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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된 초등학교출신 '빵박사' 申喆洙
32년간 빵과 함께 해온 세월. 초등학교 졸업자 신분으로 교수직에 오른 집념의 사나이 신철수씨의 삶은 오뚝이 인생 그 자체다. 절망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은….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던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운운의 얘기는 소위 문학 하는 사람이 차용할 만한 「품위 있는」 격언이나 경구는 아닌 것으로 돼 있다. 사용하는 사람이나 듣거나 읽은 사람 모두에게 진부하다 못해 신파냄새마저 풍긴다. 그러나 거기 딱 들어맞는 임자를 만났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빵 박사」 신철수씨(申喆洙·49). 그는 30년 동안 빵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빵을 기호식품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에게 빵은 음식의 한 종류만은 아니다. 빵은 그의 삶이자 눈물이고 또 보람이었다.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홍명상가 4층에 있는 성심당 제과기술학원 원장실로 그를 만나러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면에 붙은 「하면 된다」와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라는, 약간 거칠다는 느낌이 드는 붓글씨 액자였다. 좀 어색하다 싶은 생각에 새로울 것 없는 그 글귀들을 힐끗거리며 그와 마주 앉았는데, 그가 들려준 50평생을 새김질하고 사무실을 나설 때에는 그 구호들이 있어야 할 제 자리에 걸려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160cm가 조금 넘을까 말까한 단구(短軀)에다 아무리 봐도 「촌스러운」(그는 촌스럽다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얼굴 생김새를 가진 영락없는 평생 빵장이처럼 보였다. 그가 이번 봄학기부터 어엿한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게 됐다 해서 화제다. 빵 만드는 기술로만 치자면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신씨니만큼 요즘 같은 학력 파괴시대에, 더구나 실용학문을 중시하는 전문대학의 강단에 설 자격이 그에게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세인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그가 초등학교 졸업을 최종학력으로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은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훨씬 값진 것인데, 전문대학 교수로 초빙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초등학교 출신으로 대학 강단 진출」이라는 상품성 때문에 이곳 저곳 언론사들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학벌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대전에 있는 중경공업전문학교 식품공업과에서 제과·제빵 분야를 가르치게 됩니다. 3월2일이 개강일인데 실습 기자재 등의 미비로 3월11일경에나 첫 강의가 이뤄질 것 같습니다. 제과나 제빵에 관한 것이야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이 훤하지만, 그래도 가르치는 대상이 대학생이라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요. 지난번에 일단 첫출근을 했는데 아주 어색하더라고요. 하기야 직공시절 빵집만 새로 옮겨가도 그 곳의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렸는데, 하물며 낯선 대학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됐으니 어색하고 쑥스러운 건 당연하겠지요. 열심히 해봐야지요』
애써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지만 교수님 강의 학점 연구실 등 낯선 어휘들이 통용되는 사회에 진입하게 된 것이 자못 설렌다는 고백을 감추지는 않았다. 신씨의 장녀 은경양은 충남대 한문학과에 재학중이고, 그 아래 덕균군이 문제의 중경공업전문대학 공업디자인학과에 다니고 있다.
『아들녀석이 숫기가 부족한 편인데, 아비가 자기 학교 교수 됐다니까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표현을 안 해요. 출근 첫날 덕균이한테 교수연구실에 와서 청소 좀 하라고 했더니 쑥스러웠는지 안 나타나더라고요』
장인(匠人)의 긍지로 늘 주눅들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제 그는 대학생인 두 자녀에게 「교수 아버지」의 자부심까지 안겨 줄 수 있게 됐다.
『3년간 계약을 했는데 3년이 지나면 학교측에서 더 있어달랄까봐 겁나요』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신씨의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억울한 것 하나 없어요」
신철수씨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라는 농촌마을에서 4남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가 많은 경우에도 장남은 상대적으로 교육 혜택을 많이 누리는 게 통례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차남이나 3남이 감당하여 의무교육만 마치고, 다시 막내쪽으로 내려오면 형편이 좀 나아져서 고등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딸들의 경우 아들 교육을 위한 거추꾼으로 희생당하기 십상이다. 해방 이후 70년대 무렵까지 농촌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교육 양상이었다.
신씨 가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큰형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고, 둘째형은 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짓고 있으며, 신씨의 남동생은 충남대 수학과를 나와 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그러니까 형제 중에서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은 신씨뿐인 셈이다.
