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득지 |
자목 |
분 |
명손 |
희정 |
진홍 |
영우 |
굉 |
호길 |
석대 |
두임 |
익명 |
이므로 동복공(자목)파 덕촌공(희정) 후손입니다.
그리고 전주최씨세보 6권 66쪽에는 후손이 등재되어 있는데 세계도를 그려보면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익명 |
제일 |
진한 |
문옥 |
|
|
|
|
|
|
문규 |
익수 |
병두 |
재열 |
규섭 |
만호 |
낙원 | |||
규태 |
천호 |
| |||||||
신호 |
| ||||||||
륜호 |
| ||||||||
인호 |
| ||||||||
봉호 |
| ||||||||
대호 |
|
* 여기에서 휘 병두(炳斗)는 계자(系子, 양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생부(生父)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촌수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휘 병두는 찾을 수 있었으나 휘 상수와 휘 병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휘 병두의 생부(生父)를 찾으면 나머지 분들이 그곳에 계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세 분은 촌수가 가까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건륭계해보에서는 기록이 이와 다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건륭계해보 1권 126쪽에는 전주최씨세보에서와 같은 기록이 있지만 13세의 휘가 호길(浩吉)이 아니라 운일(雲馹) 이라고 기록하고 사위 송함(宋涵)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표를 그려보면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득지 |
자목 |
분 |
명손 |
희정 |
진홍 |
영우 |
굉 |
子 운일 |
女 송함 |
그러나 건륭계해보 3권 133쪽에는 사위 송함과 외손자는 모두 수록되어 있으나 휘 호길은 물론 휘 운일과 그 후손 아무도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연대 검증에 의하면 휘 익명은 숙종 때 테어나 영조 때 벼슬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4권보는 영조 19년에 발행 되었으므로 4권보에 실리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자신은 물론 증조부에서부터 4대 이상의 기록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전주최씨세보에서 휘 익명의 연대 고증
익명의 자는 항지(恒旨)이며 갑자생으로 용양위부호군 겸 가선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갑신년 3월 15일에 돌아가시니 산소는 부안면 용현(龍峴) 사기동(沙器洞) 북쪽에 있다.
여기에서 갑자년과 갑신년이 언제인지 안다면 어느 때 분인지 알 수 있겠으나 불행하게도 동양인들은 60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간지를 사용하여 연대를 기록하므로 인하여 검증이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기록되어 있는 간지를 다른 연대(간지)와 비교하고 계산하여 검증해야 하는데 오자로 인한 오류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한 번 검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익명 |
제일 |
진한 |
문규 |
익수 |
병두 |
재열 |
규섭 |
만호 |
낙원 |
갑자생 |
을유생 |
기사생 |
을해생 |
병술생 |
무신생 |
임신생 |
갑진생 |
무진생 |
계사생 |
1744 |
1789 |
1809 |
1815 |
1826 |
1848 |
1872 |
1904 |
1928 |
1953 |
여기에서 휘 익명이 1744년(영조 20) 출생이라면 돌아가신 해는 갑신년(1764, 1824)인데 1764년은 나이가 겨우 20세에 불과하여 가선대부와 같은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으므로 1824년(순조 24)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세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휘 진한은 1809년에 태어나 1815년에 겨우 6세의 나이로 아들 휘 문규를 낳았거나 아니면 66세에 낳았고, 휘 문규는 1815년에 태어나 겨우 11세의 나이에 아들 휘 익수를 낳았거나 아니면 71세에 낳은 것으로 되는데 둘 다 불가능한 일이므로 족보의 간지 기록 오류(오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휘 진한과 휘 문규의 연대는 오류라고 보고 60년을 거슬러 올라가 휘 익명이 1684년(숙종 10)에 태어나 1764년(영조 40)에 향년 80세로 돌아가셨다고 가정 한다면 현손이신 휘 익수께서 1826년생이시므로 그 사이 기간이 142년간으로 한 세대에 평균 36년이 소요되어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 됩니다. (불가능 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대체로 추정해 볼 때 휘 익명은 숙종에서 영조 사이에 가선대부를 지내신 것 같습니다.
가선대부는 상당히 높은 벼슬로 나이가 많을 것이므로 영조 때일 확률이 높겠지요.
그러나 이것을 어디까지나 추정이지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조 6년(1730) 정사공의 역모사건에 연류 된 의관(醫官) 최익명(崔益明)이 나타나지만 한 사람은 무관(武官)으로 양반이고 한 사람은 의관으로 중인(中人) 이므로 동명이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휘 익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용양위부호군 겸 가선동지중추부사가 낮은 벼슬은 아니지만 왕조실록에 무관의 휘가 실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왕조실록에서 휘를 찾을 수 없다하여 족보의 기록이 허위라고 단정 할 수는 없습니다.
휘 병두(炳斗) 배(配) 여산송씨(礪山宋氏) 기록 검증
병두는 자가 정칠(政七)이며 무신년(1848) 4월 24일 태어났고 제사는 8월 2일이다.
산소는 용현(龍峴) 사기동(沙器洞) 북쪽에 있다.
휘 병두께서는 벼슬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배(配) 여산송씨의 아버지는 송원호(宋元浩)이고 할아버지는 송종권(宋鍾權)이며 증조부는 송형옥(宋亨玉)으로 여산군(礪山君) 송유익(宋惟翊)의 후손이다.
천성이 유완하고 규범이 합법하여 시부모님을 모시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불행하게도 지아비가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끊어져 가는 목숨을 소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끝내 숨을 거두므로 함께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어린 자식들을 키울 사람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열이라고 칭찬했다.
(天性柔婉閨範合法奉養舅姑以孝甘旨不幸夫疾指血甦延畿絶之命竟以壽終絶粒誓殉顧念香火幼兒無人奉育不忍就義鄕里咸稱孝烈)
경술년(1910) 2월 27일에 돌아가시니 산소는 오리목동(五里木洞)에 있다.
* 유완(柔婉)하다 : 부드럽고 순하다.
* 규범(閨範) : 부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
* 효열(孝烈) : 효부와 열녀의 행실이 함께 있는 사람.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