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의 탄생지를 찾아 ]
파리 시내에는 큰 공동묘지가 3개 있습니다. 페르 라세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모두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자(死者)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는 공원 구실을 합니다.
* 몽마르트르 묘지 입구
산보 삼아 안으로 들어가 깨끗하게 정돈된 길을 따라 거닐면 책에서 듣던 쟁쟁한 이름들을 묘석으로 만나게 됩니다. 생전에 도저히 근접할 수 없었던 역사 속의 인물들을 당대에 가까이서 대면하는 영광이 묘지에 있습니다.
이중 몽마르트르 묘지는 파리 북쪽, 밤의 환락가인 피갈 지역의 초입에 위치하여 정문이 프렌치 캉캉으로 유명한 <물랭 루즈>에서 가깝습니다. 이 묘지에서는 문인으로 스탕달, 공쿠르 형제, 하인리히 하이네, 테오필 고티에, 알프레드 드 비니, 르낭, 음악가로는 베를리오즈, 오펜바하, 화가로는 프라고나르, 드가 등의 무덤을 순례할 수 있습니다.
* 몽마르트르 묘지 전경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이 묘지를 더욱 빛내 주는 것이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와 그의 소설의 주인공인 춘희(椿姬)의 무덤입니다.
소설 <춘희>에서 <나>는 춘희의 무덤을 찾아 이 묘지에 옵니다. 그때는 묘지기가 정원사를 시켜서 무덤까지 안내를 해 주었지만 지금은 정문의 제복 입은 수위가 사람들이 하도 물어 귀찮다는 듯이 대충 위치를 손가락질하면서 꽃 많은 무덤을 찾아가라고만 할 뿐입니다.
문을 들어서면 왼쪽 첫 길인 생샤를 가(街)(묘지의 길에도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를 조금 올라가면 왼쪽 15구에 과연 유난히 꽃치장을 한 무덤이 보입니다. 하얀 대리석의 관대(棺臺)는 이끼가 끼었습니다. 그 옆면에 "여기 1824년 1월 15일 태어나 1847년 2월 3일 죽은 알퐁신 플래시가 누워 있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춘희의 무덤
알퐁신 플레시는 나중에 마리 뒤플레시로 이름을 바꾼 춘희의 본명입니다. 스물 세 살의 일생...
춘희는 물론 실제의 인물이었습니다. 뒤마 피스의 소설은 작가가 이 춘희와의 사랑을 고백한 것이고 소설 속의 아르망 뒤발은 절반 이상이 자신입니다.
소설에서는 춘희를 일단 가매장했다가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가 그랬습니다. 이 묘역을 사서 무덤을 옮겨준 사람은 춘희가 죽기 1년 전에 런던에서 비밀 결혼한 페레고 백작이었습니다.
묘지 수위에 의하면 하루 평균 20여 명의 <춘희> 독자들이 그 주인공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하이네와 함께 이 묘지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무덤입니다. 한시도 꽃이 끊이지 않습니다. 항상 동백꽃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별명이 춘희(椿姬)였습니다.
폐병을 앓던 춘희는 냄새있는 꽃이 싫어 향기없는 동백꽃을 좋아했습니다.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춘희에게 이왕이면 동백꽃을 바칠 법하건만 꽃들은 장미가 대부분입니다. 동백꽃은 귀해서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묘지 앞에 꽃가게가 두 군데나 있어도 동백꽃은 팔지 않습니다.
* 춘희
춘희의 무덤을 가장 아낀 사람은 뒤마 피스의 딸 자닌이었습니다. 자닌은 아버지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제 아버지의 애인이기도 했던 춘희의 무덤을 수시로 찾아와 깨끗이 청소하곤 했다고 합니다. 1943년 자닌은 아버지가 준 춘희의 목걸이를 목에 건 채 죽었고 그 후로 춘희의 무덤을 간수하는 사람 없이 내버려졌습니다.
