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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연합예배의 약사와 소개
약사
• 1947년 4월 6일 06:00 한국교회 최초의 부활절연합예배
장소 : 서울 남산공원
주최 : 조선기독교연합회(NCCK전신)·미군
설교 : 한경직 목사
• 1947년-1969년 한·미 합동 부활절연합예배
장소 : 서울 남산공원(한국전쟁 기간에는 부산에서 개최)
•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부활절연합예배 중지 (각 교회에서 예배드리기로 결정)
• 1962년~1972년 부활절 연합예배 보수·진보 분열
한국기독교연합회측(진보)과 대한기독교연합회(보수)가 주관
• 1973년 보수·진보를 아우른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준비위원회 구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대한기독교연합회(DCC)가 독자적 부활절연합예배 주최를 중단하고 NCC와 DCC측 교회 및 모든 교파와 교회가 동참하는 부활절연합예배를 위해 새로이 <부활절연합예배준비위원회>를 구성 -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개최
• 1977년 부활절연합예배 재분열
NCC - 성공회 대성당 / 비NCC - 여의도광장
• 1978년 하나 된 부활절연합예배 재개
• 1993년 조선기독교도연맹(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부터 최초로 부활절연합예배 축하메시지 당도
• 1996년~2001년 여의도광장 공원화로 장충체육관에서 예배
• 2002년부터 상암월드컵경기장·잠실올림픽경기장 등에서 개최
• 2005년 한기총·NCCK 부활절연합예배 공동개최 합의
• 2006년 4월 16일 2006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개최(잠실올림픽스타디움)
• 2007년 4월 8일 2007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개최(서울 시청 앞 광장)
• 2008년 3월 23일 2008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개최(서울 시청 앞 광장)
• 2009년 4월 12일 2008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개최 예정(서울 시청 앞 광장)
소개
1.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는 민족의 해방과 광복을 주신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1947년부터 시작됐다.
2. 2006년 부활절연합예배부터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의 증진하며 부활의 참 의미를 살리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공동으로 개최했다.
3. 2006년 부활절연합예배는 예배의 공교회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NCCK와 한기총이 공동주최하기 시작했으며, 2007년에는 연합예배 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등 한국교회에 적합한 예배의 예전을 세우는데 주력했다. 2008년 부활절에는 회복된 연합예배의 공교회성과 확립된 예전을 기초로 지역별 기독교연합회·교회협의회 주관으로 개최되는 전국 각지의 부활절연합예배가 공유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4. 준비위원회는 전국 지역기독교연합회·교회협의회 대표들을 초청해 지난 2월 27일 오전 11시에 ‘2009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전국 간담회와 업무협약식’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각 지역별로 개최되는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주제, 표어, 주제해설, 설교본문, 설교제목, 예배문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지역별 요청에 따라 부활절연합예배 포스터와 리플렛 등 홍보물과 예배에 사용할 프로그램북을 보급하기로 했으며 이어서 이러한 합의의 공식화하기 위한 업무협약식을 가졌다.
5. 2009년 연합예배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려왔던 새벽 시간으로 정했으며, 장소 또한 부활절 정신이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도록 대한민국의 중심으로서 상징적인 장소인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 정했다.
6. 2009년 부활절연합예의 주제는 경제위기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보다 근본적인 위기의 탈출은 경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한명한명의 마음 속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교회가 먼저 바른 길을 걷기를 소망하는 차원에서 ‘부활과 희망’을 주제로 잡았으며, 표제를 ‘일어나 희망을 노래하자!’로 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인 부활과 그리스도교 실천을 희망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하였다.
7. 예배순서는 2007년에 정립한 한국적 예배예전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예배당일 현장 상황에 적합하도록 말씀과 성찬성례전을 중심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올해에도 연합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성찬식이 거행된다.
8. 더불어 일치와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한 교회의 뜻을 담아 ‘2009년 남북교회 부활절 공동기도’를 예식에 포함하였다.
