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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이동숙
비키니 수영복 미녀들이 화면 가득 해수욕 광고를 시작할 그 때, 시커먼 사내들은 거대한 콘크리트 철벽 안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통념의 계급장을 떼고 몰려든 사내들은 일사천리로 서고, 앉고, 뛰었다. 이십 키로의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오십 미터를 혼자서 왕복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헉헉거리지 못했다. 감시 카메라 덕분이었다. 모든 지시는 컴퓨터가 내렸다. 학교 동기를 만났지만 손을 내밀지 못했다. 함구령을 컴퓨터에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체력훈련장. 아니, 체력고시장. 그렇다. 우리는 이 폐쇄된 창고 안에서 매년 한 번은 거사를 치러야 한다. 푸른 바다를 갈망하며, 미녀들의 쭉쭉 뻗은 그곳에 욕망의 초점을 맞추며 여름을 만끽한다, 다른 한 편에서. 파도소리는 귓가를 즐겁게 미혹한다. 종목별로 설치되어 있는 자동기계음보다 더 극명하게 가슴을 뚫어주는 풍요의 실체들이다.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아가씨들의 풍만한 젖가슴이, 해변의 자유가 낭만적으로 조각퍼즐을 완성할 즈음 상상은 끝이 난다.
체력고시장의 마지막 관문, 복부 비만 검사. 더 이상 환상의 세계를 그리지 못할 종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러니의 현주소라고나 할까. 비만검사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없다. 멀쩡한 두 다리로도 할 것이 없다는 그 수초의 망막함이 우리의 상상력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육체의 좌절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달콤한 유혹도 솟아나는 샘물도 있을 수 없다. 이미 창고 안은 근육질 짐승들이 쏟아낸 침묵과 짠 내만이 출렁거렸다. 지구력 테스트는 참고 인내하고, 또 나름대로 최선이라는 것을 하다보면 통과가 된다. 초스피드 역시 몇 번의 연습을 통해 극복이 된다. 무엇보다 규칙적인 반복의 관성대로 육체는 그저 움직여 주고, 일정의 땀을 빼내면 그리 정신적 스트레스는 겪을 새가 없다. 그러나 이 비만도 검사는 예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체내 수분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든다. 비만도 검사 기계는 작고 간단했다. 본체와 두 줄의 선이 전부였다. 두 줄이 몸에 부착되는 순간 우리는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런 원칙은 없었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한다. 자동 시스템은 우리에게 명령한다. 손바닥의 습기를 수건으로 닦고 검사에 응하십시오. 비만 검사와 손바닥의 습기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신발이 그려진 그림 위에 두 발을 맞춰 서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아주 잠시, 그 찰나를 견디면 된다. 오늘의 체력고시는 끝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뭔가를 좀 상상하려 할 때 청색불이 켜졌다.