뒤마 피스가 동갑 나이인 춘희를 처음 본 것은 18세 대인 1842년 파리 시내의 부르스 광장 앞에서였습니다. 타원형 얼굴에 밤색의 짙은 눈을 가진 가느다란 몸매의 여인이었습니다. 흰 모슬린 옷에 꽃을 수놓은 쇼올을 걸친 채 이탈리아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춘희는 뒤마 피스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쳐다보지도 않고 살짝 웃음을 지었습니다. 뒤마 피스는 난생 처음으로 여자를 본 것 같았습니다. 쫓아가려 했지만 춘희는 어떤 가게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춘희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창부였습니다. 젊고 예뻐 남자를 수시로 갈며 많은 선물들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7명의 귀족이 공동으로 일곱 개의 서랍이 달린 경대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춘희는 늘 초연(初演) 날만 골라 극장에 자주 갔고 대개는 무대 앞쪽의 칸막이 좌석에 흰장갑 낀 손에 동백꽃을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반드시 귀족이나 부자 한 사람씩을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작곡가 리스트도 한때 춘희의 애인이었습니다. 뒤마 피스는 이 춘희를 20세 때인 1844년 가을 바리에테 극장에서 정식으로 대면했습니다.
* 바리에테 극장
파리의 몽마르트르 가(街)에 있는 바리에테 극장은 옛날 그 자리에 지금도 건재합니다. 1백 프랑짜리 표를 한 장 사면 춘희가 앉았던 맨 앞 칸막이 좌석에서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상면의 날, 춘희도 객석을 두리번거리느라고 무대를 거의 보지 않았고 뒤마 피스는 춘희를 쳐다보느라고 무대를 전혀 보지 않았습니다.
춘희가 즐겨 찾아다니던 극장 가운데 아직 남은 것은 바리에테 극장 외에 짐나즈 극장이 있고 보드 빌, 오페라 코믹 등은 없어졌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현재 같은 이름의 극장이 있기는 하나 딴 자리에 새로 생긴 것입니다.
이 극장이 선 보이엘듀 광장의 1번지에 1823년 파리에 처음 나온 뒤마 페르(대 뒤마)가 살았고 이 집에서 같은 층의 세탁부를 사귀어 사생아 뒤마 피스가 태어났습니다.
* 뒤마 피스의 생가
뒤마 피스는 바리에테 극장에서 춘희를 만나던 날 밤 친구와 함께 춘희의 집으로 갔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당탱 가(街) 9번지가 실제는 마들렌가 15번지입니다. 이 집에서의 이 날 야회(夜會)는 소설에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뒤마 피스 자신이 뒷날 이 대목은 구두점 하나도 사실과 안 틀린다고 술회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춘희는 하녀를 불러 밤참을 시키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서투른 솜씨로 감상적인 곡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웃는 바람에 기침이 발작하여 화장실로 달려갔고 얼마 뒤 뒤마 피스가 뒤따라 들어가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뒤마 피스가 직접 소설을 각색한 연극 <춘희>는 이 아파트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페라 극장에 가까운 마들렌 가(街)의 15번지는 아래층은 <BURMA>라는 보석상이고 2층에 이 상점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여기가 춘희의 방이었습니다. 네 칸의 방들은 모양만은 춘희 때 그대로라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불 꺼진 벽난로밖에 없습니다.
* 춘희의 집(2층)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춘희가 이 집에서 죽고 나자 소설의 맨 첫머리에 쓰인 대로 그의 가구와 소지품들은 모두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빗이며 장갑이며, 그리고 춘희의 머리털과 기르던 잉꼬새까지 금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이 경매의 현장에는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즈도 있었습니다.
병상의 춘희는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와 루소의 <신(新) 에로이즈>를 읽었습니다. 죽기 48시간 전 페레고 백작이 달려왔습니다. 병석에는 가정부 클로틸드가 지키고 있엇습니다.
춘희의 운명 장면은 작가 테오틸 고티에가 쓴 글에 나옵니다. 춘희는 죽음에 겁을 먹고 간호원의 손을 꼭 쥐고 있다가 도망칠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세 번 고함을 지르고는 쓰러졌습니다. 뒤마 피스는 춘희의 죽음을 1주일 뒤 마르세이유에서 여행 중에 들었습니다.
뒤마 피스는 춘희가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자 1845년 여름 대판 싸움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춘희의 집은 러시아의 돈 많은 귀족 스탁켈베르그 백작이 차려준 것이었습니다. 마굿간에는 영국에서 사온 새 말과 새 마차가 항상 대기하고 있엇습니다. 춘희가 거실로 쓰던 방 창 밖으로는 왼쪽에 마들렌 성당이 내다보입니다. 춘희의 장례식이 올려진 성당입니다.
* 춘희의 장례식을 지낸 마들렌 성당
그 날 춘희의 관은 동백꽃으로 뒤덮히고 그 뒤를 늙은 페레고 백작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춘희의 집 맞은편의 길 건너 골목은 공교롭게도 춘희의 후예들의 소굴로 화했습니다. 창녀들이 자가용 차를 몰고 나와 빙빙 돌며 손님들을 끌고 있습니다.