2009년 부활절 연합예배 공동문건
1. 주제해설
1.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주후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쓴 편지입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로서 탄압 받고 있는, 이제 막 성장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였습니다. 베드로서의 저자는 복음을 전달받고 세례를 받은 후, 신앙생활의 입문에서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고난에 의미를 주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증언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4,12-14)
이들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과거에 이방인들이 즐겨하던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곧 방탕에 빠지고 욕정에 흐르고 술에 취하고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고 가증한 우상숭배를 일삼아왔습니다’(4,3).
스스로 나그네였기 때문에 부단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그런 생활조건은 그들의 철저한 개인주의적 욕구의 충족과 자신의 안정 확보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거지가 거지 사정 안다고 다른 거지를 돌보아 주기는커녕, 다른 거지의 쪽박을 깨부수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지극히 노출된 욕망의 전장과 같은 상황에 그들은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부단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부족하다 싶으면 남을 헐뜯고, 잘났다 싶으면 우쭐하며, 약한 이를 경멸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허영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여러분은 모두 나그네들이니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극진히 대접하십시오.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 하십시오’(4,9-10)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이들 소아시아의 공동체 안에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쓸데없는 말을 퍼뜨려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오해시켜 곤궁에 빠지게 하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낙심한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씀 합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 분은 모독을 당하시면 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 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2,22-23).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 참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2,21)
교회가 시험에 빠지고 분열되는 대부분의 원인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말 때문이라는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서 유대의 지혜서 ‘탈무드’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하라고 하나님이 사람의 입을 하나, 귀를 둘로 만들었으며, 혀를 다스리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혀를 다스리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탈무드에 따르면 혀에는 뼈가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뼈도 없는 혀가 총칼을 지니고 있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사람을 죽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 그 말 때문에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도 말 때문입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오해를 받고 낙담하여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해받을 일도 없습니다. 직분도 맡지 않고 가끔씩 주일을 지키는 교인들은 교회 때문에 상처받을 일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두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오해와 불신이 쌓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말은 말로써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저자가 권면하듯이 ‘선한 일을 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2,15).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로서가 아니라, 오직 선한 행동을 통해서만 막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상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산돌로 지은 집’입니다. 집을 짓는 데는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의 돌이 필요합니다. 둥글거나 모나거나 각진 돌, 크거나 작은 돌, 빨강 색, 검은 색, 하얀 색 등 모든 돌 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할 때, 집은 견고하고 균형을 잡게 됩니다. 모든 크기와 형태의 돌이 집을 짓는데 필요하다는 것이 그러나 곧 각각의 돌들이 자신의 권리와 위치를 주장하고 고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라는 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머릿돌,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신 집은 거룩한 집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셔야 합니다. 교인들의 신분이나 성격의 다양성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머릿돌 위에서만 섬기고 봉사하며 선교하는데서 일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은 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죽은 돌은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의 형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산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산돌로 지어진 집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산돌입니까? 어떻게 돌이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산돌은 집 짓는 분의 뜻에 자기를 맡겨 자기 모습을 변화시키는 돌입니다. 오직 산돌만이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어 다른 돌들이 자기 곁에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제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집 짓는 분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깎아내고 다듬을 때에 서로 다른 돌들이 마침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오해와 불신과 갈등 역시, 우리가 스스로를 깎아내고 집 짓는 분의 뜻에 우리를 맡겨 순종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형태만을 고집하는 죽은 돌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산돌은 어떤 돌입니까? 산돌은 스스로를 낮추어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는 돌입니다(벧전 5,6-7). 하나님을 향한 순종, 이것이 신앙의 처음이며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때가 이르면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은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벧전 5,6-7)는 말씀을 의지합니다. 산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부단히 움직이고 구르고 그래서 닳고 깎이고 더러워지는 것 같아도 마침내 그 돌을 사용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 위에 크고 아름다운 신령한 집을 세우실 것입니다.