지금 나의 육체는 다 소진 되었다. 그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나를 진단할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이다. 그러나 이 단서는 어디까지나 나만의 단서일 뿐이다. 지적소유를 테스트하는 것이 얼마나 수월한지, 감성을 겸한 리더테스트가 얼마나 인격적인지, 나는 따지려 들지 않았다. 다만 체력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의무가 내게 있음을 알기에 그 곳에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자로 동물적 근성을 다 쏟고 나왔을 뿐이다. 그 뿐이었다. 애초에 다른 꿈틀거림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점심을 거르고 직장으로 돌아온 나는 벌써 몇 시간째 창밖을 노려보며 서 있다. 평소 나의 야심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꽉 다문 입술보다 더 강한 시선은 창밖의 광선에 화살을 꽂았다. 심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망의 열기는 언제나처럼 나의 좁아터진 목안을 빠져나오며 불만을 토해냈다. 훅.훅. 끈적거리는 입안의 타액까지 휙 싸잡아 밖으로 나온 내 안의 노폐물은 공중으로 훨훨 날아가지 못하고 도로 나에게 달라붙어버렸다. 황사. 황사 때문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정오. 나는 아내와의 전화통화를 시도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왔었다. 그러나 아내는 집에 없었다. 빈집이었다. 그곳에 머물렀던 흔적을 떼어내기 위해, 아니 등줄기의 땀이나 씻어내리자는 단지 그 소소한 소망이 벅차서 나는 그만 실수를 한 것인가. 나의 탓. 그런 건가. 아닌가. 아내에게 미리 전화를 하고 출발했더라면 지금의 낭패감은 없었을까. 까닭모를 분노 같은 것이 숨기려 해도 자꾸만 모공을 뚫고 나오는지 얼굴이 후끈후끈, 쐐기에 쏘인 것처럼 쓰라렸다. 지금 순간의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냥 봐 줄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나 역시 현실의 배반을 때로는 애교로 봐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냉정해지자. 복부 비만도 검사 때보다 더 사위의 팽팽한 눈동자들이 나를 향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나만 모른다고? 바보처럼 나만 모르고 있다고? 모르다니. 뭘 모른다는 것이지. 디지털 기계장치가 복부의 비개덩어리들을 샅샅이 뒤지어 엎어버릴 때도 나는 자신 있었다. 청신호가 반드시 켜지리라는 것을. 직감인가. 예측불허 위기촉발의 기장감이 빈집을 내리누르는 듯 답답하다.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지금이 그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중요한 그 착지점.
왜 그런 예감을 진작 해 보지 못했을까. 아내가 점심시간에 외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바라던 것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다. 이미 알고, 어쩌면 오늘 우연을 가장해서, 아귀가 딱 맞는 마치 운명처럼 마주치고 싶어서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에 쫓기고, 시간에 작은 목숨이라도 내놓은 듯 마구 달려들었던 지난날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래, 지난날. 내게도 이젠 지난 시절이 너무 많아졌다. 초고속으로 떠들어대는 담론이 어깨를 누른다. 샌드위치 베이붐 세대.
우연이었을까. 나는 왜 아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봤을까, 마흔의 초입 봄날, 황사가 나부끼는 날.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 녀석의 일기장에는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빠도 이기는 대단한 우리 엄마’
아무리 일상이 바쁘더라도 나는 기다림에 늘 익숙해 있었다. 차를 마시며 속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내일을 꿈꾸었다. 몽상가일지라도 유쾌했다. 억지 여유가 가져다주는 거짓이라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괜찮아했다. ‘아침형 인간’이 거리에 쏟아지고 ‘저녁형 인간’이 나의 의식을 메울 때 현실을 떠올리고 바빠졌지만, 여전히 전부를 걸고 하는 짓이란 내일의 태양은 뜰 것이고, 꽃은 피었다 질 것이고, 나의 아이들은 성장할 것이고, 자산은 늘어날 것이라는 긴 기다림의 탐을 세우는 것이었다.
기다림의 결국은 곧 그때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내가 좌지우지 했고 잘 살았다는 고백이 입술로 고백되기를 나는 기다렸었는데. 분명 있을 거야. 제철인데 어디 가겠어. 나는 눈에 힘을 주어 황사가 남아 있는 곳은 없는지 곳곳에 들이대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손님. 후려쳐도 달라붙는 불손한 것들.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그저 껴안고 가야하는 징그러운 것들. 살아야 하니까. 적어도 작은 아들 녀석의 일기장에는 아빠를 좋아한다고 쓰여 있기를 내심 기대하고, 어쩌면 자신도 있어서, 큰 아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과잉관심을 갖고 나는 아이의 일기장을 열어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둘째 녀석마저 엄마 편? 아니, 이 여자, 이 여자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지. 어디 있냐고.
