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상투적인 얘기가 되버리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늘상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늦은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조금씩 망각하게 되는 지난날의 수험생활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제라도 지나간 4년7개월여의 수험기간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혼잡한 기간이어서 벌써부터 혼돈이 오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것은 합격수기의 형식이 될 것이지만, 나는 기존의 공부방법론이나 결과적론적인 합격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써야만했었던 것을 한참이나 밀려서 이제야 한꺼번에 쓰게되는 장문의 일기 혹은 기록이라고 해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있을법한 더 힘든 여정에 한번쯤 꺼내어 보게 될 추억으로서...
2. 군에 입대하며...
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3수에 해당하는 나이에 뒤늦게 들어가게 된 대학생활에서 운좋게도 공군조종사관후보생이라는 감투(?)까지 쓰고 장학생으로 2학년까지 마치게 되었다.
나의 꿈은 조금 모호했지만 전투조종사였고 지금도 조종사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할 때가 가끔 있다.
하지만 神은 내가 조종사가 되는걸 싫어하셨는지 결국 그 지위를 끝까지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나는 대학이라는 곳에 머물 이유를 별로 느끼지 않은채 24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때 절망과도 같은 괴로움 속에서 인생진로를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나는 무관에 대한 집착과 제복의 길을 경찰간부라는 출구로 돌린 것이다. 군대에 입대하고 훈련소 생활을 마치며 좀 여유가 생기자 휴가 나왔을 때 나는 거의 정보도 전무한 채 노량진 시중서점에 나와있는 경찰간부용 수험서를 한두권씩 마련하여 복귀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본 책은 얼마나 엉터리 수험서였던지...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나로서는 나름대로 2년 군생활 내내 틈틈히 공부했지만 결국은 얻은게 거의 없다시피 한 셈이다.
3. 군을 제대하며...
98년 7월 11일 그야말로 청운의 꿈을 안고서 군대를 제대했다. "이제 정말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가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으로 한없이 부풀어 올라있었고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했으니 누구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군에 가기전에 공군조종장학생을 중도하차하며 결국 집에서는 등록금 700만원을 전부 되갚아 준셈이고 또한 전문대를 중퇴하고 다시 늦게나마 들어간 대학교마저도 중퇴하다시피 한 그때의 나로서는 집안에 어떤 금전적인 것도 바랄 수 없는 천하 불효자식일 뿐이었다.
벼룩시장을 뒤진 끝에 운좋게 일주일만에 독서실 총무 자리를 쉽사리 구할 수 있었다.
월25만원에 근무는 3교대이고 식사는 독서실내에서 자체적으로 숙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여건이 허락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천우신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노량진에서 정보를 얻어 기본적인 책을 구입한 후 총무를 보면서도 구입한 스탑워치로 하루 13시간이상씩 강행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98년 9월쯤 처음으로 노량진 경찰간부 단과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본격적인 수험의 무대에서 그 때 강사를 포함해 내 주변에서 들려지는 말들은 어찌나 부정적인 말들 뿐인지...모두가 한결같이 합격에 대해서 의구심과 회의를 가지는 풍문들 뿐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에게 그런 것들이 영향을 끼쳤을 리는 만무했다.
4. 99년(48기)의 첫 원서접수...
독서실 총무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99년의 첫 원서접수를 맞이했다.
그러나 99년의 시험은 그렇게 원서접수로서 끝을 맺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지만, 나는 독서실 생활내내 먹는게 부실해서인지 체중이 55Kg이 체 안나갔던 것이다. 평소에도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되겠거니 했던 것이 결국 의기소침해져서 신체검사장에도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말도 못하고 필기시험날에는 일찍 독서실을 나와서 추운 아침거리를 배회하다 돌아오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했겠거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신검장에도 못갔던 나의 소심함과 절박함에 싸여서 더욱 자신을 추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자신이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나의 수험생활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어 가고 있었다. 법학공부를 하면서 법공부에 매력을 느꼈던 나는 결국 방송통신대학 법학과 2학년에 편입을 하게 된다. 얼마나 하고 싶었던 공부였던지 편입하고 나서 꽤 열심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해 여름인가 노량진에 2달과정 경찰간부 종합반 강좌가 있어서 어려운 형편이지만 등록을 했다.
아마 정식으로 학원을 다니게 되었던 때가 아닌가 싶은데,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시 공부에 박차를 가해 꼬박꼬박 모의고사도 치루었고 예·복습도 철저히 하게 되었다. 당시에 팀장이었던 강용택선생과 강길봉선생등의 강의는 시험에 대해서 새로운 무장을 하게 되는 계기였다.
공부하는 와중에는 교재값이나 기타 간간히 다니던 학원비가 정말 만만치 않아서 나는 독서실 총무외에 또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는데, 그 해 여름 6월에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는 태권도 사범이였다.
