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울산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에서 출생한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역관으로 활약했던 송태관(宋泰官)씨의 재산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지금까지 아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재산은 울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였지만 재산에서도 전국구였다.
그의 본은 은진(恩津)으로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宮內府)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을 지냈다. 이 벼슬은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직이 된다. 어릴 때 가난한 집에서 자랐던 그가 이처럼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울산의 부호 추전(秋田) 김홍조의 도움이 컸다.
태관은 어릴 때 추전 집에서 집안 심부름을 하면서 기거했는데 이 소년이 재주가 많고 영민해 장래가 있다고 보고 일본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 송태관씨가 그의 부모를 위해 지은 소가천 재실은 지금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전망이 좋고 규모가 커 당시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추전이 국내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결심한 것은 개화파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일본을 다녀온 후다. 둘은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나라가 부강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각자 매년 10명의 유학생을 일본에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는 울산으로 돌아온 후 이 약속에 따라 유학생을 모집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유학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조선 선비들 대부분이 일본을 상놈 국가로 보아 자제들을 일본에 보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친족 중에서 7명을 선발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씨의 눈에 들었던 송씨가 갔을지도 모른다.
김홍조가 일본에 유학생을 가장 많이 보냈던 때는 경술국치 후 1915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송씨가 모셨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죽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일본 유학은 이 보다 훨씬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송씨의 경우 일본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전공이 상과로 되어 있을 뿐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송씨는 부산 구포를 중심으로 중진 경제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데 이 때 그는 부산 좌천 3동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의 경제활동을 보면 아주 빠르게 부를 축적했다. 예로 1910년 경술국치가 이루어질 때 부산 구포은행이 설립되는데 이때 이미 그는 부산의 부자로 참여하게 된다. 구포은행 설립 때는 그에게 일본유학을 주선했던 김홍조도 참여하게 되는데 이 때 둘의 직업을 보면 김홍조가 건축자재상 운영자인데 반해 송씨는 지주로 되어 있어 이 때 이미 그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 구포은행 주식 배분에서도 송씨는 전체 500주 중 무려 30주를 소유해 이 은행 최고 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그의 경제활동을 보면 1920년에 서울호텔 창립총회에서 취재역에, 그리고 경남은행 총회에서도 취재역으로 피선되었다.
또 1921년 8월 경남은행의 두취로 선출되었고 이 무렵 열린 조선인산업대회 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당시 이 모임에는 박영효가 위원장을 맡았고 위원으로는 윤치호, 송진우, 장덕수, 김병로, 서상일 등 민족대표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에 앞서 이해 3월에는 부산유지들이 모여 교육기관을 확장하는데 많은 돈을 쾌척해 신문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경남 부산부에는 교육기관이라고는 상업학교가 하나 있고 보통학교라 해보아야 3개 뿐이기 때문에 입학지원자의 4분의 1 밖에 수용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다행히 부호 송태관이 2만5000원이라는 큰 돈을 내어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는 상업학교를 시내로 옮겨 지을 수 있고 보통학교도 하나 정도 더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송씨를 칭송해 놓고 있다.
당시 그는 울산에도 재산이 많았다. 특히 그는 삼남면 가천에 농토가 많았는데 당시 가천 사람들은 “송씨가 가을에 수확한 쌀가마니를 한 줄로 세우면 그 길이가 서울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들을 했다고도 한다.
그의 재산은 울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충남 태안군에 간척사업을 해 이곳에도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고 경기도 파주의 임야도 많이 소유하였다.
그가 아들 석하(石夏)를 결혼시킨 것은 이처럼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 때인 1925년이다. 이 때문인지 며느리 역시 엄청난 부자집 딸을 보았다. 며느리 김경옥(金京玉)은 당시 정읍 최고 부자로 만경평야에 가장 논이 많았던 김 참봉의 딸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놓고 경상도 부자와 전라도 부자가 결혼한다고 떠들썩했다. 송석하는 호가 석남으로,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고 한국민속박물관을 설립한 울산출신 민속학자다.