3.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박해와 고난을 받은 것은 그들이 비타협적인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차원에서 배척과 중상모략을 받았고 심지어는 범죄자로 취급받아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과 역경의 한 복판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거나, 인간을 피안의 세계로 옮겨 신격화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신비한 황홀경의 체험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첫째 편지의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거듭나야 할까요? 저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벧전 4,7)이라고 합니다. 가까이 온 종말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빠른 기후변화는 가까워진 지구파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무엇보다 기후변화로 지구 자체가 위협받는 이 시대는 인간이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세계는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이익의 극대화에 눈이 어두워진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적이고 글로벌화한 금융자본, 세계화 지상주의, 시장근본주의의 파국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충격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18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되는 수입에 의존해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반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인구는 가장 가난한 사람 57퍼센트의 수입을 모두 합한 것과 같은 액수의 돈을 법니다.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200만 명에 달하며, 이들은 대부분 남반구에 밀집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은 4억 명이었으나 현재는 8억 5,4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구상에는 지금도 해마다 세계 인구의 1퍼센트인 6,200만 명이 무슨 이유로건 사망합니다. 그런데 2006년의 경우, 이 중에서 3,600만 명 이상이 기아 또는 영양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기아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사망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아란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살해당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리고 이 살인자의 이름은 바로 ‘부채’라고 장 지글러는 지적합니다.
세계는 빈곤을 충분히 극복하고 남을 재화와 자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빈곤의 극복보다 군비를 위해서는 더 많은 재화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군비지출총액은 2004년 1조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그 가운데 47퍼센트는 미국이 집행합니다.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에는 이라크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전광판이 있습니다. 프로젝트 빌보드 협회에서 제작한 이 전광판은 2004년 8월 25일 수요일 1,345억 달러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액수는 하루에 1억 7,700달러씩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당 740만 달러, 분당 122,820 달러에 해당합니다. 이라크 전쟁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은 매달 48억 달러(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의 1년을 대상으로 할 때)를 전쟁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유엔 개발계획(UNDP) 2006년 년례 보고서에 따르면, 해마다 850억 달러씩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기초적인 교육과 기초적인 의료, 적절한 영양, 식수, 기본적인 위생 시스템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는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융시장질서를 바꾸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성도 전망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국제연합(UN)같은 국제적 조직을 만들어 지구적 차원에서 재발 가능한 경제위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치적 의미에서도 국제연합(UN)의 가능성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2009년 창립 64년을 맞는 유엔이 앞으로 그리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보인다고 장 지글러는 전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연합이 선택한 해결책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국제연합은 ‘우리 후손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면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제안하면서, 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동시에 노동시간도 함께 줄이고, 물질만능주의보다 전통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민간영역보다 공공영역(의료보험, 퇴직연금)을 확대하고, 세계의 공공재(자원, 지식)를 민영화하는 대신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성은 자연적, 사회적 삶의 원칙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한성장으로 인한 생명 소멸의 위험과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사회적 위험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한 증식을 그 본질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사회관계를 어떻게 초월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구조적이고 세계체제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조적 대책을 마련한다고 해도 빈틈은 있기 마련이고, 과연 미국이 달러 패권을 스스로 제한할 것인지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형태의 경제위기와 파국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와 삶에로 방향전환을 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이’에서 ‘보다 적게’, ‘보다 빠르게’에서 ‘보다 느리게’, ‘보다 높게’에서 ‘보다 낮게’로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런 삶을 행복하게 실천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전환은 오직 회개와 생명의 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구조적 대안의 모색과 개인적 삶의 전환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 S.J)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난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결합되지 않으면 맘몬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은 이 지구가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맘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맘몬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가난으로부터 오는 자유’를 행복하게 누릴 때입니다. 숭배자 없는 우상은 힘을 잃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먹고 살면서 생명을 파괴하는 맘몬으로부터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설 때, 인류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샘이며, 생명, 곧 충만한 생명, 완전하고 파괴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영원한 생명을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 이전에 가져오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나타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이 빛으로 왔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보내는 생명의 영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보내심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과 놀라운 생명의 기쁨이 계시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생명이 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받아들여지고, 죽음의 악령이 축출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교를 이 세상에 가져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이 생명의 복음은 우리 시대에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낯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죄를 ‘용서’하고, 파멸의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상처받은 생명을 ‘구원’하게 합니다.
