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도시체험 확대와 일상성의 성찰 - 1990년대 이후의 시를 중심으로 -
1. 도시체험의 확대와 일상성의 성찰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한 도시적 삶의 양적 팽창은 평균적이며 균일적 일상성으로 현대인의 삶을 변화시켰다. 도시적 일상의 평균적 균일성은 현대적 삶의 근본 특징이다. 대량생산과 도시화, 그리고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의 삶이 일정한 유형을 반복하게 되면서 일상성은 현대성을 이루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일상성은 세속적 삶의 속악성과 반복성, 타율성과 범속성으로 인해 미적 범주에서 부정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무의식 세계로의 침투가 가속화되는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일상성은 현대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일상성에 대한 탐구는 전지구화된 자본주의와 이것이 배태한 도시문명의 현대성을 이해하고, 그 상부구조를 이루는 문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준거틀을 제공해 준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대하여」라는 평문은 현대사회에서 시인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관점을 제시해 준다. 그는 보들레르가 군중에 매혹되어 그들 사이를 거닐면서도 동시에 군중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근대 세계에서 시인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암시해준다고 한다. 보들레르와 같이 현대 시인들도 일상의 속악한 세속도시의 한복판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부터 시적 소재를 취하고, 도시적 감수성으로 상상력의 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일상의 세속세계는 초월성이 거세되고 무의미한 풍요와 화려함만이 현시되는 공간이다. 도시공간은 일상의 무의미함과 권태, 반복과 통속이 압도한다. 그러나 일상성은 우리의 삶과 존재가 현현하는 공간이며 방식이기 때문에 ‘삶의 구체성’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에서 ‘도시가 문제적인 공간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1930년대 이래, 산업사회의 여러 징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70년대 이후부터 도시는 중요한 문학적 관심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80년대 말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동반하면서 이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는 일상성이 현대성의 구체적인 일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적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성에 대한 시인들의 미시적 관찰과 반성은 삶의 진정성에 이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시의 삶, 혹은 현대적 삶의 일상을 지배하는 물질과 기호의 현란함에 스며들어 있는 욕망과 미시권력의 작동을 엿보고, 이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화려한 외관의 세속도시 이면에 숨은 권력,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타율성, 비개성적 존재방식을 발견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본고는 1990년대 이후 도시적 일상성을 탐사하면서 지금 여기에 깃든 ‘현대성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보여주는 시들을 주목하고, 대도시 공간의 등장으로 발생한 일상성에 대한 시인들의 미적 체험을 논의한다. 현대시의 중요한 시적 사유 가운데 하나는 도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성에 대한 성찰이다. 현대시는 일상성에 대해 민감하고도 전위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삶은 대개 이전과는 다른 고도로 발달한 후기산업사회의 도시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변화, 즉 “도시화, 또는 도시체험의 증대는 한국 현대사회와 시의 역사적 변화에 주요한 지표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일상성은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세속적 삶의 속악성(俗惡性)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일상성은 “희극적 대상이 되거나 시인이 금기시하기까지 하는 소재” 거리에 불과했다. 그것은 낯익고 습관화되어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며, 그래서 관습적이며 기계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의 세부로서 세속적 일상성은 미적 대상이 될 수 없는 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부정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우라 경험’의 붕괴와 도시체험의 확대는 자본주의적 일상성을 새롭게 주목하게 한다. 