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이란 영화가 있다. 로빈 윌리엄스와 맷 데이먼이 출연한 1997년 작 영화이다.
주인공 윌 헌팅은 수학 천재지만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다. MIT 공대에서 바닥 청소 일을 하며 희망도 의미도 없이 살아간다. 그 비상한 머리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는 대학생을 사칭하여 여대생 낚는 데 쓴다. 쓰레기 같은 인생이다. 세상에 대해 꼬인 심사를 자신의 재능과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 풀어 가던 청년은 급기야 사고를 쳐 폭행죄로 수감되기에 이른다.
재능이란 신의 선물이다. 재능이 가치 있는 것은 인류에게 빛나는 한 걸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든 과학자든 수학자든 특출한 능력을 가진 존재의 재능은 인류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거나 생활을 진전시킬 위대한 자산이 된다. 그러므로 재능을 타고난 존재는 인류에게 내려진 축복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 자신 불행하지 않다고 해도 인류에겐 아쉬운 일이다. 부러움과 축복은커녕 세상 어느 구석에 처박혀 버려져 냉대와 질시 속에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인정받지 못하는 재능은 슬프다. 또 남들이 부러워할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어도 자신이 가진 재능의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에게 재능이란 주머니 속 푼돈 같은 것이다. 재능 외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겐 쏠쏠한 삶의 재미로 낭비될 것이고, 재능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요긴한 밥벌이 도구로 쓰이면 그뿐이다. 재능을 타고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재능을 값있게 다루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파파로티>의 주인공 장호는 노래를 잘 한다. 하지만 노래만큼 주먹도 잘 쓰기에 조폭이 되었다. 대체 이 아이에게 노래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살면서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것이 그의 노래 실력이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외로운 삶의 동반자가 되어 준 것도 노래이다.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인데 가슴속에 항상 노래가 물결친다. 파바로티의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그의 노래를 무작정 좋아한다. 그는 이 위대한 성악가의 노래를 할머니의 쓸쓸한 죽음에 헌정하고 싶다.
아이돌 가수가 멋져 보여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노래 실력이 좀 되니까 노래로 성공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도 없다. 그에겐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다. 그냥 노래를 부르고 싶다. 희한하게도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성악에 꽂혔다. 한때 성악 천재로서, 성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지닌 음악 선생 상진은 알량한 노래 실력을 바탕으로 성악을 하겠다고 거들먹거리는 이 어이없는 깡패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그냥 조폭 해. 노래하는 깡패, 폼 나잖아?” 왜 하필이면 성악이냐고, 어울리지 않게 성악이냐고, 들어 볼 필요도 없다며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보아야 아냐?!”고 일갈한다. 장호가 답한다. “깡패는 노래하면 안 됩니꺼?!” “쌤요, 내 똥 아입니더!”
장호가 처음으로 테스트를 받던 날, 있는 힘껏 마음속 응어리를 토하듯 노래하는 장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비로소 한숨처럼 긴 숨을 토해 낸다. 노래는 쓸쓸하고 외로운 이 아이의 삶이 붙들고 있는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고, 그의 허기진 영혼을 채우는 양식이며,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존재의 자기 증명이었던 것이다. 노래는 그저 노래가 아니라 이 아이의 숨결이고 존재의 아우성이었다. 이 아이가 정말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쓰레기 취급했던 제자의 재능이 상상 이상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음악 선생 상진은 충격을 받는다. 저런 놈에게 이런 가당찮은 재능을 주다니, 이건 신의 장난이 아닌가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그런 상진의 태도가 변화하는 것은 바로 장호의 이 간절함을 보고나서부터이다.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던 성악을 포기하게 된 그는 열망을 꺾인 자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철없는 아이가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모르면서도 무작정 노래하고 싶어 한다. 허구한 날 사고치고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면서도 학교를 때려치우지 않는다. 노래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업소 관리와 형님의 부르심에 바쁜 와중에도 끊임없이 노래 연습을 한다. 상진이 처음에 주목한 것은 장호의 재능이었지만, 이 골칫덩어리 꼴통 학생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장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열망, 그 진정성에 감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장호가 콩쿠르에 늦는다.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쓰진 않았다고, 그래도 노래 부르기 위해 배는 가렸다고. 스승을 실망시킨 미안함과 그토록 서고 싶었던 무대에 못 서게 된 아쉬움으로 울먹이는 장호를 바라보던 상진이 뚜벅뚜벅 대기실을 걸어나간다. 그리고 행패를 부린다. 상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심사를 다시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가 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고, 5분이면 된다고, 오늘을 위해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이 무대에 서고 싶어서…….
이제 상진에게 중요한 것은 성악 천재 장호의 재능이 아니라, 그 재능에 주어질 상찬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제자의 노력이, 간절함이, 힘들게 준비한 과정 그 자체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제자가 받을 상처와 좌절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몸부림치는 스승의 절절함과, 그 스승의 마음을 읽은 제자의 눈물이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무대가 눈시울을 적신다. 세상의 어떤 화음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재능은 신의 축복이지만, 재능을 꽃피우는 것은 인간의 손길이다. 천상의 목소리가 영혼을 울린다지만, 한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열망에 귀 기울이고 화답하는 것이야말로 영혼을 구원하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무늬만 선생인 상진을 제자의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참선생으로, 외로워서 조폭이 된 깡패 학생을 전도유망한 성악가로 만든다.
영화는 시종 경박하지 않을 만큼의 소소한 유머를 잃지 않는다. 조연들의 연기도 맛깔나지만, 까칠하고 냉소적인 음악 선생 한석규, 껄렁한 조폭이면서 알고 보면 순진하고 여린 고등학생 이제훈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울컥울컥 마음을 흔든다. 이들이 빚어내는 사제 관계는 때로 웃음을 주고 때로는 애틋하다. 깡패가 성악이라니,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를 배우들의 힘으로 메꾸는 거 아닌가 했더니 실화란다. 실제 주인공은 김천예술고의 서수용 교사와 성악가 김호중.
<굿 윌 헌팅>에서 구제불능 천재 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숀 맥과이어라는 심리학 교수이다. 비뚤어진 윌이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아 건 채 오히려 자신의 재능으로 뭇사람들을 조롱하기까지 할 때, 그는 수학 천재 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한 청년과 그의 상처 입은 내면을 본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 한 마디가 대학생 흉내를 내면서 허세와 가식으로 살아가던 MIT 공대 청소원 윌의 견고한 위악의 성을 무너뜨리고 그를 숀의 품에서 흐느끼게 한다. <파파로티>에서 상진은 장호에게 말한다. “네 목소리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야.” 한 번도 다른 인생을 꿈꿔 본 적 없는 장호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와 가치, 가능성을 긍정해 준 상진을 붙들고 흐느낀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X 같은 선생밖에 없었는데…….” 발목이라도 걸 테니 제발 장호를 놓아 달라고 애원하러 찾아온 상진에게 조폭 큰형님이 하는 말이다. 누구든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갈피 잃은 영혼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절실한 순간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더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