또한 생명의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상호 의존하게 합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해 있으며, 함께 서로 위하면서 살아갑니다. 생명은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생명을 나누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영은 사람 사이의 생명공동체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 사이의 생명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영이 위에서부터 부어지면, 사막은 밭이 되고 밭은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라’고 예언자 이사야는 노래했습니다(사 32,15-16).
사람은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창2장). 이 흙은 우리 모두의 환경이며 ‘우리의 어머니’(시락서 40,1)입니다. 흙은 우리가 서 있는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흙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명권과 대기권을 포함한 지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는 흙을 단순히 물질, 혹은 투기수단으로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적 재앙과 파국이 우리를 덮쳐오기 전에 하나님의 땅의 거룩함을 다시 회복하고 존경할 때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영은 ‘새 하늘과 새 땅’(계 21장)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없이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새로운 땅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고 독일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종교인들이 오히려 구원의 대상이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다시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일까요? 종교의 가르침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낡은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인류가 그 곳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지혜의 보고라는 점에서 ‘오래된 새 길’, ‘새로운 옛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종교가 주장하는 근본가치, 곧 ‘오래된 새 길’을 스스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적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가치들 가운데 우리 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것은 ‘생태적 삶’, ‘평화와 정의와 공영의 삶’, 그리고 ‘대화적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과 발언권을 회복하고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 실존을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바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도 세상 안에 삽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병들어 아프고, 마침내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새로운 가치란 우리 시대의 ‘주류가치’,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더 높이’에 대한 ‘대항가치’이면서, ‘대안가치’여야 합니다. ‘더 적게’, ‘더 작게’, ‘더 늦게’, 더 낮게‘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종교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기쁘고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가치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이미 실현된 현실처럼 생각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미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가능의 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혁명적 본질입니다. ‘혁명’(革命)은 본래 ‘가죽에 쓴 신의 명령’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서양 전통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는 천문학과 관계되어 코페르니쿠스(Kopernikus, 1473-1543)의 작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에서 최초로 등장하며, 혁명은 ‘규칙적이고 순환적으로 움직이는 천구운동으로서,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저항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새로움이나 폭력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점차 혁명이 정치권력의 폭력적 이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본래 혁명은 하늘의 뜻과 관계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실현하려는 시도야말로 유토피아 운동이고, 종교적 혁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는 불가능한 새로운 가치를 이 낡은 세계 안에서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가치’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전환, 회개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욕망을 제어하고 고통 받는 이웃과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의 저자는 이런 전환, 인간의 거듭남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를 죽임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 자신의 행동,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 변함없고 끝이 없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희망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벧전 1,5)는 말씀으로 보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은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벧전 3,15)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벧전 1,15-16). 거룩함이란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고통 받고 시험에 빠지고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전적으로 다른 삶, 곧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삶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는 사람, 미래로부터 현재를 보는 사람,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절망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산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일어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2. 공동설교문
• 설교 제목: 일어나 희망을 노래하자