일상성이 지배하는 도시는 사회적 공간, 즉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미적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시에서 일상적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미적 체험도 한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탈근대적 도시의 등장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적 일상성이란 고도로 조직화된 자본과 제도의 힘에 의해 분배되는 시간의 균질성을 중요한 속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한 사회의 욕망과 운명의 표정을 간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현대시의 도시체험 확대와 관련하여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일상성에 주목한다. 특히 본고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시가 자본주의적 일상성을 어떻게 주목하고 있으며, 그리고 도시체험의 시적 주체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조명하고자 한다. 이는 곧 도시적 일상성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도시적 일상성에 대한 미적 체험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로써 도시적 일상성의 시적 스펙트럼을 이해하고 나아가 문학과 인간, 도시적 환경이 보다 나은 미래학적 전망을 열어가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2. 묵시록적 상상력과 공포의 미학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급격하게 변화해 왔다. 농경사회의 환경이 주로 자연이었다면, 산업화 이후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도시이다. 더군다나 후기산업사회로 지칭되는 오늘날의 고도로 문명화된 대도시의 출현은 현대인의 생활방식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생활과 지각방식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문명의 총화로서 도시는 삶과 정신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며 우리의 삶과 정신을 규정한다. 그만큼 도시는 물질적 토대로서, 그리고 삶의 조건으로서 현대적 삶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도시적 일상성은 삶의 양식과 의식을 반영하고 새로운 미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문제적 양상임에는 틀림없다. 그 가운데 특히 후기산업사회로 대변되는 탈근대의 사회는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라 가치의 상실과 일정한 질서를 상실한 묵시록적 상황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의 도시적 문명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분열을 낳고 있다. 그 속에 자리한 시적 자아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매우 낯선 것이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대시에서 일상의 도시공간은 묵시록적 상황의 집약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나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에/머리를 내밀고 있는 느낌이었다/불쾌했다/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랄까/나는 손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그 동작이 늪 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허우적거림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죽음에 둘러싸여/무력했지만 파리 쫓을 힘은 있었다/빌딩을 오르내리는 날개 없는 요일들/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함몰과 큰 추락에 대한 공포에 나는 떨고 있었다 최승호,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중에서
휘황찬란한 세속도시의 이면에서 도시문명의 부정적 폐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묵시록적 상상력을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시인이 최승호이다. 위의 인용 시에서처럼 시인이 투시하고 있는 것은 “죽음만이 살아 있는” 그로테스크한 일상의 풍경이다. 화자는 엘리베이터라는 도시적 일상의 공간을 불길한 죽음을 내장한 묵시록적 풍경으로 제시한다. 화자는 일상의 공간 속으로 갑자기 날아든 파리를 통해 일상의 영역에 내재한 죽음의 불길한 공포를 환기한다. 죽음에 기생해 사는 파리의 기분 나쁜 이미지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라는 일상의 공간을 죽음의 이미지로 뒤덮어버린다. 즉 파리가 날아들자 그 일상의 공간은 “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이 된다. 죽음의 냄새를 맡고 날아든 파리를 쫓는 동작이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 함몰의 이미지와 “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추락의 공포로 전도되는 현실은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묵시록적 세계를 보여준다. 엘리베이터는 편리하고 쾌적한 도시적 삶을 보장하는 일상의 소품이다. 