『억울하다니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늘 감사하고 있어요. 가난하고 못 배웠다고 비뚜로 나갔다면 아, 지금 내가 여기서 「신동아」 같은 잡지에서 나온 선생을 만나고 있겠어요. 교도소나 어디 딴 데 있겠지. 어려운 처지가 사람을 더 강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약인데, 요즘 사람들 고생을 안 하려고 해요. 경제가 어렵다지만 둘러보면 할 일 참 많아요. 배부른 생각으로 아무 일이나 안 하려니까 문제지』
신씨는 말을 참 맛있게 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으로는 감내하기 힘들었을 고생담도 재미있게 들린다. 그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얘기하면서도 의지박약한 사람들을 향한 따끔한 일침을 늘 사족으로 달았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그는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누나 둘, 그리고 형들과 함께였다. 당시 그의 부친은 정치 바람에 휩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자유당 사람들과 어울려 정치관계 일을 봐주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다 4·19의거가 터지고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가정이 파산지경에 이르자 두 누나들이 직장을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래봬도 제가 공부를 참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중학교도 시험 봐서 들어갈 때였는데, 경기중학교에 척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누나들이 형님 뒷바라지를 해야 됐기 때문에 나까지는 돌볼 겨를이 없었지요. 등록금이 있어야 등록을 하지요. 아쉬워서 후기인 대광중학에 응시해서 또 합격을 했는데…. 시험에 붙으면 뭘합니까. 처지가 안 되는데. 누나들이 나중에 학교에 보내주겠다면서 시골에 가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시골에 가봤자 남의 집 머슴살이 외에 할 일이 뭐 있어요. 그래서 기술을 배우기로 했지요』
그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기술을 배우겠다고 들어간 곳은 버스회사 정비반이었다. 통금시각을 넘겨 새벽 두세 시까지 일하는 것이야 참을 만했으나, 어쩌다 배터리액이 옷에 닿으면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나마 하는 일이라는 게 차밑으로 기어들어간 정비공에게 플래시 비춰주는 게 전부라 「전망없음」을 선언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두 번째로 들어간 곳은 용두동에 있던 메리야스 공장. 「아이롱사」(다리미질 담당)로 1년을 버텼으나, 반복되는 단순노동에다 새 기술을 배울 기회는 기약이 없었고, 또한 특별히 도전해볼 기술도 없는 것같아 그곳에서도 실망하고 돌아섰다. 그나마 1년 동안이나 버텨냈던 것은 『경솔하게 옮겨다니지 말고 진드거니 있자』는 평소의 다짐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구한 취직자리는 충청도 대천에 있는 옷가게 점원이었다. 그러나 점원 노릇이야말로 기술을 배우겠다고 작심한 그에게는 전망이 없는 일거리였다.
32년 전 처음 빵과 인연 맺어
『안 되겠더라고요. 일생을 두고 도전해볼 만한 일거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서울 삼양동에 외삼촌이 살고 계셨는데, 삼촌이 마침 빵집에 팥고물 배달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 소개로 돈암동에 있는 태극당에 들어가면서 빵하고 처음 인연을 맺었지요.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제가 열여덟 살이 되던 1966년 1월 6일이었습니다』
70년대에 성북구 정릉동에 얼마간 살았던 필자의 경험에 비춰보면 태극당은 서울 북부지역의 명소였다. 60∼70년대에만 해도 다방에 갈 나이가 안 된 중고생들은 갈 곳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친구도 만나고 이성교제도 하던 장소로 제과점을 선호했다. 여드름 투성이 남학생과 머리를 땋아내린 여학생이 팥빙수나 크림빵을 탁자에 놓고 마주앉아 마땅한 얘깃거리가 없어 쭈뼛거리는 모습은 어느 제과점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취직을 했다고는 하나 그토록 규모 큰 빵집에서 열여덟 살 난 새내기에게 빵 굽는 기술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 처음 신씨가 했던 일은 셔터를 올리고, 홀의 연탄 난로를 갈고, 마포걸레로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일거리를 찾아 지방에서 상경한 청소년들이 많던 시절이라 일정기간의 수습과정에 주인에게 신뢰를 줘야 제대로 된 일거리를 주는 게 통례였다. 더러는 심성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몰래 바닥에다 돈을 떨어뜨려 놓는 경우도 있었다.
