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신념이 대한민국 '자유와 번영'의 원동력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해방 당시 한반도는 이공계 대학 졸업자가 400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인재 부족의 땅이었다. 일제가 한국인의 이공계 교육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에 과학기술자라고 부를 만한 한국인은 기껏해야 2천명 정도였다.
그처럼 빈약한 인력시장마저도 국토가 남, 북으로 나뉘면서 갈라지게 되었다. 일제말리 교토 제국대학에서 과학자로서 촉망받던 이태규와 이승기가 각각 남한과 북한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한 사실이 민족의 서글픈 운명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해방 당시 남, 북은 산업시설의 보유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갈라졌다. 전체적으로는 북한지역이 남한지역 보다 약간 우세하였다. 일본인들의 추산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북한에 남겨둔 재산은 29억 달러로 남한의 28억 달러 보다 약간 많았다. 게다가 북한은 많은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산업의 돌력인 전력에 있어서 압도록으로 우세하였다.
이처럼 우세한 위치에서 출발했던 북한이 오늘날 남한에 비해 형편없이 뒤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치를 재평가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엘리트의 보존과 육성에 대해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승만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대응하려 했는지를 살펴보면 남, 북한 국력 차이에 대한 원인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북한이 엘리트를 육성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혁명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새 세상'의 건설을 꿈꾸는 공산주의 혁명은 과거와의 단절, 즉 기득권 세력의 제거를 일차 목표로 한다. 그 때문에 북한의 엘리트를 친일과, 반동분자로 몰아 숙청함에 따라 그들 대부분이 맞아 죽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빈손으로 월남했다. 남한은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득을 보게 되었다.
숙청은 북한사회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되었다. 엘리트를 잃은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다고 엘리트는 짧은 기간 안에 급조될 수 있는 세력도 아니었다. 원래 북한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지역 차별로 엘리트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나마 육성된 얼마 안 되는 식자층마저도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국가라는 집을 짓는 마당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몇 안 되는 숙련된 목수들마저도 죽이거나 쫓아내는 어리석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 대가는 인재부족이었다. 북한이 건국초기에 엘리트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은 해방 후에도 수년간 900여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그대로 잡아 두고 활용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인 기술자들 없이는 사회가 운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인재를 아꼈다. 식민지 생활을 오래 할 후진국 국민 속에 인재가 별로 없을 것은 당연하였다. 그가 얼마나 인재부족을 통감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정부 수립 2년이 채 못 되는 어느 날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의 푸념을 적은 회고록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관들조차 자기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데 대해 개탄했다. 심지어는 그의 심복으로서 오랜 미국 생활을 경험한 임병직 외무장관의 업무 처리 능력에 대해서조차도 만족하지 못함을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외교문서까지도 직접 대통령이 챙기고 문서를 타이핑해야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숙청에 신중하려고 하였다.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국회가 반민특위를 조직하여 친칠파를 숙청하려는 행동에 나서자, 그는 여러 차례에 걸려 신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밑에서 경험을 쌓은 얼만 안되는 엘리트마저도 잃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 망명생활 중에 그는 1917의 러시아 혁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엘리트가 희생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역사는 급격한 혁명을 통해 단절된 상태에서 새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국민교육을 통해 그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중오심에서 혁명의 구호를 외치는 공산주의를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고, 결국 공산주의자들과의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는 안창호, 김구와 독립, 정치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는 그들을 밑으로부터 뒷받침해 줄 교육받은 대중이 많을 때에만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일찍이 독립협회를 통해 개혁계몽 운동을 할 때부터 대중 교육이 부국강병의 근본임을 알고 국민교육임을 역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교육입국론이 잘 나타난 것이 그가 한성 감옥에서 1904년에 탈고한 <독립정신>이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 국민을 교육하고 계몽할 기회가 사라지게 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부터 교육을 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얻어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해방이 되어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한국인은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했던 문맹자 국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서둘러 1949년에 초등교육을 위한 의무겨육제를 도입하고, 매년 정부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입하였다. 그 결과로 그의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1959년에 대한민국의 취학 적령기 아동이ㅡ 95%가 의무교육을 받는, 그리고 순문맹율이 22.1%대로 낮아진 개화된 나라로 바뀌었다.