황사가 시작되었다고 알리는 직격탄이라도 되는 듯 아내의 외출은 나의 신경돌기를 너무 바삐 돌리는지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그런데 심장도 그대로, 맥박도 그대로, 심지어 호흡은 더 안정적이다. 뭐지, 육체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이치대로라면 모든 혈관은 뇌로 관심집중, 뇌로 빨리빨리를 외치며 뛰느라 거칠어져야 하는데. 어디가 잘못되었나, 교신이 끊긴 곳은 어디지. 아, 감. 감이 안 온다. 총부리를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두리번 거리는 병사의 두려움. 사방은 고요한데, 오직 총부리만 살아서 꿈틀대는 한밤의 적요. 탕. 탕. 감으로 쏴야 한다. 적보다 더 먼저 감으로 명령을 내리고 감으로 선두를 지휘해야 한다, 군인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역사의 반복은 우리의 솜털을 세우는데 낯설지도 군기가 빠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탄력적이기까지 하다. 전술은 어느 새 인문 중심의 곳곳에 쓰이고 있다. 거부감 없이, 요즘은 그렇다. 점점 지구는 야행성으로 길길이 날뛴다고나 할까. 스물 네 시간 편의점 불빛은 거리를 밝혀내고 있다. 그 어떤 인명 피해가 그들을 둘러싼다 해도 자본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포기되지 않을 몇 가지 중에 하나인 편의점. 고마워해야 하나. 생체리듬은 어쩌지. 암 보험료 마련하느라 야간 일을 자처하는 족들, 투잡 하는 올뺌이 족들. 쳇바퀴 안의 생쥐가 따로 없다.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듯이 금년의 새봄 역시 작년보다는 활짝 필 것이라는 기대로 맞이했다. 고비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를 나의 호흡기는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 했었다. 그런데 뭔가 삐걱삐걱 거린다. 뭔가가 있다. 황사를 능가하는 뭔가가. 두통이 시작되었다. 적신호이다. 감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으로 찾아낸 육감이다. 전술 중 지나치게 이성이 감성을 누를 때가 있다. 군화 발 아래로 따뜻한 향토가 아닌 철 덩어리 지뢰가 느껴진다면 이미 작전은 실패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지뢰의 복판으로 나가기 전에 지뢰의 위치를 감으로, 육감으로 체득한다. 소름이 싹 돋는 찬 기운이, 지나친 고요가 휘둘러 칠 때면 어김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는 견 역시 킁킁 거리며 더 이상 앞으로 발짝을 옮기지 않는다. 아내의 외출과 나의 두통. 누가 그 키를 쥐고 있을까. 아내가, 아님 나.
직장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내를 찾기 위해 아내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 보았다. 그러나 익숙한 기계음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라는 말만이 들려왔다. 응? 나는 순간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해왔다. 내 아내도? 내 예감이란 별 수 없이 아내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나 이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 왜냐, 나의 아내가 가끔 내게 속삭이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신, 나를 속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은 다 보고 계셔’. 맞다, 아내는 본인이 크리스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정말 아내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또 무슨 근거로 아내를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잉꼬부부는 아닌 것 같은데, 참 어이없다.
손목시계의 시침은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자동키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갔다. 거실에는 옅은 주황빛 전등만이 오롯이 나를 맞이했다. 꽈리 모양의 전등은 아내의 종이접기 작품이라고 언젠가 아내는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거실 곳곳에는 아내의 종이접기 소품들이 아내를 대신해서 나를 쏘아보는 듯 했다. 전신 거울의 테두리는 모란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어느 해 봄이었던가. 아내는 옷장의 목화솜이불을 다 끄집어내더니 명주 실밥을 톡톡 뜯어냈다. 누렇게 변색된 목화솜을 타서 아이들의 깔개 이불로 바꾸려 한다고 아내는 신문을 읽고 있는 내게 말했다. 그 목화솜 이불을 싸고 있던 껍데기에는 아이보리색 비단 바탕에 붉은 색실로 수를 놓은 큼직한 모란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의 장롱 속에 있던 촌스런 모란꽃은 아내의 종이접기 솜씨로 탈바꿈되어 거실에 떡 버티고 있다. 모란꽃은 종이로 만든 꽃병에도 가득했다. 벽에도 아내가 만든 종이꽃들이 걸려 있었다. 노란색 개나리, 분홍색 진달래와 눈을 마주친 나의 눈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 거실 바닥으로 향했다. 취기인가. 아내가 흩뿌려놓은, 딱히 뭐라 명명되지 않은 무엇. 거침없다고 해야 하나. 뭐지. 텅 빈 거실이 꽉 찬 이 답답함. 누군가, 누군가 있는 듯한 이 잔영은 뭐지.