이러한 엘리베이터로 상징되는 문명의 도시는 추락과 함몰의 공포를 이면에 거느리고 있다. 이와 같은 도시적 일상성에 대한 시적 탐사와 그 안에 드리워진 묵시록적 분위기는 자본주의적 물신화가 필연적으로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후기산업사회로 지칭되는 90년대 이후 서정시에서 도시적 ‘일상성의 강화는 전시대를 이끌어왔던 거대이론의 붕괴가 초래한 필연적 결과’이다. 이러한 묵시록적 세계 인식은 전망의 부재와 파국에의 불길한 공포적 예감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도시체험의 묵시록적 상상력은 문명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육교의 검은 철근에 매달려/다리를 버둥거리던 너,/깨진 블록처럼 투덜거리며 침을 뱉고/찌그러진 태양의 헬멧을/다시 눌러 쓴다./금이 간 두 눈을 깜박일 때마다/황색과 초록의 틈새로 흰 먼지의 불꽃이 피어나고/검은 원숭이떼 자욱하게 몰려간다. 이기성, 「1호선」 중에서
이 시는 지하철을 소재로 문명의 디스토피아적 전망, 즉 문명의 처참한 몰골을 음산하게 그려내고 있다. 지하철은 도시적 삶의 공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주요 수단이다. 지하철은 아파트나 백화점, 자동차와 같이 없어서는 안 될 도시적 일상의 중요한 세목이다. 그것은 공간이동을 보장하는 물질적 조건이면서, 동시에 도시적 삶과 경험의 기본적인 국면을 이루는 지배소이다. 화자는 문명의 최첨단에서 문명의 잔해, 거대한 욕망의 탐식이 내뱉은 폐허의 부산물을 보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과부하에 걸려 “과열된 퓨즈처럼 녹아내리”고, “육교의 검은 철근에 매달려/다리를 버둥거리”는 지하철 1호선에서 화자는 문명의 디스토피아를 본다. 도시는 ‘악몽 속의 풍경’과 흡사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 군상은 “검은 원숭이떼”에 불과하다. 그곳에서 태양은 “휘어진 고압선 너머로 쿨룩” “기침을 하며” 떠오르고, “세상은 온통” “탄식처럼 거리를 점령한 원숭이떼”의 “벌건 엉덩짝처럼 타오”른다. 이것은 다시 환경오염과 인간성 마멸 등속의 우리 주변에 상존하는 문명의 부정적 이미지들과 어울리면서 침울한 악몽 속의 풍경을 연출한다. 보들레르의 ‘대낮에도 유령이 행인들을 붙드는’ 망령의 도시처럼, 이 시에 그려진 도시도 “검은 원숭이떼가” 사방에서 “킥킥거리며 튀어나”오고 “자욱하게 몰려”가는 ‘유령’의 도시와 같다. 후기산업사회의 도시적 일상에 대한 미적 체험은 이처럼 묵시록적이다. 도시문명과 일상성에 대한 묵시록적 인식은 도시체험의 한 양상이며, 이것은 그러한 묵시록적 세계에 대한 대결의 한 방식이면서 일상을 이해하는 한 방식이다. 시인들이 도시적 일상성을 탐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이 시의 제재가 되어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시적 일상성을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그것이 은폐하고 있는 공포와 폭력을 경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묵시록적 상상력은 존재의 불안과 공포, 자아와 세계의 분열, 소외와 상실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현대문명의 착락적인 흥분과 소외, 공포와 불안의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묵시록적 상상력은 다양한 시간의 범주들이 일으키는 무정형의 혼돈을 감지하고 맞서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보편적 욕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반복의 신화와 가능성의 균등화
근대도시란 합리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대문명의 소산이다. “근대 도시의 출현은 사회학적으로 인간의 소외를 의미하지만 문학적으로는 생활방식과 문학적 감수성의 변모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뜻한다.” 도시에 거주하는 시인들의 미학적 자의식의 형태는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한국문학에서 널리 다루어온 주제이다. 특히 후기산업사회라는 변화된 물질적 기반과 고도로 문명화된 도시에서 생성된 시의 인식구조는 대체로 “고독과 소외, 꿈, 개인주의적 경향, 비인간화 또는 통합된 개인의 붕괴” 등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들은 왜곡된 도시적 삶의 비인간적 양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도시적 일상을 해부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적 욕망은 도시적 일상을 재현하고 아울러 도시적 삶의 불모성을 집요하게 천착해 들어가 그것의 정당성과 절대성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남자 앞의 남자가 신문을 보고 여자 옆의 여자가 책을 읽는다. 뜨거운 이야기의 마을에 이른다. 이야기가 끝나면 주인공이 타오르는 그런 마을. 하나둘 셋 둘둘 셋 박자를 맞추어 남자들이 다시 잠이 들었다. 여자들 때때로 방향을 바꾸었다.//가방이 미끄러지고 치마 속이 드러나고 지갑은 주인을 잃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차가 달리고 얼굴을 바꾸어갔다 남자들이 내리고 여자들이 내리고 하나둘 셋 둘둘 셋 박자를 맞추어 걸었다 나는 분명히 직각으로 어깨를 세우고. 이근화, 「지하로 달리는 사람들」 중에서