• 성경 본문: 예레미야 29:10-13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베드로전서 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0:26-29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땅과 이 민족,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여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침체와 경제적 불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는 화해와 평화 보다는 대결과 갈등을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의 한파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사회는 양분화 되어 극심한 혼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생태계가 변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이 세상은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될 것이라는 보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혀 내일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않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절망과 고통은 더 크고 힘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탐심과 불의에 빠져서 온갖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었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포로가 되어 잡혀가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며 서로 돌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려는 탐심으로,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과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고통도 같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인간의 극악한 탐심 때문에 경제 위기가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짓밟은 이 세상은 점점 어두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공의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불의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징계 아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그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징계하였지만,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 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그들에게 장래를 약속하고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미래를 가지며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분을 찾고 찾으면 만나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우리의 탐심으로 인하여 파괴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생명 중심의 소중한 가치 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질서를 향한 희망과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실 뿐만 아니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미래를 보여주면서 희망을 약속하는 분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분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사랑하는 스승을 여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 죽어 무덤에 장사되어 버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실망했고, 그를 따름으로 받게 될 고난을 생각하면서 깊은 절망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다시 사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의심 많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는 옆구리와 손의 못 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도 하였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의 살아나심을 보여주시고 새 소망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걸어가는 길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복음의 증거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순교할 정도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감 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6). 또한 예수님은“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 6:40, cf. 44, 54).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소망을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망 가운데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1f, 살전 4:14). 또한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3-4).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죽음의 질서를 넘어 부활의 산 소망 가운데 사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에서 일어나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죽음의 옛 질서에 얽매여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 질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문장생략> 죄로 향하던 육체의 소욕을 벗어버리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탐심으로 비롯된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됨으로 영광스러운 은혜의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다시 한 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합시다. 그 분을 믿는 신앙 가운데 이 세계가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은 대결과 갈등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이 평화와 화해의 새 길을 열어야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유 때문에 갈라지고 일그러진 우리 사회가 화해와 공존의 새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위에 도덕과 경건이 유지되는 정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돈과 물질에 대한 탐욕에 기초해서 생명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경제가 아니라,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줄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질서가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희망은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그것은 반드시 올 것이고, 또 지금 오고 있는 미래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교회와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시애와 질서를 향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으로 오늘을 이기며 삽시다. 비록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크지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할 것을 잊지 맙시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신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42-44).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3:2). 바울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확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낙망하지 맙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린 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해서는 안 됩니다(고전 15:32).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루매 거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믿음 가운데 행진합시다. 나의 죄성을 죽여 버리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역사하는 삶을 삽시다.
바울은 로마서 6:8-11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앎 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바울은“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31). 매일 자신을 죽이면서 하나님만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영적인 침체, 경제적 위기, 사회적 혼란을 극복합시다. 위기와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부활의 희망 가운데서 새 삶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바로 그 희망과 위로의 전령이 됩시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능력을 기대하면서 이겨 나갑시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이 민족 위에, 그리고 온 세상 땅 끝까지 퍼져가길 기원합니다(*).
3. 예식 순서와 담당