용인대 출신 여자관장이 개관한 체육관인데 나는 독서실 근무를 야간으로 돌리고 낮에는 자전거를 타고 구일에서 대림근처의 체육관까지 30분정도 페달을 밟아 태권도지도 일을 했다.
관장은 개관한지 얼마 안돼 남자사범이 급했었는지 태권도3단이 나를 4단으로 대우(?)해준다며 흔쾌히 일을 맡겼다.
뒤돌아보면 당시에 얼마나 욕심이 과했던가...하고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운동에 대한 욕심이 부족한 돈이라는 핑계로 작용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결국 허했던 내몸에 살이 붙기는커녕 과로로 힘든 상태였고 또한 체육관 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독서실 야간근무시 떠들던 여학생을 훈계하던 도중에는 일이 터지고 만것이다.
당시에 항상 떠들던 한 여학생이 피차 좋을 바 없이 내눈에 띄어 나는 결국 노발대발하고 말았고 일이 불거져 나는 심한 자책감과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 독서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냥 그렇게 독서실 생활을 마무리 하고 싶었지만 독서실 2개를 운영하던 실장은 나를 목동에 있던 다른 독서실로 근무하게끔 도와주셔서 6월말에 안식처를 옮게게 되었다.
지금 생각건대 체육관 생활은 나에게 값진 경험이었고 2000년까지 이어진 독서실 생활은 수험생활을 떠나 내 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추억거리를 제공해 준 곳이었다고 나는 고백한다.
5. 2000년(49기)의 두 번째 시험...
목동 독서실 자리로 옮긴 후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몇달후 체육관 일을 접게 되었고 시험에 임박해서는 근무시간 외에 근처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자리를 옯겨 공부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해 2000년 시험접수 후 체중에 대한 강박관념을 안고 처음으로 서울청 신체검사장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에는 어떻게든 통과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페트병을 서너개 준비해 가서 들어가기 전에 물을 엄청 마셨다. 처음 체중계에 발을 올리는데 1Kg이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감독관은 돌아가서 물을 좀 먹고 오라고 권장했는데 이미 물을 많이 마신 상태지만 돌아가서 마시고죽자는 식으로 물을 입에 대고 부었다. 결과는 56.5Kg...
결국 그분은 57.5Kg로 기재를 해주었다. "꼭 합격하세요"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그 때 신검통과후의 시험에 대한 나의 자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아리의 장훈고등학교에서의 첫 필기시험은 나의 머리를 혼란시켰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고 자부했었던 시험인데 영어는 말할것도 없고 형법이나 국사, 행정학등도 도통 알 수 없는 내용들 뿐이었다.
한가닥 희망을 안고 필기합격자 발표를 직접확인하려고 서울청까지 전철을 타고 가며 온갖 잡념을 지울수가 없었지만...시험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6. 본격적인 수험생활...
2000년 7월이던가 우연히 장학생선발 모의고사 전단을 보고, 신림동 한국법학원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돌아오면서 내심 "꼭~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전체에서 3등을 했는데 1~3등은 "01년 50기 시험전까지 학원에서 개설하는 모든 강좌에 대해서 50%할인을 받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커다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여자친구에게 조심스럽게 8월부터 총무를 관두고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부하면서 내년 시험에 승부를 내보고 싶다고 내비치고 재정적인 지원을 부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왜 여태껏 고집을 부렸냐는 듯 책망하는 눈초리였다. 흔쾌한 허락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약 2년여의 독서실 총무 생활을 마무리하는 나로서는 떠나는 감회와 신림동에 소위 입성(?)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고시원비용을 여자친구에게 맡기고 어렵게 집안에 얘기해 한달에 10여만원의 생활비를 타 쓰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여 나태해질 수가 없었다.
강의는 미리 첫회를 들어보고 꼭 필요한 강의만 선별해서 들었고 기타 생활을 단순화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매일매일의 공부시간을 스탑워치로 체크해서 기록하고 부족한 부분을 과감히 서브정리하기 시작했다. 산중턱 조그만 고시원 창문으로 보이는 신림동의 야경들이 나를 우울하게 할 때가 많았지만 내 앞에는 있을 리 만무한 "50기 경찰간부후보 수석합격"이라는 나만의 표어를 당당하게 붙여놓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름대로 신검만 통과하면 반드시 필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감이 오는 듯 했다.
7. 2001년 50기 경찰간부후보생 응시
그러나 시험이 다가올수록 필기시험에 대한 자신감과는 반대로 고집스럽게 불지 않는 체중에 대한 초조감은 커져만 가고, 우여곡절로 최신 전자저울까지 고시원 방안에 들여놓고 매일매일 체크하는데. 어쩌면 이다지도 체중 따위가 내 수험생활에 있어서 큰 화두가 되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2월의 추운겨울 아침...나는 역시 페트병 4~5개를 마치 소중한 무기인양 가방에 싸넣고 서울청 신검장으로 향했다. 탈의실에서 옷갈아 입으면서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들어간 그 신검의 현장!!
