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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사이펀신인상 당선 원룸 외 5편
임윤아
봄은 부드럽고 여름은 끈적하고 가을은 축축하고 높고 겨울나무는 비썩 말라 여름과 몸 섞으려 하지만
아직은 본능적으로 사랑한다 쪼았다 애인은 봄은 조금 가지럽고
여름은 예민하며 배가 고프고 가을은 할 게 없으며 겨울은 숨 막히기 좋은 계절이라 사랑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계절 없는 집에서 몸을 섞고 싶어졌다 저질 영화를 틀어놓고 한가득 몇 번째 사계절인지 돌아봤다
봄은 단편적인 불행 여름엔 땀난다고 잘 보지 않았지만 가을엔 아무것도 안 해도 웃음이 났고 겨울엔 너희 집에서
내 아랫도리에 문 하나를 그렸다가 닫았다.
------------------------------------ 상징적 부부형
버뮤다의 얼굴을 가진 여자가 심해 같은 키스를 하고 발광 같은 성격을 안고 결혼하자 한다
아이를 아이로 다룰 수 있을까 한 겹씩 치는 게 짜증이 나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불 태운 제자가
물컵을 엎고 개미를 밟고 친구를 홧김에 때리는 아이를 때리지 않고 키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아직은 사람이 본래 선할 수 있는지 아버지의 폭력을 구현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 혼자 하는 체위
저질 영화를 모처럼 봤다 주말이었으며 만나고 싶은 거리가 없었다 맛있는 걸 먹었지만 배는 충분히 부르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우주의 끝을 보아도 심심할 것 같은 기분이다
길가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 인상이 죽은 사람 나를 닮은 사람
몇 번인가 마주쳤지만 말을 걸기엔 이번 저녁은 허기졌으며 목표 없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불을 다 끄고 방에 엎드려 병과 병을 옮기는 행위를 지속할 동안 길가다가 보지 못한
안 예쁜데 괜찮은 사람 안 괜찮은데 예쁜 사람 사랑을 모른 척한 사람 연을 날리다 날아오른 사람
상상하며 긴긴 밤을 보냈다 느낌이 쉬이 오지 않았다 뇌를 팔고 꽃을 얻은 자
왜 동심을 팔아먹고 신분을 심장에 꽂고 살아가는가 왜 마음을 헐값에 넘겨두고 욕정을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가 아직 북극성은 북쪽에서 반짝이는데 하늘을 보지 않고도 밤길을 바삐 찾아간 정면이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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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다섯 번째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대화이지만 당신이 나의 언어에 다치리란 확신이 있다 쓰지 않는 삶에게 매료되어 남은 노년을 편히 보내고 싶다 그때쯤이면 일방적인 죽음에도 두렵지 않고 당신이 꿈에 나와도 아프지 않으리라 온 신경이 개양귀비밭 되어 넘실넘실 춤을 추지만 여섯 번째 꽃밭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본다 벌써 사랑이 심플해졌다
--------------------------------------- 너는 나의 거울
여자의 입술이 부르트고 창백하여도 아름답다는 세상이 올 것이다
곳곳마다 거울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마을과
뚱뚱한 여자가 미의 기준이라는 어느 나라처럼
곳곳마다 여자를 개처럼 고양이처럼 부르지 않는
나라가 올 것이다 남자다움을 남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여자다움을 여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이곳 한국에서 동성애자 부부가 아이를 입양을 할 수 있는 제도
서로 마주보며 얼굴을 닦아주는 사회가 분명 올 것이다
-------------------------------------------------------------------------- 제3회 사이펀 신인상 당선소감/임윤아
詩는 문짝너머 내 절망을 똑똑히 마주하는 것
문학을 하면서 느낀 건, 문학 내에서도 사춘기가 있고, 슬럼프가 있고, 변화무쌍한 사계절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온갖 세상이 내어놓는 풍요로운 감정을 느끼며 오랜 시간을 견뎌왔습니다. 어디까지 스스로를 망가뜨릴지 걱정하면서도 늘 마음 한켠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글이었습니다. 저는 문학의 힘을 믿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믿을 것입니다.
시를 읽는 것은 제가 가진 절망에 문을 그려 넣는 일이었고, 시를 쓰는 것은 문고리를 잡고 돌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며, 시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문짝 너머 내 절망을 똑똑히 마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분명한 절망이 있고 흐릿한 문 하 나 역시 존재합니다. 제 시를 통해 누군가가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합니다. 절망이 깨끗하게 떠나간 자리에 다시 한 번 희망을 차곡차곡 채워 넣기를 바랍니다. 시는 지치지 않는 생입니다. 저는 당신의 절망의 숨결까지 사랑할 것이며, 당신의 희망찬 앞날을 위할 것입니다. 오늘도 당신이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시를 쓰겠습니다. 언제나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임윤아 -199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2년 충성대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 -2014년 제3회 현진건청소년문학상 단편소설 교육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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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랄한 시, 젊은 분이 기대됩니다.
시가 거침없고 할 말 다하고...
참 좋네요.
멋진 시인이 되실 겁니다!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