• 식전 행사
✔ 대회사 _김삼환 목사(NCCK 회장)✔환영사 _엄신형 목사(한기총 대표회장)
• 예식
❏ 집례이정익 목사(준비위원장)
Ⅰ. 모임 예전
개회기도 집례자
경배의 찬송(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승천 하셨네)
Ⅱ. 말씀 예전
기도 이영훈 목사(기하성)
성경 봉독
1. 예레미야 29:10~13 신화석 목사(예성)
2. 베드로전서 1:3-4 임성이 장로(감리교)
3. 요한복음 20:26~29 지관해 목사(복음)
찬양 연합성가대
설교 오정현 목사(예장합동)
신앙고백 다함께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부활과 생명나눔을 위한 기도박성배 목사(기하성)
2.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오덕교 목사(예장합신)
3.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용호 목사(고신)
4. 세계와 지구를 위한 기도양병희 목사(합동정통)
남북교회 공동기도문 낭독김광준 신부(성공회)
권순직 목사(한기총)
Ⅲ. 성만찬 예전조성기 목사(준비위원장)
평화의 인사 다함께 *구세군 악대
봉헌
* 봉헌기도황형택 목사(예장통합)
성만찬 초대❏ 성만찬 집례 고수철 감독(감리회)
손인웅 목사(예장통합)
성만찬 기도김요셉 목사(예장대신)
성만찬 참여다함께․배병배잔위원
성만찬 후 기도지형은 목사(기성)
Ⅳ. 파송 예전 Sending
광고집례자
결단의 찬송(부활하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축도서재일 목사(기장)
위탁과 파송전광표 사령관(구세군)
최병남 목사(예장 합동)
성가대 후주
4. 공동기도
부활과 생명 나눔을 위한 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받은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넘치는 은혜와 생명을 얻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받은 것조차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회개하오니,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이제부터는 받은바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의 어리석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만드신 이 세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켜나가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누리게 된, 허망한 번영과 파괴적인 생활의 즐거움이, 저희에게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바른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 연약한 존재이지만 성령 안에 굳게 서서, 주님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 나가는 구원역사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자연을 살리고 보존하는 일, 기아와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과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얻은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일에 저희의 작은 힘과 정성을 모을 수 있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복음을 따라 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곧 함께 사는 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생명을 살리기 위한 저희의 작은 몸짓과 노력이, 새 생명을 만들어가는 귀한 역사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 이 민족을 얽어매고 있던 죄악의 사슬을 깨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와 빛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자비하신 주님 !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셔서, 한국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시고,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는 교회가 되어, 날마다 부흥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희가 어리석어서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지 못하고, 허망한 욕심과 이기적인 목적을 따라간 결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여러 갈래로 찢어지게 하고, 크나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그간의 지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 갈라진 교회가 복음 안에서 다시 일치를 이루게 하옵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서,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는 힘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섬김의 삶을 사신 주님 ! 저희도 주님처럼 이 민족과 세상을 섬겨서, 한국교회가 산위에 있는 마을처럼 마땅히 밝힐 빛을 발하게 하옵소서.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지치고 소외된 영혼의 쉼터이자 새 힘을 얻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능력의 주님 !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충만히 비추어 주셔서, 이 땅에서 불의와 부정이 사라지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 나라가 복음으로 하나가 되고, 여러 가지로 찢겨진 주님의 교회 또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작고 보잘것없던 나라가 외세의 침탈과 민족분단의 아픈 상처를 딛고, 경제적 성장과 영적인 부흥을 이루어, 세계의 부러움을 받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총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믿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 민족은 지금 또 한 번의 위기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위기에서부터 시작된 경제적인 어려움이 지금 이 나라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린 실직자들과 해고의 위협 아래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들, 그리고 요동하는 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민족 모두가 힘을 합해서, 지금의 경제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 가는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도 헤쳐 나가기 어려운 시대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안에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대립, 반목과 불신이 깊어져만 가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저희의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시어, 지혜롭고, 이타적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가진 것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를지라도, 그것 때문에 서로 나누어지고, 시비하고,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개인적인 이해와 욕심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갈라진 이 민족을 하루속히 하나로 회복시켜 주시고, 이제는 물질적인 성장과 배타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우선하는, 그리스도의 영성이 살아 숨 쉬는 나라와 민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계의 평화와 지구를 위한 기도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주님! 그 아름답던 세상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다툼의 자리가 되고, 파괴되어 황폐해져 감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보존되는 아름다운 세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력을 다하게 하옵소서.
새로운 삶을 주시는 주님!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특별히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실직자들과 비정규직 근로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정성을 다하여 살지만 항상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이 땅의 농민들과 새터민, 그리고 다문화가정을 기억하시고, 그들이 구조적인 어려움에서부터 벗어나, 삶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도록 도와주옵소서.
