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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5-26> 빈 사도의 한 자리, 봉사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 맛디아, 바사바, 유스도, 요셉, 제비뽑기, 품삯, 은 삼십, 토기장이, 죽음의 골짜기, 힌놈의 골짜기
1. 말씀의 배경
오늘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목매어 죽은 후 (마 27:5),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사도의 자리를 제비뽑기를 통하여 맛디아가 채우는 내용입니다.
※ 가룟은 유다의 출신지명 (가룟인 유다-눅 22:3, 요 14:22)
※ 키워드: 가룟유다, 맛디아, 은 삼십, 품삯, 양떼, 토기장이,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 열두사도, 열두 제자, 스가랴서 11장
왜, 가룟유다는 제자에서 탈락하였고, 맛디아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도로 제비뽑힌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하여 가룟유다와 맛디아가 누구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가룟유다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인 슥 11장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여러차례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자임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택하신 것일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택한 것일까? 또 모르다가 나중에 알았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말씀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스가랴서 11장에서 참 목자의 값을 은 삼십에 매긴 자들은 가룟유다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룟유다인 것입니다.
① 스가랴서 11 : 12-1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가랴 11:12]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여기서 은 삼십을 달아준 “그들”이 가룟유다를 예표하는 자들입니다. 뒷 부분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가룟유다가 한 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말씀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당시 종 한사람의 값인 은 삼십에 판 것으로 이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출 21:32).
품삯인 은 삼십을 토기장이에게 던졌다고 했는데 이것도 가룟유다가 그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목매어 죽으니,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은 것으로 이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마 27:5-8).
▶가룟유다와 관련하여 토기장이, 토기장이의 밭이 나오는데, 이곳은 토기장이의 밭은 토기장이에 의해 만들어진 옹기가 깨트려지는 장소로 (렘 19:10)입니다, 그 장소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죽음의 뼈들이 가득한 힌놈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인 것입니다. (렘 7:31-31, 18:2-6, 19:1-15).
[렘 19: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6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참 목자를 버린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은 힌놈의 골짜기, 뼈들이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가는 자들을 예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토기가 터지고 깨지는 것처럼 다시는 원상복구가 안되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룟유다처럼 잡혀 죽을 양 떼이며 (슥 11:4,7)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양 떼들인 것입니다 (슥 11:6). 그들이 참 목자를 따르지 않은 결과입니다.
▶ 이들이 처음부터 잡혀 죽을 양 떼들로 보지는 않습니다.
칼빈을 따르는 분들은 가룟유다가 처음부터 멸망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장로교).
반대로 웨슬리를 따르는 분들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그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여 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순복음, 성결교, 감리교).
결과만을 가지고 본다면 칼빈주의 주장이 맞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을 보면 웨슬리안 주장도 맞습니다. 왜, 그렇까요?
a. 스가랴서를 통해서 본 “그들”도 양이었습니다.
분명히 “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시 77:20, 78:52, 79:13)
그 양들이 누구를 목자로 삼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멸망으로도 갈 수 있고 생명으로도 갈 수 있는 양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양들을 잡아 먹기 위하여 사고 파는 (슥 11:5) 어리석은 목자(슥 11:15)를 따라간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은 참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 10:3-5).
결국에는 그들이 “잡혀 죽을 양 떼”,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양 떼”가 된 것입니다.
▶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처음부터 ”깨뜨려 버리기로 작정한 그릇“은 없습니다. 잘 빚었는데 건조, 굽는 과정에서 토기장이의 의도와 다른 모양이 나온 것입니다 (사 30:4). 마치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랬는데 들포도를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사 5:2,4)
b.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 목자에게 그런 양 떼들도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를 가지고 먹이라고 하신 것도 그들중에도 구원받을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참 목자의 말을 듣고 지켜는 자도 있습니다 (슥 11:11), 그런데 많은 양들은 사탄에 유혹에 따라 참 목자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결국에는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가 꺽여지고 참 목자가 더 이상 먹이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슥 11:9).