『어디 가든 성실하고 착하단 얘기는 들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는 없었는데, 어느 날엔가는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고향 친구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빵집에 왔다가 정면으로 마주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할 일 하는 거니까 아무 거리낄 게 없었을 텐데, 당시에는 얼마나 창피하던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더란 말입니다』
생각이 많았던 18세였던 것이다. 얼마간의 수습과정이 끝나고 선배들에게 「싹수」를 인정받은 그는 드디어 공장(빵 만드는 곳)으로 진출해 맨 아래 단계인 보조가 된다. 보조의 역할은 단팥빵 속에 들어갈 팥을 끓이고, 밀가루나 설탕 포대 등의 재료를 운반하는 허드렛 일들을 도맡는 것이다. 그러다 일정기간(보통 1년쯤)이 지나면 중간보조로 진급을 하게 되는데 주로 하는 일이 연탄을 잘게 깨서 화덕에 넣고 화력을 조절하는 일명 가마돌이다. 항상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고, 걸핏하면 손에 화상을 입기 일쑤다. 다시 1년쯤 지나면 부공장장이 된다. 밀가루 반죽으로 크림빵이나 팥빵의 모양만들기(성형작업)를 주로 하는데 손놀림이 재빨라야 하고, 얇은 반죽으로 속이 비치지 않게 싸야 한다. 그 다음이 마지막 단계인 공장장이다. 요즘도 도제식(徒弟式)으로 기술을 전수하는 제과점 내부 공장의 체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내 또래 학생들이 빵 놓고 남녀가 앉아 데이트하는 걸 보면 부러웠지만 환경이 안 되니 어떡합니까. 대신에 짬 나는 대로 한자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가림없이 독서도 했지요』
군대보다 더 센 빵집 군기
짬나는 대로 공부도 하고 독서도 했다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그 짬이라는 걸 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4시에 기상해 밤 11시가 돼서야 일을 마쳤다. 한 달에 한 번 휴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오전 근무는 온전히 한 다음에 오후 시간만 쉴 수 있었다. 그러니 항상 잠이 부족해서, 어쩌다 친척집에라도 가는 날이면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 혹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잠을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수면 부족은 공장 내부의 군기잡기를 견뎌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걸핏하면 공장장이 아랫 사람들에게 작업대를 잡고 엎드리라 하고는 반죽 미는 밀대로 사정없이 때리는 겁니다. 군기가 빠졌다는 거지요. 아무리 추운 겨울철에도 그거 열 대쯤 맞고나면 엉덩이가 뜨거워서 활활 타요. 단체로 맞는 거야 또 그렇다 쳐도, 별 잘못도 아닌 일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할 때에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어떤 사람은 뺨을 잘못 맞아서 고막이 터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고…』
신씨가 부공장장 시절이었다. 그날 그는 밤에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나가려면 이전에 할 일을 마쳐야 한다. 다른 직공들이야 새벽 4시에 일어나지만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공장장은 아침 8시나 9시가 돼야 나타난다. 아랫사람들이 자기 일 마쳤다고 일찍 외출을 할 수는 없다. 공장장이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파이를 만드는 반죽을 준비하는 것은 부공장장의 임무지만, 파이 반죽을 미는 것은 워낙 숙련을 요구하는 작업이므로 전통적으로 공장장만 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신씨는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공장장의 할 일을 덜어준다는 생각에서 파이 반죽을 요령껏 밀어놓았다.
『공장장 못지 않은 솜씨로 밀어놨으니 공장장이 출근하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누가 그런 일을 하랬느냐고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겁니다. 말이 없으면 묻는 말에 대답 안 한다고 때리고, 뭐라고 대답을 하면 말대꾸한다고 때리고…. 그날 얼마나 맞았는지 뺨이 부어 터지고 피가 나고 하는 통에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어요』
담담하게 그 시절 얘기를 들려주던 신씨의 목소리가 잠기는가 했더니 눈가에 물기가 고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영역을 침해했으니 기분이 나빴을 것』이라고, 지금은 연락조차 두절된 당시의 공장장에게 향할 뻔한 원망을 거두어 들인다.
비단 빵공장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해 쉽게 자리를 박차고 나갈 형편이 못 되던 「촌놈」들은 크고 작은 산업 현장에서 그런 욱대김을 견디며 살아왔던 것이다.