또한 세계 곳곳에 있는 굶주린 자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해 먼저 저희들이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정성을 다하게 하옵소서.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이 끝이 나게 하시고, 종교 간의 갈등이나 인종 간의 반목과 차별, 계층 간의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종교와 언어와 피부색을 넘어서 모든 이들이 서로 믿고, 신뢰하며, 귀중히 여기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화해의 주님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는, 평화로운 새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가족의 담, 이웃의 담, 지역의 담, 사회의 담, 교회의 담, 교파의 담, 민족의 담, 국가의 담을 넘어서, 이제는 저희의 갈라진 마음이 부활의 주님 앞에서 하나로 모이게 하시고, 그 앞에서 참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 2009 남북교회 부활절 공동기도문
부활과 생명의 주님! 많은 이들의 눈물과 기도로 일구어낸
평화와 화해 협력의 길이, 오늘, 적지 않은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을 찾아가던 발길들이 가로막히고,
남과 북은 다시 갈등과 대립으로 돌아서고 있으며,
단절과 오해, 갈등 속에 전쟁의 기운마저 감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낙망하지 않고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드립니다.
자비의 주님 ! 무엇보다 이 시간 먼저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꽃피우기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참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던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민족의 화해와 하나됨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멸시하며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보다 물질과 무력, 힘의 논리를 추종하면서
우리 자신의 안일한 삶을 추구하며 민족의 고난과 분단의 현실에 눈감았습니다.
정의의 주님!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고
어두움과 죽임의 권세들을 두려워하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평화를 말하는 자들과 분열의 세력에 맞서
결연히 일어서게 하소서.
우리를 일깨워 거짓 평화를 깨뜨리며 참된 평화의 역사를 세우게 하소서
생명의 주님!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무엇보다 먼저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하나가 되어
대결이 아닌 화해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분열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민족의 부활인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일구어 가게 하소서
신실한 마음으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굳게 지키며
남과 북이 마음과 힘을 모아 실천하게 하소서.
오늘도 죽음의 권세와 불의를 이기고
모든 고난 받는 자들과 우는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시며
부활과 생명,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아멘.
2009년 4월
(* 이 기도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함께 작성하였습니다.)
◎ 조직구성
고 문 |
대 회 장 |
자 문 | |||||||
양 기구 전회장, 명예회장 |
김삼환 목사, 엄신형 목사 |
참여 교단장 | |||||||
준비위원장 |
예배위원장 | ||||||||
조성기 목사, 이정익 목사 |
양권석 신부, 오덕교 목사 | ||||||||
준비위원 |
|||||||||
서 기 |
회 계 | ||||||||
황선엽 사관 |
허종현 신부 | ||||||||
부 서 기 |
부 회 계 | ||||||||
재정분과위원회 |
시설분과위원회 |
여성분과위원회 | |||||||
홍보분과위원회 |
동원분과위원회 |
청년분과위원회 | |||||||
문화분과위원회 |
안내분과위원회 |
행사분과위원회 | |||||||
• 2009년 부활절 연합예배의 주안점
1. 한국교회 모두가 참여하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되도록 합니다.
⑴‘부활과 희망’, ‘일어나 희망을 노래하자!’라는 2009년 부활절 연합예배의 주제, 표어를 선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주제해설, 공동설교, 예식문, 공동기도를 준비 했습니다.
⑵ 서울은 물론 전국의 부활절 연합예배를 준비하는 조직들과 주제, 표어 등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대부분의 지역이 이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2. 많은 교회가 참여하도록 합니다.
⑴ 예년과 같이 초대교회 예배 양식을 토대로 예식을 만들었으며 성만찬을 순서에 포함했습니다.
⑵ 이 예식은 일반 신자들의 참여는 물론 개교회 목회자들이 배병배잔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⑶ 참여의 폭을 넓힘으로 부활의 의미를 더욱 크게 하고자 합니다.
3.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⑴ 현재 한국사회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⑵ 이러한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⑶ 희망의 메시지는 교회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 드러나게 되며, 특히 예배 헌금은 특히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합니다.
(4) 부활절 연합예배 후 노숙자들에게 부활달걀과 아침 식사를 제공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