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가 부르는 노래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음치다. 무슨 클리닉으로도 교정이 불가능한 완벽한 음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자리라면 딱 질색이다. 옛날엔 여행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게 시들해졌다. 단체 여행의 경우, 장시간의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으레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여 흥겨워 하건만 이럴 때 나는 차라리 버스를 내리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경이 된다. 단체 여행에서의 고역으로 인해 내게는 은연중 여행 기피증이 생기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구성지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학창시절 교과 성적표를 보면 음악은 항상 '미'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는 가수들보다 술자리에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더 부럽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이상하게도 나만 빼놓고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이다. 아내는 패티김의 노래를 근사하게 잘 부르고 아들녀석도 김종서 뺨치게 노래를 잘 불러 대학 축제 때는 여학생들 팬도 많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두 딸들도 제 엄마 이상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 어쩌다가 내가 혼자 흥에 겨워 집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막내딸이 제일 성화를 댄다.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거다.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내 노래를 듣는 건 고역 이상의 정신적인 고문이란다.
나는 그러나 음악을 좋아한다. 이건 그러니까 짝사랑이다. 고교 시절엔 스테파노의 '별은 빛나건만'이나 카니 프란시스의 '말라게니아'를 즐겨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자리에서였다.
시를 쓰면서 이따금 내 시가 노래로 작곡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져 본 때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욤 아뽈리네르의 많은 시가 작곡되어 프랑스 국민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노란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순수시와 대중가요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골이 있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내가 직접 써 본 적이 있었다.
1972년 무렵이다. 그 당시 '동양방송(TBC)'에서는 청취자들을 상대로 건전 가요의 노랫말을 공모하는 프로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의 <신가요 박람회>라는 프로였다. 한 주일 동안 응모된 가사들 중에서 한 편을 뽑아 세 사람의 작곡가에게 작곡을 의뢰한 뒤, 다음 주에 한 곡을 선정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프로였다. 우수작으로 뽑힌 가사에는 시 한 편의 열 배쯤 되는 고료를 주었다.
나는 그 <신가요 박람회>의 단골 응모자였다. 시인으로서의 이름이 아닌 내 본명(강동길)으로 응모했는데 아마 열 편쯤 가요로 작곡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정작 음반으로까지 남은 건 딱 두 편뿐이다. 박인희가 부른 <하얀 조가비>와 영싸운드가 부른 <등불>의 두 곡이 그것이다.
고동을 불어본다.
하얀 조가비
먼 바다 물소리가 다시 그리워
조가비란 조개 껍데기의 순우리말이다. 한자어로는 패각(貝殼). 박인희가 불러준 이 노래는 그 무렵 꽤 많이 전파를 탔고, 길거리의 레코드 가게를 지나치면서 그 노래를 들을 때도 많았다. 맞물린 조개 껍질의 볼록한 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벅벅 갈아서 두 개의 구멍을 내고, 그걸 입에 물고 불어보면 뱃고동 소리 같은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다. 어린 날의 그런 추억과 바다를 향한 그리움을 나는 그 노랫말에 담은 것이었다. <하얀 조가비>는 듣기엔 아름다운 곡이었으나 내가 따라 부르기에는 왠지 음정을 맞추기가 어려운 노래였다.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고요히 타오르는 장미의 눈물.
하이얀 외로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먼 바다에
그대, 배를 띄워요.
이 노래는 조명이 은은한 분위기의 멋스런 카페에 가면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노랫말에 은유를 곁들여선지 많은 이들이 '등불'을 좋아하였다. 이 무렵 내 시에는 '등', '등불', '램프' 같은 시어가 많이 쓰였던 시기였다. 벌써 28년 전의 이야기이다. 시인 유하가 감독한 첫 작품으로 데뷔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년)에 주인공 현수가 은주를 짝사랑하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장면에 '등불' 전곡이 나온다.
어쩌다가 술자리가 2차, 3차로 옮겨지고 노래방에 떼몰려 가는 게 보통인데, 그런 자리에서 짓궂은 친구들이 내 노래를 강권할 때면 나는 괴로워진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앞의 술을 거듭 두 잔쯤 들이킨다. 음치가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차마 제 정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