빵공장에서는 사탕도 직접 만든다. 설탕을 녹여 알맞은 빛깔로 끓여내는 일을 「청을 잡는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끓이면 까맣게 돼버리고 덜 끓이면 나중에 입에 끈적끈적 달라붙는다. 따라서 『그만 끓이라』는 명령은 베테랑인 공장장이 내린다. 한 번은 공장장 자신이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색깔이 검게 나왔는데, 아랫 사람들에게 솥을 잘 닦지 않아서 그랬다며 또 두들겨 패더란다. 당한 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진대 신씨는 자신이 공장장이 되면 아랫사람들한테 잘해줘야겠다고, 자신이 겪었던 험한 일을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부리는 위치에 올라섰을 때 한 차례도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러는 중에도 신씨는 사장의 배려로 영등포에 있던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에 나가 제과 제빵에 대한 체계적인 기술을 연수했다.
헐렁헐렁 살다 코 다친다
스물여섯 살. 의정부에 태극당이 개업하게 됐다. 돈암동 태극당 지배인의 소개로 그는 당당하게 그곳 공장장으로 배치됐다. 이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다섯 명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돈암동에서 8년을 일했고, 그곳 의정부에서도 5년을 일했으니 『어디 가든 가볍게 옮기지 않고 진드거니 있는다』는 그의 얘기가 빈 말이 아니다.
구미에 살던 이모의 중매로 결혼도 했다. 신씨는 공장장으로 일하는 한 편으로 부인 배순금씨(46)에게 별도로 조그만 가게(빵집)를 내주어 맞벌이를 시작했다. 그 맞벌이 시절 얘기를 들려주면서 또 세상에 대고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다.
『부부가 같이 벌어야 살림도 펴고 발전을 할 게 아닙니까. 여자라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이나 축내고 흥청망청해서는 안 되는 거요. 가족이 합심해서 준비를 하면 아이 엠 에프 할애비가 닥쳐도 문제 없을 텐데, 요즘 사람들 헐렁헐렁하게 살다가 코앞에 닥치니까 허둥댄단 말예요. 생각들이 짧아서 그래요』
자신이 몸으로 실천해온, 그래서 너무도 지당한 얘기에 필자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근면 성실이 늘 성공만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오랜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잠실로 진출했다. 잠실1단지 상가에 거북당이라는 제과점을 차리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1980년 무렵이었으니 백화점이나 대규모 쇼핑센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장사가 무척 잘 됐다. 2∼3년 동안 그는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아파트 여자들이 큰일났다고 야단이에요. 우리 빵집에서 불이 나서 단지내 상가 건물이 다 타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가게가 타버린 것도 문젠데, 우리 집 때문에 다른 점포가 다 타버렸다니 눈앞이 노래질 수밖에요. 종업원들은 혹시 자기들한테 책임이 돌아올까봐 미리 도망쳐버렸어요. 허둥지둥 달려갔더니 불이 난 곳은 우리 가게가 아니라 앞집 핫도그 집에서 전기 코드를 뽑지 않고 두었다가 누전이 된 거래요』
그의 나이 서른 일곱 시절, 시련이 시작됐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서 갖고 있던 돈 일부에다 여기 저기서 빚을 끌어다 잠실4단지 상가에 다시 빵집을 냈다. 초기에는 장사가 괜찮게 돼서 점포를 확장했다. 그러나 한양쇼핑센터가 생기고 연이어 대형상가가 생기는 바람에 단지내 상가에 있는 빵집은 그야말로 구멍가게로 전락해버렸고, 빌린 돈을 약속 날짜에 갚을 수도 없게 됐다.
『원금은 갚을 형편이 안 되니까 이자만 갖고 가서 사정을 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압류가 들어오더라고요. 권리금도 못 받고, 기계들은 고철값으로 넘어가고…. 파산한 거지요』
다시 월급쟁이를 해야 했다. 명색이 사장 노릇을 하다가 남 밑에 들어가는 데에는 작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체면 이전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제과 제빵 현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의 경우 끊임없이 밀려오는 기술을 받아들여 익히게 되지만, 자기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 공백만큼 정체되거나 퇴보하게 마련이어서 명성 있는 빵집에서 연수를 거친 다음에라야 취직이 가능했다.