돌아보건대 신검통과는 천우신조가 아니었는지...예전처럼 또다시 체중미달로 한번 거부되고 죽자살자로 들이킨 물은 나를 56.5Kg밖에 늘이지 못했다. 그때 측정관의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정도면 됐네. 됐어..."하고 그는 57Kg으로 기록을 해주었던 것이다.
의기양양한 나는 모든 것에 자신감이 있었고, 그때부터 필기시험에 임하는 그날까지 행복한 마음으로 엄청난 공부량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8. 낙심속의 사회생활과 또다른 캠퍼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50기 필기합격자 발표날!!
이번에도 역시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합격에 대한 어느정도의 확신과 마치 신성한 명단확인이라는 어떤 의식(?)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울청으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명단에서 내이름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에서부터 재차 보게 되면서 나는 하늘이 캄캄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이런 것인가!
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언제까지 신세질 수 없었다. 8월까지 직장생활하면서 돈을 모아 다시 신림동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마포에 있는 삼성래미안 지원센타 반장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기술 하나 없는 나는 오로지 친구의 추천으로 채용된 셈인데... 말이 거창하지 사실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이었다. 24시간 2교대 체제였지만 나름대로 급여도 괜찮고 야간에는 공부도 할 수 있을것 같았다.
어느날 저녘 퇴근해 있는데 몇일전 신청해둔 성적확인통보서가 종합학교로부터 도착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확인해 보는데 아무리 눈씻고 봐도 객관식 점수에서 행정학이 "0"점으로 기재되 있는 것이다.
물론 주관식은 채점조차 안되었고...내가 계산한 행정학 예상점수를 합한다면 객관식 커트라인은 이미 상회하는 점수였다.
다음날 회사에서 곧바로 종합학교로 전화를 해보니 담당하시는 분이 아마도 답안지 마킹이 잘못된 것 같다고 하신다.
나는 바로 답안지 확인을 요청했고, 나중에 다시 전화해보았으나 자체적인 회의결과 답안지 확인은 불가하다고 한다.
그리고 컴퓨터오류의 가능성도 시사하였고 또한 이번에는 "0"점 처리된 사람이 꽤 되더라는 얘기, 마지막으로 행정학을 빼고도 이 정도 점수면 1년 더해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거란 얘기를 고맙게도(?) 덧붙이며...
머리가 어지럽고 참담해서 잠시 아파트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가슴이 마구마구 쿵쾅거렸다. 나는 기필코 자신컨대 답안마킹을 잘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 확인할 수도 없는 이유로 고배를 마신 거였던지, 힘들게 직장생활을 해야하는 지금의 초라한 내모습...이대로 넘어가기는 싫었다.
적어도 그때의 심정은 행정소송이라도 불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해 여름 이미 방송통신대학을 3학기 수강했던 나는 법학공부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어 다시금 4년제 대학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중퇴 고졸이라도 경찰간부에 대한 자신감과 조직에서의 승부가 용기백배 했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좋아하는 공부라면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결국 아주대학교 법학부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고 직장은 개강후 2주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남지 않았던지 나는 수험생이라는 것도 잊은 채 학과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고 결국 겨울방학에 받아본 나의 성적은 교양 한과목 B+을 제외한 전과목 A+을 받을 수가 있었다.
군대가기전에 다니던 대학에서 "올F"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던 나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등록금 부담이 되었던 그즈음 다음학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캠퍼스를 거닐면서 한학기를 마친후 겨울방학이 되어서 다시 신림동 고시원을 찾았다. 남들보다 여러일들을 해야 했던 나로서는 막판에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해 겨울 또 한번의 전쟁을 다짐하며...
9. 시련과 재기의 2002년...
또다시 새로운 2002년이 밝았고 어김없이 나의 시험접수는 시작되었으며 나는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신체검사장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때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신검이 엄격해져서 기준치 이하는 조금의 재량도 허용치 않는다고 수험표 배부시부터 겁을 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결론적으로 0.3Kg의 체중부족이라는 결과를 나았고 그것은 예전처럼 죽을만큼 먹은 물로도 이상스럽게 채워지지가 않았다. 측정관의 안된다는 손사래와 매정한 목소리는 애걸을 넘어서 분노로 바뀌게 하였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신검장을 뒤로해야만 했다.
작년에는 답안지마킹실수(검증되지 않은)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그리고 올해는 결국 또다시 시험도 못보게 내쫓는 결과로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나는 이미 경찰을 등지고 멀어지고 있었다.
꽃피는 봄의 캠퍼스...