뒤마 피스는 춘희가 죽자, 그해 6월 파리 교외의 생 제르맹 앙 레에 있던 한적한 여관 <슈발 블랑(白馬)>에서 3주일 만에 소설 <춘희>를 써냈습니다. <마농 레스코>를 읽고 나서 이것을 자신의 추억과 결부시켜 하루 10시간씩 때로는 16시간씩 정력적으로 집필을 했습니다. 23세 때였습니다.
소설 <춘희>에서 아르망 뒤발과 마르그리트 고티에(춘희)는 세느 강변의 부지발에 집을 얻어 열애(熱愛)의 한 시절을 보냅니다. 부지발에는 현재 <르 카멜리아(동백꽃)>라는 식당이 있어서 뒤마 피스와 마리 뒤플레시(춘희)가 자주 왔던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실제 두 사람이 같이 산 곳은 <슈발 블랑>이 있던 곳에서 가까운 생 제르맹의 호텔 <앙리 4세관(館)>의 빌라 메디시스라는 별관이었습니다. 이 호텔은 뒤마 피스의 아버지 뒤마 페르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곳이기도 합니다.
* 뒤마 피스와 춘희가 잠시 동거한 빌라 메디시스 이곳에서 아버지 뒤마 페르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썼습니다
생 제르맹의 이웃, 뒤마 페르가 지은 <몽테크리스토 관(館)>이 있는 마를리 르 르와 마을은 뒤마 피스의 임종의 땅입니다. 샹플루르 가(街) 1BIS번지. 옥호를 <르 샹플루르>라 부르는 이 집에서 뒤마 피스는 그의 마지막을 살았습니다. 뒤마 피스의 사후(死後) 그의 둘째부인 앙리에트가 지키다가 다시 딸 자닌이 1943년에 팔아 버렸습니다.
* 뒤마 피스가 마지막을 살다간 집
뒤마 피스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이 집에서 태어난 큰 딸의 아들이 십수년 전 죽음으로써 후손이 끊어졌습니다.
춘희는 파리시내의 말제르브 광장에 석상(石像)으로 살아 있습니다. 뒤마 페르의 동상을 마주 바라 보는 곳에 선 뒤마 피스의 기념상은 좌대(座臺)에 이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여러 여인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중의 하나가 춘희입니다.
* 뒤마 피스의 기념상
뒤마 피스는 춘희가 죽은 뒤 몽마르트르 묘지로 옛 애인의 무덤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춘희>를 연극으로 각색하면서도 설음에 겨워 이 무덤 앞에서 실컷 울었다고 합니다.
그 뒤마 피스가 죽어 춘희의 무덤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묻혔습니다. 정자 같은 묘실(墓室) 안에 그의 하얀 대리석 전신상이 누워 있습니다. "내 죽거든 빨간 가장자리의 무명베 셔츠에 평상복을 입히고 발은 맨발로 놓아 두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묻혔고 또 그 유언대로 조각되어 발이 맨발입니다. 뒤마 피스는 자기 발을 몹시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 뒤마 피스의 무덤
작품의 주인공이 죽고 약 50년의 상거(相距)로 그 작가도 죽어 이제는 둘 다 같은 원경(遠景)입니다. 묘지에는 검정고양이들이 무덤 사이를 을씨년스럽게 쏘다니고 있습니다.
[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와 <춘희> ]
소설 <춘희(춘희,동백아가씨)>는 만천하 독자들의 홍루(紅淚)를 자아내 온 한 창부의 순애담(純愛譚)입니다.
동백꽃을 좋아하여 춘희라 불리던 고급 창부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아르망 뒤발이라는 젊은이를 알게 되어 순정을 느낍니다. 아르망의 아버지가 찾아와 아들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타이르자 마르그리트는 그의 곁을 떠납니다.
아르망은 마르그리트가 다른 돈 많은 귀족 때문에 자기를 버린 줄로 압니다. 아르망이 잘못을 깨닫고 달려갔을 때 마르그리트는 폐병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小 뒤마,1824~1895년)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大 뒤마)의 사생아입니다.
1848년 작가 자신의 각색으로 무대에 올려졌고 이듬해 베르디가 <라 트라비아타>로 오페라로 만들었습니다. 영화로도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것 등 여러 편이 나왔습니다.
*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 르네 플레밍이 부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