일상의 신화에 내재하는 반복과 평균율은 비개성적 방식으로 일상인의 존재를 규정한다. 위의 작품은 일상적으로 주어진 친근한 환경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현존재’가 타자라는 존재양식으로 분열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평균율 속에서 자기 자신은 없고 타자의 의향이 현존재의 모든 존재 가능성을 임의대로 조정하는 경우를 ‘존재가능성의 균등화’로 보았다. 존재가능성의 균등화는 획일성 혹은 균일성으로서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규정한다. 이때 개인은 완전히 무화되어 타자에 귀속되고 ‘나’는 사라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타자의 지배는 눈에 띄지 않고, 타율성은 이미 뜻하지 않게 ‘나’에게 떠맡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가능성의 균등화라는 일상적 세인(世人)의 실존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가방이 미끄러지고 치마 속이 드러나고” 지갑을 잃는 지극히 일상적인 지하철 속에서 타자를 관찰하고 타자화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일상적 생활 세계의 관찰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는 셈인데, 거기에는 ‘나’는 없고 평균율의 반복만이 허락될 뿐이다. 화자인 ‘나’는 “남자 앞의 남자가 신문을 보고 여자 옆의 여자가 책을 읽고”, “하나둘 셋 둘둘셋 박자를 맞추어 남자들 다시 잠이 들”고, “여자들 때때로 방향을 바꾸”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차가 달리고”, 반복되는 리듬에 “박자를 맞추어” 걷는 일상적 풍경을 통해 비개성적 존재방식으로서의 일상성을 강화한다. 시적 화자인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끝까지 “어깨를 직각으로 세우고” 있다. “어깨를 직각으로 세”운 기계적 경직성이 바로 일상이다. 화자는 이렇게 균등화된 일상 세계를 통사구문의 병행과 어휘 및 음절 반복을 통해서도 의미론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즉 문법적 병행 구조를 전경화하여 시적 분위기와 정조를 창출하고,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일상성이 내포한 가능성의 균등화라는 의미를 강화한다.
지하철 신도림 역에 내리면/화살들이 정신없이 쏟아진다//계단을 올라가라/옆으로 돌아가라/…중략…/치약은 저 거다/여기가 최고다/발 밑을 조심하라//화살에 맞고도/그 많은 사람들이/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잘 살아가고 있다 신미균, 「화살표」 중에서 인용 시는 도시적 일상생활에 대한 시적 보고로써 일상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색을 보여준다. 화자는 도시적 삶의 일상적 사실에 접근해 반복되는 경험의 타율성과 속악성을 전경화한다. 일상의 세부는 볼품없고 추하다. 그것은 인습적이고 기계적이며 자동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성은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명명되는 오늘날 “사회를 알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는 ‘화살표’로 상징되는 강제된 욕망과 물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으로 읽힌다. 화자는 ‘화살표’를 통해 타인과 똑같이 인식하고 똑같은 틀에서 똑같은 견해를 갖고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도시적 삶의 균일성과 비자율성을 비판한다. 도시의 일상적 삶에 강제된 획일성은 ‘현대성의 무의식’이라는 명제를 드러내는 본보기이다. 강제된 획일성과 비자율성은 도시적 문명의 삶이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강제하고 조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치약은 이거다” “여기가 최고다”라고 지시하는 상품미학의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는 ‘화살표’는 도시적 삶을 획일화하는 강제적 명령의 기호이다. 그것은 질서와 편리라는 이름으로 일상인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화자는 도시의 일상성이 품고 있는 강제성, 즉 화살표의 지시적 명령에 조종되는 현실을 반성한다. 화살표가 상징하는 편리와 합리, 그리고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조절하고 금기하는 규칙이다. 화자는 이러한 도시적 삶과 일상에 내재한 도구화되고 획일화된 타율성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한 비판은 현실의 맹목적 상태에 대한 시적 반성이다. 그러니까 “화살에 맞고도/그 많은 사람들이/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잘 살아가고 있”는 무반성적 보행, 즉 ‘현대성의 무의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도시적 일상의 신화를 해부하는 이와 같은 미적 인식은 현대성의 무의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문제적인 것은 시인들이 단순히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재로 삼아서가 아니라, 도시문명이 안고 있는 비개성적 존재방식의 표현이다. 시인들은 가능성이 균등화된 도시적 삶을 형상화함으로써 일상이 내재하고 있는 어떤 불길한 운명을 예감하고, 그것을 경계하고 그러한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시는 일상의 리얼리즘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 반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또한 균등화된 일상적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현실을 전망하고자 하는 의지적 노력이다.