묵묵히 학교생활에 열중하며 나는 나와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경찰간부에 대한 미련을 버린 듯이 생활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법학공부를 하며 또 한학기를 마치고 우연히 간부후보생51기 홈페이지를 방문한 나는 작년에 같이 공부하며 친했던 "장현덕"이라는 후보생이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본다. 바래지는 자존심과 함께 가슴이 한없이 벅차오름을 느끼면서 내 자신까지 속여온 지난 몇 달을 돌아본다.
결국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심하게 중독이 된 것이다.
벅찬 가슴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져 하반기 계획을 세우고 여름방학을 기하여 다시금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나이먹은 대학생이 방학기간중 할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몇일을 허송세월하면서 우연히 집앞을 지나다가 충동적으로 신문배달기사 모집을 보고 바로 신문사로 들어간 나는 다음날 새벽부터 곧바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일종의 오기였다.
월드컵으로 쉬는날도 없이 새벽에 일했던 그해에 시작된 신문배달은 결국 본의아니게 2학기 개강후를 훨씬 넘어선 11월에 가서야 끝이 났고, 나는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고 수원의 학교를 가서 수업을 마친 뒤 다시 곧바로 신림동의 독서실로 향한 후 밤12시가 다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는 어느 새벽 아침, 오토바이에 신문을 가득싣고 나간거리에서 신문한부를 넣고 달려와보니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며 주섬주섬 신문을 모아담고 있으려니 참담한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름대로 체중관리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고,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힘들게 2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었지만, 자금사정상 계속해서 집과 신림동독서실을 통학했다.
고시원에만 있었던 지난날보다 시간관리도 철저히 했고 오가는 버스안에서는 요약한 서브집과 주관식 과목을 눈으로 훑어 나갔다.
이상스러웠지만 체중도 늘어났고 공부도 잘되는 것 같았다.
10. 새로운 시작...
2003년도가 밝았고 나는 고심 끝에 원서접수를 경기경찰청에 하게 되었다. 학교근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작년의 악몽이 되살아나서였다.
체중문제는 해결된 듯 했지만 여전히 신검장에서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서 수원의 경기청으로 향했는데...
정말 그렇게 뛸뜻이 기쁠 수가 없었다. 체중은 이미 초과되어 있었다. 이런 내마음을 누가 알것이며 누구에게 얘기할 것인가...나는 마치 합격이라도 된 양 신이나서 이제 필기시험이 몇
일 안남았지만 죽을만큼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왜 그리도 기뻤는지...
시험은 생각보다 만만치는 않았다. 시험장에 아는 사람은 없었고 항상 그렇듯이 모두들 고수같았고, 나만 외톨이인 듯 했다. 특히나 답안 마킹에 신경을 쓰고, 주관식 답안은 50분내내 쉬지않고 저리는 손을 쥐어짜가며 속사포같이 써내려 같다.
필기발표를 몇일 남겨두고 안양의 모백화점에 여자친구와 쇼핑하면서 이번시험 발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중이었다. 무척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그순간 핸드폰이 울렸는데 먼저 들어간 51기 "장현덕"씨였다.
~~~뭔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서둘러 한쪽에서 전화를 받은 내가 들은 한마디는 "경환씨 축하해"였다. 뒤이어 51기 "양희성"씨에게도 축하전화를 받았다.
아~~꿈이 아니구나...
그후 적성검사 / 체력검사 / 면접을 최선을 다해 마치고 마음을 조리고 있던 중 역시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다른 친구에게서 최종합격축하 전화를 받았다.
아~~정말 합격이란건 이렇게 -문득- 찾아오는 것이구나...!!
11. 마치는 글
생각보다 장문의 글을 쓰게 되었다.
다시 보건대 상당부분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내용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로 보일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 진심으로 솔직하고 담담하게 글을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내용을 줄이려고 몇번 검토했지만 효과가 별로였고 더군다나 글을 쓰는 의도상 내 스스로의 독백과 일기라는 생각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수험기간이 길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기에 섰다. 그러나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건대 절대 우연 따위는 없으며 결국에는 이렇게 여기에 당당히 서기 위해 모두가 계획된 길이었으리라 굳게 믿는다. 심지어 답안지 채점누락과 신검탈락등의 경험까지도... ...
어렸을 때부터 이 길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주 농후하게 4년 7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했고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바라고 원하던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돌아보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던 듯하다. 나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실패했고, 종종 적잖은 시련과 중도하차의 경험을 해야만 했다. 지금 이순간 다시 한번 회고해 보건대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하던 당시에 나에게는 모든것이 있었음을 느낄수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 그리고 항상 힘이 되주는 여자친구와 내꿈을 펼칠수 있는 조국땅을...
이제 어쩌면 가장 작은 것을 성취한 지금의 자리에서 절대 멈추지 않는 열기를 가지고 나는 앞으로 전진해 보고자 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모든이를 부요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첫댓글 전진하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