은총의 막대기가 꺽인 것은 더 이상 구원의 은총 가운데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며, 연합의 막대기가 꺽인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의 의를 끊는 것과 같이 오늘날 믿음의 형제. 자매 무리에서 떨어진 것이며, 예수님과의 연합이 끝이 난 것을 의미합니다 (슥 11:10,14).
그러므로 그들도 처음에는 구원의 기회가 있었지만 구원에서 멀어진 자가 된 것입니다.
②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원래 ”사도의 직무의 한 부분을 맡은 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17)
이것은 가룟유다도 원래의 사도의 직무를 바라고 택하셨는데, 그는 그것을 버리고 사탄이 인도하는 길로 간 것입니다.
양이 참 목자의 말씀을 따라가면 살고, 못된 목자인 사탄의 유혹을 따라 가면 죽음의 길로 가게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16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죄의 종으로 가느냐 순종의 종으로 가느냐는 그가 누구에게 순종하는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사망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생명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양“인 것입니다.
스가랴서 말씀을 근거로 본다면, 죽임을 당할 양떼 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처럼, 가룟유다도 구원의 기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팔자가 있다고 하시면서 가룟유다를 지적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말씀으로 먹이셨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먹이신 것입니다. 그는 성찬에도 참여했습니다. 계속 먹이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는 그때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을 팔 자가 없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또 다른 가룟 유다와 같은 자를 예수님을 팔 자로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역사상 단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다수입니다.
잡혀 먹힐 양 떼가 여러 명인 것처럼 오늘날도 다수의 가룟유다들이 있는 것입니다. 팔자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염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가룟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팔 자로 쓰임 받는 모든 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자임이 분명합니다.
d. 더구나 그가 예수님을 판 이후에도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죄는 가룟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제자의 자리에 돌아온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주님께 돌아와 엎드려 회개했다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고 사탄의 정죄의 음성을 듣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사탄의 음성을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가룟유다가 언제부터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었을까요?
어떤 분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많은 능력을 행하시어 충분히 정치적 메시야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자꾸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팔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대로 그를 대제사장이나 장로, 서기관들에게 넘겨주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가 드러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여 잡으러 오는 자들을 쓸어 버리고 왕이 되든지, 아니면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에게 잡혀 죽고 다시 살아나든지 이것을 시험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질 때부터 그는 사탄에게 틈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탄이 역사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탄의 조종을 받게 되었다고 봅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마귀가 된 것입니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그가 열두 제자의 이름을 가지고도 헌금을 도둑질하는 도둑이기에 예수님도 팔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둑이라”(요 12:6)
아마 그는 마귀의 음성도 듣고 예수님의 음성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양신역사라고 합니다.
▶ 사실 우리들도 원래는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름으로 구원을 받는 자가 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양을 가졌지만 계속 사탄의 음성에 따라 멸망으로 가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가룟유다도 열두 제자의 이름 안에 그가 있었지만, 참 제자로 나아가지 못하고 악한 자의 한 사람으로 쓰임을 받다가 멸망의 길로 간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태어나서 좋은 자가 있는 반면에, 태어나서 안좋은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기룟유다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 한 자들입니다. 가룟유다는 한명이 아닌 것입니다. 사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여러 명인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이 은 삽십을 정하고 가룟유다는 받았으므로 예수를 사고 판 그들이 모두 가룟유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가룟유다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이런 마음의 생각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3:21). 그 길로 계속 가면 사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와 같은 자가 있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성경을 응하게 하므로 (요 17:12) 안타깝지만 제자의 무리에 그냥 둘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니면 또 다른 가룟유다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그가 악한 도구로 쓰임을 받았고, 그가 제자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는 멸망의 자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 17:12).
그리고 비어진 가룟유다와 같은 자의 자리에는 새로운 자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맛디아인 것입니다.
3. 가룟유다로 인하여 비어진 자리는 맛디아와 같은 자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우리들의 자리도 될 수 있습니다. 그 빈 한 자리는 맛디아와 같은 신앙 수준이 되면 누구나 앉는 자리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열려 있는 제자의 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열둘은 제자의 충만한 수이지 반드시 문자적으로 열둘 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12명, 120명, 1200명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우리들의 자리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가룟유다처럼 차지하고 있는 제자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자리도 될 수 있습니다.