4. 욕망의 생태와 환(幻)의 세계
아우라가 사라진 사회현실에서 기호와 이미지 가치가 지배하는 소비사회의 풍경은 익숙한 것이다. 상품의 효용성이나 사용가치보다는 기호와 이미지 자체의 상징가치가 우세한 소비사회의 현실에서 일상인 욕망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물신의 매혹에 무력하다. 지시대상과 분리된 채 부유하는 현란한 기표들의 매혹, 풍요와 행복의 고혹적인 공격으로부터 현대인의 욕망은 무기력하다. 우리의 현실은 “소비가 생활 전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소비를 위해서 “환경은 전면적으로 조절되고 정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잘 정비되고 조절된 소비의 도시에서 일상인은 삶을 꾸리고, 그 경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지시대상을 잃은 떠도는 기표의 현란한 이미지들은 우리들에게 자유와 행복, 풍요와 유토피아의 황금시대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것들은 기표가 기표를 낳고 또 낳는 자기증식을 거듭하며 욕망을 조작한다. 도시의 시인들은 이러한 소비 도시의 물질과 패션, 기호의 풍요로움과 현란함에 깃든 욕망의 확대재생산과 미시권력의 작동을 바라보며 이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나뭇가지에서 마른 잎들 떨어져/부랑아처럼 뒹굴고 쓰레기통 걷어차며/분통 터뜨리는 어둠 속 악다구니에서/오래된 종자의 힘이 느껴진다/극장 입구 무리 지어 걸어 나오는 유령들/소실점처럼 아득히 꺼진 눈빛으로/담배를 피우며 이미지에 취해/맥 빠진 몸을 흐느적흐느적 저으며/3을 향해 가고 있다 장경린,「재개발지역 2」 중에서
인용 시에서 화자는 효용성이 다해 재개발을 앞둔 지역의 황량함에서 새로운 욕망의 재창출을 본다. 재개발이라는 욕망충족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이제는 “사용할 수 없게”된 지역에서 화자는 “이미지에 취해”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순환의 고리를 보는 것이다. 화자는 한계효용이 체감하고 욕망의 한계충족이 체감함에 따라 욕망이 더욱 새롭게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마치 “속에 무엇인가 꽉 차서/텅 비어 보이는 9”처럼 인간의 욕망이란 충족될 수 없는 결핍된 것이기에 끊임없이 새롭게 재개발해야 하는 욕망의 순환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욕망의 결핍을 촉발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재개발 지역’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욕망충족의 순환에 비례해서 그 충족의 가치율은 갈수록 하락할 수밖에 없다. 화자는 이러한 결핍과 충족의 순환 고리가 단축되는 욕망의 생태를 비감하게 조망한다. 화자는 “꽉 차서/텅 비어 보이는” 것에서 낡은 욕망의 폐기와 새로운 욕망의 확대 재생산을 본다. 화자가 바라보는 ‘재개발지역’은 꽉 차서 텅 빈 ‘9’이며, 그 거리는 “마른 잎들”이 떨어져 “부랑아처럼 뒹굴고” “어둠 속 악다구니에서”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삭막하고 황폐한 곳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9’처럼 꽉 찼지만 텅 비어 있는 결핍의 풍요와 환(幻)에 취한 ‘유령’이다. 그들은 속이 텅 빈 풍요와 거짓 욕망으로 “이미지에 취해” “소실점처럼 아득히 꺼”져 간다. 화자는 이것을 “이미지에 취”한 환(幻)의 현실로 인식한다. 그것은 결국 부정되어야 할 세계이며, 그 속에 매몰되어 의식을 마비 당한 채 그것이 거짓된 세계인 것조차 망각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화자가 도시의 ‘재개발지역’에서 발견한 것은 “이미지에 취해” 의식을 마비 당한 채 환의 세계에 함몰되어 있는 인간과 조작된 욕망으로 이루어진 허상의 세계이다.