사각형 탁자 위에 성경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우리 집에 저렇게 깨끗한 탁자가 있었나. 탁자 위에 펼쳐진 그림은 푸른 초목이 무성한 들판에 양들은 풀을 뜯고, 예수님은 그 양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풍경이다. 헛, 무섭다. 아내의 탈을 쓴 발칙한 것들. 이것들이 다 미쳤나. 뭐야. 뭐냐구. 응.
이쯤에서 나는 아내 보기를 포기하고 작은 아이의 방을 노크했다. 잠시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다. 이미 몸은 후들거렸다. 제발 아이라도 있어줘야 할 텐데. 든든한 백. 그랬다. 첫 아들을 보자 괜히 당당해졌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둘째 녀석 역시 새롭고 신기하고 막 무엇인가 할 일이 많아졌었다, 그 때처럼 아내가 위대해 보인 적이 또 있었던가.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나는 살짝 방문을 열어보았다. 새들의 속삭임이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그들의 리듬은 때 아닌 아침을 몰고 온 것 같다. 상쾌하다. 산새 소리를 방안으로 끌어들여온 주범 역시 아내였다. 며칠 전 아내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핸드폰을 샀더니, 액자형 공기청정기를 공짜로 얻게 되었다고.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던 아이는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 꾸벅 인사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공책에 뭔가를 쓰면서, 서 있는 내게 아이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아빠, 나 바빠서. 형은 학원. 엄마는 모임. 보시다시피 나는 숙제 중.
베란다 쪽은 두 아들 녀석의 책상이 각각 놓여 있다. 큰 아들 녀석의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의자까지 책상 안으로 잘 밀어져 있다. 두 아이의 책상 위에도 역시 아내의 종이접기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탁상시계 받침, 티슈곽 테두리, 연필꽂이, 나무 십자가 받침대 등이 형형색색으로 놓여 있다. 화분 가득 촘촘히 들어찬 산실베리아를 비롯해 내가 이름 모를 작은 화초, 검은 숯들이 가득한 바구니, 시골 옹기 뚜껑으로 만든 어항이 놓여있다. 나는 조용히 아들 녀석의 방을 나왔다. 헉.
소리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붉은 색 딸기가 또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한다.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딸기 접시는 두 아들 녀석의 간식인 듯 느껴져 나는 손을 내밀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은 또 뭔가. 웃긴다, 웃겨. 아내의 외출이라. 그렇지 지금은 아내의 외출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지. 할 일은 해야겠지. 암 하고말고, 내가 누군데. 이까짓 유혹에 미끄러질 것 같아. 흠 어림없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딸기의 향이 아내의 외출과 무관하게만 보이지 않음을 어쩔 수 없이 또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원초적 본능 후각은 이미 아내의 체취를 흠뻑 빨아들이는 듯 눈까지 감고 음미한다. 고마운 사람이지. 내게 아내는. 거짓말의 달콤한 유혹에 취해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황홀을 깨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있는 힘껏 세차게 닫았다. 찬바람이 씽 한 바퀴 돈다. 어지럽다. 냉장고 안의 딸기 향은 냉장고 문을 닫은 후에도 나의 욕정을 자꾸만 키웠다. 아내를 지금 순간 눕히고 싶다는 강한 끈적거림은 황사처럼 덤볐다. 지겹다. 어쩌란 말인가. 아내는 지금 외출중이다. 아내는 외출. 아내가 집에 없다고.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아내는 이렇게 긴 시간동안 집을 비우고 나다닌 것일까. 근데 이 껄끄러운 시간을 안녕으로 지켜내고 있는 저 거대한 힘은 뭐냐고. 무엇일까. 모두가 조화롭다. 살아있다. 흔들림 없이. 빈집이. 내가 미쳤나. 빈집은 또 뭐고 살아있다는 것은 또 뭐야. 배고프다고. 그래 속이 비어서 헛소리 떠드는 거라고. 굶었거든. 뭣 때문에, 몰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내 속은 텅 비었다고.