『삼선교에 있는 나폴레옹 제과점에 친구가 공장장으로 있었어요.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 하는 수 없이 그 친구를 찾아가 사정 얘기를 했지요. 평직공으로 들어가 연수를 하겠다고요. 그래서 신입사원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기로 하고 가방 싸들고 그곳으로 갔어요. 아이 둘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가족들하고 생이별하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지내야 한다 생각하니 참 서럽데요. 가방 풀어놓고 그 친구와 부둥켜 안고 울었어요. 저는 제 신세가 처량해서 울고, 그 친구는 제 처지가 딱해서 울고』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으로 자신감
다시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근무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공장장인 친구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기를 6개월. 대전의 성심당 제과점이 확장하면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대전으로 내려가게 된다.
『참, 중요한 얘기를 빠뜨릴 뻔했네요』
신씨는 필자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몇 차례나 빠뜨리고 지나간 얘기가 있다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충해주곤 했다. 기사감으로는 별것 아닌 얘기도 있었지만, 이번에 빠뜨렸다는 얘기는 그가 세상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빼놓아서는 안 될 얘기였다.
『잠실에서 거북당을 운영할 때입니다. 그때 공인중개사 바람이 불었어요. 그 자격증만 따면 돈방석에 앉는다고 야단이었어요. 좋다, 그걸 한 번 해보자, 작심을 했지요. 그런데 교재를 한 질 사서 들여다보니까 이게 온통 어려운 법률용어에다 한문투성이어서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더구나 제과점 일을 마치면 금방 자정인데 시간을 낼 수 있어야죠. 그 암담한 상황에도 죽자사자 매달렸습니다』
신씨가 중개사 시험 응시원서의 학력난에다 「무학」이라 써놓은 걸 보고 접수창구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란다. 그는 서울 무학(舞鶴) 초등학교를 졸었했기 때문에 그렇게 썼는데, 사람들은 그가 달랑 한 줄 써놓은 학력사항이 그나마 무학(無學)이라 여겼던 듯하다고 한다. 신씨가 책상 위에 있던 소형 액자를 들고 왔다.
『보세요. 합격했어요.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붙은 겁니다. 초등학교 졸업자가 그것도 독학으로 말입니다. 아마 초등학교 졸업자로는 제가 유일했을 거요. 저는 제과기술학원 못하게 돼도 복덕방을 열 수 있으니 굶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더라고요. 아무런 대비 없이 그저 세월 좋다고 지내는 사람한테는 기회가 왔다가도 도망치는 법입니다』
신씨가 또 「공자님 말씀」 한 마디를 곁들인다.
86년 11월, 가족과 함께 대전에 내려온 신씨의 당시 나이가 38세였는데 사장은 그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다.
『이곳 성심당 사장이 참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처음 면접 때 저한테 빵장사의 노하우를 묻기에 평소 생각대로 대답을 해줬지요. 재료를 좋은 걸 써야 한다, 아침에 만든 빵을 저녁에 팔면 제품이 노화돼서 신용이 떨어지니 「신선한 공급」의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 직원 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신씨의 새 직장 경영주인 성심당 제과 사장은 그의 충고를 값지게 받아들였고, 초기에는 대전 시내에도 변변히 알려지지 않았던 가게가 지금은 빵 만드는 직공만 80여 명에 이른다. 단일 제과점으로서는 드물게 아시아 각국의 제과업계에도 명성이 자자해 일본기술자들이 견학을 올 정도로 번창했다. 물론 신씨는 전적으로 사장이 경영을 잘한 탓으로 돌린다.
1985년경 빵 만들고 과자 만드는 데에도 자격증을 부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그가 거느리고 있던 직공들 중에도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터에, 명색이 공장장이 무자격자라는 게 마음에 걸려 1987년에 응시했는데 제과와 제빵 분야 두 가지 자격시험을 한꺼번에 통과했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비하면 우스웠다』는 게 그의 소감.