초등교육의 확산은 고등교육의 확산으로도 이어져 대학 숫자는 해방 직후의 19개교에서 1960년 63개교로 크게 늘어났고, 대학생 숫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6.25전쟁 당시 대학생에 대한 병역 혜택의 조치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단 양적인 측면에서 고등교육 혁명이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교육인구의 증가는 1960년대 이후에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를 시작하려는 나라에 이승만 시대의 교육은 우수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급인력의 양성은 대한민국 정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문명국인 미국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한국을 해양문명권의 중심이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한 결합의 계기는 한국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싸운 6.25전쟁을 통해서 찾아 왔다. 새로운 엘리트의 대량 양성은 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군대는 한 때 80만 명 선까지 갖바기 커지기도 하였지만, 1954년에만 보더라도 병력 65만 명에 정부예산의 40%를 사용하는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군대의 유지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매년 1천 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기술실무를 맡은 하사관의 단기 파견 연수는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이 그와 같은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냉전에서 반공의 첨병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배워 온 군사기술을 대부분이 일반사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요긴한 것들이었다. 특히 조직 관리의 기술은 무질서한 한국사회에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행정체계를 도입케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유능한 장교집단은 후일 한국 사회에 기획과 조직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선진 문명을 배우기 위한 해외유학 붐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해외 유학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래서 나라가 경제가 어려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600명 이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특히 1956년부터는 미네소타 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주도하게 되엇다.
미국 문명의 습득은 미국의 우너조가운데 포함된 기술 원조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졌다. 전시긴급구호((CRIK)등의 원조 계획에 따라,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훈련 목적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것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상호방위조약이 개정된 1956년부터 특히 활발해졌다.
이승만 통치기에 이루어진 미국의 최고 기술 지원이 원자력 부문 이었는데, 1956년에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트리가마크Ⅱ 연구용 원자로를 구입하고, 그 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부는 과학자들을 제작업체인 제너럴 일렉트릭 사로 파견하여 훈련을 받게 하였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200여 명이 기술훈련을 받았다.
새로운 엘리트의 출현이 가장 빨리 느껴진 분야는 정부였고, 특히 경제문제를 다루고 있던 전문 관료들(technocrats)에게서 두드러졌다. 그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대학교육을 받은 뒤 관청이나 은행 등에서 젊은 관료로 경험을 쌓고 해방이 되어서는 정부 기관이나 한국은행, 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에서 근무하게 된 실무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미국에 단기 연수나 유학을 다녀오고 영어와 미국식 경제 및 기획 · 관리의 제도를 배웠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부흥부의 송인상 장관과 재무부의 이한빈 국장이엇다. 산업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연공서열과 자리보전에 집착해 있던 기성의 관료들과는 달리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들 전문 관료는 1959년 말에 3개년경제계획안을 만들 정도로 성숙한 상태였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실천은 다음 정권으로 미루어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1960년대 박정희 시대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이승만 시대에 놓여진 토대 위헤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을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으로 편입시킨 이승만의 '문명사적 전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전환 과정에서 그는 엘리트의 교체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맞는 대한민국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엘리트를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엘리트의 양성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통치자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지난 "잃어버린 10년"의 평준화 교육정책으로 엘리트의 정상적인 육성이 방해를 받아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이 사교육비를 들여 자식들을 공부시키게 된 사실이 바로 그와 같은 국민교육의 황폐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통치자들은 로버트 올리버가 '교육 대통령'으로 부른 이승만의 교육관과 교육정책을 관심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사회는 엘리트에 의해서 발전되고, 그 엘리트는 통제된 사회가 아닌,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육성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건국 대통령의 그러한 생각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자유와 번영'의 토대 위에 올려놓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