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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7일 부활 주일
성경 ; 행10:34-43, 고전15:19-26, 요20:1-18
제목 ; 인간 최후의 원수는 죽음입니다!
할렐루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 인류에게
참소망과 영원한 기쁨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 예수께 감사와 찬
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이 아침, 부활절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께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항상 가득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은, 제가 38년간의 목회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설교시간이라서, 저로서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처음 목회를 시작한 이곳 학운교회에서 공식적으
로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된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 함께 했던 이들도
몇 분 남아있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학운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날로
더욱 부흥하고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믿음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늘 건강하고 평안
하시기를 빕니다. 최문수 목사님을 중심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
어,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하기를
‘만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
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15:19)’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 본문
을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
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이다.’라고 번역했습니
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이 가장 비참한 존재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사
도 바울은 어째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
의 소망이 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
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가치’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참된 가치’
라는 것입니다.
새에덴교회 집사인 남진 씨가 불러서 히트를 쳤던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흘러간 노래가 있습니다. 원래 영화주제가
였는데, 나중에는 영화보다 노래가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1절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
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그 사람을 사
랑해선 안 될 사람, 말없이 가는 길에 미워도 다시 한 번, 아
아 안녕!’
생명을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
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심심풀이 삼아 했던 사랑이라면,
그다지 허무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건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 사랑을
허무하게 끝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비극적
이고 불쌍한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을 다 바쳐서 사랑했던지, 아니면 순정을
다 바쳐서 믿었던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이
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말 인생인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야말로 밤잠을 설쳐가면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새
벽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
다. 밤 12시가 넘도록 회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침 7시 이전
에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또 어떻습니까? 삼복더위 무더운 여름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
서 일을 해야만 가을에 원하는 만큼의 소출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죽음으로 마감하게 된다면, 이 모든 수
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멀리,
그러나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인생의 종착점이 있는데, 그 종
점이 천 길 낭떠러지라면, 과연 그 누가 그 종점을 향하여 열
심히 그리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분명한 것은 ‘인생의 종점’이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
니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그토록 온갖 수고를 하지만, 도대
체 무슨 유익이 있는가?(1:2,3)’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운명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보니, 다 허무하여 바람을 잡
으려는 것 같다(1:13,14)’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생은 그저 허무하고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한 학년에 6개 반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그 중에서 한 학급은 직업반이었습니다. 비록 대학진학을
목표로 삼는 인문계 학교였지만, 불가피하게 대학진학을 포기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성한 학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이라도 열심히 공
부해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냥저냥 학교 다니다가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 따겠다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과정
을 공부한다는 데만 그 의미를 두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농부가 가을에 거둘 열매를 기대하지 않고 어떻게 뙤약볕에
서 땀 흘려 일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농부는 가을에 거
두게 될 풍성한 열매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열
매는 얼마가 열리든지 상관하지 않고, 일하는 그 자체를 보람
으로 여기면서 일한다는 그런 농부를 과연 찾아볼 수가 있을까
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평생 열심히 사는 것만을 보
람으로 여기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도록 열심히 일했
는데, 그냥 죽는 것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면, 이 얼마나 허무
한 일입니까? 대학진학이라는 목표가 있어야 고등학교 과정을
열심히 공부하듯이, 우리 인생도 영원한 목표가 있어야 한평생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에는 두려움과 걱정, 미움과 원망, 다툼과 갈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요컨대, 죽
음의 세력이 우리를 좌절하게 하거나 절망에 빠뜨리는 것입니
다. 주님의 제자들도,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 스승이신 예수
를 버리고 부리나케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찌하여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끝장난다고 믿었
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
에 그처럼 비겁하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스승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
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은, 오늘 새벽
에 선포한 누가복음 24장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주일새벽에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갈릴리에서 온 이 여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날 자신
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겪은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囚衣)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9절 이하를 보
면,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
습니다.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당사자인 사도 요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간 줄로 알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울다가 다시 한 번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을 두
었던 곳 머리맡에,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
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누가 주님을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
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예수님이 거기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때
예수님도 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에게 “여자여, 왜 우느
냐?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
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가져갔으면 어디에 두
었는지 말씀해주세요. 내가 모셔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여!”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음성을 듣고서 그제서야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돌아서면서
“선생님!”하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잡
으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너
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내
가 주님을 보았어요!”하고 전하면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도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주님인
아직도 죽은 자 가운데 계신다면, 우리가 전한 복음은 다 허상
에 불과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릴게 아닌가?(고전15:14)’하고 반문하면서, ‘만일 기독
교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
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
(19)’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여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면서 ‘죽음이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온 것처럼,
죽은 사람의 부활도 한 사람, 곧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죽
게 되었다면, 이제는 그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
하는 삶을 살 때에 다시 살게 된다(고전15:22)’는 것입니다. 사
도행전 10장 3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사랑하
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경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는 다 받아주신다(행10:35)’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성경말씀을 바르게 잘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죽음은 죄를 지은 결과이고, 죄는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은 그 생각이 땅에만 머물러 있을
때에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욕심에는 그 한계가 없
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욕심에
는 그 한계가 없고, 그 욕심의 대상인 물질은 제한적이기 때문
에, 사람들은 제한적인 물질을 서로 먼저 많이 차지하려고 갈
등과 다툼을 일으키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의 행복이 물질의 다소에
따라 좌우된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다
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경쟁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
과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원하는 행
복은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과 다툼으로 인해서 더욱 큰
불행을 겪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게 되신 것도, 그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 예수님을 시기한 나머지, 신성모
독죄로 정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종교인들이 물질욕심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
의 이름으로 도둑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사실을 알
고 지적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더 이상 계속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정부에 대해서는
정치범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죄로 예수를 정죄했던 것
입니다.
요컨대, 예수를 죽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만 죽이면 자기
들 세상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
인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인간의 생사화복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진실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은, 진실과 정의의 세력이 욕심과 거짓이 그 본질인 죽음의 세
력을 물리치신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께서 섭리하신 일입니다.
아무튼, 인간의 행복은 사람이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
고자 노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물질에 대한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
에 따라 진실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
니다. 여러분은 교회운동장 펜스에 붙여놓은 현수막을 보셨을
겁니다. ‘예수께 속한 사람은 자기 육체와 함께 욕심을 십자가
에 못 박았다.’고 하는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욕심 때문에 비인간적인 생활을 했다면, 그
욕심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인간
의 생명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모든 것을 아주 풍족하게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
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끈을 놓으시면, 그 모든 것이 다 아
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세상 욕심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
습을 발견하고서 부끄럽게 느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수
치스러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거듭남으로써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님의 도우심으로 부활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주께서 오라 하시는 그 날, 부활의 몸으로 영생
천국에 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