그러다 시험제도가 다시 바뀌어 제과, 제빵 기능사 자격이 1급과 2급으로 나뉘었다. 1급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대학 전공자나 4년제 대학 유사학과 전공자로 자격이 제한돼 있었다. 그로서는 시험을 치르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1992년에 제과와 제빵 분야를 통합해 그 분야의 고등고시라고 불리는 제과 기능장제도가 생겨났다. 다행히 16년 이상의 경력자에게도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제1회 시험 때 응시를 했어요. 사장한테는 떨어질지 모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시험장에 나갔지요. 대부분 기능대학 졸업 이상의 응시자였지 저같은 초등학교 졸업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러나 그는 합격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몰려들었지만 단 3명이 선발됐다. 신씨는 그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인중개사 시험에도 붙었는데 해서 안 될 게 뭐 있겠느냐』는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한국제과기능장회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솔선수범? 말이 쉽지 실천은 참 어려운 겁니다. 이곳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사실은 공장장이라 8시나 9시에 출근해도 되지만, 10년을 하루같이 새벽에 일어나 다른 직공들보다 먼저 출근하려 노력했죠』
빵 5백종 만드는 장인
성심당을 명실상부하게 최고 수준의 제과점으로 키워놓은 신씨는 97년 8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빵집을 경영하면서 가르치는 낡은 도제식으로는 기술전수와 후진양성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지금의 자리에 제과제빵기술전문학원을 차린 것이다. 성심당이라는 상호를 제과점과 함께 쓰기로 양해를 받았다. 상가 3층과 4층을 합해 80여평 넓이의 교실에서 매일 90여 명의 수강생이 기술연마에 여념이 없다. 이론과 실기를 함께 가르치는데, 기초반(3개월)은 기능사자격 시험 준비과정이고, 중급반은 제과점에서 실제로 파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다. 최대한 속성으로 기술을 익히게 해서 생계 수단으로 삼도록 도와주자는 게 그의 목표다.
신씨가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에 들어서니 대형 냉장고에 발효장치 오븐 반죽기 등이 사위에 자리하고 있다. 칠판에는 그 날 실습한 내용인 듯 호박씨 쿠키 만드는 순서가 필기돼 있다. 그가 만들 수 있는 빵의 가짓수만도 5백종이라 한다. 30년 동안 빵을 만들어 왔으니 지겨울 만도 한데 그는 『천만의 말씀』이란다.
『제가 미련해서 그런지 빵 만드는 일이 지금도 아주 재밌습니다. 완성된 제품을 시식하면서 「야, 이렇게 맛있는 빵을 정말 내가 만들었을까」하고 감탄할 때가 많다니까요』
―워낙 험한 고생을 하면서 배우셨기 때문에 개성 강한 요즘 수강생들의 자세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도 있을 텐데….
『한 마디로 「난 빵 만들려고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각오를 하고 덤비는 친구들이 없어요. 수강생 중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많은데 힘든 일, 신경 쓰는 일들은 머리 아프다고 싫어해요. 그럼 내가 구박을 하지요. 비싼 돈 들여 대학을 나왔으니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밀가루 1포대 운반하면 대학 나온 너희들은 5포대를 운반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 반대란 말예요』
―학원 경영으로 먹고 사실 만합니까?
『그럼요. 돈이라면 벌 만큼 법니다. 설령 이 일이 잘 안 된다 해도 걱정 안 해요. 저는 건강한 육신 가지고 밥벌이 할 수단이 없다고 죽네 사네 하는 사람 보면 이해가 안 가요. 그저 편하고 쉬운 일만 찾으니까 그래요. 육신을 가장 편하게 보전하는 방법은 죽는 일밖에 더 있겠어요』
벽에 걸린 「하면 된다」는 글귀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세상살이에 자신만만하다.
대전 빵은 서울 빵과 맛이 다르다
신철수씨의 「하면 된다」 혹은 「진인사대천명」의 생활철학은 교수진출 과정에서도 발휘된다. 가령 일간지에 교수 초빙 광고가 났다고 할 때, 보통 사람같으면 자신이 채용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고 할지라도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조건이라는 게 뭐냐 하면 제과기능장을 소지하고 있을 것, 학사나 석·박사 학위를 지닌 자, 뭐 거기에다 제출 서류가 논문이나 저서…. 뭐 이렇더라고요. 수십 가지의 조건 중에서 저한테 해당되는 것은 제과기능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응모를 했죠』
최진사댁 셋째딸을 달라고 쳐들어간 아랫마을 칠복이의 용기였다. 실제로 그는 『무모할지 모르지만 용기라는 게 필요하긴 하데요』라고, 자신의 겁없는 도전을 돌이켰다. 그러나 그가 교수초빙 광고를 보고 응시원서를 낸 것은 달리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과·제빵 기능장을 소지한 사람이라면 현직에서 잔뼈가 굵었을 것이므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을 조건이 안 됐을 것이고, 반대로 석·박사 학위 소지자의 경우 일선에서 다년간 뛰어야 가능한 기능장을 소유한 사람이 별반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모자는 두 자리수를 넘었다.