그날 큰아들 녀석과 함께 아내는 새벽에야 돌아왔다. 아내는 돌아온 후, 한참을 지나서야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아내는 아직 내 옆에서 잠을 자는 여자이다. 마흔의 고개로 접어든 나는 아내와의 별거를 시작한다. 마흔은 낯선 불청객이다. 서른의 부드러움을 뒤로 해야 하는 버거움이 묻어 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 높아 차라리 쉰의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때이다. 마흔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냥 가야할 의무만 남아있다. 이제 나는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 내가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손님이 아닌 주인처럼 나를 대신할 더 큰 힘이 나를 에워싸지 않도록 나는 내 안을 정비해야 한다. 배수진을 쳐야 한다. 그 첫 번째 관문이 어쩌면 아내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새벽 여섯 시에 아내보다 먼저 나는 일어났다. 일어나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어 올리는 일이다. 내가 신문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새벽 공기를 흠뻑 느끼게 하는 차가움이다. 우리에게 열정이란 덜 중요하다. 아니 없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직 냉정만이 있을 뿐이다. 냉정이 주는 질서정연은 칼바람이다. 비만도 검사에서의 적색신호는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는 괴물이다. 아니 우리의 목을 조르는 실질적인 권력일지도 모르겠다. 그 검사에서의 결과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인사기록부에 자동적으로 저장, 공개된다. 붉은 색으로 말이다. 나이도 없다. 계급도 무시된다. 어느 날 그렇게 하달된 명령은 누구를 막론하고 비켜갈 수 없다. 문제는 그 기계의 진정성이다. 말 그대로 디지털이다. 단 몇 마디가 우리의 신체를 진단하다니. 스위치를 켜십시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정말 우리의 육체가 그렇게 혹사당해도 되는 건가. 왜 인권위는 정신적 피해만 다루는 것일까.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순진하기는. 정말 단순한 기계는 정신인데.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지상에서 가장 단순한 오물 덩어리인데. 나는 천천히 사람들에 대해서 읽어 나갔다. 어떤 사람들이 분야별로 최고의 별을 땄는지. 어떤 사람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는지. 웰빙에 대해서, 혹은 아파트 평수에 대해서, 자유무역 협정의 정치적 소리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내가 걷고 있는 지금 이 길을 무사히 멈추지 않고 잘 가기를 바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아내와의 별거를 기다리기로 한 이상 나는 당분간 그 일로 바빠질 것이다. 우선 내 안에 확신이 서야 한다. 어느 정도의 선에서 우리는 별거로 들어가야 하는지. 별거에 대한 제안은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그동안 고마웠다’라고 시작해야 하나?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만약 오늘 저녁에도 아내가 늦게 귀가 한다면 나는 따져야 하나.
전화라는 통신수단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가장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나의 두 발을 더 믿기로 했다. 아내가 없는 빈집을 택하는 지혜도 생겼다. 기억 속의 아내는 남들 다 가는 주일 말고도 수요일 저녁에도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수요일 오후 일곱 시, 아내는 집에 없다. 작은 아들 녀석도 없다. 제 어미랑 교회를 갔는지, 학원을 갔는지 녀석의 방은 비어 있다. 알게 뭐람. 이제 작은 아들 녀석 따위는 관심 밖이다.