무엇이든 입속으로 들어오면/무조건 빨고 깨물고 질겅대는 당신의/무의식에 시동을 건 나는/이제 당신이 기계적으로 씹는 대로 씹히면서/황홀한 자본의 오르가슴을 향해 치닫는/단물 빠진 질기디 질긴 창녀가 다 되었다/결코 삼킬 수 없는 그 천박성 때문에/아니, 나도 당신의 그 캄캄한/욕망의 목울대를 넘볼 용의는 없지만,/말로 오입하듯이 수다와 잡담의 대용으로 즐기다가/射精하듯 퉤, 뱉어버리는 일을 두고/그 어떤 짐승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반추 없는 되새김질이라고 혀를 차며 간다 이덕규, 「자일리톨 껌」 중에서
인용 시는 감각적인 언어적 기교와 성적 상상력을 통해 상품이 주는 매혹과 쾌락을 도발적으로 보여준다. 화자는 조작된 욕망의 세계에서 “황홀한 자본의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흔하게 접하고 씹는 ‘자일리톨 껌’의 일회적이며 천박한 속성을 통해 자본의 상품논리와 거기에 무반성적으로 사로잡힌 욕망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상품논리와 상업적 책략이 감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체제의 문법이 갖는 천박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 시의 이러한 의미 자질을 일상에 편재한 무의식적 욕망에서 길어 올린다. 욕망의 생태를 통해 화자는 인간의 탐욕적인 실존을 확인하고 자본의 상업적 책략, 그 “현란한 혀굴림에 놀아나”는 욕망의 작동을 냉소적으로 성찰한다. 껌을 씹는 행위는 무의식적 행위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러한 무의식적 행위를 특수화함으로써 그 행위의 부정성을 환기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품의 무의식적 소비가 내포한 부정성 자체가 아니다. 이 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것에 길들여져 도취된 의식과 그 상업적 책략에 점령된 무의식적 욕망, 그것에 의한 소비 행태의 일차원성이다. 이 시의 문제성은 입 속에 껌을 넣고 씹는 무의식적이며 ‘기계적’인 반복 행위와 성적 욕망의 ‘오르가슴’을 연상해 겹쳐 놓는 데 있다. “자일리톨 껌”이라는 상품이 자동적으로 환기하는 일정한 연상작용과 성적 행위를 겹쳐 놓음으로써 자본주의 체제 속에 길들여진 관성화된 우리의 의식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화자는 물신의 욕망에 대한 독특한 독법을 통해 상품이 강요하는 타율성과 그 상품이 유포한 욕망의 질서 속에서 맹목의 상태로 반성하지 않는 의식을 반성한다. 화자는 무엇인가를 계속하여 소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도시적 일상의 욕망을 굴절해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절대성과 환상을 전복한다. 도시적 삶과 자본의 상품 논리가 유포한 왜곡된 욕망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비단 이들 시만이 갖는 독특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도시 문명과 상품의 논리에 마비된 의식과 왜곡된 욕망에 대한 시적 독해는 오늘의 시인들에게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적 인식과 성과는 80년대 이후 많은 시인들이 가졌던 시적 성과와 더불어 있으며, 이제 그것은 현대 시인들에게 보편화되었다. 온갖 이미지와 기호가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한 복판에서 현대 시인들은 거기에 몸담고 언어를 무기로 대결한다.
5. 물신체험과 소외의 수사학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서 상가나 백화점은 물질적 쾌락을 보장하는 조건이며, 도시체험의 기본적 국면이다. 자본주의 상품미학의 전시장인 거리나 백화점은 새로운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들 공간은 도시적 삶의 풍요로움과 물질적 풍요의 신화를 보장해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그러나 벤야민의 분석처럼 도시공간에서의 미적 체험의 주체는 상품의 황홀한 유혹에 매혹당하면서도 그 상품의 매혹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양가적인 자이다. 상품에 대한 매혹이야말로 “대중의 참다운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대중을 사로잡는 일상에 있어서의 권력을 붙잡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체험의 확대에 따른 일상성에 대한 탐사와 복원은 왜곡된 현대성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을 찾는 일에 부응하는 것이다.
