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1896년 ~ 1948년 12월 10일)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1896년 4월 28일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출생한다. 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9월 1일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913년 3월 28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해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한국인으로 4번째, 여자로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 셈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동경의 여자유학생 30명 가운데 나혜석이 제일 뛰어나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혜석의 일본유학은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와 재정적 기초가 있었던 탓이었다.
이미 오빠 홍석(弘錫)과 경석(景錫)이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교육을 받았고,
특히 나경석이 나혜석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일본 유학을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오빠 나경석과 조선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학우회(學友會)의 기관지 학지광에서
인쇄인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약혼자 최승구를 통해 사회적이며 민족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최승구가 1917년 26세로 폐병으로 죽자 당시 19살이었던 나혜석은 깊은 충격으로 정신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나혜석은 1917년 10월 17일 동경 조선교회당 내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여자친목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회장에 김마리아 서기 정자영(鄭子英) 부서기 김충의(金忠義) 회계 현덕신(玄德信) 등이 선출되었다.
또한 나혜석은 허영숙(許英肅), 황애시덕(黃愛施德) 등과 함께 여자계의 편집위원으로 선출되어
편집부장인 김덕성(金德成)을 보필하였다.
여자친목회 관계자들은 이후 3.1운동 당시 함께 긴밀히 연결되어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자계는 창간 이후 경비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전영택과 함께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오가며 간행기금을 호소하기도 하고, 또한 출연금을 내서 발간에 힘쓰게 되었다.
나혜석은 1918년 3월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여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다가
건강이 나빠 익선동(益善洞) 자택에서 요양하면서도 여자계를 위해 힘을 쓰고 있을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1919년 경성부 운니동 37번지 집에서 혼자 그림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동경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일본에서부터 같이 활동하였던 김마리아 황애시덕(黃愛施德)을 비롯하여 당시 여성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이화학당의 교사들이던 박인덕(朴仁德)신준려(申俊勵) 등과 더불어 비밀회합을 통해
거족적 독립운동에 따른 지식인 여성들의 역할과 여학생의 참가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혜석은 자금 모집을 위하여 해주, 평양 등 황해도평안도 지역을 돌며 운동을 하였다.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일제의 배려로 면소-방면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옥중에서 곤욕을 치뤘다. 이 때 변호사는 김우영(金雨英)으로 동경 유학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나혜석에게 구애를 해왔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920년 24살의 나혜석은 3년전 상처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던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이러한 일면도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쉽지 않을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해 문예지 폐허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함으로써 화가로서 뿐 만 아니라 소설가로 창조적 역량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신학문을 한 사람들 대부분 문학과 관계를 맺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때였다.
김우영과 결혼한 이후 1927년부터 16개월에 걸친 유럽여행은 서양화가 나혜석에게 또 다른 미술 흐름을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귀국한 남편보다 1년간의 더 프랑스 파리에 남아 있던 나혜석은 당시 중추원 참의였고 언론사 사장이었던 최린과의 염문설로 이혼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혜석은 남편의 주선으로 프랑스 파리에 그림공부를 할수있는 특혜까지 얻어 프랑스에 간 것이다.
친일파로 변절한 독립운동가 최린과 눈이맞아 두 아이의 엄마로써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이를 알게된 남편 우영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것이다.
금전에 쪼들린 나혜석은 최린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최린의 비서관이 거절하자. 신문사에 공개적으로 정조유린에 관한 손해배상청구를 공개하였다.
나혜석은 이러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게재하여 부조리한 가부장적 가치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나혜석은 이혼을 당한 이후에도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제12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특선과 입선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최후의 100여 점의 개인전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싸늘한 반응에 직면하여 붓을 놓은 채 수덕사와
마곡사 등을 전전하며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
미술학원을 차려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김우영과의 사이에서 낳은
3남 1녀와도 남편의 방해로 만나지 못하면서 차츰 폐인이 되어 불행한 생활을 하였다.
3남 1녀 중 막내 아들인 김건이 한국은행 제17대 총재를 지냈다.
서울 인왕산의 청운양로원에서 행방불명된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하여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가 태어난 집도 현재는 집터만 남아 있으며, 남아 있는 작품들도 십여편에 불과하다.
나혜석에 대한 전기로는 《나혜석 일대기 - 에미는 선작가였느니라》(동화출판공사, 1974),
《나혜석 평전》(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등 다수 나와 있다. 연극 《불꽃의 여자, 나혜석》도 그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