냉장고에 부착되어 있는 음식배달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식사로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중국집 외의 식당들은 오천 원 이상이거나 혹은 이인 분 이상의 배달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굳이 자장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썩 내키지 않은 심기를 다스리는 찰나 나의 눈마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변하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띈다.
얼마나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저렇게 캄캄하담. 사진 안에는 벚꽃만이 환하게 주위를 밝혀주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지 않았다. 그 사진 안에 있는 여자들 중의 한 명이 나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 사진을 애써 들여다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흔들리기조차 했는지 아내의 입모양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아내는 저 순간 웃고 있었을까.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교회 집사님들이 저 늦은 시간에 모여서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다고 거의 확신 했다. 왜냐, 아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목사의 마지막 설교는 매번 같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크리스찬이 수요일 저녁 술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끝마무리를 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교회에 간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아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사 설교를 들었었다. 그 마지막 설교 때문에 나는 아내 없는 자리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한 사람의 말장난에 저렇게 수천 명이 동의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납득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인가. 사진 속의 남녀 다섯 명은 누구인가. 학교 동창. 내가 겨우 생각해 낸 궁리 끝의 답이었다. 찾아보자. 아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이름이 뭐였더라. 뭐였더라.
또 여기까지 왔군. 결국 종착점은 아내인가. 이미 엎질러진 아내에 대한 나의 긴 꼬리들을 접고 냉장고 앞을 벗어났다. 싸한 한기는 온몸을 거듭거듭 에워쌌다. 보란듯이 딱 붙여놓은 저의는 무엇일까. 아내에게도 애인이. 아내에게도 남친이. 아내에게도 사생활이. 그런 건가.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컴퓨터로 가자. 컴퓨터는 자신 있다. 아내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다. 아내가 핸드폰 문자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내가 이메일을 열어 볼 줄 모르고, 이메일을 보낼 줄 모른다는 사실이 이렇게 내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다니. 아내가 스스로 기계치라며 홈베킹을 전혀 못해 공과금의 연체료로 아내를 닦달할 때마다 짜증스러울 뿐이었는데 오히려 나를 구원해 주다니.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아내가 없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컴퓨터를 켰다. 내 의지로, 내 손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속도감은 또 나를 흥분시켰다. 직업상 나는 늘 시간에 구속되었다. 머리로든, 손으로든, 몸으로든 무엇이든지 민첩해야 했다.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 민감성으로 대처해야 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단순성 명령에도 목숨 걸고 순발력을 보였다.
우선 먼저 나는 아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홈피에 들어갔다. 여러 메뉴들 중에 지난 주 주일 밤의 예배를 클릭했다. 나는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지만 인터넷 덕분에 아내가 주일 밤 교회에서 찬양단 활동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섯 명의 찬양단은 남녀로 구성되었고 아내는 좌측으로 두 번째에서 손을 높이 들고 뛰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찬양할 때 언제나 아내의 손은 하늘로 뻗어 있었다. 손가락까지 쫙 편 아내의 손은 찬양이 다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아내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다.
찬양이 끝나고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 때 아내를 포함한 찬양단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찬양단원들은 하나 둘씩 짝을 지어 단상을 내려왔다. 갑자기 나는 아내가 누구와 단상에서 내려올지 궁금해졌다. 나는 아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는 대표기도 자 옆으로 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순간 사실 모든 교인들은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중이다. 아내의 남자친구인가, 저 대표기도 하는 사람이?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기도 자도 기도를 하고, 아내도 기도를 하는지 고개는 숙여 있고, 아내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아래복부에 포개어 있었다. 설마, 아내가 그렇게 부도덕한 사람이었나.