눈여겨 보지 마. 난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어. 유통기한 지난 젤리처럼 아무도 모르게 상해가고 있을 뿐이야. 나를 좇아 다니는 CC-TV도 이제 그만 꺼줘. 언제부터 이 쇼핑몰을 맴돌고 있는 건지 나도 잊어버렸어. 퓨즈가 나가버린 머리를 달고 나 고낭난 장난감처럼 같은 곳만 맴돌고 있어. …중략… 쇼핑몰의 여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매장 안에도 다른 음악을 틀어 봐. 도돌이표 가득한 네 소절 단음, 이제 더 이상 밟을 스텝도 없어. 김경인, 「쇼핑몰의 여자」 중에서
도시에서 쇼핑몰은 지배적인 일상의 세목이다. 그것은 소비의 쾌감을 보장하고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며, 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이다. ‘소비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사회형태에서 소비의 조합된 양식에 의해 인간 생활의 연쇄됨은 물론 욕망의 충족에 이르는 확실한 통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소비 창출의 욕망 조작 메커니즘은 일상생활의 그물망과 더불어 잘 조직되어 있다. 그 대표적 공간이 쇼핑몰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소비활동의 종합을 실현”한다. 그 “소비활동의 대개는 쇼핑”이다. 그 공간은 심리조작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그물에 포획된 일상인의 생활은 자유롭지 못하다. 인용 시는 이와 같은 거대한 쇼핑몰에 감금된 “쇼핑몰의 여자”를 통해 현실 소비사회의 극단적인 초상을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쇼핑몰의 여자”와 진열된 ‘마네킨’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녀는 진열대 위의 마네킨처럼 “언제부터 이 쇼핑몰을 맴돌고 있는 건지” 잊어버렸으며, “퓨즈가 나가버린 머리를 달고 나”는 “고장난 장난감처럼 같은 곳만 맴돌고 있”는 것이다. 화자에게 주체적 보행은 허락되지 않는다. 쇼핑몰의 소비적 충동과 달콤한 유혹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중력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소비의 감옥이며 “더 이상 밟을 스텝”이 허용되지 않는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가도 가도 출구가 안 보이는” 미로이며 감옥이다. 화자는 쇼핑몰은 일상생활의 주재자가 되었고, 그곳에서의 인간은 몰주체적이며 비개성적임을 환기한다. 화자는 쇼핑몰이라는 풍요로운 신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비롯한 일상인들이 주체적 개성을 거세당한 채 감금된 상황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이 보기에는 쇼핑몰이라는 그 풍요로운 신전 안에서 어떠한 일상인도 예의 물신의 무릎 아래 엎드린 노예와 같은 것이다. 그 신전 앞에서 일상적 삶은 가혹하고 그 늪은 측정할 수 없는 깊이로 욕망의 끈을 잡아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보장할 수 없다. 다만 마네킨과 같이 화려한 패션으로 치장한 허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상은 일상적이지 않으며 불길하고 공포적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포옹과 빛나는 웃음이다.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냉정한 빌딩을 긴 칼로 내리치자 유리창이 깨어지고 노래가 튀어 나왔다. 끈적끈적한 리듬과 따뜻한 음색이 목을 휘감았고 뜨거운 눈물이 목을 타고 내렸다. …중략… 옆을 봐도 사람의 노래는 없었고 뒤를 보아도 사람의 온기(溫氣)는 어디에도 없었다. 앞에는 노래하지 않는 또다른 철골과 유리창의 빌딩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악’ 하고 소리를 쳐보지만 메아리마저 화살이 되어 되돌아와 심장에 꽂힌다. 벚꽃잎들이 곱게 깔려진 골방 안에서 벽을 보고 돌아앉아 나는 모래보다 작은 점으로 변해간다. 김경수, 「화가 뭉크의 고백 1-도시인의 절규 -」 중에서
거대한 도시 안에서 일상인은 철저하게 왜곡되고 조작된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도시 공간에 갇혀 자기를 상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절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표현주의 화가 에드발트 뭉크의 그림 「비명」에서 착안한 듯하다. 뭉크의 그림이 그렇듯이 이 시도 우리에게 어떤 불길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공포는 ‘악몽 속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뭉크가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 있는 자아의 불안과 공포를 시인은 그의 시에 그대로 전사시켜 놓고 있다.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빌딩 숲에 갇힌 “도시인의 절규”를, 그 심리적 공황을 묘사하고 있다. 뭉크의 그림은 극도의 자기 소외와 공포ㆍ불안 등을 표현했다면, 이 시도 마찬가지로 공포와 불안을 현대화된 도시공간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즉 화자는 위기에 처한 자아의 정체성의 극단적인 경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냉정한 빌딩”의 도시에서 “따뜻한 포옹과 빛나는 웃음”을 바라지만 “사람의 온기(溫氣)는 어디에도 없”는 비정함을 노래한다. 화자는 “철골과 유리창의 빌딩”에 갇힌 자아를 발견하고는 “‘악’ 하고 소리를 쳐보지만 메아리마저 화살이 되어 되돌아와 심장에 꽂”히는 공포를 경험한다. 