재산 축적에서 태관씨가 울산의 일반 부자와 달랐던 것은 울산의 대부분 부자들이 돈을 모은 후 권력을 산데 반해 그는 권력을 잡은 후 재산을 늘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재산 중 궁금한 것이 태안에 있는 논이다. 현재 태안에는 그의 후손이 갖고 있는 논만 해도 300~400여마지기가 된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가 주로 머물렀던 곳은 부산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태안에 이처럼 많은 논을 갖고 있었나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태안을 가 보았다. 그가 태안에 이처럼 많은 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간척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간척지는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 있다. 간척지는 300㏊로 예상외로 컸다. 두야리는 태안군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20여분 거리다. 이곳에는 ‘서풍농장’이 있는데 이 농장이 지금까지 그의 후손 성범씨의 소유다. 이 농장이 어떻게 성범씨 소유가 되었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태관씨의 족보를 알아야 한다. 그는 세도만큼 자식 욕심도 많았다. 우선 본 부인인 최씨 사이에 아들 석하(石夏)와 딸 석계(石桂), 석혜(石惠)를 두었다. 그리고 다른 부인에서도 많은 자식을 얻었다. 우선 아들만 해도 석부와 석천이 있었고 딸들도 많았다. 그런데 본 부인에서 난 석하는 후손이 많지 않았다. 아들 대영과 딸 조영을 두었으나 불행히도 아들 대영은 18살에 죽었다. 그리고 석하씨 역시 45살에 타계해 석하씨의 부인은 나중에 외동딸 조영과 사위 은휘철씨와 함께 서울 명륜동에서 생활했다.
성범씨는 외동딸 조영씨가 나은 아들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관씨가 모은 많은 재산이 모두 성범씨 소유가 되었다. 경옥씨는 남편 석하씨가 죽은 후 사위, 딸과 함께 이 농장에 자주 드나들었다.
농장이 정이 들면서 경옥씨는 환갑 때 이곳에 농장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큰 집을 짓고 이름을 ‘서풍농장’이라 붙였다.
이곳이 얼마나 정이 들었던지 1995년에는 경옥씨가 남편의 무덤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자신도 죽어 이 곳 남편 곁에 묻혔다. 석하씨는 1948년 타계한 후 그 동안 망우리에 묻혀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석하씨 무덤은 서풍농장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다. 두야리 마을 뒷산에 있는 이 무덤에 올라가면 앞으로 간척지가 뻗어 있다.
당시만 해도 식량이 모자라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던 것을 생각해 간척지를 만든 태관씨가 단순한 세도가가 아닌 선견지명이 있었던 선각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관씨의 흔적은 울산에도 많다. 고향인 상북면 양등 마을과 또 논이 많았던 삼남면 가천 마을에는 그가 세운 재실이 지금도 있다. ‘영모재’ 간판을 달고 있는 양등 마을 재실은 마을 중앙에 있다.
재실 본채는 동향으로 앞이 훤히 틔었다. 그러나 그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서인지 집은 완전히 폐가다. 재실 뒤에는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태관씨 할머니 묘다. 무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소나무다. 울산에는 노거수로 지정된 소나무가 많지만 무덤 옆에 있는 이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에 비해 기품이 있어 보인다. 재실은 소가천에도 있다. 이 재실은 태관씨가 부모를 위해 지었다. 돌계단을 돌아 돌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재실은 우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규모도 엄청나 당시 그의 권세가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의 무덤은 재실에서 신불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다. 무덤 앞에는 그의 부친을 칭송하는 비가 있는데 비의 전액은 의친왕이 직접 써 그가 왕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1928년 11월 타계했다.
태관씨는 아들이 보다 좋은 교육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석하 선생이 언양초등학교 2학년 때 태화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 때 학교에서 멀지 않은 반구동에 큰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이 집이 김홍조의 집 바로 가까이 있었는데 김홍조의 집보다 훨씬 좋았다고 한다. 이 집은 지금은 헐려 언양 자수정 인근으로 옮겨져 전통찻집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알 수 없는 것이 태관씨 본인의 무덤 위치와 태어난 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무덤이 소가천 부모 무덤 가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곳에는 그의 무덤이 없다. 이 때문에 아들 석하씨가 묻힌 태안에 그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에 내가 태안을 간 것도 그곳에 태관씨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러나 태안에도 그의 무덤이 없다. 그는 1939년 서울 계동에서 죽은 후 자신의 임야가 많았던 파주에 묻혔다. 그런데 이곳이 한국동란 후 철책 지역이 되면서 지금은 가족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아들 석하씨가 태어난 해가 1904년인 것을 생각하면 아마 187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태어난 정확한 햇수는 알 수 없다.
망국의 시대 한 세월을 풍미했던 송재산은 아직 곳곳에 많이 남아 있지만 그의 행적은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태관씨.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