대표기도가 끝나도 아내는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화면으로 보였다. 아내는 지금 뭐하는 거지. 정말 아내가 미쳤나. 자기 자리도 지키지 못할 만큼 분별력이 없어졌나. 그런데 누구도 아내를 데리고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처럼 아내나, 교인들이나, 심지어 기계들이나 모두 너무 자연스러워보였다. 낯선 침입자, 나만 빼고 시간은 계속 준비된 것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교인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화면에 부목사가 나왔다. 그는 간단하게 아내의 이름만 부르고 사라졌다. 부목사가 사라진 화면에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환호성도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단상 중앙에 서 있는 아내. 누가 아내의 남친이지. 눈동자는 저절로 굴러갔다. 어떤 놈이지. 어떤 놈이 감히. 내 눈은 못 속이지. 내가 누군데, 최연소 대령인데. 어디 그 뿐인가.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아내의 표정은 봄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글쎄 모르겠다. 거리감 때문인지 화면 가득 찬 아내였지만 낯설기만 하다. 누굴까. 누가 저렇게 아내를 화사하게 바꿔놓았을까. 그럼, 나는. 나는 무엇을 했지, 아내와. 흐흐. 웃기고 있네, 누구 맘대로. 나는 나의 속을 아내에게 들킨 것 같아 서둘러 컴퓨터를 꺼버렸다. 자장면을 먹어야겠다, 아내가 오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다시 찾아간 냉장고 앞에서 식당의 메뉴판을 읽어내려 갔다. 조금은 여유 있게 메뉴판의 디자인과 음식과 친절성을 따지며 고르고 있었다. 식당은 역시 맛이 최고지 하며 나는 기억속의 자장면 맛을 생각해내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혀까지 굴려가며 침을 만들었다. 어쨌든 맛있게 먹자고 다짐까지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하든 냉장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냉장고는 그저 보여주기만 했다. 나는 노란 색의 메모지에 적혀 있는 아내의 글씨를 읽게 되었다. 그 메모지에는 아내의 일주일 계획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눈은 몇 번이고 월요일에 멈춰 있다. 아내의 월요일 계획에는 ‘시 창작교실 수업’이라고 쓰여 있다. 아내가 시를? 아내가 시를 쓴다고? 아내의 꿈이 시인이었던가? 아내는 교회에 미쳤었는데.
나는 별 수 없이 다시 컴퓨터를 켰다. 곧바로 내문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내의 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문서찾기에서 아내의 이름으로 검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아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홈피에 들어갔고 지난 주 주일 저녁예배를 클릭했다.
클릭, 클릭 하는 어느 순간 아내의 시 낭송 장면이 화면으로 떴다. 헉. 아내가 시를 쓴다고. 반쪽은 아내가 차지하고 나머지 반쪽은 한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의 제목은 ‘빈집’이었다. 그리고 그 시를 지은 사람도 아내임을 알려주는 이름 석 자가 분명 있다. 나의 아내는 시인이었던가. 언제부터였지. 이 현실은 나의 기다림에 예정되어 있었던 건가. 그런데 ‘빈집’은 또 뭐야. 신앙시나 쓰면 되지.
저녁 어스름 한 칸
떼밀리어 들어앉은 구들장맛
누군들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마는
입술 건 맹세라도 찾는지
거푸거푸 달싹이는 빈소리
속절없는 의리 어찌 탓하리오
오롯이 불 지피는 빈 병
가파른 언덕빼기 넘어
모퉁이 돌고돌아
꽉 찬 소주병 또 움켜쥘 때
문풍지 흔드는 대숲 찬바람
진부타령 젖어든 허파 안으로
훠이훠이
오늘도 자정 넘긴
발자국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가는 18번지
아내의 시 낭송이 끝나자 박수 소리와 함께 휘파람도 곳곳에서 나왔다. 다시 좀 전의 부목사가 나왔고 아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여러분 오늘 이 집사님이 아주 귀한 분을 모시고 왔답니다. 그 분들은 이 집사님의 고교 동창 분들로 학교 홈피에서 이 집사님의 시를 만났고, 그 시를 통해 예수님이 궁금해졌답니다. 그 분들을 단상으로 모셔보겠습니다. 자, 환영의 박수.