그러한 심리적 경험에 의하여 화자는 “나는 모래보다 작은 점으로 변해간다.” 이와 같은 자아의 상실과 왜소화는 도시적 삶의 고독과 소외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골방 안에서 벽을 보고 돌아앉아 나는 모래보다 작은 점으로 변해간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가 느끼는 불안감은 소외와 공포이다. 화자는 “따뜻한 포옹과 빛나는 웃음”을 희망하지만 그 희망을 받아들이기에 빌딩의 철골은 너무 강하며, 유리창은 반사의 빛이 너무 세다. 그 불모성에 화자는 경악한다. 한 시인에게 비인간화와 물신주의의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존재를 자각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성을 자각케 하는 소외감은 그렇기 때문에 물신화된 세계에 대한 저항의 양식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상품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존재이기를 거부하고 물질적 동물이기를 거부하는 도시적 삶의 감수성이다. 이렇게 볼 때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정성은 예술의 한 전형을 이루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 세계의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모델로서, 이 부정성은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물신화와 문명에 대한 맹목적 신앙에 대한 인간적 자각이며 저항이다.
6. 일상의 신화화와 탈신화화
도시적 일상성은 현대적 삶의 근본적 특징이다. 본고는 도시체험의 확대와 일상성에 대한 미적 인식이 현대시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가를 살폈다. 특히 본고는 90년대 이후 주요한 시적 관심사인 일상성에 대한 시인들의 반응 양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일상성은 다름 아닌 도시공간의 일반적 생활방식의 핵심적 준거틀이다. 따라서 일상성은 오늘날 ‘사회를 알기 위한 실마리’로서 이에 대한 미시적 접근과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일상성에 대한 시적 관심과 미적 반응이 갖는 의미를 묵시록적 상상력과 공포의 미학, 반복의 신화와 가능성의 균등화, 욕망의 생태와 환(幻)의 세계, 물신의 체험과 인간소외라는 내용종목으로 나누어 조명하였다. 본고는 후기산업사회의 도시적 일상에 대한 미적 체험이 부정적이며 비판적임을 주목하였다. 도시문명과 일상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도시체험의 한 양상이며, 그것은 시적 주체가 세계와 대결하는 한 방식이면서, 동시에 일상을 이해하는 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부정적 상상력은 다양한 시간의 범주들이 일으키는 무정형의 혼돈을 감지하고 맞서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의한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내다보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주목한 일상성에 대한 부정적 사유는 존재의 불안과 공포, 자아와 세계의 분열, 소외와 상실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현대문명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또 다른 관계의 모색과 전망을 내다보는 행위이다. 도시적 일상의 신화에 대한 미적 인식은 현대성의 무의식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 시인들이 단순히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재로 삼아서가 아니라, 도시문명과 일상의 생태학이 안고 있는 묵시록적 위기감을 표현하는 데 있다. 시인들은 도시적 삶을 형상화함으로써 일상의 신화에 내포한 불길한 운명을 예감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의 일상의 신화에 대한 재현과 해부는 현실의 구체적 반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결국 한 시인에게 비인간화와 물신주의의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존재를 자각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성을 자각케 하는 소외감은 그렇기 때문에 물신화된 세계에 대한 저항의 양식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상품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존재이기를 거부하고 물질적 동물이기를 거부하는 도시적 삶의 감수성이다. 이렇게 볼 때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정성은 예술의 한 전형을 이루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 세계의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모델로서, 이 부정성은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물신화와 문명에 대한 맹목적 신앙에 대한 인간적 자각이며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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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김홍진 충남 홍성 출생 시와정신』으로 등단 ,『부정과 전복의 시학』, 평론집으로 『현대시와 도시체험의 미적 근대성』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