里, 저고리, jeogori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이 수를 놓듯 꼼꼼하게 재현한 저고리에는 아름다운 실루엣과 격조가 살아 있다. 학문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되살려 놓은 조선시대의 저고리들. 한복은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이다. 꽤 체계적으로 배우는 교과목 중의 하나이고 살아가면서도 가끔씩 입어야 하지만 친숙하지는 않다. 오히려 낯설음에 가깝다. 옛 어르신들은 그 옷을 두르고 풍류를 즐기며 일을 했다는데, 한복을 입은 몸은 영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감상할 시간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잘 만들어진 한복을 찬찬히 살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섬세한 안목과 빼어난 아름다움과 고운 자태를. 지난 9월 28일 김혜순은 안동 권씨 가문의 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신문에서 전시회 기사를 보았는데 거기에 실린 안동 저고리를 구입할 수 있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판매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전화 저편의 여인을 기쁘게 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3년간의 작업 끝에 선보이는 저고리 전시회가 가져 올 조용한 파문을 예고하고 있었다. 10월 2일부터 1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김혜순의 저고리 600년 변천사>에는 천연 염색에서 시작해 손바느질로 마무리한 저고리 60여 점이 전시되었다. 조선 중기인 1500년대부터 요즘의 저고리까지, 저고리 변천사를 한눈에 익힐 수 있는 이 전시를 기획한 것은 3년 전. “한국복식 연구가인 유희경 박사님으로부터 10년 동안 배우며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의 자료와 보고서를 일일이 챙겨 보며 저고리 하나를 복원하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2개월. 전라북도 군산에 자그마한 땅을 마련해 그곳에서 차나무를 비롯해 치자, 검정 콩, 송화, 홍화, 쪽, 대나무를 키워 천연 염색 재료로 사용했고 푸새(옷에 풀을 먹이는 일)와 다듬이질도 직접 했다.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으로 되돌려 작업하기가 부지기수. 연작으로 기획한 이 전시를 저고리에서 출발한 것은 한복을 구성하는 첫번째 요소가 저고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복의 변천사는 ‘저고리의 여밈이나 트임은 물론 배래, 소매, 길이, 깃, 곡선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 엉덩이까지 내려오던 긴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동정을 사용한 지금의 여밈 양식이 생긴 것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저고리의 길이는 더욱 짧아져 가슴 아래까지로 올라왔다. 특히 영·정조시대에는 당대의 패션 리더였던 기녀들로부터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졌는데 짧고 품이 작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양식이 그것. 여염집 부인들도 기녀들의 풍속을 따랐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저고리의 길이는 계속 짧아져 19세기 말에는 채 한 뼘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이에 맞춰 품, 소매통, 소맷부리는 더욱 좁고 가늘어졌다. 소매의 배래(소매 아래쪽)가 지금과 같이 둥글려진 모양으로 변한 것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한복의 변천사를 따르다 보면 양장과 비슷한 맥락에서 발전해왔음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치마와 저고리의 색상을 달리 해 입었어요.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아래 위의 색깔을 맞추어 한 벌로 입게 되었지요. 추측컨대 양장의 웨딩드레스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외삼촌인 고 허영 선생의 제안을 듣고 한복 디자인의 길에 들어선 김혜순이 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여염집 아낙들 사이에도 ‘패션’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되는 일본의 기모노처럼 한복의 격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 이제 시작된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은 포(袍:치마와 저고리 위에 입던 겉옷), 치마 등으로 이어질 예정. 적어도 2∼3년에 한 번씩은 그녀의 손을 통해 재현된 한복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의 567-6081. 赤古里 : 세종 때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저고리의 표기. 고려 말부터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1 삼회장저고리 | 20세기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저고리 길이가 매우 짧고 품이 좁은 것과 함께 깃나비와 끝동의 폭도 좁다. 저고리 여밈이 거의 가운데서 이루어질 만큼 섶이 바깥쪽으로 달아나게 하여 고름을 앞으로 당겨서 입음으로써 평면적인 한복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2 저고리 | 17세기 | 구례 손씨(1576∼1626)묘 출토 | 충북대학교박물관 저고리 길이와 품, 소매통이 넉넉하고 소매길이가 길다. 옷감의 안과 겉 사이에 솜을 두어 저고리를 만든 것을 솜저고리라고 하는데 방한과 옷감의 보강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3 삼회장저고리 | 20세기 | 개인소장 모시로 만든 삼회장저고리. 곁마기가 소매의 반이상 위로 올라가 있으며 사선도 곡선에 가깝게 변화하였다. 저고리 옆 길이에 비해 앞 길이가 길어 저고리 도련을 앞섶에서 볼룩하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4 적삼 | 16세기 | 성주 이씨(1524∼1582) 묘 출토 | 석주선기념박물관 적삼은 홑으로 만든 안에 입는 옷인데 저고리와 형태는 같다. 당시에는 삼복더위에도 속적삼을 반드시 받쳐 입었고 겨울에는 속적삼 위에 속저고리와 겉저고리를 입었다.
5 저고리 | 15세기 | 조반부인 초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복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조반(趙伴, 1341∼1401)부인 초상화 속의 저고리를 고증에 의거하여 만든 것. 허리에 대(帶)가 아닌 가늘고 짧은 고름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6 저고리 | 17세기 | 문화 유씨 (1615∼1685) 묘 출토 | 석주선기념박물관 병자호란(1636∼1637) 때 살았던 인물의 저고리를 재현한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저고리 길이는 짧아지고 품이 줄어들었다.
7 삼회장저고리 | 18세기 | 이황(1651∼1742) 묘 출토. 완산 최씨 (1650∼1732) 저고리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 저고리가 짧아지기 전의 저고리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저고리의 길이가 허리아래까지 길며 옆선의 곁마기는 진동선까지만 올라와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어 무가 진동선 위로 올라가기 전의 모습이다.
8 저고리 | 18세기 | 의원군 일가 묘 출토. 안동 권씨(1664∼1722) 저고리 | 경기도박물관 조선 초의 저고리에 비해 저고리 길이와 품은 줄어들었으나 섶이 커서 깊게 여며지는 편이다. 진동에 비해 소맷부리가 좁아 소매 배래가 사선 형태를 보인다.
9 삼회장저고리 | 18세기 | 의원군 일가 묘 출토. 안동 권씨(1664∼1722) 저고리 | 경기도박물관 소매 아래의 곁마기가 깃의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 곁마기의 끝선이 진동선 위로 올라가 있어 소매 쪽으로 나가면서 어슷한 사선이 되었다. 이런 곁마기 형태의 변화는 18세기에 이르러 회장 양식이 세련화, 장식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0 삼회장저고리 | 16세기 | 은진 송씨(1509∼1580) 묘 출토 | 석주선기념박물관 길이가 짧고 품이 넓은 삼회장저고리. 짧은 저고리는 긴 저고리에 비해 품이 넓고 화려하여 덧입는 저고리로 입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1 분홍저고리 | 18세기 | 파평 윤씨(1735∼1754) 묘 출토 | 석주선기념박물관 가슴 정도 길이이며 소매통이 매우 좁은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