아내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맞이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교인들에게 소개해 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듯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오늘 낭송한 ‘빈집’은 우리들에게 참 다가오는 시였어요. 우리들이 이제 다 마흔을 앞두고 있어요. 마흔이 되니깐 뭔가 허전함이 밀려오고 우리의 끝에 상념이 머물렀어요. 길을 몰라 허둥댔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빈집’을 읽는 동안 여유가 좀 생기더라고요. 우리의 인생에 돌아갈 빈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또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소망이 되더라고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빈집은 예수님이 마련해 놓은 진짜 우리의 돌아갈 고향이 아닐까요.
두 번째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친구의 시를 외워버렸어요. 한 번 낭송해 보고 싶어요. 제목, 블랙홀. 칵테일 소리를 내며 쪼개지는 불빛/ 달려와 쏟아내는 소음/ 너와 나의 우리/ 충혈 된 빛의 혼돈/ 거리거리로 내몰려와 왁자지껄/ 육체의 담력// 짙어진 미로를 만들고, 또 만들어/ 아우성 끝의 잔잔한 떨림조차 추해진/ 착지점 없는 허공/ 앞이 아닌 지나온 굽은 길/ 딱, 한 번 찌를 듯한 기세에 눌려/ 온몸을 휘감아 돈 낯뜨거운 집착/ 조각조각 흩어진 백설의 살점이/ 침식되어버린 한 덩어리/ 그 후
저는 이 시를 낭송하고 정말 궁금해졌어요. 우리가 모두 블랙홀에 빠져든다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블랙홀은 아마 죽음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다가왔어요. 우리는 정말로 죽음을 향해서 전력질주 하지 않았나요.
핸드폰 진동음이 찌릿찌릿 가슴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손까지 괜히 떤다. 뭐가 문제였지. 컴퓨터를 먼저 꺼야하나. 아니 전화를 우선 받아야겠지. 모르겠다. 설마 다짜고짜로 내게 따지진 않겠지. 손을 진정시킨 나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아내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남편처럼, 틀림없는 아내의 전화라는 확신을 갖고 폴더를 열었다. 아주 느긋하게, 그것도 어느 새 의자를 찾아 앉고 난 후다.
“예, 김진호 대령입니다.”
“나, 박 대령이야, 검진 날자 잡았어? 같이 가게”
“응? 검진? 무슨 검진? ”
“이 달 안으로 추가검진 다 마쳐야 하잖아, 나도 깜박했었는데, 아내가 기억하고 있더라고. 우리 나이가 그렇다나.”
“응? 추가검진? 없어. 비만도 검사에서 청색불 받았거든.”
“허허, 이사람 정말? 마흔 몰라, 위 내시경, 간 초음파, 아직도 감이 안 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지금. 아니 요 며칠사이
나 뭐하고 다녔던 거지. 맞아, 그놈의 황사. 황사가 문제였어. 나쁜 놈. 봄날의 불청객. 나는 닫혀 있던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후득. 후두득. 빗줄기가 제법 굵은 초여름 소나기이다. 쭉쭉 뻗은 아스팔트의 열기는 빠르게 젖어들었다. 갑작스런 소나기 세례 덕분에 거리의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시원하단다. 숨이 트여 좋단다. 위로만 쑥쑥 크느라 분주했던 줄기들이 잎들의 수선스러움에 덩달아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초록이 짙어가는 잎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그들만의 순수가 솔솔 바람을 탄다. 봄날의 꽃보다 더 진한 향수다. 나그네의 발걸음이 수초동안 대지의 호흡을 만끽한다. 마흔의 소리가 울린다, 괜찮아. 생의 한 올은 또 그렇게 나폴나폴.
약력)
이동숙
문예연구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