빈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사도”라고 칭함을 받지는 않겠지만 영적원리가 맛디아와 같은 자가 되면 그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들도 맛디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비 뽑아 열한 사도의 그룹에 들어가는 맛디아를 뽑는 장면이 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 1:26절,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여기서 왜,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간다고 했을 까요? 열두 사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이것이 열려 있는 제자의 한 자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처음에 번역이 잘 못된 것 같아서 원어를 보니 분명히 “열한”(헬,헨데카)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들어가니라” (헬,슁카세피조)는 쉰(아무개 중에서)+카타(~로서)+프세피조(세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른 열한 사도와 같이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세어졌다, 카운팅 되엇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added to” (~에 추가되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한 사도의 수에 그가 추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의 자리가 비면 누군가가 그 빈 자리에 사도로 추가되는 것입니다. 사도의 수로 세어지는 것입니다.
열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사도이지만, 나머지 비어지는 한 자리는 맛디아처럼 제비뽑혀 앉는 자리인 것입니다. 제비뽑혔다는 것은 사람이 뽑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도 역시 열한 사도와 같이 하나님께서 뽑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로 피택도 복수로 추천을 받고 제비를 뽑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럼 사도의 수에 들어가는 맛디아는 어떤 사림입니까?
① 요한의 세례부터 주님 승천하신 날까지 항상 함께 하던 자입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열한 제자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함께 했던 자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한 자라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 둔 자도 아닙니다. 끝까지 부활까지 본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열두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들쑥 날쑥한 자가 아닙니다.
“항상”, “함께”. “끝까지”입니다. 제자는 주님과 항상 함께 끝까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맛디아는 오늘날 세례를 받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고 항상 동행하다가 마침내 주님처럼 부활에 동참하는 자를 예표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자가 사도의 빈 한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② 그는 맛디아라는 이름 하나 밖에 드러나지 않은 자입니다.
맛디아와 사도 경쟁을 한 요셉은 바사바라는 별명도 있고, 유스도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요셉 (헬, 하나님께서 더하심), 바사바 (헬, 사바의 아들), 유스도 (헬, 올바른, 의로운)란 이름으로 불려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유명한 자입니다. 널리 알려진 자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맛디아보다 훨씬 나은 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맛디아를 뽑으셨습니다. 맛디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맛디아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이 인정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자이었을 것입니다.
빈깡통이 요란하다고 큰 소리를 내는 자를 사람들은 큰 자로 볼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 보실 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만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자가 빈 사도의 한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그릇이 못되니 제자에서 빠지고(-) 맛디아와 같은 신실한 자가 추가(+)되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와 같이 사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 사도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멸망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맛디아와 같은 자가 앉는 것입니다. 맛디아와 같은 자가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각 지파를 다스리는 자인 것입니다. (마 29:28, 22:30)
4. 놀랍게도 열두 제자가 채워지니 성령이 충만이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어서 바로 나오는 말씀이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입니다.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① 열두 사도 모두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 성령 충만으로 열두 제자가 하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되지 않고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엡 4:3).
③ 그리고 능력을 입어야 제자들이 열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능력이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열 둘은 완전한 제자의 수입니다. 완전한 제자의 수가 차니 성령 충만이 일어났다는 것이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영적으로 열두 제자와 같은 자들로 차 있을 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맺는 말>
▶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참 목자를 따르면 열 두 제자의 무리에 속하는 맛디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 맛디아가 되어 열두 제자의 수에 들어갈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목매어 자살할 가룟 유다, 죽음의 골짜기에 버려질 가룟 유다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시길 원하십니까? 가룟유다로 끝이 날 것입니까? 회개하여 맛디아가 될 것입니까? 그 답은 자명합니다.
대산교회 모든 식구들은 당연히 죽을 가룟 유다가 아니고, 더 나아가 세상적으로 유명해진 요셉, 유스도, 바사바도 아닌 맛디아가 되어 성령충만으로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