학력난에 그는 다시 「무학 초등학교졸」이라는 한 줄만을 기입했다. 교수를 뽑는 전형이고보니 그건 글자 그대로 무학자(無學者) 선언이었다.
『그런데, 1차 서류 심사에 합격했으니 면접에 나오라는 겁니다. 이것 참, 그래도 대학인데 저 같은 사람이야 구색 맞추기겠지 하고 일단 나가봤지요』
2차 면접 시험에 10여명의 쟁쟁한 교수후보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이왕 안 될 것, 당당하게 임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면접관과 그가 주고받은 대화를 대충 옮겨보면 이렇다.
―대전의 성심당을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에 공헌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일본의 제과 관계자들을 데려가서 시식을 해본 결과 제품이 별로 뛰어난 게 없다고들 하던데요?
『일본 사람들의 입맛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지요』
―그러면 서울의 빵하고도 차별성이 있습니까?
『한국과 일본의 입맛이 다르듯 서울과 충청도 사람의 입맛도 다른 법입니다』
―단지 지역민의 입맛을 달리 했다는 것이 성공비결이라는 얘깁니까?
『빵맛만이 아니지요. 사업의 성공 여부는 제품의 질로만 가름되는 게 아닙니다. 제과점 분위기, 인테리어, 청결상태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 되지요. 대학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금 상태로는 안 되고…』
신씨는 겁 없이 면접관들 앞에서 오히려 한바탕 훈시를 해나갔다. 먹고 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으니 대학교수 그런 것 안 되어도 상관 없다는 배짱이 그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다. 점잖은 면접관들은 그의 파격적인 언사에 더러는 낄낄거리고 더러는 건방지다고 했단다.
『면접 시험을 보고 한참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대학의 기획실장이라는 분이 나오라고 그러데요. 무슨 일인가 해서 나갔더니 월급을 조금밖에 못 줘서 죄송하다, 부교수급으로 대우해서 연봉 2천4백만원에 3년간 계약하는 걸로 하자, 이러더라고요. 아, 내가 대학 교수가 됐구나 하고 실감했지요』
다원주의 사회의 옹고집
이야기 도중 손님 한 사람이 찾아왔다. 신씨가 대전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성심당 빵집에 부공장장으로 부임했을 때 밑에서 일하던 오세호(35)씨였다. 지금은 신씨의 학원 근처에 제과제빵연구소를 차려놓고 제과점을 개업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로 생계를 삼고 있다.
『왜 텃세라는 게 있잖습니까. 당시 우리는 우리 체제에 맞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이 드신 이 양반이 와서는 그 체제를 흔들어 놓는 겁니다. 불만이 상당했지만, 이 분의 솔선수범 때문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키도 작고 모습도 촌스러워서 우리가 사모님을 보고 왜 이런 촌스런 사람하고 결혼을 했느냐고 놀리기도 했는데…』(오세호씨)
오씨의 말에 의하면 신씨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라 한다. 『초등학교 졸업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자랑이라고 사방에 소문내고 다니느냐』고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 신씨의 전언이다.
『먼 길 오셨으니까 제가 빵을 좀 대접하겠습니다. 성심당 제과점이 근처에 있으니 같이 가서 구경좀 해보십시다』
신철수씨가 앞장을 섰다. 빵 만드는 일은 별것 아닌데 인터뷰 하는 일은 진땀이 난다면서 그가 머리에 얹고 있던 모자를 잠깐 벗었다. 반이 넘게 벗겨진 대머리였다. 그는 들켜버린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서 황급히 모자를 되썼다. 빵을 만드는 시간에는 위생상 반드시 모자를 착용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맨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킬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그가 빵과 과자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한 모자를 안 벗어도 될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 역시, 그가 제과 제빵의 장인(匠人)인 이상 바깥으로 노출되어서 그의 장래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런 세상이 돼야 한다. 비록 무슨 일이든 「하면 된다」는 식의 일로매진을 강조하는 그의 인생관이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온전한 미덕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첫댓글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신철수씨처럼 능력으로 승부하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한우물 적어도 20년은 파야지요.. 교수님말씀대로 .. 분명 최고의 유아교육자가 될겁니다. 하면된다. 할수있습니다.
20년 후엔 대한민국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저는 꼭 두번째 유아교육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